언론 혐오 사회
정상근 지음 | 행성B
언론 혐오 사회
정상근 지음
행성B / 2022년 2월 / 311쪽 / 18,000원
돈을 좇는 언론, 시간에 쫓기는 기자
뉴스는 있는데 기자가 없다
힘들고 억울한 사람 곁에 기자가 없는 이유: 우리 중 대부분은 노동을 한다. 노동을 해야 돈을 벌고 그래야 삶을 살 수 있다. 그런데 2020년 한 해 동안, 그 일상을 보내다가 무려 882명이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공식 산업 재해로 집계된 사고만 해도 그렇다. 이 사고는 대부분이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했고 건설업에서 절반 가까이 일어났다.
특히 최근 택배 노동자들의 죽음이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됐다. 우리 사회에 택배 노동자가 등장한 것이 십수 년 전이고, 그동안 택배 노동자들은 업무가 지나치게 과중하다고 수차례 호소했다. 집회나 시위를 통해 목소리도 냈다. 그런데 우리는 이분들 몇 명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택배 노동자들이 목숨 걸고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론을 통해 접했다.
우리 언론은 정치인들과 연예인들의 개인 SNS 글까지 퍼다 나르지만, 택배 노동자 수만 명의 삶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치인과 연예인 SNS는 적은 노동력을 투입하고도 대중으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을 수 있다. 반면 택배 노동자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취재하는 과정은 길고 복잡하지만 대중으로부터 관심을 받을 가능성이 낮다. 대중의 관심을 끄는 기사를 쓸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항변할 수도 있다.
그런데 정치인과 연예인의 자극적인 SNS 기사가 범람하는 시대를 언론이 만들어 놓고,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를 대중이 보지 않는다고 푸념하는 것은 무책임하고 비겁하다. 그럼 ‘대중의 관심’은 잠시 접어 두고 왜 언론은 대중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이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선, 지금 언론과 기자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들여다봐야 한다.
서울 사대문 안 정치인, 관료, 재벌 곁에 있는 언론: 언론사와 기자들은 소비자인 국민보다 권력과 가깝다. 사회를 뒤흔드는 정보 대부분은 권력을 지니고 있고, 권력으로부터 정보를 취득해 내보내는 기자는 ‘특종 기자’가 된다. 권력 밖에서 사건을 취재하고 현실을 분석하는 기자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기자는 대한민국의 서울, 그중에서도 권력의 중심인 사대문 안쪽에 몰려 있다. 자연스럽게 기자들이 접촉하는 대상은 언론이 필요한 국민이 아니라, 정치인이나 관료들이 된다. 언론은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국민이라고 보지 않고, 정치인이나 관료 혹은 재벌이라고 생각한다. 신문 대신 포털에서 공짜 뉴스를 보고 있는 지금 이 시대, 이들에게 붙어 있는 편이 금전적으로도 훨씬 이득이다.
예를 들어 보자. 사실 언론사는 일상이 회의다. 대면이든 카톡이든 일단 회의부터 하고 일을 시작한다. 오늘은 어떤 기사를 내보내고, 그 기사는 어떻게 다룰지를 논의한다. 큰 매체일수록 이 프로세스가 강력하다. 그리고 언론이 회의에서 다루는 주제는 (부서별로 다르지만) 대체로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들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우리 삶과 연결된 이 중대한 문제들에 관한 기사를 쓸 때, 어떤 식으로 이 문제를 조망할지, 어떤 결론을 낼지 결정하는 것은 그 매체에 근무하는 데스크와 기자들이다.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를 아주 좁고 제한된 식견을 가진 사람들끼리, 대체로 동일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사람들끼리 논의하고 결정한다. 그렇게 결정된 기사의 방향은 역시 제한된 정보와 의견의 틀 안에서 작성된다.
부동산 문제에 관한 기사를 쓴다고 예를 들어 보자. 국토부에 출입하는 기자가 국토부의 자료를 받아서, 함께 국토부에 출입하는 기자 혹은 국토부 공무원들과 대화하며 기사를 만들어 낸다. 그렇게 비슷한 시간, 비슷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수천 개의 비슷한 기사들이 동시에 풀리고, 포털은 그중 하나를 골라 메인 화면에 건다. 그러면 그것이 이슈가 된다. 사람들이 댓글을 달고 가장 많이 읽은 기사들은 다시 청와대, 국회, 국토부에 스크랩되어 보고되는데, 이것은 ‘여론’이라 불리고 위정자들은 이 여론을 바탕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법안을 만들어 낸다.
서울에 집이 있는 기자들과 부동산에 투자하는 데스크들이 여론을 만든다. 그리고 다주택을 보유한 위정자들이 부동산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고, 분석한다. 그러다 보니 서울에서의 내 집 마련 꿈을 버리고 점점 서울 바깥으로 밀려나 왕복 하루 네 시간, 고개도 돌릴 수 없는 만원 지하철에 몸을 싣고 다니는 30대 A씨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매년 올라가는 월세에 대출만 늘어나고 월급의 상당 부분을 이자 메우는 데 쓰다가 연애도 못 하는 20대 B씨의 현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언론은 자기들 목소리가 여론이라고 했고, 정치는 서민의 삶을 개선하겠다고 했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여론을 만드는 사람도 여론을 이용하는 사람도 소수의 몇 명뿐이다. 그리고 언론은 이 과정에서 소수의 권력 집중을 돕는 역할을 한다. 아니, 권력을 부여받는 소수의 일원이 된다. 그렇게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나가는 데 언론이 독이 되는 것이다.
강자 옆에 붙은 뉴스
강자 옆에 붙은 뉴스
힘을 갖고 싶은 언론 정치권력과 돈독하게: 한국 언론은 권력과 가깝다. 권력과 가까워야 권력을 감시할 수 있다는 항변은 그럴듯하다. 그런데 사실 언론은 감시하기 위해 권력과 가까워지진 않았다. 언론이 권력을 가까이 둔 이유는 생존, 나아가 언론도 권력을 갖기 위해서였다. 기자 개인도, 언론사라는 단체도, 권력 옆에서 언론 본연의 기능을 잃어 갔다. 일제 강점기, 독재 정권 당시의 언론은 권력의 도구가 됐다. 역사와 전통이 오래된 언론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민족지라고 자부하고 있지만, 기자들이 일제에 저항한 적은 있어도, 언론사가 일제에 저항한 적은 없었다. 독재 정권 시절도 마찬가지다. 기자들 개개인도 마찬가지였다. 독재 정권 시대 저항하다가 해직된 언론인들이 있지만, 언론인으로서 정치권과 유대 관계를 유지하다가 독재 정권에 부역하거나 정치권으로 간 언론인도 많았다.
권력의 대상은 정치권을 넘어 광고주님으로: 지금은 권력의 대상이 정치권을 넘어 자본으로 확대됐다. 언론의 주인은 독자님이 아니라 광고주님이 된 지 오래다. 국민의 범죄에 추상같이 호통치며 엄정한 법질서를 강조하던 언론들이 광고주님의 중대 범죄는 ‘쉴드’ 치기 바쁘다. 광고주님이 잡혀가면 경제 위기 운운하며 사면시켜 달라고 조르고, 광고주님의 경영 실패로 기업이 위기에 빠지면 세금을 투입해 살려 놓으라고 떼를 쓴다. 잘사는 집 아이나 못사는 집 아이나 구분을 짓지 말고 누구나 점심을 먹이자는 주장은 ‘포퓰리즘’이니 ‘퍼 주기’니 비난하며 서민들의 마음을 후벼 파지만, 광고주님에게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된다. 기자들이, 언론이 권력의 지근거리에 있으니, 언론이 권력을 갖지 못한 국민 옆에 있을 수가 없다. 권력이 있는 종로와 여의도, 강남에서는 길 가다 어깨빵 하는 사람 중 절반이 기자지만, 권력이 없는 삶의 공간에서는 그 흔한 기자 명함 하나 찾기 어렵다.
기자들은 왜 싸가지가 없나요?미디어지 기자로 근무했을 때, 기자들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제보를 종종 받았다. 생각해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 어떤 기자는 출입처 직원에게 전화해 자료를 가져오라 지시했는데, 자료를 늦게 가져왔다는 이유로 그 직원의 얼굴에 종이로 된 자료를 뿌렸다. 또 잘 알려진 사건이 있다. 쿠키뉴스의 한 기자는 지인의 민원을 해결해 주려다 담당 직원이 이를 거절하자 해당 직원이 돈을 받았다는 허위 사실을 기사로 써 버렸다. 그런데 억울함을 견디지 못한 직원은 결국 극단적 선택을 했다. 재판부는 기자에게 실형을 선고했지만, 출소 후 또 다른 매체에 취업해 다시 기자가 됐다.
지금은 그나마 기자의 지위와 체면이란 것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상황이다. 지금도 이런데 기자가 대단한 직업으로 취급받았던 과거에는 어땠을까? 정말 난장판이었다고 한다. 기자라는 이름으로 식당을 협박해 무전취식을 한 사람도 참 많았다고 하고, 음주 운전 해 놓고 단속에 걸리면 경찰에게 “내가 느그 서장하고 사우나도 가고, 밥도 먹고, 술도 먹고 다 했다.”고 큰소리치며 입건을 피했다고 한다.
자신감이 비틀어졌을 때 싸가지 없는 기자가 탄생한다: 지금이야 그런 일은 없겠지만, 불과 십몇 년 전만 해도 수습기자에 선발돼 경찰서에 출입하면, 경찰서장실 혹은 형사과장실 문을 발로 차고 들어가는 연습을 선배들이 시켰다고 한다. 이 의미 없는 무례함의 이유는 그럴싸하다. 기자들이 상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어떤 형태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기죽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분명 그런 면은 있다. 기자가 기죽어 있거나 소심하면, 권력자에게 묻고 싶은 질문을 하지 못하게 된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내가 그랬다. 성격이 워낙 소심해 시민들에게 말을 거는 것도 무척이나 어려웠다.
특히 권력을 가진 분들은 속되게 말해 ‘기가 센’ 분들이 많다. 나는 사람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는 것이 좀 어려운 편인데, 정치인들은 습관적으로 상대방과 눈을 맞추며 대화한다. 또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목소리가 크고, 대화의 속도도 빠르고, 대화 화제를 이끌어 가곤 한다. 그런데 기자가 여기에 후루룩 딸려 가면 묻고 싶은 것, 물어봐야 할 것을 묻지 못한다. 그런 기세에 눌리지 않기 위해서는 분명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자신감의 원천은 기자라는 직업에서 올 수도 있고, 다니는 언론사라는 배경에서 올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자신감이 한 번 몸에 장착이 되면, 그걸 벗어야 할 때 벗지 못한다는 데 있다. 상대방이 허세를 부리지 않음에도 기자가 허세를 부리면, 그건 그냥 그 기자가 ‘싸가지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중증이 되면 기자라는 직업을 가진 개인과, 국민의 알 권리 실현이라는 사회적 책무를 가진 기자라는 직군을 등치시키는 지경에 이른다.
기자라는 직업은 분명 민주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대부분의 언론사는 이익을 추구하는 사기업이고, 대부분의 기자는 각자의 생활을 영위하는 직장인이지만, 공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법과 사회로부터 많은 보호를 받는다. 그렇다고 그것이 기자가 무슨 짓을 해도 보호받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개인의 문제, 언론사의 문제를 저널리즘의 가치로 보호받으려 한다면,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용감하고 날카로운 것과 싸가지 없는 것은 분명히 다른 문제다.
족쇄가 된 조직, 그리고 기레기
과거에도 있었지만 과거와는 다른, 언론 불신기자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내 꿈은 한겨레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뭐 굳이 한겨레가 아니라고 해도 좋은 매체에서 기자 생활을 했지만……. 그만큼 기자 생활을 하는 데 있어 언론사라는 소속은 당연히 가져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처럼 프리랜서 기자로 일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현재 프리랜서이다 보니 내 플랫폼이 없고,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곳도 없고, 취재할 수 있는 영역도 없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어디든 내 플랫폼이 될 수 있고, 책으로라도 글을 쓸 수 있고, 누구나 만나서 무슨 얘기든 할 수 있다. 물론 지금 내가 그걸 제대로 하고 있다는 건 아니다.
그런데 소속이 있었을 때의 나도 그렇고 또 다른 기자들도 마찬가지인데, 언론사라는 조직에 소속되었다는 것이 오히려 족쇄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언론사는 당연히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내 뜻과 다른 일을 해야 할 때가 있었다. 시도 때도 없는 인사에, 누구 하나 자리를 비우게 되면 남이 맡던 영역을 떠맡아야 할 때도 있다. 내가 하고 싶은 취재,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데스크의 관심사와 전혀 다를 때도 많았다.
선배들은 왜 기사 안 나오냐 난리, 후배들은 왜 내가 이걸 해야 하냐고 난리, 누구는 다 못 해 먹겠다고 난리, 그럼 데스크는 네가 땜빵 좀 해 달라고 난리……. 사실 언론사뿐 아니라 어느 조직이나 가진 문제이자 고민일 것이다. 앞선 글이 기자들과 독자들의 관계, 기자들과 독자들이 왜 점점 멀어지는가에 대한 고민이었다면, 지금부터는 언론사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고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다.
발전적 비판에서 무작정 불신으로: 영국 옥스퍼드대학 산하 로이터 저널리즘 연구소가 2020년 발표한 언론 신뢰도 조사에서, 우리나라 언론은 고작 22%의 신뢰도를 기록하며, 조사 대상 38개국 가운데 꼴찌를 차지했다.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무려 4년 연속 최하위다. 이런 현실을 언론인들이 모르는 게 아니다. 또 답답함을 토로하는 언론인들도 많다. 조직 문화와 분위기를 거론하며 이러니 독자들이 언론을 외면한다고 푸념하기도 하고, 무슨 기사 하나 쓰면 여기서 쥐어뜯고, 다른 기사 하나 쓰면 저기서 비난한다며 한숨짓는 기자도 있다. 또 여전히 악플에는 적응이 안 된다는 기자도 있다.
그런데 솔직히 그럴 수밖에 없다. 이 땅에 5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이 완벽하게 일치할 수 없다. 게다가 과거처럼 언론이 보도를 내면 사람들이 혼자 생각하고, 친구들끼리 모여서 욕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누구나 온라인에서 자기의 생각을 표출할 수 있는데, 굳이 댓글까지 남기는 수고를 감수하면서 뭔가 의견을 내고 싶다면 그건 아마 비난일 가능성이 크다.
언론에 대한 불신이 어느 때보다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언론에 대한 비평 통로가 적었을 뿐, 그동안 언론 비평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일제 강점기에도 매체 비평은 있었고 독재 정권 시절에도 언론 비판이 있었다. 게다가 비판을 남기기 이렇게 쉬운 세상이라니! 또 댓글을 달더라도 차분히 생각을 정리해서 정제된 언어로 댓글을 달 시간은 우리 국민에게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아울러 언론은 비판의 자유를 위해 언제나 표현의 자유를 상당히 높은 가치로 둔다. 그렇다면 독자들의 비판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막을 방법? 사실 없다. 물론 바뀐 시대상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특정 언론에 대한 비판이 ‘안티 조선’이라는 시민 사회 운동으로 표출된 적은 있지만, 그것도 이렇게 광범위한, 아예 언론 전반에 대한 불신은 아니었다. 조선일보에 대한 비판은 한겨레에 대한 응원으로 이어지거나, 조선일보를 비판하면서 가치 중립ㆍ비 정파적 언론에 대한 갈구로 나타났다. 하지만 지금의 흐름은 그렇지 않다. 불신은 언론계 전반에 걸쳐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대안을 언론에서 찾으려 하지도 않고, 불편부당(不偏不黨)이란 가치가 반드시 공정한 가치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의 생각은 왜 변했을까? ‘나꼼수’가 언론을 하도 비판해 대니 그렇다는 등 대안 매체의 등장을 이유로 꼽는 분들도 있고, 독자들의 정파성이 강해지면서 자신의 지지 정당에 편을 들지 않으면 모두 비난하는 세태, 이른바 ‘확증 편향’을 이유로 꼽는 분도 계시다. 하지만 이 얘기는 안 할 수 없다. 한국 언론 문화 전체가 이 결과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언론 비판의 흐름이 특정 언론사가 아닌, 언론 전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는가에 관한 질문에서 빠질 수 없는 주제가 있다. 바로 세월호다.
세월호 참사, 기레기가 된 언론들2014년 4월 16일 아침, 단원고 학생들을 포함해 승객 476명이 탄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군 관매도 부근에서 침몰했다. 속보가 나왔고 많은 사람이 걱정했다. 하지만 그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단원고 학생들이 전원 구조됐다는 뉴스 속보가 나왔기 때문이다. 부끄럽지만 기자인 나도 전원 구조 속보를 보고 참 다행이란 생각만 했다. 그날의 일상이 다시 시작됐고, 점심시간이 됐고, 동료들과 밥을 먹었다. 그러면서 오늘 무슨 뉴스를 취재하고 또 편집해야 하는지, 또 이런저런 사는 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