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건넌 물건들 Ⅰ
부경대학교 인문한국플러스사업단 지음 | 산지니
바다를 건넌 물건들Ⅰ
부경대학교 인문한국플러스사업단 엮음
산지니 / 2022년 12월 / 240쪽 / 20,000원
1부 해안가에 도착한 미지의 문화
진정한 세계사는 은으로부터 시작되었다16세기 남아메리카 포토시 광산에서 채굴된 다량의 은이 유럽으로 유입되는 동시에 세계로 확산되어 나갔다. 이때 지구를 하나의 단위로 하는 세계사가 비로소 출현하였다. 근대 세계는 이러한 글로벌리제이션의 결과물이었다. 결국 세계사는 은의 흐름으로 파악해 낼 수 있는 셈이다. 영국의 방직 공업, 산업 혁명, 세계 패권, 노예 플랜테이션, 스페인의 몰락, 네덜란드의 독립, 근대 자본주의의 탄생, 커피와 차의 유행, 중국의 아편 전쟁, 러일 전쟁 등은 모두 은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은의 발견: 은은 금과 더불어 대표적인 귀금속으로서 직접 화폐로 만들기도 하고, 장식품, 생활용품, 공업 원료로 사용되어 온 대단히 중요한 금속이었다.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드라크마라고 부르는 은화가 주조되었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전반까지 서양에서 은 생산의 중심지는 남부 독일이었다. 그런데 16세기 중엽부터 스페인령 남미 대륙의 포토시(현재 볼리비아) 은산 등에서 대량의 은이 산출되어 세계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포토시는 표고 4,000m를 넘는 안데스산맥에 위치해 있으며, 그 외곽에 있는 세라 리코라고 불리는 높이 800m 정도의 산이 은과 각종 광물이 산출되는 중심지였다.
1545년부터 75인의 스페인인과 3,000명의 인디오가 포토시에서 은 광석을 채굴하기 시작하였다. 2년 후에는 포토시 인구가 1만 4천 명이 되었고, 은 광맥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스페인인들과 인디오들이 몰려들면서 1650년에는 인구가 16만에 이르렀다. 당시 마드리드가 15만 5천, 세비야가 18만, 런던이 22만 5천이었다. 사실 17세기 포토시는 세계 최초의 자본주의적 도시이자 국제화된 도시였다.
17세기 전반 동안 신대륙에서 스페인으로 유입된 은의 양이 1만 6천 톤에 이르렀는데, 그 3분의 2가 포토시의 은, 나머지가 멕시코산이었다고 한다. 포토시의 은 생산량은, 1545년부터 1780년대까지 약 240년 동안 적게는 1만 5천 톤, 많게는 4만 톤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당시 전 세계 은 생산량의 3분의 2에 달했다. 1g 가격을 2022년 10월 기준으로 1,000원이라고 한다면, 1만 5천 톤의 가격은 15조 원에 이른다. 하지만 현재 금 1g이 7만 원 이상이고 당시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이 1:6이었으므로, 당시 교환 비율로 계산하면 은 1g은 12,000원이 된다. 그러면 1만 5천 톤 은의 가격은 180조이고, 4만 톤이라면 480조가 된다. 당시 스페인 인구가 800만이었고, 2021년의 인구 5,000만인 우리나라 국가 예산이 558조이니 은 1만 5천 톤이 얼마나 큰 재원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은의 제련: 은의 대량 생산은 회취법(灰吹法)으로 불리는 제련 기술 때문에 가능해졌다. 은광석을 용해시킨 납 속에 넣으면 쉽게 은과 납의 합금이 만들어진다. 이 합금을 큐펠이라고 부르는 용기에 올려놓고 공기를 불어 넣으면서 800~850℃로 가열하면, 납은 공기 중의 산소와 결합하여 산화납이 되어 큐펠로 흡수되고, 은은 알갱이 상태로 큐펠 위에 남게 된다.
1570년에 포토시에서는 수은 아말감법으로 대량의 은을 생산하기에 이른다. 이 방법은 1554년 멕시코 파추카의 바르톨로메 데메디나에 의해 발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추카는 포토시에 필요한 수은이 생산되는 광산으로도 유명하였다. 수은 아말감법은 먼저 은이 함유된 광석을 잘게 분쇄한 다음 얕은 웅덩이처럼 생긴 혼합 장소(patio)에 넓게 펴서 깐다. 그 위에 수은, 소금물, 황산구리를 섞어서 반죽처럼 만들어 덮은 다음, 사람이 발로 밟거나 가축이 돌리는 연자방아로 압력을 가한다. 그러면 은과 수은이 화학 반응을 일으켜 아말감이 형성되는데, 이것이 굳으면 물로 씻어 낸다. 그리고 나서 굳은 아말감에 열을 가하면 기화점이 낮은 수은이 먼저 증발하면서 은을 얻을 수 있게 된다. 특히 수은 아말감법이 보급되면서 수은 증기를 들이마신 작업자들이 수은 중독에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
은의 도시: ‘포토시의 제국 마을’은 삶과 일에 필요한 모든 물품이 결여된 척박한 고원 지대에 있었다. 따라서 모든 것을 운반해 와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토시의 시장에서는 선주민과 아프리카 여성들이 옥수수로 만든 맥주, 따뜻한 수프, 마테차를 제공하였다. 상점에는 세계 최고의 비단과 린넨, 중국의 자기, 베니스의 유리그릇, 러시아의 가죽 제품, 일본의 칠기, 플랑드르의 회화를 비롯하여 베스트셀러 서적이 십여 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진열되어 있었다.
마닐라에서 중국 장인들이 정교하게 조각한 아프리카산 상아는 포토시의 부유한 여성들이 꼭 사고 싶은 물품이었다. 그들은 또한 은으로 만든 굽이 달린 신발을 신고, 인도의 다이아몬드와 버마의 루비가 박혀 있는 금으로 된 귀걸이, 목걸이, 팔찌를 걸치고 다녔다. 콜롬비아산 에메랄드나 카브리해의 진주는 오히려 너무나 흔한 것이었다. 스페인에서 온 식도락가들은 수입한 아몬드, 케이퍼, 올리브, 아르보리오 쌀, 사프란, 카스티야 와인을 맛볼 수 있었다. 후추는 수마트라와 인도 서남부에서, 시나몬은 스리랑카에서, 정향은 말루쿠제도에서, 육두구는 반다 제도에서 들여왔다. 자메이카에서는 올스파이스라는 향신료가 들어왔다. 물건을 잔뜩 실은 갈레온선이 몇 개월이나 걸려서 태평양, 인도양, 대서양을 횡단하여 이러한 사치스러운 물품들을 수송하였다. 해안에 도착한 물품들은 다시 노새와 라마들이 ‘제국 마을’까지 실어 날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태평양 쪽에서 돌아온 노새 대열은 은의 정제에 필요한 상품과 수은을 운반해 왔다. 절반 이상의 수은은 페루의 우앙카벨리카에서 생산된 것이었지만, 스페인의 합스부르크가가 알마덴과 이드리야의 광산에서 채굴한 수은도 사용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콩고와 앙골라에서 사로잡은 노예를 리우데자네이루를 거쳐 끌고 왔다. 이처럼 포토시는 세계 최고의 상품들을 소비하는 도시가 되었고, 상인들은 상품들을 반짝이는 은화와 교환할 수 있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렸다.
그러나 포토시는 그 모든 영광에도 불구하고 잔혹함, 오염, 범죄의 세계의 축소판이었다. 1647년 왕실의 파산이 한창이던 중, 스페인의 펠리페 4세는 조사관을 파견하여 포토시의 왕실 조폐국 내부에서 발생한 거대한 음모를 밝혀냈다. 그 음모는 1,000마일 이내에 있는 거의 모든 관리들을 타락시켰다. 페루의 총독조차도 공모 혐의를 받았다. 행운의 샘은 독이 든 우물이 되어 있었다.
거대한 조직으로 발전한 포토시 은화 주조 사기범들을 추적하여 처벌하고 주화를 적절한 중량과 순도로 되돌리는 데 10년 이상이 걸렸다. 새로운 디자인의 동전을 발행하였지만, 포토시 은화에 대한 세계적인 신뢰를 회복하는 데는 수십 년이 걸렸다. 보스턴에서 베이징에 이르는 모든 지역에서 상인들은 포토시 동전을 거부했으며, 수마트라의 후추 재배자들조차 포토시를 상징하는 ‘P’가 찍힌 동전을 꺼렸다.
은의 항해: 한편으로 포토시의 은은 정교한 글로벌 무역 네트워크의 형성을 자극했다. 우선 스페인 북부의 철은 은 채굴에 필수적이었다.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풍부한 철광상을 가지고 있었고, 바스크 철광상들은 포토시에 필수적이었다. 철기, 못, 편자, 곡괭이, 경첩, 자물쇠 등을 스페인에서 수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광산 노동자들은 이들 철제품을 이용하여 단단한 암석을 파헤칠 수 있었고, 이 철제품은 안데스 광산에 혁명을 불러왔다.
또한 신대륙의 값싼 은을 유럽과 아시아로 옮길 필요도 있었다. 수송되는 루트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쿠바의 아바나 항구로 모은 뒤, 콜럼버스가 개척한 항로를 따라 대서양을 횡단하여 유럽으로 옮기는 경로, 또 하나는 멕시코의 태평양 측 항구인 아카풀코를 경유하여 아시아로 대량 유통되는 경로가 있었다. 신대륙의 은이 유라시아 대륙, 아프리카 대륙, 아메리카 대륙을 비로소 하나로 연결하였다.
대서양에서는 16세기 초까지 100톤 전후의 무역선을 사용하였지만, 16세기 중엽에 이르면 해적들에 대비하기 위하여 500~600톤의 대형선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1,000톤 이상이면서도 선형이 가늘고 물에 잠기는 깊이가 얕으며 속도가 빠른 대형 상선 갈레온선도 등장했다. 그때 우르다네타라는 인물이 대서양 항해 경험을 바탕으로 태평양 항해의 간선이 될 수 있는 해상 도로를 개척하고자 하였다. 그는 적도 근처에서 발생하는 난류를 타고 몬순 해역을 북상한 다음, 편서풍을 이용하여 멕시코로 돌아가는 루트를 생각해 낸 것이다. 대서양에서는 카리브해로부터 스페인으로 돌아갈 때 플로리다해에서 멕시코 만류를 타고 아조레스 제도를 향해 북동쪽으로 나아간 다음, 거기에서 다시 편서풍을 타고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루트가 이미 개척되어 있었다.
우르다네타는 태평양에서 편서풍 해역으로 들어가기 위해, 쿠로시오해류를 타고 일본 열도의 동안을 북위 39~40도까지 북상하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의 시도는 예상한 대로 성공하였다. 우르다네타가 탄 산베드로호는 4개월 8일 만에 태평양을 횡단하여 캘리포니아 해안에 도착하였다. 그 후 일행은 무사히 멕시코 남부의 항구 아카풀코로 귀환했다. 약 2만 킬로미터에 이르는 대항해였다. 이렇게 제3의 세계에 장대한 해상의 간선 도로가 만들어졌고, 비로소 아메리카 대륙과 아시아가 연결된다. 우르다네타의 업적은 콜럼버스에 필적하는 것이었다.
신대륙에서 마닐라로 옮겨진 은의 가격은 당시 아시아 가격의 세 배에 달했기 때문에 스페인인은 중국의 비단, 도자기, 칠기, 동남아시아의 향신료를 대량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 이 수익은 막대하여 신대륙에서 산출되는 은의 3분의 1이 태평양을 건너 아시아로 향했다. 이렇게 아메리카 대륙과 중국 사이에 은을 비단과 도자기로 교환하는 거대한 파이프가 생겼다.
유럽에서 희망봉을 우회하여 인도양을 통해 아시아로 오는 루트가, 다시 마닐라를 거쳐 태평양을 건너 신대륙으로 가는 장대한 루트와 연결되었다. 마닐라에서 멕시코의 아카풀코로 옮겨진 비단 제품이나 도자기는 카리브해를 마주한 베라크루즈 항구에서 쿠바의 아바나 항구로 옮겨졌으며, 그 후 멕시코 만류를 타고 대서양을 횡단하여 스페인의 세비야로 옮겨졌다. 마침내 태평양과 대서양의 해상 도로가 하나로 이어진 것이다.
마닐라에서는 신대륙의 은이 중국 복건(福建) 상인들이 가져오는 비단 제품과 교환되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세금을 은으로 내는 명대 후기의 일조편법, 청대의 지정은(地丁銀)과 같은 세금 제도가 정착될 만큼 대량의 은이 신대륙으로부터 흘러 들어왔다.
세비야 통상원의 관리하에 이루어진 신대륙의 값싼 은을 아시아로 수송하는 ‘마닐라 갈레온 무역’은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대항해였다. 운 좋게 바람의 도움을 받아도 왕복 4개월, 운이 없으면 7개월이나 걸리는 장기 항해였다. 그 때문에 대형 선박이 필요했다. 풍부한 필리핀의 목재를 사용하여, 배의 길이가 40m 이상, 평균 1,700톤에서 2,000톤에 달하는 갈레온선이 건조되었으며, 아카풀코와 마닐라 두 항구에서 각각 3척씩(1593년 이후에는 2척씩) 출항하여 태평양을 횡단하는 무역에 참여했다.
이처럼 마닐라 갈레온 무역에 사용된 태평양 횡단 항로는, 은에 의해서 하나로 연결된 세계 경제의 근간이기도 했다.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금화와 동전 대부분은 인도와 중국에, 그리고 종종 근동과 중앙아시아의 항구들과 카라반을 통해 보내졌다. 오스만과 사파비나 무굴인들은 그들의 정복 전쟁 자금으로 포토시 은을 사용했다. 포토시에서 만들어진 ‘8조각’이라고 불리는 스페인 은화는 국경을 넘어 무역과 전쟁 비용으로 사용된 세계 최초의 글로벌 통화였다.
신대륙의 은이 모이는 마닐라 항구에는 대만 해협을 횡단하여 남중국해를 남하한 복건 상인이 중국의 비단, 도자기, 칠기 등을 대량으로 가져오고, 동남아시아 상인이 향신료와 상아를 가져왔다. 대량의 무역품 중에서 특히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이 중국의 비단이었으므로, 갈레온선은 ‘나오 데 치나(Nao de china, 중국선)’라고도 불렸다.
은의 침몰: 포토시의 은은 1550년 이후 유라시아의 금과 은 부족 사태를 종식시켰다. 포토시의 은을 실은 배는 남아메리카에서 파나마 지협을 지나 서쪽으로 대서양으로 나가 스페인으로 건너갔다. 스페인의 세비야와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은은 다시 동쪽으로 오스만과 이란의 사파비 왕조, 인도의 무굴, 중국의 명과 청에 이르렀다.
그러나 빈번한 항해에는 재난도 따르기 마련이었다. 스페인의 보물선들이 난파되거나 약탈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누에스트라 세뇨라 데 아토차(약칭 아토차)는 스페인 침몰선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1622년 금, 은, 동 등을 만재한 아토차는 파나마와 아바나 등을 거쳐 스페인 본국으로 가던 중 마르가리타호와 함께 플로리다 연안에서 침몰하였다. 그해 9월 6일 강력한 허리케인과 암초 때문에 난파되었고, 타고 있던 265명 중 5명을 제외하고는 전원 구출되지 못했다. 두 배의 침몰은 30년 전쟁 등으로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스페인 제국의 재정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었다. 스페인은 배와 함께 가라앉은 재화를 인양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10년간의 노력과 많은 희생 끝에 마르가리타호의 재화는 거의 다 건져 올릴 수 있었지만, 아토차는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그런데 미국의 보물 사냥꾼 멜 피셔가 16년 반에 이르는 탐색 작업 끝에 1980년에 배의 잔해를 발견하였는데, 침몰 후 처음 보고한 위치에 그대로 있었다. 1985년에는 당시 알려져 있지 않았던 스페인의 은화 등을 인양하였다. 현재에도 아토차에서 발견된 은화는 비싼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같은 배에서 2011년에 찾은 에메랄드 반지는 50만 달러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은의 저주: 포토시 은의 발견은 인류에게 축복이었을까 저주였을까? 당시의 현지인들에게는 분명한 저주였다. 16세기 아메리카 신대륙 등 스페인 식민지에서는 가톨릭 교화를 명분으로 현지인들을 실질적으로 노예처럼 사역시키는 농업 경영 형태가 운영되었다. 이를 엔코미엔다(Encomienda; 스페인령 식민지에서 실시된 식민지 통치 제도)라고 한다. 포토시에도 이 제도가 적용되었다. 금은과 각종 재화의 획득에 광분한 스페인 입식자들은 인디오를 종교적으로 구제한다는 명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므로 결국 노예 제도와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포토시에서 생산된 방대한 은은 스페인에게는 축복이었을까? 일시적으로는 엄청난 행운이었을지 모르지만, 스페인의 행로는 꼭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없었다. 현재도 산유국이나 자원 대국이 반드시 산업화에 성공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당시로서는 스페인이 자원 대국이었고, 네덜란드나 영국은 자원 빈국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와 영국은 각종 제조업이 발달하였고 산업 혁명을 일으키기도 하였지만, 스페인은 그러지 못했다. 은으로 주변 나라에서 생산된 저렴한 물품들을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막대한 은을 획득하게 된 스페인 왕실은 가톨릭교의 수호자를 자처하였다. 대량의 은이 세비야의 서인도 상관을 통해서 스페인으로 쏟아져 들어온 것은 1570년경이다. 은은 매년 200~300톤 규모로 유입되었다. 방대한 양의 은 때문에 종래의 금화 제도는 사라지고 은화만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과연 이러한 은은 스페인을 부유하게 만들었을까? 결과는 정반대였다. 손쉽게 획득한 은은 헤프게 쓰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스페인은 내부적으로는 이베리아반도의 마지막 이슬람 왕조인 나스르를 축출하는 레콩키스타(재정복)를 수행 중이었다. 그러나 이 재정복의 말기에는 전쟁 비용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전쟁 채권의 이자만 국가 예산의 3분의 1에 이를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