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의 눈으로 교토를 다시 보다
강동완 지음 | 너나드리
통일의 눈으로 교토를 다시 보다
강동완 지음
너나드리 / 2022년 11월 / 352쪽 / 24,000원
긴카쿠지(은각사) 지역
하루카 열차: 통일 열차 캐릭터를 상상하며한국에서 교토를 찾아가는 길은 오사카 공항에서부터 시작된다. 인천 국제공항에서 오사카 간사이 공항까지 한 시간 정도 비행을 마치면 그곳에서부터 교토로 가는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물론 패키지형의 단체 여행으로 전세 버스를 이용하면 전혀 문제 되지 않지만, 홀로 또는 개인적인 일정으로 통일 여행을 계획했다면 버스나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첫 번째 방법은 1시간 20분 정도 리무진 버스를 타는 여정이다. 공항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조금 걸어가야 하지만 도심을 달리는 버스 안에서 또 다른 일본을 만난다는 장점이 있다. 두 번째는 한큐 전철이나 케이한 전철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공항에서 바로 연결되고 비용은 저렴하지만, 환승 때문에 다소 번거롭다. 마지막으로 JR 특급 하루카 기차를 타는 방법이다. 오사카 간사이 공항을 출발해 덴노지, 신오사카, 교토 등 간사이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특급 열차다. 리무진 버스와 요금은 비슷하면서도, 환승 없이 한 번에 갈 수 있으니 지하철과 버스의 장점만 모은 것 같다.
통일 열차를 장식할 캐릭터는 ‘영리한 너구리’?: 오사카 간사이 공항에서 교토까지 버스와 지하철이 아닌 하루카 특급 열차를 타겠다고 결정한 건 순전히 헬로 키티 디자인 때문이었다. “교토로의 첫 출발은 하루카 열차와 함께”라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언제인가 한 블로그를 통해 교토행 하루카 열차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통일 열차를 장식할 디자인의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 꼭 이 기차를 타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한 번 쓰고 버리는 종이 승차권이 아닌 예쁜 디자인의 이코카 카드를 소장하고픈 마음도 한몫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기차를 기다리며 ‘통일 열차’라는 단어를 몇 번이고 되뇌었다. 플랫폼 안으로 천천히 들어오는 열차는 마치 동화 속 한 장면과도 같았다. 헬로 키티 디자인이 기차 안팎 곳곳마다 예쁘게 그려져 있었다. 헬로 키티를 개인적으로 좋아한다기보다 캐릭터가 지닌 마성의 힘이라고 해야 할까? 캐릭터와 브랜드가 지역 경제를 견인하고 있다고 말하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 단순히 기차 한 대가 아니라 꼭 타 보고 싶은 그래서 그 지역을 일부러 찾아오게끔 만드니 과한 표현도 아닌 듯싶다. 하루카 열차에 이끌려 교토행을 선택했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하루카 특급 열차를 타고 교토로 향하는 시간은 통일의 상상력을 무한히 펼쳐 보는 꿈의 여정이었다. 통일되면 우리는 관광 열차에 어떤 캐릭터를 활용할까?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고민이었다. 부산에서 출발한 통일 열차가 동해안을 따라 한반도 최북단인 멀~리 함경북도 온성까지 달리는 꿈을 꿔 보았다. 신의주를 출발한 기차가 압록강을 따라 이어진 산악 협곡 관광 열차와 연결되어, 차창 밖으로 중국 땅을 바라보는 소원도 상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다 문득 그곳에도 사람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리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늘상 통일 편익을 말하면 부산-서울-평양을 지나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타고 유럽으로 가자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와 연결해 유럽까지 가자며 목소리를 높이지만 정작 그 열차에 사람이 없었다. 우리와 함께 통일을 이루어 낼 북녘의 사람들 말이다.
부산에서 출발해 서울과 평양을 거쳐 유럽으로 갈 생각만 했지, 그 기차에 남북한 주민들이 함께 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유라시아 연결 철도 레일을 깔고 통과역으로만 여겼지, 두고 온 이웃들과 함께 그 기차를 탄다는 이야기는 지금까지 하지 않았다. 함경북도 온성과 양강도 혜산 사람들이 동해안을 따라 부산을 거쳐 제주도까지 가는 여정은 왜 염두에 두지 않을까?
통일을 그저 북한의 지하자원을 캐고, 북한 사람을 저렴한 노동력 정도쯤으로 여기며, 유럽까지 가는 기차 레일을 놓은 점령지 정도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진정 그곳에 사람이 있기에,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자유 민주주의와 인권을 누려야 하기에 우리는 통일 조국을 꿈꾸는 것이다. 통일 열차는 남북한 출신의 모든 주민이 VIP 승객이 되어야 한다.
암펠만, 헬로 키티 그리고 영리한 너구리?: 통일 열차를 장식할 캐릭터를 고민하며 베를린의 ‘암펠만’이 떠올랐다. 독일은 통일 이후 동독의 신호등이었던 암펠만을 최고의 브랜드와 캐릭터 상품으로 만들어 냈다. 베를린의 상징이라고도 하는 암펠만을 모티브로 해서 만든 기념품들도 많아서 ‘암펠만 샵’이 운영될 정도다. 암펠만은 1960년대에 동베를린의 교통국에서 근무하던 칼 페글라우가 발명한 것으로, 아이들과 시력이 안 좋은 노인들을 위해 눈에 잘 띄는 귀여운 캐릭터를 디자인하여 신호등에 적용했다고 한다. 독일 통일과 함께 폐기 처분될 위기에 놓였는데 동독 시민들이 ‘암펠만 살리기 운동’을 펼쳤다. 서독 출신의 산업 디자이너이자 현재 주식회사 ‘암펠만’의 대표인 마르쿠스 헥하우젠에 의해 버려진 암펠만이 다시 재조명되었다. 물론 경제적 가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동독의 문화와 정서를 하찮게 여기지 않은 포용이다.
통일 독일의 암펠만, 교토 하루카 열차의 헬로 키티를 보며 북한에서 가장 인기 있다는 ‘영리한 너구리’를 떠올려 보았다. 한반도 통일 열차를 장식할 캐릭터로 인기를 끌지 기대해 봄 직하다. ‘영리한 너구리’와 ‘뽀로로’가 다정히 손잡은 디자인도 괜찮을 듯싶다. 남북이 하나 되는 통일 캐릭터, 상상만으로도 즐겁지 아니한가.
교토 조선중고급학교: 남도 북도 아닌 조선 사람?4,000장의 유리창에 반영된 교토타워를 남북한의 모습으로 상상하면서, 교토의 여러 곳 중 제일 먼저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타국 땅에서 분단의 흔적과 통일의 의미를 직접 체감할 수 있는 곳을 첫 여정으로 삼고 싶었다. 하지만 선뜻 목적지를 정하지 못한 채 여러 편의 버스를 그냥 지나 보냈다.
그러다 금각사(킨카구지)와 은각사(긴카쿠지)라는 묘한 대조를 이루는 장소의 이름을 발견했다. 교토의 대표적 관광지인 금각사(킨카구지)와 은각사(긴카쿠지)는 교토역을 기준으로 서로 반대 방향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더는 고민할 것도 없이 어느 한쪽을 선택해 그 주변을 먼저 돌아보기로 했다. 첫 번째 일정으로 결정한 곳은 다름 아닌 은각사(긴카쿠지)였다. 사실 은각사가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교토 조선중고급학교>가 은각사 바로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는 말에 마음이 끌렸다. 교토역 정류장에서 은각사행 100번 버스를 탔지만, 사실은 이름도 낯선 일본의 조선 학교를 찾아가는 순간이었다.
두 갈래 길에서 마주한 표지판: 교토의 수많은 장소 중에서 가장 먼저 <교토 조선중고급학교>를 선택한 건 순전히 한 편의 영화 때문이었다. 2003년 일본에서 개봉한 영화 <박치기>는 1960년대 조총련계 재일 교포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교토의 조선인 학교에 다니는 재일 조선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간의 갈등이 주요 소재다. 세상 어디든 통한다는 구글 지도에 주소를 입력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교토 조선 학교는 쉬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런 곳에 과연 학교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만큼 외딴곳으로 길은 계속 이어졌다.
번화한 마을을 벗어나 숲 사이로 놓인 언덕길을 한참이나 올라갔다. 두 갈래 길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일 때 작은 안내판 하나를 발견했다. “교토 조선중고급학교 진입로”라는 글씨와 함께 빨간색 화살표가 방향을 가리켰다. 순간 망설여졌다. ‘정말 이 길 끝에 학교가 있을까’라는 의문도 들었지만, 사실 혼자 조선 학교를 방문해도 되는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잠시 동안이지만 두려운 마음이 들었던 게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른다. 분단의 골은 그렇게 깊이 패어 있었다.
조선 학교: 분단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는 분명 아니었다. 낯선 방문객을 어떻게 맞아 줄지, 혹여나 학교에 발도 붙이지 못하는 건 아닌지 생각이 많아졌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굳이 용기를 낼 것까지야 아니었지만, 나 자신을 위안하듯 크게 쉼 한번 내쉬고 오르막길을 천천히 올라갔다.
교토 조선 학교와의 첫 만남: 이 깊은 산속에 학교라니. 처음에는 건물을 보고도 믿겨지지 않았다. 일부러 찾아오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위치였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먼저 교무실을 찾아갔다. 선생님 한 분께서 친절하게 미소를 보이며 맞아 주었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사전 약속을 하지 않고서는 학교 내 시설을 둘러보는 건 어렵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다음 방문 때 필요한 전화번호를 받아 들고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못내 아쉬움에 운동장도 한 바퀴 돌아보고 복도에 서성이다 지나가는 아이들과 마주하기도 했다. 온갖 생각과 망설임이 무색할 정도로 첫 방문은 너무도 싱겁게 끝났다. 그래도 낯선 방문객을 매몰차게 내쫓지 않고, 친절하게 다음을 기약해 주신 선생님의 배려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교문을 나서는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방문 약속을 하고 다시 찾은 학교: 그다음 날 쪽지에 적어 준 전화번호로 바로 전화를 걸었다. 어쩌면 너무도 당연하지만, 수화기 너머로 전해 오는 그는 분명 한국말(조선말)을 사용했다. 억양은 조금 달랐지만 분명 우리가 쓰는, 서로의 생각과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우리말이었다. 한국에서 온 대학 교수로 신분을 밝히고 학교를 방문해 조선의 아이들을 보고 싶다는 말을 건넸다. 흔쾌히 허락해 주었고 교토 체류 일정을 고려해 다음 날 바로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다시 찾아간 학교. 재일 교포 3세라고 자신을 소개한 선생님은 선친의 고향이 경상남도 양산이라 했다. 양산이라면 부산에서 불과 30여 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가까운 곳이지만 그에게는 지금까지 한 번도 찾아가 보지 않은 멀고도 먼 미지의 땅이었다.
남한도 북한도 아닌 조선 사람: 해방 직후 당시 일본에는 약 240만 명의 재일 교포가 있었다. 귀국선을 타고 140만 명의 동포들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곳에 남게 되었다. 남북의 분단은 재일 동포 사회를 재일본조선거류민단(민단)과 재일본조선련맹(조총련)으로 갈라놓았다. 일본 내에서의 또 다른 분단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남한도 북한도 아닌 조선 사람이라는 국적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한 사람들이 있었다.
<교토 조선중고급학교>는 1953년 4월 20일에 문을 열었다. 당시 학교는 교토시 한복판에 있었는데, 태평양 전쟁 시 무기고로 사용하던 곳을 빌렸다. 조국은 여전히 전쟁 중이었다. 학생 70명, 교사가 20명 정도였으며, 나중에 학생 수가 늘어나면서 현재 학교는 1961년에 산을 직접 깎아서 만들었다고 한다. 학교의 교육 이념은 ‘민족의 자주성’, ‘민족적 소양’, ‘풍부한 인간성’, ‘올바른 력사관’, ‘폭넓은 학과 실력’이라고 했다.
조선의 아이들: 선생님은 친절하게도 학교 내 이곳저곳을 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한창 국어 수업에 열중하던 선생님은 치마저고리를 입은 채 아이들의 표정 하나하나를 살피는 듯했다. 교생 실습 선생님을 소개한다는 포스터가 복도 게시판에 걸렸고, 여느 학교처럼 자신의 각오를 다지는 글귀가 교실 여기저기에 붙어 있었다. 수업 참관을 위해 교실로 들어섰을 때 아이들은 낯선 방문객을 거부하지 않았다. 카메라를 치켜들면 여느 사춘기 소녀들처럼 수줍어 고개를 가로저을 만도 한데, 너나 할 것 없이 브이를 그리며 환한 웃음을 띠어 주었다. 이보다 더 순수하고 맑은 표정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적어도 그들의 표정에서만큼은 시퍼렇게 날 선 분단의 칼날은 보이지 않았다. 남이니 북이니 둘로 갈라져 서로를 증오하고 적대하는 지금의 남북한이 그저 부끄럽게 보일 뿐이었다.
빨강과 파랑의 삼펜 교표: 교실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다시 운동장으로 나왔다. 체육 수업이 한창이었다. 생일을 맞은 친구를 위해 같은 반 아이들이 사진을 찍고 축하 노래를 불러 주는 모습은 여느 학교와 사뭇 달랐다. 운동장을 몇 바퀴나 뛰어다닐 만큼 아이들의 표정은 밝고 활기찼다. 마치 모델이라도 된 것처럼 신나게 포즈를 취해 주는 아이들의 모습을 하나둘 카메라에 담았다.
더 머물고 싶었지만 아쉬움을 뒤로한 채 학교 교문을 나섰다. 한동안 아이들은 연신 뒤를 돌아보고 방문객의 발걸음을 지켜봐 주었다. 아이들이 모두 교실로 들어가고 빈 교정에 잠시 멈추어 섰다. 그리고는 학교 교문에 붙은 삼펜 교표를 마주했다. 펜과 망치가 세 개씩 배열된 교표였다. ‘일하면서 공부’하되 남북한과 재일 동포를 위해 3배나 열심히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빨간색과 파란색 교표가 두 개의 교문에 각각 붙어 있었다. 어느 한쪽만 열어서는 결코 아니 될 두 개의 문이 완전히 열려야 한다는 뜻을 담은 듯했다.
무린안: 조선의 운명은 어디로무린안에 들어서는 입구에 이르러서도 이곳이 출입문이 맞는지 몇 번이고 주변을 살폈다. 내부를 볼 수 없도록 만든 높은 담장이 둘러 있었고, 쉽사리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곳처럼 보였다. 일본 정원의 진수를 볼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무린안을 찾아갔지만, 사실 이곳은 한반도와 조선의 역사 가운데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장소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림 같은 정원이 한눈에 펼쳐진다. 교토의 어디를 가도 늘 문을 기준으로 바깥쪽과 그 안쪽은 다른 세상이 열리듯 무린안 역시 자연의 품속으로 들어온 듯한 푸르름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무린안은 뒤쪽의 히가시야마의 경치를 빌려서 만든 정원이다. 정원에서 보면 산 위에서 자연스럽게 무린안 숲으로 이어져, 그 사이를 강물이 마치 히가시야마에서 내려온 것처럼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단지 물을 가둔 인공 연못이 아니라 비와 호수의 물을 끌어와 작은 냇물이 흐르도록 만들었다. 중요 문화재 정원으로 지정된 이곳은 당대 최고의 정원사로 불리었던 오가와 지헤가 설계했다.
그런데 무린안은 우리에게 결코 아름다운 자연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1896년 메이지 시대 정치가인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별장이라는 점 때문이다. 아리토모는 일본 제국 육군의 창설자이자 군국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인물로 러일 전쟁을 일으키고 대한 제국 침략을 이끈 장본인이다. 무린안에서 눈에 띄는 장소가 바로 서양관이라 불리는 건물이다. 바로 이곳에서 무린안 회의가 열렸다.
무린안 회의: 무린안 회의는 당시 원로인 야마타가 아리토모, 정우회 총회 이토 히로부미, 총리대신 가츠라 타로(당시 총리로서 1905년에 맺어진 가츠라-테프츠 조약의 장본인),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가 참석한 회의를 말한다. 20세기 초 러시아는 의화단 사건을 빌미로 만주에 병력을 주둔시켜 사실상 만주를 점령하는데 일본 정부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청일 전쟁의 승자였던 일본은 1903년 4월 21일 이곳 무린안에서 러시아에 대한 외교 방침을 결정한다. 즉, 조선에 대한 일본의 절대 우월권, 만주에 대한 협상권을 통해 각각의 우월성을 정하는 방침이자, 조선에 대해서는 단 한 걸음도 러시아에 양보할 수 없다고 명시했다. 일본으로서는 러시아와 가급적 전쟁을 피하려고 외교적 협상을 지속했다고 말하지만, 전후 상황을 보면 사실상 러시아에게 조선에 대한 포기와 만주를 양분하는 것을 제시하고, 수틀리면 전쟁하겠다는 야욕을 감춘 것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