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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사의 명장면

김문기 외 지음 | 산지니


해양사의 명장면

김문기 외 지음

산지니 / 2019년 7월 / 295쪽 / 20,000원





해상 제국의 출현



‘설탕 제국주의’: 해양 공간의 교류가 만든 일상의 변화


그리스ㆍ로마 시대부터 전개된 해양 공간의 물자 교류는 지역에서 얻기 어려운 생산물을 전달해 주는 통로였기 때문에 당대인들의 일상생활을 풍요롭게 했다. 그렇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이러한 생산물 전파는 지역의 거주민은 물론 그 물자의 생산과 관련을 맺고 있는 사람들의 생존 방식을 엄청나게 변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설탕의 생산과 전파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역사적 사례이다.

이미 6세기경부터 페르시아인들은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정제하는 기술을 알고 있었으며 이를 지중해에 전파했다고 한다. 중세 남유럽의 시실리에서 9세기경 처음으로 사탕수수가 집약적으로 재배될 수 있었던 것도 이슬람이 지중해에서 가지고 있었던 당시의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슬람이 지배하고 있던 스페인 남부의 알-안달루스는 10세기에 이르러 지중해 지역에서 설탕 생산의 중심지로 부각되기도 했다. 지중해 유역을 중심으로 유럽인들에게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 설탕은 육두구, 정향, 후추 등의 아시아 향신료에 버금가는 고가의 산물이었고, 상층 귀족 계급만이 즐길 수 있는 사치품이었다. 설탕이 특권 계층의 사람들만이 즐길 수 있는 사치품에서 대중적 소비재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전기가 필요했는데 유럽인들의 해양 진출이 바로 그것이다.

인도나 중국에 도달할 수 있는 새로운 항로를 찾는 과정에서 유럽의 항해 세력들은 아프리카 북서부 대서양의 카나리아제도와 마데이라섬을 차지했다. 처음에는 이들 섬의 목재와 천연자원이 주된 수탈 대상이었지만 그것이 한계에 도달하자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지배자들은 새로운 수익원을 찾아야 했다. 설탕 생산을 위한 사탕수수 경작은 자원 수탈에만 의존하는 이익 창출 방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로 이익을 지속적으로 창출하기 위해서는 설탕 생산에 필요한 노동력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사탕수수 재배로부터 이를 수확, 운반하여 최종적으로 설탕 정제 과정까지 이르려면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데 섬의 원주민 노동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마데이라섬을 차지하고 있던 포르투갈은 설탕 생산의 주된 장소를 남아메리카 대륙의 브라질로 이전했다.

대규모의 설탕 생산 체제는 대서양 연안의 브라질 북동부 바이아와 페르남부쿠에서 16세기 초반부터 확립되었다. 사탕수수 재배를 위한 경작지와 이것의 가공 공장을 한군데로 집결시킨 설탕 플랜테이션 체제는 이미 마데이라와 카나리아제도에서도 도입된 바 있지만 노동력과 경작지의 부족으로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반면에 남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노동력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의 노예 노동력까지 활용한 브라질의 설탕 플랜테이션은 설탕의 대량 생산을 가능케 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1630년, 포르투갈로부터 페르남부쿠를 획득한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의 투자로 브라질 동북부의 설탕 생산은 더욱 증가했다. 1612년, 브라질의 설탕 총생산량이 14,000톤이었는데 1640년대에 들어서는 페르남부쿠 지역에서만 매년 암스테르담에 24,000톤 이상을 수출했다. 그렇지만 설탕 생산의 중심지는 브라질에서 카리브해의 섬들로 또다시 이전했다.

설탕 생산의 중심지로 바베이도스를 비롯한 카리브해 섬들의 부각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양한 이유를 들 수 있지만 중요한 것 중 하나가 1654년 페르남부쿠 지역을 포르투갈이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로부터 재탈환한 사건이었다. 페르남부쿠 지역의 포르투갈 농장주들은 네덜란드의 지배를 인정한 적이 없었고 이전 시대의 농장주들은 고금리의 사채 상환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네덜란드의 서인도 회사는 페르남부크 지역을 포르투갈에 넘기게 되고 서인도 회사는 설탕 생산을 위한 자본 투자처를 카리브해 지역의 섬들로 이전했다. 그중에서도 영국인 제임스 드락스의 주도 아래 설탕 산업을 발전시키고 있던 카리브해의 바베이도스가 대안으로 부상했다.

페르남부쿠에서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설탕 생산 방법과 구조를 습득한 바 있는 드락스는 1620년대에 바베이도스로 이주하여 1630년대 후반에는 상당한 정도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카리브해에서 담배 농사가 장기간 침체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자 드락스는 설탕 생산이 타개책이라 생각하고 네덜란드의 자본과 기술을 설탕 생산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드락스는 노예 노동력을 대규모로 활용하여 바베이도스를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 설탕 공급의 핵심 장소로 부각시켰다.

1640년대 이전, 바베이도스 노동력의 핵심 원천은 유럽의 계약 노동자였다. 계약 노동자는 특정 고용주 아래에서 정해진 시간 동안 부자유한 신분으로 노동 의무를 다하면 자유로운 신분으로 전환될 수 있었는데, 이러한 고용 형태는 대규모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설탕 생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따라서 드락스는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들을 수입하여 설탕 생산에 필요한 지속적 노동력을 확보해 나갔다. 1642년에 22명의 노예를 부리기 시작한 드락스는 1650년대에 자신의 광대한 영지를 200명의 노예로 채웠다. 드락스의 노예 노동에 기반한 설탕 생산은 카리브해 여타의 섬들에서도 전형적 형태로 확립되어 갔고 노예들의 후손은 자신들의 뿌리를 단절당한 채 디아스포라의 삶을 지속해 나가야 했다.

물론 카리브해의 설탕 플랜테이션 모두를 영국이 장악한 것은 아니다. 이미 1568년 에스파냐 해상세력들은 히스파니올라와 푸에르토리코에 가축의 동력을 이용하는 46개의 설탕 공장을 가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스파냐 식민세력들에게 카리브해의 설탕플랜테이션은 멕시코의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이나 페루 부왕령에서 얻을 수 있는 금은의 수탈에 비해 수지가 맞는 사업이 아니었다. 에스파냐로 떠나는 선단의 중간 기착지라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한 쿠바 아바나에 대한 관심을 제외하면 카리브해의 섬들은 에스파냐 왕실의 경제적 고려 대상에서 멀어졌다. 그로 인해 18세기에 들어와 카리브해의 설탕 플랜테이션 대부분은 영국과 프랑스의 수중에 들어갔다.

유럽의 두 강대국이 카리브해의 설탕 플랜테이션을 지배하면서 설탕은 이제 더 이상 상층 계급만을 위한 소비재가 아니었다. 아프리카의 노예 노동력을 기반으로 대량 생산 체제에 들어가면서 설탕은 싼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 소비재가 되었다. 특히, 영국이 산업 혁명으로 공장제 생산 양식을 점차 확대하자 설탕의 소비도 비약적으로 늘어 갔다. 영국인들이 즐기는 차의 소비가 늘어나면서 차에 설탕을 첨가하는 형태가 자리 잡기 시작했던 것이다. 공장 노동자들은 한때 귀족층의 전유물이었던 설탕의 소비기회를 갖게 되면서 새로운 사회관계 안에 편입되었다는 심리적 만족감을 얻을 수 있었다.

‘단맛’을 부담 없이 누릴 수 있었던 영국 공장 노동자들의 형성 이면에는 그러한 ‘단맛’을 끊임없이 제고하기 위해 엄격한 작업 규율과 가혹한 노동 조건에 시달려야만 하는 흑인 노예들이 있었다. 순백의 설탕을 만들어 내기 위해 흑인 노예들은 사탕수수액을 뽑아내기 위한 착즙기에 사탕수수를 밀어 넣다가 손이 절단당하는 사고를 당하기 일쑤였다. 또한 사탕수수액을 정제하여 설탕을 만들기 위해 고온의 작업장에서 장시간 노동을 견뎌 내야 했다. 인류학자 시드니 민츠의 지적대로 근대 사회의 설탕 소비에는 제국주의적 권력관계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었다. ‘설탕 권력’은 그것을 보유하지 못한 아프리카와 카리브해 원주민들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킨 힘의 원천이었다.



해양 중국의 역사



황해를 둘러싼 근대 한중 관계의 전환


1882년 8월 26일 딩루창이 이끄는 청군은 한성에 진입해 군란의 책임을 물어 대원군을 구금했다. 비 오는 밤길 120리를 행군해 다음 날 새벽 마산포(경기도 화성)에 도착했다. 그리고 대원군을 곧바로 등영주호에 태워 텐진으로 압송했다. 한두 줄로 요약한 임오군란 당시 대원군 납치 사건이다. 그런데 이 사건 속에는 2천 년 한중 관계사의 극적인 변화가 숨겨져 있다.

청의 군사 개입:
무엇보다 충격적인 사실은 임오군란 중에 중국이 조선 문제에 직접적인 군사 개입을 했다는 점이다. 조선 5백 년 역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누구는 병자호란을 떠올려 중국의 침략이 있지 않았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병자호란은 엄격한 의미에서 북방 민족이던 후금의 만주족이 갓 청으로 국명을 바꾼 후 남침한 사건이다. 고려 시대에 거란의 요, 여진의 금, 몽골의 원도 어찌 보면 북방 민족의 침략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중국의 왕조와 한국의 왕조 사이에는 세계사에 유례없는 오랜 친선 관계가 이어져 왔다. 물론 요동이라는 지리적 방어막이 있어야 가능했지만.

황해를 건너 마산포로:
다시 주목할 대목은 ‘임오군란 때 어떻게 3천여 명의 청군이 조선에 신속하게 왔을까’이다. 그들은 육로가 아닌 북양수사의 군함과 민간용 윤선을 타고 황해를 건너 마산포로 들어왔다. 마산포는 인천에서 27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한 남양만의 포구이다. 청 수사가 인천과 더불어 자주 이용한 미개항 항구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근대는 바다로부터 왔다는 말이 있다. 옛날에는 한국에서 중국으로 가려면 육로를 통해 몇 개월이 걸렸다. 비록 해로가 있었지만 너무 위험해서 기피했다. 그런데 범선이 아닌 윤선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한중 간 교통로에서 증기선의 출현은 전신망과 더불어 혁명적인 변화를 몰고 왔다.

북양수사, 최초의 대외 군사 행동:
‘북양수사’란 1881년 말 리홍장이 딩루창에게 북방의 해양 방어 책임을 맡기면서 처음 공식 문서로 나타난 해군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대원군 납치 사건 기사 중에 언급된다. 리홍장이 영국에서 구매한 순양함 초용과 양위라는 자매함에 몇 척의 배를 보태어 연근해 군사 작전이 가능하도록 만든 부대이다. 보통 군함은 두 척 이상을 동시에 건조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 초용호와 양위호는 텐진에서 황해를 건너 조선과 영국ㆍ미국ㆍ독일 간 통상 조약을 체결할 때 능력을 입증한 바 있었다. 과거 군함이 없어 일본의 대만 침공 사건이나 강화도 사건 때 개입하지 못한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발전이었다. 청의 시각에서 보면, 임오군란은 북양수사가 처음 실행한 대외 군사 작전으로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 사건은 조청 관계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조선선후사의」와 리홍장:
1882년 10월 말 장페이룬이란 젊은 학자가 「조선선후사의」(6조)라는 글을 청 조정에 올려 조선 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을 요청했다. 거물 정치인 리홍장이 이 젊은이의 글을 하나하나 논평했는데, 여기서 대조선 정책의 전환이 잘 드러난다. 장페이룬은 “육군이 왕도를 수호함은 해군이 해구(海口)를 보호함만 같지 못하다.”라며 육군에 의한 한성 지배보다는 북양수사에 의한 인천 지배가 유리하다는 주장을 폈다. 리홍장도 영국이나 독일에서 신형 군함을 구입해 장차 조선 해안까지 수비하겠다고 맞장구를 쳤다. 더 나아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조선의 지리적 여건상 청의 육군보다는 해군력을 강화하는 것이 조선을 통제하는 데 더 적합한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북양육군에서 북양수사로:
당시 리홍장의 말을 그대로 옮겨 보자. “당부터 명까지 조선에 일이 있으면 항상 랴오선에서 병력을 보낸 것은 바다로 건너가는 병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동서양의 윤선이 발전하여 하루에 천 리를 갑니다. 조선 형세는 삼면이 바다에 접해 있어서 수사가 더욱 적당합니다. 윤선은 옌타이에서 조선의 한강 입구까지 하룻밤이면 도달할 수 있고, 텐진 다구에서도 사흘이 걸리지 않습니다. 만약 랴오선에서 육로로 조선 왕성까지 가려면 반드시 20여 일이 소요되어 종종 일에 늦습니다. 조선을 방어하려면 반드시 병선을 추가하는 것이 핵심인데, 이는 시대 변화에 따른 변통입니다.”(「조선선후사의」 제5조) 이것은 조선에 대한 군사 전략을 육군에서 해군으로 전환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북양수사, 두 번째 대외 군사 행동:
1884년 12월 한성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조선 대신들이 청군에 도움을 청하자 한성에 머물던 위안스카이의 군대가 왕궁으로 진입해 개화파를 지지하던 일본군을 몰아내었다. 이때에도 리홍장은 청프 전쟁으로 인해 남양에 파견되었던 북양 소속 초용호와 양위호를 불러들였다. 배들이 조선에 도착했을 때는 정변이 이미 평정되었다. 하지만 인천항에 군함 세 척을 순환 배치해 인천을 북양수사의 전진 기지로 만들었다. 청의 조선에 대한 기본 전략이 북양육군에서 북양수사로 바뀐 것을 확인한 셈이다.

나가사키 사건과 청일 해군력 경쟁:
얼마 후 나가사키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1885년 4월 영국 해군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거문도를 점령한 일과 관련이 깊다. 리홍장은 고종에게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허락하지 말라는 편지를 보냈다. 러시아와 일본도 영국의 군사 행동에 반발하며 무력시위를 했다. 북양수사는 새로 구입한 철갑선 정원과 진원을 주축으로 함대를 부산과 원산 일대로 출동시켰다. 문제는 북양함대가 선박을 수리하고 연료를 공급받는다는 이유로 나가사키에 기항하면서 일어났다. 역사책에는 나가사키 사건을 청의 수병과 나가사키 경찰 사이에 두 차례 난투극이 벌어져 다수의 사상자를 내면서 중일 양국 간 갈등이 고조된 사건으로 기록한다. 하지만 더욱 주목할 사실은 얼마 후 북양함대가 자신들의 능력을 과시할 요량으로 일본 지도층을 초대해 선상 파티를 연 점이다. 청의 첨단 해군력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자 일본 국내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 후 일본은 해군력 강화를 최고 목표로 삼아 경쟁적으로 군사력 증강에 나서게 된다.

북양수사가 황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면서 조선에 수시로 군함을 파견해 육군보다 먼저 군사 행동한 사실 등은 전통적 책봉 조공 관계에서 이탈해 유사 제국주의적인 형태로 전환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급격한 변화는 일본 해군력의 팽창을 가져와 얼마 후 청일 전쟁이라는 엄청난 사건의 불씨가 되었다. 최근 동북아의 군사 경쟁, 특히 해군력 증강이나 도서 영해 갈등을 보노라면 근대 청일 간 군함 구매를 둘러싸고 벌어진 경쟁 상황을 떠오르게 한다. 끊임없는 군사력 경쟁이 결국 서로의 안전이 아닌 파멸로 이끈 불길한 경험과 함께 말이다.



해양 교류의 발신지, 부산



한일 외교의 최전방, 초량 왜관 속의 삶과 죽음


부산은 대한 해협을 사이에 두고 고대 이래 오랫동안 일본과 교류해 온 항구 도시이다. 특히, 15세기 초(1407년) 부산포에 설치되어 메이지 초기(1870년)까지 약 사백여 년 이상 존재한 왜관은, 에도 시대 이후 외국 땅에 있었던 유일한 일본인 거주지로서 학계의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조선 후기 왜관은 부산포에만 설치되어 그 지역에 따라 절영도 왜관ㆍ두모포 왜관ㆍ초량 왜관 시대로 구분되는데 바야흐로 동래부는 한일 양국 외교의 최전방으로, ‘가까운 타자’ 왜관과의 끊임없는 갈등과 모순을 극복함으로써 한일 양국 평화 유지에 주력하였다.

이 중 초량 왜관 총책임자인 관수가 약 184여 년 동안(1687~1870) 기록한 일기가 방대한 분량(약 860여 책)으로 보존되고 있어 한일 양국 교류의 다양한 실상에 대해 접근할 수 있다. 이 기록은 한일 외교ㆍ무역ㆍ문화 교류는 물론이고 전근대 부산포 기후 환경(날씨ㆍ풍향ㆍ해양ㆍ환경), 각종 사건 사고ㆍ스캔들 등 참으로 무궁무진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초량 왜관은 1678년, 두모포 왜관에서 구 초량(현 중구 광복동)으로 이전하여 초량 왜관으로 불리게 되었다. 공간 구조를 보면 용두산을 중심으로 동쪽 해안가에 동관(거주ㆍ업무 공간), 서쪽 용두산에 서관(일본에서 온 사절단의 숙소 공간)이 배치되어, 두모포 왜관의 10배(10만 평)로 넓어졌다. 동관은 관수 가옥을 비롯하여 개시대청(매달 3ㆍ8일 개최되는 5일장 형태의 한일 무역 공간), 왜관 관리들의 제반 가옥, 제반 상가(떡집ㆍ술집ㆍ찻집ㆍ그릇집ㆍ국수집ㆍ염색집ㆍ다다미집ㆍ목수집ㆍ약국ㆍ설탕ㆍ선원), 사찰ㆍ신사, 부두 시설, 출입문 등으로 구성된 생활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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