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인문학
김태만 지음 | 호밀밭
해양인문학
김태만 지음
호밀밭 / 2022년 11월 / 214쪽 / 18,000원
해양 DNA와 인류
배와 함께 시작된 해양의 역사우리는 오랫동안 문명의 대부분이 땅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학습 받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인류의 생명뿐 아니라 인류 문명의 탄생과 발전은 해양에서 이루어졌다. 참고로 지구 표면적의 71%는 해양이다. 그런 점에서 지구를 하나의 물로 된 거대한 공, 즉 ‘수구’라 불러야 한다. 한편 오늘날 각국의 인구 밀집 지역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 강이나 바닷가에 인접해 있다. 인류 문명의 토대인 해양은 음식 문화, 주거 양식, 교통수단, 여행 방식 등의 생활 방식에도 큰 영향을 주었으며, 지질학, 지리학, 기상학, 생명 공학 등 과학 기술 발명과 발전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편 해양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배’다. 배는 항공 기술이 발달하기 전까지 대륙과 대륙을 잇는 유일한 수단으로서 인류 문명 구축에 엄청난 역할을 했다. 전 세계적으로 배의 기원은 B.C. 8000~5100년경 원시 사회 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나무가 물 위에 떠다니는 것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물고기, 조개 등 먹거리를 얻기 위해 만든 조그만 뗏목을 배의 시초로 본다. 그러다 차츰 원시 국가가 출현할 무렵에는 배를 타고 근해로 고기잡이와 사냥까지 나서게 된다.
그리고 B.C. 2000년경 나무로 만든 배에 돛을 단 목범선(木帆船)이 등장하면서부터 본격적인 배의 문화가 형성되었다. 목범선은 화물 적재용인 중형선(重型船)과 해적용인 경형선(輕型船)으로 구분되는데, 초창기에는 중형선이 주를 이루었으나, 이후 해상 패권 쟁탈전이 시작되면서 그리스를 중심으로 경형선의 건조와 이용이 활성화되었다. 참고로 대중에게 잘 알려진 목범선은 바이킹선이다.
배의 역사에 있어서 목선과 목범선이 수천 년을 이어 온 데 비해, 근대식 기계 선박은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등장한다. 산업 혁명 시기인 1800년대, 증기와 기계 장치로 동력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면서 증기선이 출현했다. 초기 증기선은 선체를 나무로 제작하다 보니 나무 선체에 쉽게 금이 가거나 장시간에 걸친 기계의 진동을 견디지 못하는 등 한계가 뚜렷했다. 이후 1822년 영국에서 제작한 최초의 철제 증기선인 ‘아론 맨비호’가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철제 증기선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한반도에 증기선(철제선)이 처음 출현했던 시기는 미국과 프랑스 증기선이 우리나라 해역에 출현했던 1866년이고, 증기선이라는 명칭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된 시기는 1876년 개항 이후로 본다. 한편 일제 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근대적 조선업이 처음 자리 잡고 흥성하기는 했지만, 우리나라의 본격적인 조선 산업 흥성기는 정주영 회장이 그리스 리바노스사와 26만t짜리 원유 운반선 건조 계약을 맺음과 동시에 울산 방어진에 ‘현대 조선소’를 건설하기 위해 첫 삽을 뜬 1972년부터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선박 건조 기술은 이미 세계적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아울러 해운 물류업 역시 세계 수위를 달린다. 이쯤 되면 우리 민족의 밑바탕에 어떤 해양 DNA가 작동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생길 만하다. 조선과 해운 모두에서 단기간에 결코 이루기 힘든 기적적인 성과를 거둔 걸 보니 말이다.
바다는 문명 교류의 고속 도로배는 항해를 가능하게 하는 도구이자, 오래도록 대륙과 대륙을 이어 주는 다리 역할을 했다. 선박을 앞세워 각국이 바다에서 무한 경쟁을 펼쳤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활발한 무역을 통해 더 많은 경제적 부를 창출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러한 시도로 말미암아 문화 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배가 문명 교류의 보부상 역할을 했다면 바다는 문명 교류의 고속 도로 그 자체일 것이다.
해상은 육상에 비해 마찰계수가 낮아 사용 에너지 대비 이동 효율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배를 타고 수면 위를 미끄러질 수 있는 해양은 육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동이 자유로워 짧은 시간 내에 도달할 수 있는 공간도 많다. 또한 운송이 안전하고 비용이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다.
인류의 미래, 해양인류 문명은 다양한 문제를 맞닥뜨리면서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변화하고 발전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가끔은 난제라 부를 만큼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기후 위기와 같은 문제는 세계 각국의 전문가가 나서서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하지만 결코 쉽지 않다. 그런데 해양을 연구해 온 사람으로서 지구의 문명을 바라볼 때, 21세기 인류에게 닥친 다수의 문제는 해양에서 연원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의 한계는 육지의 관점에서 사고하는 데 익숙하다는 점이다. 점차 육지가 바다에 잠겨 삶의 공간이 사라지는 것만을 걱정하지, 해양의 변화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 이미 거의 모든 자원과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인 육지를 더욱 쥐어짜는 데만 골몰하지, 지구의 71%를 차지하는 해양을 중요하게 여기며 호혜적으로 이용할 꿈을 꾸지 않는다.
인류 문명의 위기를 극복하고, 인간 개개인의 삶의 질을 높여 줄 방안. 그 미래 문을 여는 열쇠는 바로 해양에 있다. 그 열쇠를 손에 쥐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전제가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는 해양의 가치와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전문가뿐만 아니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해양에 대한 재인식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사고의 전환을 도모하는 ‘해양 문명과 해양성’에 대한 인식의 재정립과 바다와의 친화력을 높이기 위한 공간 및 시설 마련 등이 충분히 이뤄져야 한다.
두 번째로 과학 기술은 경제, 산업, 지속 가능성 등 문제 해결의 직접적인 방법이 되기도 하지만 그 기술 개발의 범위가 여전히 육지에 국한되어 있는데, 다채로운 해양 자원을 모색해 호혜적으로 활용하고, 해양과 결부되어 일어나는 지구 위기 극복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해양 하이테크 신기술 개발에 눈을 돌려야 한다. 셋째, 우리는 삶의 질에 대해 이야기할 때 주거나 수익성 등과 같은 육지적 지표를 내세운다. 하지만 해양이야말로 주거나 때로는 치유의 장소로 오랜 시간 인류와 함께해 온 최적의 공간임을 인식해야 한다. 해양으로 삶의 범위를 확장한다면 우리의 일상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아무튼 해양은 인류의 오래된 미래다. 우리는 다시 해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해양으로의 온전한 회귀를 위해서는 ‘바다를 아는 노력’이 필요하다. 해양에 대한 호기심과 실천(탐험, 항해 등), 연구 및 탐사(극지, 해양 고고학, 해양 민속 등), 해양 유산의 가치 인식과 창조적 활용(해녀, 해양 예술 등)이 인류에게 끼친 영향을 알게 된다면, 해양으로의 회귀 필요성을 깊이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해양 문명의 발견과 가치
탐험
대항해 시대 탐험가와 지리상의 대발견: 본격적인 대항해 시대라 일컬을 수 있는 15세기에는 무수한 해양 탐험가가 탄생했다. 이들의 업적을 두고 단순히 하나의 대륙 또는 항로를 발견한 정도가 아닌, ‘인식의 전환이자 지리상의 대발견’이라 평가하기도 한다. 당시 해양 탐험가들의 행보는 국가 간의 교류를 촉진했고 인류사의 무대를 바다로 확장시켰다.
한편 대항해를 가능케 했던 요인은 여러 가지다. 조선 기술의 발달, 갖가지 항해 도구의 발명과 항해술의 발전, 갈수록 정교해지는 해도(海圖)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항해를 통해 거두어들인 막대한 부(富)도 탐험의 가속화에 일조했다. 그리고 탐험을 담보로 한 투자와 분배는 현대적 의미의 보험과 금융의 시초가 되었으며, 항해를 가능케 하기 위한 법 제도 정비와 경제 시스템의 발달은 탐험에 더욱 불을 당겼다.
대항해 시대 해양 탐험가의 이름 중 절대 빠지지 않는 이는 콜럼버스다. 그는 어려서부터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확신했다고 한다. 그렇기에 유럽의 해안을 출발해 서쪽으로 항해하면 인도를 거쳐 중국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듯 콜럼버스는 1492년에 에스파냐(지금의 스페인) 왕실의 이사벨 여왕으로부터 신대륙 발견에 필요한 기반과 자금을 후원받아 탐험에 나서게 된다. 그는 10년 동안 네 차례 항해를 떠났고, 마침내 신대륙인 아메리카를 발견한다. 그의 발견은 세계 지도에 무한한 가능성을 담은 커다란 대륙 하나를 새로 그려 넣을 수 있을 정도의 획기적인 업적이었다.
콜럼버스와 견주어 늘 등장하는 해양 탐험가 바스쿠 다가마는 콜럼버스가 항해를 떠난 5년 후인 1497년 7월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희망봉을 발견한 바르톨로뮤 디아스와 함께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을 출항해 인도로 향한다. 그리고 1498년 5월 20일 마침내 인도 서남해안의 항구 캘리컷에 도착한다.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로 가는 신항로를 개척한 것이다. 한편 바스쿠 뉴네스 데 발보아는 신대륙 발견 이후 남아메리카에 정착한 인물이자 유럽인 최초로 태평양을 발견한 탐험가다.
그 외에도 많은 탐험가가 바다를 탐험해 새로운 항로와 땅을 발견했고, 두려움에 맞선 이들의 탐험과 개척 정신이 인류의 역사를 바꿨다는 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다만 탐험의 목적을 영토 확장 야욕으로 전락시킨 서구의 비뚤어진 욕망과 대항해를 통해 제국화를 실현하고자 했던 야망으로 인해 아시아ㆍ아프리카 등의 대륙이 식민화라는 거대한 불길에 휩싸여 고통 받게 되었다는 점은 기억해야 한다.
극지(極地)
극지 연구의 중요성: 극지란 지구의 자전축이 지표와 교차하여 생기는 북극점과 남극점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는 고위도 지역을 말하며, 지구의 기후와 환경, 또 생태계와 인간 사회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다만 극지의 환경적 특성상 원활한 연구가 쉽지는 않은데, 그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 ‘국제 극지의 해’다. ‘국제 극지의 해’는 국제과학연맹이사회와 세계기상기구가 공동으로 제정한 것으로, 50년마다 전 세계 과학자가 연대해 남극과 북극을 연구하고 탐험하는 캠페인이자 올림픽이다.
극지 연구의 진정한 가치: 오랜 탐험과 연구에도 불구하고 극지 연구는 현대로 올수록 그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극지 연구는 왜 필요한 것일까? 남극은 지구 환경 변화에 가장 민감한 지역으로, 지구 전체의 기후를 관찰하는 기상 연구소 역할을 한다. 또 지구 환경의 과거와 현재가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지구 환경 변화에 관한 연구가 이뤄지기도 한다. 초고층 대기는 물론 선명한 우주 관찰이 가능한 남극은 지구 너머의 세계로 향하는 창과도 같다. 북극 역시 인류 문명의 비밀을 간직한 저장고다.
극지를 통해 지구의 과거와 현재를 살피고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각국의 극지 연구소에서 수행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남극 기지는 세계 각국이 남극에 지은 연구소나 과학 시설을 일컫는데, 특정 국가가 남극 기지를 갖기 위해서는 먼저 ‘남극 조약’에 가입해야 한다. 남극 기지는 주로 하계 기간에 즉, 높아진 기온으로 남극 대륙 해안과 섬 등의 암석이 노출된 시기에 만들어진다. 하계에 4,000여 명, 동계에 1,000여 명 정도가 남극에 체류하며 주로 빙하, 지질학, 지구 물리학, 기상 등에 관한 연구를 수행한다. 우리나라는 남극과 북극에 각각 기지를 가지고 있다.
북극에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의 호를 딴 ‘다산(茶山)과학기지’가 있다. 2002년 4월 29일에 설립했으며, 북극의 노르웨이령 스발바르 제도 스피츠베르겐섬의 뉘올레순에 위치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북극에 기지를 설치한 세계 12번째 국가이며, 세계에서 8번째로 남극과 북극에 모두 기지를 보유한 국가다. 다산과학기지에는 연구를 수행할 때마다 최대 12명 정도의 연구원이 일정 기간 체류한다.
남극에는 1988년 2월 17일에 설립된 ‘세종과학기지’가 남아 있다. 사우스셰틀랜드 제도의 킹조지섬 남서쪽 해안의 바톤반도에 위치한다. 기지가 위치한 곳은 남극에서도 비교적 날씨가 온화해 여름에는 산란과 번식을 위해 많은 동물이 모여들어 생물학자의 관심이 집중되는 곳이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KIOST) 부설 극지 연구소에서 운영하며, 16개의 건물과 부두, 저유 탱크 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여름에는 극지 연구소를 비롯해 다른 연구 기관에서 초청된 사람까지 포함해 최대 90명까지 수용이 가능하다. 겨울에는 엔지니어와 과학자로 이루어진 17명이 월동대로 활동한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남극의 하와이’로 불릴 정도로 기지 주변의 기후가 따뜻해지고 있어 큰 우려를 낳고 있다. 오늘날 지구에서 벌어지는 이상 기후 현상의 원인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듯하다.
인류는 극지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많은 생명을 잃는 등 큰 대가를 치렀다. 북극 탐사 과정에서 희생당한 수만 해도 공식적으로 500여 명에 이른다. 이들의 희생 덕분에 인류는 극지를 통해 지구와 공생하는 방법을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극지는 여전히 수많은 비밀과 해답을 간직하고 있는 신비의 공간이다. 지구의 바로미터이자 천연 실험실인 극지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해양 고고학
해양 고고학의 연구 분야와 가치: 해양 고고학은 인류의 해양 활동이 남긴 흔적, 그중에서도 특히 유물에 관한 과학적인 연구를 뜻한다. 해양 고고학은 크게 세 가지 연구 분야로 나뉜다. 첫 번째는 선박 침몰에 관한 연구다. 주로 선박의 침몰 과정에 관해 연구하며, 선박 해체를 통해 침몰 과정, 인양 과정, 쉽게 부식되는 물질의 분해 과정 및 침몰당한 배의 잔해 물질의 특성에 관한 연구ㆍ분석 등을 진행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배의 침몰 현상이 갖는 보편적인 법칙이나 특징을 확인한다.
다음은 침몰 전 배에 관한 연구다. 배를 구성하는 재료와 선체 구조에 관한 연구는, 배가 인류의 오랜 교통수단이었던 만큼 매우 중요하다. 해저에 남은 선체, 남아 있는 선박의 각종 장비, 선체의 재료를 통해 선박 건조 기술을 파악한다. 당시 사회의 기술 수준을 반영하는 이러한 선박 연구를 통해 그 시대의 기술과 조직 능력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연구를 통해 옛 선박의 설계 자료나 도안, 건조 방식 등을 도출해 옛 선박 형태를 복원하거나 오늘날 건조 방식 등에 활용하기도 한다.
다음은 해양 문화에 관한 연구인데, 이는 침몰 선박에 관한 실증적 연구를 통해 당대의 역사를 파악하는 것이다. 앞에 언급한 두 연구가 선행되어 선박의 건조 및 침몰 연대와 과정 등을 밝히고 난 뒤, 선박이 운항되던 시대와 결부 지어 당대 해양 문화에 대한 새로운 분석을 내놓는 것이다. 예컨대 침몰 선박에 적재된 화물이 무엇인지에 따라 선박의 용도가 군사용인지 상업용인지 구분한다.
만약 군사용이라면 당대 벌어진 해전(海戰)에 관한 정보와 군사의 규모 등을 알 수 있다. 만약 상업용이라면 국가의 경제 상황이나 무역량, 물품 등을 파악할 수 있는데, 유물의 발굴 정도에 따라 해상 경제와 해상 무역사에서 획기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다. 또한 침몰선과 잔재 유물을 통해 당대 선상 사회의 문화적 특징을 알 수 있다. 예컨대 타이타닉호의 특정 구역에서 발견된 사람의 옷가지, 장신구, 기타 물품 등을 통해 배 안의 승객이 어떻게 구분되었는지, 계급에 따른 복식은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다.
해양 민속
해양 민속과 해양 사회: 바다와 관련된 각 지방의 풍속과 생활상은 ‘해양 민속’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해양 민속은 인류가 해양을 경외의 대상으로, 또는 친숙한 생활 환경으로 만들어 온 과정이며, 기록과 구전, 전수와 교류를 통해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인류 해양 문화의 핵심이다. 해양 민속은 크게 물질생활, 제도 생활, 정신생활의 세 가지 층위로 나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