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마이너리티 힘
허정백 지음 | 전망
부산의 마이너리티 힘
허정백 지음
도서출판 전망 / 2022년 10월 / 236쪽 / 20,000원
부산진은 어디일까?증산의 옛 이름 부산(釜山), 그 가까이 있는 포구가 부산포였다. 이 부산포 언저리에 조선 시대 군부대가 만들어졌는데, 그것이 부산진(釜山鎭)이었다. 지금의 부산이란 말은 부산진이 있던 곳에서 출발한 셈이다. 그러면 부산진(釜山鎭)은 어디에 있었을까? 부산진역, 부산진시장, 부산진초등학교, 부산진구청 등 여러 지명이 부산진을 나타내고 있지만, 이 지명들의 위치는 제각각 떨어져 있다. 왜 그럴까?
부산진구(釜山鎭區)에 부산진(釜山鎭)이 없다!‘부산진구에 부산진이 없다!’는 말의 뜻을 아는가? ‘부산광역시 부산진구’라는 행정 구역 안에는 ‘부산진(釜山鎭)’이 없다는 뜻이다. 부산진이라는 말은 조선 시대에 있었던 해안 군사 진영을 의미하는데, 그 진영이 있었던 위치가 지금의 부산진구 지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부산진은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부산진은 지금의 동구 좌천동과 범일동에 해당하는 해안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시의 발달과 함께 해안 매립이 이뤄지면서 해안선이 많이 달라진 지금은 그 정확한 위치마저도 쉽게 판단할 수 없게 되었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의 부산진은 해안선을 조금도 끼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면 어째서 부산진이 있던 곳이 동구가 되고 부산진구라는 지명은 다른 지역에 사용되었을까?
이는 지명을 사용할 때 행정 편의적으로 방위를 우선하여 사용했기 때문이다. 부산이라는 도시가 커져 나오면서 구(區) 제도를 처음 시행할 때, 중구, 서구, 영도구, 동구, 부산진구, 동래구라는 6개의 구가 만들어진다. 이때 동구의 범위는 지금의 초량 지역과 함께 부산진 지역을 포함하게 된다. 그런데 초량과 부산진을 아우르는 지역에 어울리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통상적으로 해오던 방위 지명, 즉 동구를 사용해 버린 것이다. 부산진이라는 지명과 지역성이 엄연히 있었지만 아쉽게도 살리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부산진구라는 이름은 다른 가까운 지역에서 사용하게 된다. ‘부산진(釜山鎭)이 없는 곳에 부산진구’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된 것이다.
고지도 속의 부산진부산진을 표현한 고지도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부산진순절도’인데, 이것은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 전투를 그린 지도다. ‘부산진순절도’에 표현된 부산진(釜山鎭)은 왜적을 맞아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모습이다. 성 위에는 검은 갑옷을 입은 정발 장군을 비롯한 부산진 주민들이 적에 맞서고 있다. 또 일본군들이 성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고 성 앞바다에는 엄청난 수의 일본군 배가 가득 채워져 있다.
이때의 성이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부산진성이다. 성을 자세히 보면 성벽 높이가 상당하고 성벽 위에 성가퀴가 잘 만들어져 있다. 남문, 서문, 북문 세 개의 문이 또렷이 보이고, 성안에는 여러 채의 관아 건물도 있다. 성의 뒤쪽으로 산이 있고 이 산의 경사면을 따라 성이 만들어져 있다. 성과 성문 가까이 바다가 접하고 있다. 이러한 산의 형태와 성의 배치 그리고 해안가의 모습으로 보아 이 산이 바로 부산(釜山), 그러니까 지금의 지하철 1호선 좌천역 가까이 있는 증산일 것으로 쉽게 추측이 간다.
그런데 그림의 아래쪽에 또 하나의 성이 보인다. 이것은 무엇일까? 한쪽에서는 급박하게 전투가 이뤄지고 있는데 여기는 텅 빈 모습이다. 이것도 부산진성일까? 그러면 부산진성이 2개였단 말인가? 자료상으로는 조선 전기에 부산진성이 2개였다는 기록은 없는데, 그러면 뭘까? 위치상으로는 지금의 자성대 부근일 것 같은데,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가 안 된다. 다른 자료를 바탕으로 부산진성에 대해 더 정리해 보자. 조선 전기의 부산진성은 임진왜란 때 갈가리 찢겨 해체되어 버린다. 전쟁으로 인한 상처도 컸겠지만 일본군이 점령한 후 그들을 위한 성을 쌓으면서 의도적으로 성돌을 모두 빼 갔기 때문이다. 이때 쌓은 성이 바로 뒷산 증산 꼭대기를 중심으로 쌓은 증산왜성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선 후기에 부산진(釜山鎭)이 다시 세워진다. 하지만 부산진성은 완전히 해체되어 버렸기 때문에 원래 있던 그곳에서 진(鎭)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된다. 대신 지금의 자성대 부근에 부산진이 들어선다. 자성대와 부근 평지를 포함하는 지역에 일본군이 남기고 간 또 다른 성, 자성대왜성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왜성의 경우 산을 끼고 옹벽을 쌓듯 만들어지기 때문에 성내 여유 공간이 부족하다. 우리식 성과 같이 성내 관아 시설을 두거나 주민이 거주하진 않는다. 따라서 왜성을 우리식 성으로 활용하기는 어려운 점이 많다. 하지만 자성대왜성은 자성대 언덕을 둘러싼 내성과 함께 자성대 외곽의 평지를 포함하는 외성이 있어 외성을 중심으로 우리식 진영의 역할을 수행하기 알맞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를 일부 보수하여 정식 부산진성으로 삼은 것이다.
자성대 부근의 부산진성, 그렇다면 ‘부산진순절도’ 아래쪽에 있는 또 다른 성의 정체는 조선 후기 부산진성이 아닐까? 임진왜란 때 있었던 성이 아니라 그림을 그릴 당시에 있었던 부산진성 말이다. 그러니까 전쟁 중 부산진성과 그림 그릴 당시의 부산진성은 다르다는 것을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고지도에서는 시대별 상황이 다른 내용을 같이 표현하거나 그리는 목적에 따라 여러 시대의 내용을 한꺼번에 반영한 경우도 허다하다. ‘임진전란도’에서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시대를 달리하는 두 개의 부산진성을 똑같이 그려 놓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임진왜란 당시 상황과 조선 후기 부산진성의 모습이 같이 표현된 ‘부산진순절도’가 좀 더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자성대에 뒤엉킨 부산진 흔적자성대는 부산 사람 모두에게 익숙한 지명이다. 주요 교통로가 통과하는 곳이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지나는 곳이다. 하지만 자성대 위를 올라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부산진의 역사를 담고 있는 자성대에는 복원된 부산진성과 성문을 비롯하여 왜성, 진남대, 최영장군비각, 조선통신사기념관, 영가대 등 주요 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자그마한 언덕 자성대에 왜 이렇게 유적이 많은 것일까? 한 번 올라가 자성대에 얽힌 부산진 이야기를 알아가 보자.
부산진의 상징, 영가대(永嘉臺)영가대. 부산진을 이해하려면 빼놓을 수 없는 구조물이다. 조선 후기, 부산진성 옆에 있던 누대가 있는 아름다운 언덕으로 부산진성과 함께 잘 어울렸던 한 쌍의 구조물이었다. 어쩌면 부산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영가대 모습은 조선 후기의 그림인 ‘사로승구도’의 ‘부산’에서 잘 볼 수 있다. 그림을 보면 뒤쪽으로 제일 크게 보이는 산이 자성대이고, 자성대 앞으로 부산진성과 성안의 관아들이 보인다. 그리고 부산진성 앞에 언덕이 있고 언덕 위에 누대가 얹혀 있는데 이것이 영가대다.
영가대는 부산진에 선창을 새로 만들면서 파낸 흙이 언덕을 이루자 그 위에 누대를 세우면서 완성되었다. 부산진성의 성벽 일부가 이곳과 이어져 있어 부산진성에 딸린 누대와 언덕의 모습은 바다 등 주위 환경과 어우러져 너무나 절묘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래서 당시 고지도나 고문서는 부산진성이 있는 곳에 항상 영가대를 같이 표현하였으며, 많은 문인들도 이곳의 아름다움을 시로 읊을 정도로 귀하게 다루었다.
조선 후기 조선 통신사들은 이곳 영가대를 일본을 오고 갈 때 출발하고 귀환하는 상징적인 장소로 삼았다. 이들 통신사 무리의 안녕을 위해 관에서 드리는 해신제도 이곳에서 이뤄졌다. 누대 옆에는 임진왜란 부산진성 전투의 영웅 ‘정발장군전망비’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영가대가 경부선 철도가 놓이면서 부산진 마을로부터 잘려 나간다. 이어 전차가 놓이면서 누대와 함께 영가대의 대부분이 사라져 부산이 근대화되는 과정에서 완전히 희생당해 버린 것이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영가대 터는 남아 있다. 누대도 없어지고 언덕도 사라졌는데 그 터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어찌 된 일일까? 자성대의 부산진 지역은 이 사실을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과선교에서 동쪽을 향해 계단을 내려오는 것은 부산진성 서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내려온 길에 있는 남문시장에서 얼마 가지 않아 첫 교차로를 만나 그곳에서 남쪽으로 난 길로 접어든다. 좁다란 이 길은 한때 우암선 철도가 있던 길인데, 지금은 남문시장의 시장 길 한 부분이다. 이 길을 따라 50m 정도 걸어가는데 ‘영가대 본터’라는 큰 안내판이 머리 위로 보인다. 안내판의 화살표 방향을 따라 돌아서 들어가니 철도 담장에 ‘영가대 본터’라는 이름이 쓰여 있고 잘 가꿔진 작은 공간이 나온다.
이곳 영가대 본터에 부산진 전체를 보여 주는 모형도를 만들면 어떨까? 영가대 본터의 부산진 모형도. 상상해 보니 참 잘 어울리는 구성이겠다. 분명 영가대가 어우러진 모습을 표현한다는 점도 의미가 있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부산진의 상징이었던 곳에 부산진의 원래 모습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 있겠다.
지금은 철도와 도로에 의해 쪼개지고 갈라진 부산진, 어디가 정확한 부산진인지 애매해져 버린 부산진, 게다가 해안 매립으로 해안 지형마저 변해 버린 부산진, 이런 현재의 모습과 비교되는 원래 부산진을 보여 주는 모형도라면 부산진을 이해하는 데 직접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어쩌면 잃어버린 ‘부산진 지역’이라는 지역성의 원형을 이야기해 주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겠다. 그러면 ‘부산진이 어디지?’ 하는 말에 답을 해 줄 수 있는 장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자성대와 부산진성영가대 본터를 빠져나와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과선교에서 내려온 길을 만나 동쪽으로 꺾어 걷는다. 남문시장 길이다. 이 길은 옛날로 치면 부산진성 서문에서 동문으로 이어지는 성안의 관아 거리와 같은 중심부다. 지금도 그 길만큼은 그대로 남아 있다. 이곳의 이름도 여전히 남문시장이다. 이 길을 따라 남문시장이 끝나는 지점에 다다르면 큰길(범일로)을 만난다. 여기서 끊어진 듯 보이지만, 큰길을 가로질러 보면 건너편 길이 보이고, 눈짐작으로도 길이 곧장 연결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산진의 중심 거리는 이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남문시장을 지나 건널목을 건너 건너편 길 사이로 들어서니 도심 속에 커다란 숲이 보인다. 자성대다.
자성대. 이곳은 서면과 동래 지역 사람들과 수영과 남구 지역 사람들이 도심이었던 남포동이나 광복동으로 가기 위한 길목이다. 자성대를 중심으로, 범일로, 자성로, 진시장길 등 굵직한 길이 통과하고 있고 버스나 자동차가 그 옆을 수없이 지나다니고 있다. 그만큼 부산의 교통 요지이다. 따라서 나이 지긋한 세대들은 버스를 타고 부산 도심을 오가면서 예외 없이 자성대 옆을 통과해 보았으니 자성대를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지하철이 생겨나고부터 자성대는 범일역에서 좌천역 사이의 통과 구간이 되었고 더구나 지하로 지나다니다 보니 통과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곳으로 되어 있다. 그래도 워낙 많이 불리는 지명이었으므로 한 번쯤 들어 본 장소이다. 그래서 부산에서 제법 살아왔다면 자성대를 모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곳 자성대를 직접 올라 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조선의 진영으로서 대표적인 곳, 조선의 역사와 흥망을 오롯이 안고 있었던 부산진의 대표적인 곳 자성대. 그 속으로 들어간다. 지금은 도심 속의 작은 공원이 되어 있다. 가볍게 산책한다는 마음을 안고 자성대로 들어서는 순간, 우뚝한 성과 성문이 맞이한다. 성문의 정면 위에는 금루관(金壘關)이라는 이름의 현판이 달려 있다. 이는 부산진성의 서문임을 의미한다.
‘그래, 이곳에 부산진성을 복원해 두었구나!’ 그렇다면 이것도 실제 부산진성의 위치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위치와 상관없이 상징적으로 복원해 놓은 것이다. 원래 부산진성터는 이미 도시화 되어 시가지 속에 포함되어 버렸고 위치와 흔적을 되찾기 어렵다. 안내판을 보니 1975년에 복원했다고 한다.
지난날 부산진을 떠올리며 한참을 쳐다보고 서 있다. 부산진의 가장 중요한 시설물 부산진성이다. 이것을 보면 부산진(釜山鎭)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왠지 답답함만 느껴진다. 옛 부산진의 모습을 연상할 수가 없다. 당시의 생활 모습을 유추하거나 대입시켜 볼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복원된 성과 성문 뒤로 자성대라는 작은 산이 가로막고 있고, 산에 둘러 막혀 있는 성과 성문의 모습은 지난날 우리의 성과 성문이 가지고 있었던 모습이 아니다.
마을이 있고, 행정 치소가 있고, 성을 오가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상상을 전혀 할 수가 없다. 그나마 이 정도로서 지난날의 부산진이라도 기억하자는 뜻이라면 충분한 의미가 있겠지만 아쉽기만 하다. 원래의 성터를 유지하지 못한 지난날 우리 역사의 아픔이 그대로 배여 있는 듯하다. 부산진이 바로 그런 곳임을 또 한 번 또렷이 확인한다.
부산진 사람들의 의로운 삶과 죽음정공단-정공단은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을 지키다 장렬히 전사한 충장공(忠壯公) 정발과 그를 따라 함께 순절한 군민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만든 제단임-이 있는 부산진 지역은 정공단을 중심으로 반경 100m 이내에 굵직한 의미를 가진 유적들이 집중적으로 분포해 있다. 정공단, 일신기독병원, 부산진교회, 일신여학교 등이다. 의미 있는 유적이 이렇게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곳은 부산뿐 아니라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모두 부산진 사람들이 뒤엉켜 살아왔던 흔적들이다. 이곳에서 특별히 의롭게 살아온 부산진 사람들을 만난다. 거리거리를 누비며 그들의 숨결을 느껴 보자.
임진왜란 부산진성 전투가 있었던 곳은 지금의 어디일까?정공단 지역 부산진을 둘러보자. 지하철 1호선 좌천역의 7번 출구를 나선다. 넓게 뚫린 도로와 인도가 있고 일신기독병원이라는 간판과 함께 병원 주차장이 철망을 사이에 두고 맞이한다. 주위를 둘러보니 가구점이 많이 늘어서 있고 좌천 가구 거리라는 간판도 보인다. 이곳이 정공단에서 가장 가까운 중앙대로가 맞닿은 부분이다. 이 부근이 부산진성 전투가 있었던 부산진성 남문 자리일 것이다. 그렇다면 부산진성은 이곳에서 뒷산 증산 쪽으로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성의 모습은커녕 부산진 전투와 관련한 아무런 흔적도 없다. 도로와 건물로만 뒤덮여 있다.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이후 420여 년이 지나는 동안 내버려져 있었고 끝내 없어져 버렸다. 그러니 이곳에 서서 부산진성 전투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상상하는 일이 오히려 우습게 여겨진다.
이곳이 그 중요한 부산진성 전투의 남문터 부근인 것이 사실이라면, 최소한 ‘부산진성 전투가 일어난 남문 앞’이라는 사실을 밝혀 두어야 하지 않을까? 정발 장군과 부산진 주민들이 목숨을 내어놓고 싸우던 자리라면, ‘임진왜란 부산진성 전투가 있었던 곳’이라는 안내판이라도 만들어 놓아야 하지 않을까? 이곳을 오가는 부산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전투, 임진왜란 하면 빼놓지 않고 이야기하는 전투, 그 전투가 바로 이곳에서 있었다고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아무것도 없다. 참으로 아쉽다.
인류애를 유감없이 보여 준 매견시정공단을 내려와 쌓아 놓은 축대를 보며 좌우로 왔다 갔다 하는데 정공단 옆 골목에 새까만 비석이 하나 보인다. 정공단과 일신기독병원 사이 골목이라고 해야겠는데, 건물 사이에 있는지라 건물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고 눈에 잘 띄지도 않는 모습이다. 주변을 살펴보니 뒤로 돌아 들어가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 옆에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비석의 글과 안내판을 하나하나 읽으며 그 내용을 훑어본다.
비석에는 한자로 ‘매견시 기념비(梅見施 紀念碑)’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부산 나병 관리자’라는 작은 글도 딸려 있다. 그러니까 이 비석은 매견시(Mackenzie)라는 이름을 가진 분을 기리는 비석이다. 이분이 부산의 나병 환자를 관리해 주었다는 뜻이다. 비석 옆면에 적힌 연도를 보니 일제 강점기이다. 좀 독특하다 싶어 안내판을 여러 번 차근차근 읽어 본다. 그 시절 나병이라면 말로 표현하기 힘든 병이었는데, 매견시라는 분이 어떻게 부산, 경남 지역의 나병 환자들을 관리했었던가를 기록해 두었다. 글 속에서 목사, 선교사, 의사 그리고 한센병, 상애원, 상애교회 등의 단어를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