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의 세계사
차홍규 지음 | 아이템하우스
조각의 세계사
차홍규 지음
아이템하우스 / 2022년 12월 / 496쪽 / 23,800원
조각의 역사
원시 시대의 비너스 조각상‘원시 시대의 비너스 조각상’들은 길이 6~16cm의 작은 조각상들이다. 재료는 맘모스 송곳니나 돌, 뿔 등을 썼으며 간혹 진흙으로 빚기도 했다. 상아와 돌에 낀 녹청으로 미뤄, 몇 세대에 걸쳐 유품으로 대물림됐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조각상들을 통해 젊은 여성의 이상적인 신체 크기가 후대에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너스 조각상들은 그동안 성적 특징이 강조돼 다산과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해독되고,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하면 여신으로까지 확대 해석되었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1908년, 헝가리-오스트리아의 고고학자 요제프 솜바시와 그의 팀원들은 오스트리아의 빌렌도르프 마을에서 4인치 반 정도 크기의 한 여인상을 발견했다. 기원전 25,000년에서 30,000년 사이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여성 인물상(빌렌도르프의 비너스로 알려짐)은 석회암으로 조각되어 원형이며 컬이 과장되게 얼굴을 덮고 있다.
미술 사학자들은 이 여인상이 아마도 다산의 이미지를 상징하고 있으며 한 손에 잡힐 수 있도록 고안된 마법의 매력을 지녔다고 일컫는다. 이 작품은 성과 예술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고대 오리엔트 문명의 조각상‘오리엔트’라는 말은 로마인이 태양이 솟아오르는 동방을 ‘오리엔스’라고 부른 데서 유래하며, 이집트와 서아시아 일대를 총칭한다. 이 지역의 중심지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의 유역인 메소포타미아와 나일강 유역인 이집트로서, 두 지역 모두 기원전 3000년 전후에 국가가 성립되고 문명이 시작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이 오리엔트 지방에서 일어난 원인은, 인류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자연적 생존 형태인 수렵과 채집 경제로부터 맨 먼저 벗어나서 농경, 목축이라는 생산 경제로 전환한 데 있다. 그 결과, 생활에 여유가 생겨 분업이 되고, 건축과 도자기 제조, 기계 등의 각종 기술이 발달함으로써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기름진 초승달 지대’가 고대 오리엔트 문명의 모태가 되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건축 조각 전통은 아시리아의 아슈르나시르팔 2세가 기원전 879년경 님루드로 수도를 옮길 때 시작되었다. 이 수도는 석고가 침전된 곳 근처에 위치했다. 이 돌은 아주 쉽게 잘렸기 때문에 큰 블록으로 채석되어 그곳에 지어진 궁전을 쉽게 조각할 수 있었다. 문명 초기부터 이미 번성했던 벽화 기술을 바탕으로 벽화에 그림을 만들어 조각했다.
수메르 쐐기판: 역사의 시작을 알렸던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인들은 인류 최초로 문자를 발명한 민족이다. 기원전 3000년경에 그림 문자를 사용하였고 이를 점토판에 기록하였다. 시간이 흐르며 여러 개의 획으로 복잡한 쐐기 모양의 문자까지 구현할 수 있었으며 문자가 발명되면서 역사가 기록되었다. 쐐기 문자판은 고대의 훈민정음이라 할 수 있고 예술적 가치 또한 뛰어난 훌륭한 문자 부조상을 나타내고 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의 조각상‘생명의 모형을 만드는 사람’이라 불리는 이집트 조각사의 사명은 조각하는 대상에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도록 충실하게 조각하는 것이었다. 조각의 종류에는 신상(神像), 왕상, 개인상, 풍속상 및 동물상 등이 있는데 묘에 안치된다든지 신전에 모셔 두었으며, 그 크기도 20m 이상의 거상에서 몇 cm의 소상에 이르렀고, 돌, 나무, 금속, 상아 등 다양한 재료가 사용되었다. 또한 부조의 수법에는 통상적으로 양각과 음각이 있다. 선(先) 왕조 시대에는 상아의 세공에도 보였지만 왕조 시대에 들어서면 묘나 신전의 벽면에 그려졌다. 도상의 표현법은 거의 회화와 같이 채색되었다. 제5왕조 대에 최고의 기술에 달하였으며, 중왕국 시대에는 그것을 답습하였으나 신왕국 시대에는 궁정 아틀리에의 제작품을 제외하고는 조잡하게 이루어졌다.
나르메르 팔레트: <나르메르 팔레트>는 이집트의 강한 햇빛으로부터 왕의 눈을 보호하기 위한 화장품을 만드는 데 쓰인 작은 석판을 일컫는다. 이집트의 매우 중요한 고고학적 발견이자 이집트 미술의 중요한 유산 중 하나이다. 팔레트에 새겨진 부조의 그림은 전쟁에서 이기고 개선하는 영웅적인 왕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왕의 서열과 특권이 표현된 상형 문자와 나르메르의 통일 업적을 기리는 기념 미술로서의 가치도 주목할 만하다.
고전기의 조각고졸기 이후 약 200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 그리스 조각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이 같은 고전 조각의 백미는 아크로폴리스에 세워진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이다. 이 신전의 주인인 아테나 여신상은 그리스 고전기의 대표적인 조각가인 페이디아스가 목조로 제작한 것으로서 외부를 금은보화로 장식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원작은 발견되지 않았다. 단지 로마 시대에 대리석으로 복제된 신상을 통해 원형을 추론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신전의 박공과 메토프(도리아 건축 양식의 프리즈에서 두 개의 트리글리프 사이에 위치한 사각형의 패널, 소간벽이라고도 한다), 프리즈 부분에 세워진 조각들은 고전 조각의 원숙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이 신상을 통해 우리는 고전기의 한 위대한 조각가의 창조적 상상력에 대해 여실히 알 수 있으며, 원본은 남아 있지 않지만, 고전 조각의 이상미가 가장 완벽하게 구현된 작품이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상: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서, 페이디아스가 만든 제우스 상을 복원한 작품이다. 페이디아스는 올림피아 성역에 아테네의 사람들이 우러러볼 만큼 멋진 <제우스 좌상>을 제작했다. 그는 이 신상을 조각하기 위해 먼저 치밀한 계산을 했다. 제우스 상은 높이 90cm, 폭 6.6m의 대리석 받침대 위에 제우스 신이 왕좌에 걸터앉아 있는 형태로 구상되었다. 그리스의 수학자 필론은 “제우스 신상 앞에서는 누구나 두려움에 떨며 무릎을 꿇는다. 제우스 신상은 너무나 성스러워서 도무지 인간의 손으로 만들었다고는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헬레니즘 시대는 기원전 320년경부터 기원전 30년경까지, 즉 알렉산드로스 대왕(재위 기원전 336년~기원전 323년)의 동정(東征)에 의하여, 그리스 문화가 동방을 향해서 광대한 범위로 확산되던 시대를 말한다. 불안정한 시대였던 그리스 말기의 헬레니즘 미술에서는 예술의 중심적 위치에 있던 아테나가 그 지위를 잃고 오리엔트 전제 군주 제도로 바뀌면서 왕이나 영웅, 투사 등의 초상 조각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내용 면에 있어서도 현실주의적인 세계관이 팽배한 가운데 인간의 관능과 감정에 호소하는 격정적인 표현이 나타남으로써 신앙과의 연관성은 점차 멀어지게 되었다.
새로운 미술의 중심은 본토를 떠나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소아시아의 페르가몬 등으로 옮겨졌다. 각종의 다양한 민족이나 문화와의 접촉과 현실 생활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그 소재를 무한정으로 넓혀, 세속적인 서민의 일상생활의 모든 모습에까지 넓혀졌다. 여기서 고전적인 감정은 격정, 흥분으로까지 높아지고, 운동은 격동, 동요에 이르렀다. 아름다운 아프로디테는 관능의 세계에 도취되어 결국 헤르마프로디토스의 상까지 만들어지게 되었다.
페르가몬의 대제단: 헬레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조각 중 가장 앞자리에 위치한 작품으로는 단연 페르가몬의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페르가몬의 대제단(제우스의 대제단)>을 꼽지 않을 수 없다. 페르가몬은 소아시아의 북서부에 위치한 미시아의 고대 도시 유적으로 에우메네스 2세(재위 기원전 197년~기원전 159년) 시대에 그리스 문화의 일대 중심지가 되어 학예나 미술이 크게 번성한 곳이었다.
안타깝게도 페르가몬 왕국이 있던 터키 베르가마에는 남아 있는 유적이 거의 없는 상태이다. 그 실상은 독일이 1864년 이 지역에서 유물을 발견하여 독일 제국의 초대 재상 비스마르크가 독일을 강대국으로 만들기 위한 일환으로 베를린에 페르가몬 대제단과 대제단을 둘러싼 프리즈를 전시할 공간을 새로 건축하고는 페르가몬의 중요한 유적들을 모두 옮겨와 영구 전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 시대의 조각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과 달리 매우 현실적인 감각을 지닌 사람들로서, 그리스 문화를 그대로 답습했으나 그것을 로마식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사실주의를 발전시켰다. 그리스의 많은 조각들은 청동으로 주조된 것이었는데 로마인들은 이것을 대리석으로 복제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처럼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차원에서 조각을 제작했다기보다 장식이나 권력, 부, 교양의 과시란 차원에서 조각을 소유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머리: 이 거대한 머리는 원래 높이가 10~12m에 달하는 거대한 조각상 일부이다. 발견된 조각상의 신체 부분만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나머지 부분은 코어, 직물로 사용되는 나무 틀 위에 치장 벽토로 만들어졌다.
로마 시대의 사르코파구스사르코파구스의 뜻은 원래 ‘육신을 먹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살벌한 단어가 사각 입체형 돌과 무거운 뚜껑으로 장식된 석관(石棺)을 지칭하는 것으로 의미가 바뀌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탄생한 사르코파구스는 로마 시대 때부터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최고급은 대리석 제품이지만 대부분은 석회암으로 만든 사르코파구스를 선호했다. 석회를 통한 화학 작용으로, 보관된 시신을 가장 빨리 분해할 수 있는 돌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현재 어느 정도 이름이 난 박물관에 가면 만날 수 있다. 석관 외관에 뛰어난 조각이 있는지와 함께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표현된 사르코파구스가 전시되어 있는지가 박물관 수준을 결정하기도 한다.
헤라클레스 12과업의 석관: 헤라클레스의 12과업을 묘사한 로마 대리석 석관으로, 2세기 터키의 안탈리아의 고대 도시 도키메온에서 불법적으로 도굴되어 제네바에서 발견되었다. 헤라클레스의 12과업은 헤라가 내린 광기로 자신의 아이들을 죽인 헤라클레스가 죗값을 치르기 위해 에우리스테우스 밑에서 노역을 하게 된 것을 말한다. 석관 4면으로는 헤라클레스가 12가지 과업을 완수하려는 고부조가 조각되어 있다.
로마의 신전로마는 신전의 나라이다. 신전을 뜻하는 영어 단어 템플(temple)은 라틴어 템플룸(templum)에서 유래하였다. 고대 로마 신전은 로마 문화의 고고학적 유물 가운데 가장 시각적이며, 로마 건축 이해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신전을 만들고 유지하는 게 고대 로마 종교의 주요한 한 부분이었다. 켈라라고 불린 주실(主室)에 해당 신전을 모시는 신의 신상(神像)이 놓여 있었으며, 종종 향을 피우거나 제주(祭酒)를 올리는 작은 제단이 함께 놓여 있었다.
아폴로 소시아누스 신전의 기둥: 아폴로에게 헌정된 신전으로, 헤롯을 예루살렘의 왕좌에 앉힌 것으로 잘 알려진 재건자 가이우스 소시아누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오늘날 볼 수 있는 세 개의 기둥은 1920년대 후반에 발굴되어 1940년에 곧게 펴졌다. 고린도와 카라라 대리석으로 높이는 14m, 바닥에서 직경이 1.47m이다. 기둥의 바닥은 밑줄이 그어진 몰딩이 번갈아 가며 로프 패턴을 지닌 토러스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기둥 위 프리즈에는 아폴로를 상징하는 월계수 가지와 화환으로 조각되어 있다.
고딕 시대의 예술과 조각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의 시대는 일반적으로 암흑시대라는 명예스럽지 못한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를 암흑시대라고 부르는 이유는 민족의 대이동과 전쟁, 봉기로 점철돼 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암흑 상태에 빠져서 그들을 인도할 만한 지혜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고대 세계의 몰락 이후 유럽의 제국들이 대략 형태를 갖추고 생겨나기 이전의 혼란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500년 동안에도, 특히 수도원과 수녀원에서는 계속해서 학문과 예술을 사랑하는 남녀들이 있었고 또 이들은 도서관과 보물실에 보관되어 있는 고대 세계의 작품들에 대해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 수도사들은 고대의 예술을 부활시키려고 여러 번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는데 그것은 그들과 예술관이 전혀 다른 북쪽의 무장 침략자들의 무수한 전쟁과 침략 때문이었다.
그러나 야만인이라 일컬어지는 북쪽 침입자들이 아름다움에 대해서 전혀 느낄 줄 모른다거나 그들 나름의 고유한 예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 중에는 정교한 금속 세공을 하는 장인이나 탁월한 목공예가들도 있었다. 그들은 용들이 몸을 꼬고 있거나 새들이 신비스럽게 얽혀 있는 것 같은 복잡한 문양을 좋아했다. 켈트족의 아일랜드와 색슨족의 잉글랜드의 수도사와 선교사들은 이러한 북방 민족 장인들의 전통을 기독교 예술에 응용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그 지방의 장인들이 사용했던 목조 건물을 모방해서 성당과 첨탑들을 다듬고 건축했다. 이러한 결과는 고딕의 위엄 있는 성당을 출현시켰고, 수많은 조상군으로 장식되어 갔다.
켈트 십자가: 켈트 십자가는 십자가와 원이 결합된 문양이다. 대부분의 경우 켈트 십자가는 복잡한 매듭이 여러 번 반복되는 양식인 켈트 매듭으로 장식된다. 기원전 아일랜드에서 초기의 형태가 처음 등장했고, 켈트 문화권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현재는 기독교 상징의 일종으로 취급받고 있지만 기독교에서 유래된 문양은 아니며 성 파트리치오가 스코틀랜드 원주민의 문양을 적절히 변형시켜 만든 것이 현대식 켈트 십자가의 시초이다. 초기 형태의 켈트 십자가는 주로 돌기둥에 조각되었으나, 8세기경부터는 독자적이고 입체적인 문양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고대에 만들어진 대부분의 켈트 십자가는 기독교와 결부된 유명 인물이나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가고일 조각상기독교 교회의 지붕 네 귀퉁이에 추악한 형태를 한 괴물의 상이 얹혀져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형상은 갖가지이지만 대개는 인간과 새를 합성해 놓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날카로운 부리와 날개가 있다. 이 조각상이 바로 가고일이다. 본래 가고일은 빗물받이의 출구에 놓였던 것으로, 빗물이 빗물받이를 따라 흘러서 가고일의 ‘목’에 모여 부리를 통해 지면에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점차 이 조각상은 분수의 출구나 건축물의 벽 등에도 놓이게 되었다.
디종 노트르담 교회의 가고일: 노트르담 대성당은 화제로 인해 그 면모를 볼 수 없게 되었지만 디종의 노트르담 교회에 있는 51개의 가고일은 한눈에 볼 수 있다. 지역 전설에 따르면 그 지역 고리대금업자는 가고일 중 마음에 들지 않은 하나를 그의 친구에게 제거하도록 했는데 고리대금업자는 그의 결혼식 날 교회 아래를 지나다 떨어지는 가고일에 의해 사망했다고 한다.
조각가 열전
도나텔로(1386~1466)도나텔로는 15세기 이탈리아 미술계에 새로운 혁신을 가져온 인물로, 그가 추구한 예술 세계는 가장 독창적이고 종합적인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는 중세의 건축 조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벽감(반원형의 건물 벽) 속에 갇혀 있던 조각을 3차원적인 조각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았다. 표현 방식에 있어서도 사실적인 관찰을 바탕으로 그리스 고전기 조각에 나타난 ‘콘트라포스토’ 자세를 다시금 재현해 생동감 있는 인체 조각을 만들어 냈다. 도나텔로의 조각은 후세의 많은 조각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그를 일컬어 ‘르네상스의 아버지’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