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금
김석균 지음 | 예미
해금
김석균 지음
예미 / 2022년 11월 / 306쪽 / 18,000원
개해의 유럽
유럽의 대양 진출
근세로 항해한 유럽: 유럽의 중세 시대는 종교, 사상, 문화적으로 ‘암흑시대’로 불린다. 교황 중심의 신권이 세속 왕권보다 우위에 군림하고 기독교에 반하는 가치나 사상은 한 치도 용납되지 않았다. ‘신의 뜻’이라는 최고의 가치 앞에 우주와 자연의 원리에 대한 과학적 관찰과 합리적 사고는 설 자리가 없었다. 중세의 긴 암흑시대가 끝나고 근대의 여명이 비쳤다. 중세 유럽을 ‘신’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이성’과 ‘인간 중심’의 사회로 돌리는 르네상스가 이탈리아 북부에서 시작되어 다른 유럽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문명사적 대전환이었다. 종교의 굴레에서 벗어나 이성과 과학적 사고에 기초한 자연과 우주, 사물에 대한 탐구는 ‘사실’의 발견을 낳았고,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자연의 탐구와 과학 기술이 발달하고 무역과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유럽인들은 부를 찾아 다른 대륙으로 눈을 돌렸다. 이들이 개척한 아시아 항로와 신대륙의 발견은 인류사의 신기원이 되었다. 이것은 새로운 무역 항로를 개척했다는 의미만이 아니었다. 세계사적으로 유럽이 중세의 어둠에서 벗어나 근세로 나아가게 한 ‘대항해 시대’의 시작이었고 서양이 근대 세계사를 주도하는 출발점이었다. 유럽인들의 해양 진출과 무역은 과학, 기술, 경제의 폭발적 성장과 팽창을 이끌었다. 이들이 전파한 기술 문명과 법, 제도, 문화, 사상, 언어, 음식은 세계로 퍼져 나가며 근대 세계의 표준이 되었다. 세계인들은 오늘날 많은 부분 대항해 시대 이래 유럽인들이 남긴 사회ㆍ경제적, 문화적 유산 속에서 살고 있다.
신대륙 발견의 세계사적 의미: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세계사적으로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문명과 문화, 생태 환경들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하나의 역사 흐름 속에 합류하게 된다. 이후 신대륙은 구대륙의 역사에 강제로 편입되어 혹독한 수탈과 식민 지배를 받게 된다. 수천 년간 지속되어 온 원주민의 전통과 문화, 종교, 언어, 공동체는 말살되고, 정복자의 종교와 언어, 문화가 강요되었다. 정복자가 휘두르는 총칼 앞에 수많은 원주민들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구대륙으로부터 유입된 전염병 앞에 면역력이 없던 원주민들은 속절없이 쓰러졌고, 인구는 한 세기 만에 10분의 1까지 줄었다. 반면 구대륙은 신대륙으로부터 들여온 고구마, 감자, 옥수수와 같은 새로운 작물 덕분에 식량부족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막대한 금과 은이 유입되면서 유럽의 경제는 확장되어 갔다. 또한 신대륙, 아프리카를 잇는 삼각 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올렸다. 다시 말하면, 유럽은 원주민의 고통과 눈물 위에 경제적 부를 쌓고 상업과 자본주의의 발전을 이루며 근대 세계의 패자로 올라설 수 있었다.
자본주의 제도의 탄생과 동인도 회사
대항해 시대가 발전시킨 자본주의 제도: 유럽 국가들의 신항로 개척, 식민지 건설과 해외 무역은 과학 기술의 발달, 지식의 확대, 상공업의 발달, 부의 축적, 음식과 생활 양식의 변화 등 사회의 모든 면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는데, 그중에서 금융, 보험, 주식, 회사, 은행 등 오늘날 세계 경제의 근간이 되는 자본주의 제도의 탄생과 발전은 그 어느 것보다 세계사에 미친 영향이 크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사유 재산을 보장하고 자유로운 상거래와 해외 무역을 허용했던 유럽의 상업 제도와 자본주의가 대항해 시대를 가능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허용하고 이윤 추구를 제일 우선시하는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선박 건조, 선단 구성과 항해에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을 자본가와 일반 투자자들로부터 조달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동방 무역 선단이 아시아에서 향신료를 싣고 유럽으로 돌아오면 많게는 60배의 이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역 선단의 항해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고 항해 중 폭풍우를 만나 조난을 당하거나 해적에게 약탈을 당할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동방 무역은 이익이 높은 만큼 위험성도 큰 투자였다. 따라서 투자의 위험성을 낮추고 더 많은 투자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제도의 고안이 절실해졌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주식회사’ 제도였다. 한 명의 투자자가 비용을 모두 부담하는 대신, 주식회사는 항해에 소요되는 비용을 여러 투자자들로부터 모았다. 소수의 투자자가 모든 비용을 부담했을 때보다 성공했을 때의 몫은 적어지지만, 실패해도 투자자 개인은 자기 자본에서 전체 비용 중 아주 작은 몫만 위험 부담을 지면 되는 방식이었다.
네덜란드 금융에서는 투자의 위험을 완화하기 위한 선물(futures) 제도가 발달했다. ‘청어를 잡기 전에 먼저 구입’하는 전략이었다. 투자자는 1년 후 잡힐 청어 가격을 미리 정했으며, 이러한 금융 상품은 실제 물건처럼 사고팔 수 있었다. 선물에 투자한 사람은 도중에 상품 가격이 급등하는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선박 사고가 나서 바다에서 화물을 잃더라도 투자 금액을 보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탄생했다. 오늘날 손해 보험의 기원이 된 ‘해상 보험’ 제도이다. 해상 보험 제도는 고대 페니키아인과 그리스인도 가지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대항해 시대를 거치면서였다. 17세기 말부터 런던이 해상 보험의 중심이 되었다. 오늘날 유명한 영국의 해상 보험 회사 로이드(Lloyd’s)는 1688년 선주나 선장, 해상 보험 인수인이 출입하는 커피점에서 유래되었다.
한편 투자자들은 자본을 출자한 후 무역 선단이 돌아와서 싣고 온 물품을 팔아 이익금을 배분받을 때까지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는데, 이 기간 동안 자신의 투자를 증명할 수 있는 유가 증서가 필요했고, 이것이 오늘날 주식의 기원이 되었다. 무역 선단을 운영하는 주식회사는 처음에는 소자본으로 시작했으나 수익 가능성이 확인되자 사업 전망을 주시하던 대자본과 왕실까지 뛰어들었다.
그리고 투자자들로부터 모은 거액의 자금을 관리하기 위해서 전문 조직이 필요했고 자연스럽게 은행 제도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금융 제도는 점차 복잡해져 갔다. 금융 제도 덕분에 개인이나 정부는 금융업자나 은행가로부터 신용 대출을 받아 투자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신용 대출 제도는 왕국이나 제국에 비해 훨씬 효율적으로 탐사 원정이나 정복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했다.
네덜란드인들은 이런 신용을 바탕으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전쟁(1568-1648)을 벌이는 동안에도 용병을 고용해 싸우게 하고 자신들은 바다로 나갔다. 용병을 고용하고 함포를 장착한 선단을 꾸리는 데 드는 막대한 비용은 이들이 쌓은 신용 덕분에 유럽 금융 제도로부터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 기술의 발달과 함께 선박이 커졌고, 대항해 시대 초기의 항해 위험 요소들이 줄어들면서 선단의 규모도 커져 갔다. 아무튼 해상 무역의 위험성은 여전히 컸지만 투자의 위험성을 관리할 금융의 제도적 장치가 점차적으로 형성되어 갔다. 금융 제도가 발전하고 대자본과 국가가 결탁하면서 전 세계 대륙에 걸친 유럽 해양 제국의 건설이 본격화되었다.
해금의 동아시아
동아시아의 반해양 정책
명의 해금령: 서양과 동양의 근세 역사와 관계를 결정짓는 키워드는 ‘해금(海禁)’이라 생각한다. 해금은 ‘하해통번지금(下海通番之禁)’, 즉 ‘바다로 나가 오랑캐와 교통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말의 약칭이다. 말 그대로 바다로 진출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다. 해금은 명ㆍ청 시대에 중국인이 해외에 나가 무역하는 것을 금지하고 외국 상선의 입출항을 제한하는 반무역 정책이자 해양 진출을 억제하는 해양 통제 정책이었다. 또한 외국에 문호를 닫고 자국민에게는 해외 진출을 금지하는 쇄국 정책이었다.
해금은 중국뿐만 아니라 중국 중심의 화이(華夷) 질서 속에 있던 조선과 일본의 근세 역사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참고로 해금은 몽골이 세운 원 제국을 무너트리고 명나라를 건국한 직후인 1371년에 처음 시행되었다. 이후 해금이 완화되어 외국으로 나가 무역을 하는 것을 허용하고 부분적으로 사무역을 허용하는 개해(開海)가 시행되기도 했으나, 해금은 명ㆍ청 시대의 지배적인 외교ㆍ무역ㆍ국방 정책이었다. 이처럼 중국은 유럽 열강들이 앞다투어 활발히 대양으로 진출하던 시기에 수천 년 동안 누려 왔던 해양 강국의 지위를 포기하고 스스로 바다에 빗장을 치며 고립을 자초했다.
해금령에 따라 송ㆍ원대에 활발했던 민간의 해외 무역은 금지되고 정부가 관장하는 공무역인 조공 무역만 허용되었다. 조공 무역은 조공ㆍ책봉 관계에 있던 번속국의 사신단이 조공을 바치기 위해 방문할 때 함께 온 상인들이 지정된 장소, 즉 입국한 항구와 베이징에서 행했던 무역을 의미한다. 명나라 건국 초 16개였던 조공국은 이후 40여 개국 이상으로 늘어났다.
주요 조공국은 일본, 고려(조선), 류큐, 안남(북부 베트남) 등이었다. 조공 사절은 정해진 항구를 통해 들어와 공물을 헌상하고 황제가 내리는 선물인 회사품을 받았다. 아무튼 해금은 바다 진출을 금하는 의미이지만, 바닷길이 거의 유일한 해외 진출 통로인 시대에 해금은 곧 자국민의 해외 출입과 이주, 외국인의 도래, 상거래, 무역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의미했다. 이런 이유로 해금은 곧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지 않는 쇄국이었다.
청의 천계령(遷界令): 명의 해금령을 이어받은 청은 더욱 강력한 해금령을 시행하였다. 청의 법전인『대청회전』에서 “나뭇조각 하나도 바다에 띄우는 것을 불허한다.”고 규정할 만큼 엄격한 해금령을 시행했다. 만주족이 세운 청은 대만을 근거지로 하여 반청 복명 운동을 펼치던 정성공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두 차례의 해금령을 내려 조그만 배라도 나가지 못하게 했다. 이와 함께 1661년에는 해금을 강화한 천계령을 실시하였다. 정성공 세력을 고립시킬 목적으로 푸젠, 광둥, 저장, 장쑤, 산둥 등 5성의 연해 주민들의 해상 교통과 어업, 무역을 금지하고 주민들을 10~30리 내륙으로 이주시켰다.
1683년 정성공 세력이 평정되면서 천계령이 폐지되고 제한적으로 무역과 어업이 허용되었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해금의 완화였지 폐지는 아니었다. 해금이 완화되면서 해외 무역을 위하여 많은 중국인들이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해금령의 완화로 해적이 들끓고 반청 세력이 다시 일어날 조짐을 보이자 해외 무역을 다시 통제하였다. 한편 해금령이 엄격하게 시행되는 시기에도 감시의 눈을 피해 밀무역이 성행하였다. 동남아시아산 향료나 염료 무역이 큰 이익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상인들은 목숨을 걸고 밀무역에 종사했다. 밀무역을 단속해야 할 관료들도 참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떠오르는 개해론(開海論): 명ㆍ청 시대에 해금령이 강력히 시행되면서 많은 문제점들이 드러났다. 정부의 감시의 눈을 피해 밀무역이 급증하였고 무역을 위해 동남아시아 등 해외로 도항하는 중국인들이 크게 늘어났는데, 해외로 나간 중국 상인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해 국가의 전폭적 지원을 받는 유럽 상인들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시간이 지나면서 해금령을 완화하고 해외 무역을 허용하자는 개해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명나라 조정도 어쩔 수 없이 1509년 광둥성의 광저우를 조공국 상인들에 개방했다. 그리고 1576년에는 해금령이 시행된 지 200여 년 만에 다시 사무역을 허용하였는데, 사무역이 허용되었다고 해서 완전한 자유 무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무역은 대동남아시아 무역항인 장저우 한 곳으로 한정되었고, 무역선의 연간 출항 횟수도 50회로 제한되었다. 아무튼 해금령의 완화는 그동안 폐쇄되었던 무역 항로와 교역 루트를 빠르게 회복시켰다.
해금과 개해가 반복되는 과정에서 오늘날의 세관에 해당하는 해관(海關)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해관의 역할은 대외 무역을 허가하고 관세를 징수하는 것이었다. 자유롭게 해외 무역을 하던 송ㆍ원대 시기에는 시박사라는 명칭의 기관이 그 업무를 담당하였는데, 관세를 징수하고 선박을 검사하는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점에서 해관과 동일한 성격의 기관이었다. 아무튼 해금을 완화한 후 청나라의 강희제는 동남해 연안의 장저우, 광저우, 닝보, 상하이 네 곳에 해관을 설치하였고, 해외로 출항하는 중국 상선은 배의 규모, 승선자 수, 금지 품목 등 여러 가지 항목에 걸쳐 규제를 받았다.
그러나 해금을 완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건륭제는 사소한 무역 분쟁과 유럽 상인들이 중국의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1757년 외국 상선의 입출항을 광저우 한 곳으로 제한했다. 한편 아편 전쟁 후 해금 체제 해체의 가장 상징적 변화는 광저우 해관의 독점적 지위가 무너지고 여러 개항장에 근대적 해관이 설치된 것이었는데, 해관은 자본주의라는 서양의 새로운 시스템이 중국에 도입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시에 대외 무역이나 관세 업무를 넘어 청의 외교의 많은 부분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해금의 세계사적 의미: 해금이 중국과 동아시아의 근세 역사에 끼친 영향과 내포하는 의미는 해상 무역을 넘어 정치, 안보, 사회, 문화, 과학 기술 등 사회의 모든 영역에 걸친 전방위적인 것이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유럽인들은 ‘해양은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는 ‘자유해’ 사상을 바탕으로 일찍이 대양 개척에 나섰다. 이들이 범선과 대포, 총기를 앞세우고 세계 해양을 누비며 무역 항로를 개척하고 식민지를 정복하면서 단절되어 있던 대륙들은 해양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고 있었다. 반면 아시아는 활발했던 해상 활동을 뒤로하고 바다에 빗장을 치며 해양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이는 다음 세기의 유럽 주도 근대 역사와 ‘식민의 바다’와 ‘굴욕의 아시아’의 근대사가 펼쳐지는 서막이었다.
중국이 다른 대륙과의 해상 무역을 금지한다는 것은 바깥세상을 향한 창을 닫고 다른 문명과 교류를 단절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것은 중국이 고대부터 육ㆍ해상의 실크로드를 통하여 다른 대륙과 교류하고 앞선 문명을 전파하던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자세를 버리고, 스스로 고립되는 것을 선택한 전환점이었다. 문화적 우월감과 자급자족의 경제적 풍요를 믿고 바깥 세계와 담을 쌓은 중국은 점차 역동성을 잃기 시작했다. 유럽이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고 대항해 시대를 열었던 사건이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점이 되고 이후 산업 혁명으로 이어졌던 사실을 고려하면 이 점은 보다 분명해진다.
한편 아메리카 신대륙을 정복하겠다는 유럽인들의 욕망은 새로운 지식을 맹렬한 속도로 찾아 나서게 했다. 새로 발견한 방대한 영토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신대륙의 지리, 기후, 식물, 동물, 언어, 문화, 역사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연구를 해야 했는데, 성경이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중심 세계관, 중세적 종교관에 의한 지리서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새로운 도전을 위해서는 새로운 지식과 과학을 찾아 나서야 했다. 게다가 개인의 창의성과 성과를 인정해 주고 보상이 주어지는 자본주의 제도는 부를 찾아 대양을 항해하고 새로운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는 강한 유인책이었다.
바다에 빗장을 친 중국과 아시아는 유럽 세력의 대양 진출이라는 세계사의 거대한 흐름에 무지했고 유교적 신분 질서와 중화주의의 울타리 속에 갇혀 있었다. 결국 중국과 아시아는 세계사의 메가트렌드에 뒤처지고 자기 주도의 근대 세계로의 전환에 실패했다. 그 결과 이름뿐인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중국과 중화 세계는 유럽 식민주의 세력에게 유린당하는 굴욕을 당하고 근대 세계사의 주도권을 대서양에 내주게 된다.
중국보다 강력한 조선의 해금령: 소중화를 자처하며 중화주의의 충실한 이행자였던 조선도 해금령을 시행했는데, 중국보다 오히려 더 강력한 해금이었다. 참고로 삼국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 한반도에서는 중국, 일본 등 주변국 상인들은 물론 멀리 아라비아에서 온 상인들과도 교역을 할 만큼 해상 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교를 지배 이념으로 하고 사대주의 노선을 취하였던 조선이 건국되면서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조선은 중국의 해금보다 한층 강력한 ‘공도 정책(空島 政策)’을 실행하였다. 공도 정책은 섬에서 사람이 살지 않고 비워 두는 것을 말한다. 왜구의 침입에 시달리던 조선 조정은 섬을 왜구와 결탁할 수 있는 불온 지대로 보고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하였다. 1403년(태종 3년)에 시작된 공도 정책은 1882년(고종 19년)에야 공식적으로 폐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