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가 재미있어지는 20가지 수학 이야기
차이톈신 지음 | 사람과나무사이
세계사가 재미있어지는 20가지 수학 이야기
차이톈신 지음
사람과나무사이 / 2021년 2월 / 303쪽 / 16,500원
수학 이야기
마르코 폴로와 아라비아 숫자의 여행
영(0)과 인도 숫자: ‘1, 2, 3, 4, 5, 6, 7, 8, 9, 0.’ 이 간결하고 보기 좋은 부호 10개와 그 조합으로 이뤄진 십진법 체계가 흔히 말하는 아라비아 숫자다. 그런데 오늘날 대다수가 사용하는 아라비아 숫자는 과연 아라비아인이 발명한 것일까? 1881년 여름, 지금의 파키스탄(당시와 고대에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인도에 속했다) 서북부에 있는 페샤와르에서 80여 킬로미터 떨어진 바크샬리의 한 소작농이 땅을 파다가 자작나무 껍질에 적힌 『바크샬리 필사본』을 발견했는데, 3~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필사본 겉면에는 서기 원년을 전후로 수 세기에 걸친 인도 수학이 기록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분수, 제곱수, 비례, 수열, 수지와 이유 계산, 급수의 합과 대수 방정식 등이 있었다. 그뿐 아니라 뺄셈 부호를 사용해 오늘날의 덧셈 부호 같은 형태를 만들기도 했는데, 이 부호는 뺌수의 오른쪽에 적었고 덧셈 부호와 곱셈, 나눗셈, 등호는 문자로 표시했다. 가장 의미 있는 것은 필사본에 완전한 십진법 숫자가 등장한 점이며 그중 속을 채운 점으로 ‘영’을 표시했다.
영을 나타내던 점은 시간이 흐르면서 현재 사용하는 ‘0’으로 변했는데, 이 형태가 나타난 가장 앞선(9세기) 유적이 인도에 있다. 876년 괄리오르 사람이 새긴 석비에 숫자 0이 선명하게 보인다. 괄리오르는 인도 북부 도시로 갠지스강 유역에서 인구가 가장 밀집된 마디아프라데시주에 속한다. 화원에 있던 그 석비에는 근처 사원에 기증한 땅의 폭과 길이, 매일 해당 사원에 공급하고자 준비한 화환이나 화관의 수를 새기고 있는데 여기에서 비록 크지는 않지만 선명하게 새긴 숫자 0 두 개를 볼 수 있다.
영을 동그라미로 표시한 것은 인도인의 대단한 발명이다. 0은 무(無)를 의미하기도 하고 자리 표기법에서 빈자리를 나타내기도 한다. 또 수의 기본 단위로써 다른 수와 함께 계산할 수도 있다. 수메르인이 발명한 설형 문자나 송원 시대 이전의 산가지 기수법은 모두 빈자리만 남겨 두었을 뿐 부호는 없었다. 60진법을 쓴 바빌로니아인과 20진법을 쓴 마야인이 0(마야인은 조개껍데기나 눈으로 표시)을 도입했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이는 빈자리만 표시한 것뿐이며 0을 독립 숫자로 간주한 것은 아니었다.
1부터 9까지 아라비아 숫자 9개의 초기 형태도 인도인이 가장 먼저 발명했지만, 정확한 시기는 고증하기 어렵다. 근대 고고학 발달로 인도에 있는 오래된 돌기둥과 동굴 벽에서 이들 숫자의 흔적을 발견했는데, 그 시기는 대략 기원전 250년에서 기원전 200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기와 이후 몇 세기 동안 자모 문자에 미지수나 숫자 부호가 없었기 때문에 아라비아 숫자가 힘을 발휘했다.
고대 인도는 고대 바빌로니아, 이집트, 중국과 마찬가지로 수학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다만 인도 수학은 그 뿌리가 종교라는 점에서 나머지 세 문명과 차이가 있다. 신비와 종교가 성행하는 인도에서는 브라만교, 자이나교, 불교, 시크교, 인도교(힌두교) 등 유명 종교가 탄생했는데, 그중 역사가 가장 오래된 브라만교는 이 종교의 유일한 경전 『베다(Vedah)』를 중심으로 발달한 종교다. 그런데 초기에 제사장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베다』는 이후 야자수잎이나 나무껍질에 기록했고, 그 전승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사라졌으나 잔존하는 부분에 사당, 제단 설계와 측량 내용이 담겨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수학 문헌 『술바수트라스』다. 출판 연대는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로 추정하는데, 이는 인도의 두 고전 서사시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보다 앞선 것이다. 『술바수트라스』에는 제단 건축법이 들어 있으며, 그 가장 흔한 형태는 직사각형, 원형, 반원형인데, 어떤 형태든 제단 면적은 특정 수치와 같아야 했기 때문에 인도인은 정사각형과 면적이 같은 원을 그리는 법을 배워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원주율이 정확해야 했다. 등변 사다리꼴 형태의 제단은 새로운 기하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결국 인도 숫자와 0 기호는 『술바수트라스』에서 파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수탉, 암탉, 병아리 그리고 토끼
당나라의 수학 교과서: 639년 아라비아인이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이집트를 침입했다. 아라비아인과 3년간 교전을 벌인 비잔티움군은 어쩔 수 없이 이집트를 떠나야 했다. 침입자들은 학술 보고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남아 있던 몇 안 되는 저서를 불태웠고 결국 그리스 문명은 막을 내렸다. 이후 이집트에 카이로가 생기면서 이집트인은 아라비아어를 쓰고 이슬람교를 신봉했다.
당시 중국은 당태종 이세민이 재위에 올라 융성기를 맞이한 시기였다. 300여 년간 중국을 통치한 당나라는 시가 분야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으나 수학 분야는 다소 부진했는데, 의미 있는 성과로 볼 수 있는 것이 당고종 이치(재위 649~683)의 명으로 편찬한 『산경십서(算經十書)』(중국 고전 수학서 10종)다. 『산경십서』의 편찬과 주해 작업을 맡은 이순풍은 특히 천문, 역법, 수학에 정통했다.
『산경십서』 중에는 작자 미상의 고전 수학 『주비산경』과 『구장산술』, 수학자 유휘의 『해도산경』, 조충지의 『철술』도 있다. 유휘, 조충지, 조충지의 아들 조긍은 함께 구의 면적 계산 공식과 원주율(소수점 아래 7자리까지 정확했다)을 생각해 냈다. 이 외에 『손자산경』, 『장구건산경』, 『집고산경』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산경십서』는 당나라 이후 각 조대(朝代)의 수학 교과서로 쓰였으며, 특히 송원 시대 수학이 고도로 발전하는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영국의 저명한 과학사가 조지프 니덤은 “그는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학 저서 주석가다.”라며 이순풍을 높이 평가했다.
수탉, 암탉, 병아리: 『손자산경』, 『장구건산경』, 『집고산경』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가치 있는 문제를 제기하고 그 문제가 대대로 전해졌다는 점이다. 『손자산경』에 나오는 물부지수(物不知數, 직역하면 어떤 물건이 있는데 그 수량을 모른다는 뜻으로,『손자산경』의 내용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3으로 나누면 2가 남고 5로 나누면 3이 남고 7로 나누면 2가 남는 수는 무엇인가.’) 문제는 ‘중국인의 나머지 정리’를 이끌어 냈고, 이는 중국과 외국의 모든 수론 교과서에 수록되었다.
한편 『집고산경』은 3차 방정식의 해를 논의한 세계 최초 수학 저서다. 그리고 『장구건산경』은 5세기에 북위 사람 장구건이 집필했는데, 여기서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문제다. 이것은 ‘백계문제(百鷄問題)’라고 불리는데, 민간에는 현령이 이 문제로 신동을 테스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탉은 한 마리에 5전, 암탉은 한 마리에 3전, 병아리는 세 마리에 1전이다. 돈 100전으로 닭 100마리(돈은 남김없이 다 써야 한다)를 산다면 수탉, 암탉, 병아리를 각각 몇 마리씩 사야 할까?’ 구매한 수탉, 암탉, 병아리의 수를 각각 x, y, z라고 가정하면 이 문제는 아래 연립 방정식의 해를 구하는 것과 같다. ‘x + y + z = 100, 5x + 3y + z/3 = 100’
그런데 장구건이 살던 시대는 중국이 알파벳을 도입하기 전이고 미지수 개념도 없어서 이 연립 방정식을 글로 설명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런데 장구건은 (4, 18, 78), (8, 11, 81), (12, 4, 84)라는 정답 3개를 정확히 구했다. 우선 그는 소거법으로 3원 1차 방정식 2개를 2원 1차 방정식 1개로 만들었다. ‘7x + 4y = 100’ 그리고 x에 4의 배수를 차례로 넣어 앞서 말한 정답 3개를 얻은 것이다. 이 문제는 중국 민간에서 널리 퍼졌는데, 수학 보급의 본보기라고 할 만하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뒤 13세기 이탈리아인 피보나치와 15세기 아라비아인 알카시가 이와 유사한 문제를 제기하고 연구했다. 이후 이 방정식은 이것을 최초로 수집, 연구, 정리한 그리스 수학자 디오판토스의 이름을 따서 ‘디오판토스 방정식’이라 불렸다.
피보나치의 토끼: 상대적으로 개방된 정치와 인문학 분위기에서 중세기 유럽의 가장 걸출한 수학자 피보나치가 출현했다. 1170년 이탈리아 피사에서 태어난 피보나치는 청년 시절 정부 관원이던 아버지를 따라 북아프리카 알제리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아라비아인의 수학을 접하고 인도-아라비아 숫자를 이용해 계산하는 법을 배웠다. 이후 피보나치는 이집트, 시리아, 비잔티움, 시칠리아 등지를 다니며 동양인의 계산법을 배웠고, 피사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주판서』를 출간했다.
『주판서』는 1장에 수의 기본 산법과 다른 진법 간의 전환 방법을 소개했는데, 그는 분수를 만드는 가로선을 최초로 사용했으며, 이 기호는 지금도 쓰이고 있다. 2장은 상업 응용 문제를 다뤘는데, 그중 ‘30전으로 새 30마리 사기’는 ‘100전으로 닭 100마리 사기’와 판에 박은 듯 똑같다. 『주판서』 3장은 잡다한 문제와 이상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특히 다음과 같은 ‘토끼 문제’가 눈길을 끈다.
“큰 토끼 한 쌍은 매달 작은 토끼 한 쌍을 낳는다. 작은 토끼 한 쌍은 2개월이면 번식 가능한 큰 토끼로 성장한다. 작은 토끼 한 쌍으로 시작할 때 1년 후 토끼는 몇 쌍이 될까?” 토끼 문제를 이용하면 ‘피보나치수열’을 쉽게 얻을 수 있다. ‘1, 1, 2, 3, 5, 8, 13, 21, 34 ……’ 이 수열의 점화식(수학자가 발견한 첫 번째 점화식일 가능성이 크다)은 다음과 같다. ‘F1=F2=1, Fn=Fn-1 + Fn-2(n≥3)’ 재미있는 점은 이 정수 수열의 통항 공식이 무리수를 포함한 식이고, 전항과 후항 비율의 극한이 피타고라스학파가 정의한 황금 분할률이라는 것이다. 한편 다양한 수학 문제에 등장하는 피보나치수열은 꿀벌 번식, 데이지의 꽃잎 수, 미적ㆍ예술적 감각 분야와 관련이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준다. 댄 브라운의 베스트셀러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도 피보나치수열이 금고의 비밀번호를 만드는 데 쓰였다.
한편 1963년 토끼 문제를 열정적으로 연구한 수학자들은 피보나치 협회를 설립하고, 미국에서 『피보나치 계간지』를 펴내 피보나치수열과 관련된 수학 논문을 주로 게재했다. 나아가 이들은 세계 각지에서 피보나치수열과 그 응용에 관한 국제 회의를 2년에 한 번씩 개최하고 있다.
수학자 이야기
주인 집안 출신 조충지(429~500)
완원이 편찬한 『주인전』: 1795년은 중국 수학과 수학사에 상당히 의미 있는 해다. 일대 문호로 칭송받던 완원(阮元, 1764~1849)이 처음 항저우에서 저장 학정(교육청장에 해당)으로 부임해 『주인전(疇人傳)』 편찬을 주재했기 때문이다. ‘주인’이란 고대 중국에서 주로 천문과 역산을 관장하던 사람으로 그 일을 가업으로 전수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위진 남북조 시대 조충지와 그의 아들 조긍을 들 수 있다. 『주인전』 초판은 모두 46권이며 전기 기록 대상자는 316명이다. 상고, 영방, 진자, 손자, 사마천, 유휘, 갈홍, 조충지, 조긍, 이순풍, 진구소 등 중국 과학자 275명과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 프톨레마이오스, 히파르코스, 코페르니쿠스, 튀코 브라헤, 마테오 리치 등 외국 과학자 41명이 수록되어 있다. 『주인전』이 출판되자 중국에 천문과 수학 분야를 체계적으로 기록하는 과학 기술 인재와 발명 서적이 잇따라 등장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과학사가 조지프 니덤은 『중국 과학 기술사』에서 『주인전』을 “전대미문의 중국 과학사 연구”라고 일컬으며 완원을 ‘정확한 과학사가’라고 칭송했다.
조충지와 원주율: 조충지의 가문은 관리 집안으로 역대 조상이 대부분 천문 역법을 깊이 연구했는데, 비록 조충지는 관직이 낮았지만 천문학, 수학, 나아가 기계 제조 분야에서까지 뛰어난 성과를 거뒀다. 수학 분야에서 조충지는 자신보다 200여 년 앞선 위진 시대 유휘의 유산을 계승했는데, 유휘는 원주율을 계산하는 할원술과 구의 면적을 계산하는 방법을 발명한 인물이다. 원의 면적 공식 S=πr2으로 알 수 있듯, 원의 면적(S)을 구해 반지름의 제곱(r2)으로 나누면 그 값이 곧 원주율(π)인데, 원의 면적을 구하는 방법은 유휘가 『구장산술』 주해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원을 잘게 쪼개 붙이면 남는 부분이 점점 줄어든다. 더 이상 자를 수 없을 때까지 계속 쪼개면 원과 딱 맞아 남는 부분이 없어진다.’
유휘는 원에 내접한 정육각형부터 면적을 계산하기 시작해 차례로 변의 개수를 2배로 늘려 내접한 정십이각형, 정이십사각형, 정사십팔각형 등의 면적을 구했다. 변의 개수를 2배로 늘릴 때마다 내접한 정다각형 면적은 점차 원의 면적에 가까워지고 원의 면적과 원주율의 정확도가 높아졌다. 참고로 고대에는 바빌로니아를 포함한 모든 민족이 3을 원주율로 삼았다. 이 분야에서는 고대 이집트인이 계산한 값이 비교적 정확했는데, 그들이 얻은 원주율은 3.1이었다. 한편 유휘는 할원술로 3.14라는 원주율 값을 얻었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가 계산한 원주율과 일치하지만, 아르키메데스는 유휘보다 600년 앞선 시대를 살았다. 조충지가 계산한 원주율 π의 범위는 다음과 같다. ‘3.1415926 < π < 3.1415927’ 즉, 소수점 아래 7자리까지 정확하다.
그 밖에도 그는 밀률(密率)이라 불리는 355/113의 분수 형식 원주율도 얻었다. 이는 소수점 아래 6자리까지 정확한 것에 불과하지만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조충지의 원주율은 962년 후 아라비아 수학자 알 카시가 개선했는데, 그는 코사인 함수의 반각 공식을 이용해 계산을 간소화하며 원주율을 소수점 17자리까지 계산했다. 한편 발렌티누스 오토가 밀률을 구한 건 조충지보다 1,000여 년 늦은 시점이다.
지남차와 천리선: 수학과 천문학 분야의 업적 외에 조충지는 지남차(指南車)와 천리선(千里船)을 비롯해 정교한 기계를 많이 만들었다. 특정 방향, 즉 남쪽을 가리키는 수레를 뜻하는 지남차는 상당히 유용했을 테지만, 조충지가 만든 지남차의 구조는 전해지지 않는다. 한편 조긍(456~536)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수학에 커다란 흥미를 느꼈으며, 조충지의 『대명력』은 조긍이 세 번째 제안한 내용을 바탕으로 완성한 것이다. 그리고 당나라의 수학 교과서로 쓰이고 조선과 일본에도 전해진 조충지의 명저 『철술』은 학자들의 고증으로 일부 항목은 조긍의 작품임이 밝혀졌다. 특히 구의 면적 공식은 조긍의 가장 대표적인 발견이다. 아무튼 조충지 부자는 수학 분야에서 두 가지 주요 성취를 이뤘으나, 아르키메데스가 먼저 구의 면적 공식을 구한 까닭에 원주율 분야 성과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무한급수 표시법과 컴퓨터가 등장한 이후 원주율 경쟁은 의미를 상실했다.
황제, 여제 그리고 수학의 대가
유클리드와 아르키메데스: 일반적으로 수학자는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고 예술가처럼 말썽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보들레르는 말년에 이 점을 깨달은 듯하다. 보들레르는 다음과 같은 17세기 수학자 파스칼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재난이 발생하는 원인은 대부분 우리가 얌전히 집에 들어앉아 있지 않아서다.” 아무튼 수학자의 이런 점 때문에 많은 정치인이 수학자와 교류하길 원하고 심지어 수학 문제에 매료되기도 한다. 한편 유클리드는 고대 그리스 기하학을 집대성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가 태어난 곳과 살았던 정확한 연대는 지금까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