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모지현 지음 | 더좋은책
사건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모지현 지음
더좋은책 / 2022년 7월 / 472쪽 / 20,000원
1장 | 절망 속에서 희망으로 탄생하다 1919~1930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 대한민국, 국체와 국호의 탄생3ㆍ1 운동은 민족 독립운동의 전환점이 되었다. 3ㆍ1 운동으로 민족의 독립 염원을 느낀 많은 애국지사들이 독립운동에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고 이에 임시 정부 수립을 추진하면서 독립운동에 불을 지폈다.
최초의 정부 형태를 띤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 국민 의회와 국내의 한성 정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다양한 움직임으로 수립된 7개 임시 정부 중 대표 격이다. 프랑스 조계 상하이 보창로에 임시 독립 사무소를 설치, 1919년 4월 11일 ‘임시 의정원’으로 출발한 임정은 각 도 대의원 30명이 만든 헌법 격인 ‘대한민국 임시 헌장’을 통해 행정, 입법, 사법 3권 분립 형태의 민주 공화 정부를 선포한다. 헌장(헌법)과 국호, 연호가 선포되면서 정식으로 임정이 수립된 후에 한성 정부 수립 소식을 들은 지도자들은 세 임정들의 통합을 추진했다. 그 결과 근거지는 상하이에 두고 임시 의정원과 대한 국민 의회를 합병한 의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9월 상하이 대한민국 임정을 중심으로 대한 국민 의회와 한성 정부가 통합되면서 한성 정부의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 대한 국민 의회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하는 정부가 출범했다. 임정은 외교, 군사, 교육, 문화, 재정, 사법, 교통 등 10여 개 부분에 걸친 중앙 부서를 조직하고 국내 각지를 연결하는 교통국과 비밀 연락망인 연통제를 시행했다. 국내와 해외에서 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고 독립 공채를 판매하기도 했으며 운동가들 사이의 비밀 연락 업무와 소식 교환들을 수행하기도 했다. 역사 편찬부를 설치하고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를 간행해 일본 침략 사실을 기록, 세계인에게 알리고 독립의 당위성을 호소하고, 《독립신문》과 잡지들을 발행해 독립운동의 전개 상황을 알리기도 했다.
그러나 다양한 세력으로 정부가 출범한 데서 예견되었던 대로 곧 내재되었던 갈등이 표출된다. 만주의 무장 독립 투쟁 세력이 이승만을 중심으로 추진된 외교 독립 노선과 독립 청원 운동에 반대하여 임정을 배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장 독립 투쟁 세력은 이동휘를 중심으로 1920년을 독립 전쟁 원년으로 선포하고 실력 양성과 독립 전쟁을 병행하는 노선을 채택했다. 하와이에서 활동하다 임정 수립 직후 상하이로 왔던 이승만은 자신의 국제 연맹 위임 통치 발언과 외교 독립 노선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자 미국으로 돌아간다. 이후에도 임정 내부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결국 임정은 국민 대표 회의를 개최, 기존의 임정을 해체하고 새로운 임정을 수립하자는 ‘창조파’와 정부 자체를 두고 조직만 개조하자는 ‘개조파’로 분열되었고 이승만 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이후 십여 년간 대한민국 임정은 독립운동 세력 사이의 통일을 이뤄 내지 못하고 침체 상태에 놓이게 된다. 임정은 ‘정부’라 이름 붙이기에는 민족 운동 전체를 결집시킬 역량을 담보해 내지 못하면서 독립운동 단체 중 하나로 전락했고, 무장 독립 투쟁과 외교 독립운동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8ㆍ15 광복을 맞기까지 27년 동안 5차에 걸친 개헌을 비롯한 각 세력 간의 분열과 재정난, 그리고 8차례에 걸친 상하이를 포함한 중국 각지 이동 등 극심한 부침을 겪어야만 했다.
임정을 탄생시켰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떠난 뒤 약화된 임정의 자리를 지킨 것은 ‘임시 정부의 문지기’를 자처했던 김구였다.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변경하면서 임정의 명맥을 이어 간 김구는 1930년대 중반 이후 변화되는 정세 속에서 임정의 위상이 변모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만주의 무장 독립 투쟁 세력이 만주 사변 이후 활동 입지가 좁아짐에 따라 중국 관내로 이동한 뒤 임정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세력 간 통일을 이루어 낸다. 이후 임정은 광복에 이르기까지 군사와 외교 활동까지 담아내면서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서 정부 역할을 하게 된다.
봉오동 전투ㆍ청산리 대첩 - 승전보를 알려라!3ㆍ1 운동을 겪으며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비폭력적ㆍ평화적 방법으로 독립을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중국 관내 독립운동 세력이 임정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동안 만주와 러시아 영내에서는 1919년 상반기에만 70여 개의 단체를 결성하고 군사력을 키울 만큼 무장 독립 투쟁 노선을 택한 운동가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무장 독립 전쟁을 통한 조국 광복, 이것이 그들의 최종 목표가 되었고 국권 피탈을 전후해 형성된 이주민들의 망명촌이 이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특히 간도 지역이 키워 낸 독립군은 1920년대를 전후해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해 나간다. 관공서를 습격하며 일본 군대, 경찰과 전투를 벌였던 것이다. 이에 일제는 군대를 만주로 보내 독립군을 토벌하려고 했고, 그 중심에 독립군이 대승을 거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이 있다.
1920년 6월 독립군 부대가 북간도에서 출발해, 함북 강양동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헌병 국경 초소를 습격해서 격파한다. 급보를 받은 일본군은 참패를 거듭하면서 반격을 시도했고 독립군의 유도 작전에 말려 두만강에서 40리 거리에 위치한 봉오동으로 들어온다. 최진동을 사령관으로, 홍범도를 제1연대장으로 한 독립군 부대는 100여 호에 달하는 봉오동 주민을 미리 대피시키고 일본군이 포위망에 들어오자 3면에서 공격한다. 잠복해 있던 700여 명의 독립군이 협공해 일본군 157명의 전사자와 200여 명의 부상자를 낸 데 비해 독립군은 장교 1명, 병사 3명의 전사와 소수의 부상자를 내며 크게 승리한다. 이 전투가 바로 첫 정규전의 쾌거로서 독립군의 사기를 드높인 봉오동 전투다.
그동안 청일 전쟁, 러일 전쟁에서의 승리로 승승장구하던 일제는 봉오동 전투에서 정규군이 대패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에 토벌군을 투입해 항일 단체와 독립군을 말살하려는 대규모 작전을 수립한다. 일제는 조선 내 주둔 부대, 관동 및 연해주 주둔 부대들을 독립군 토벌대 병력으로 만주 지역에 투입시킨다. 일본의 병력 이동을 중국 측으로부터 통고받은 독립군 부대들은 청산리(중국 지린성 이도구-삼도구) 방면으로 이동하게 된다.
북간도 독립군 부대인 북로 군정서는 10월 10일경 삼도구에 도착, 20일 백운평 계곡에 매복해 있다 공격하여 200여 명의 일본군 전사자를 내는 등 큰 전과를 거둔다. 일본군 수가 늘어나자 밤새 행군해 160여 킬로미터 떨어진 갑산촌으로 이동했는데, 그동안 홍범도 부대는 이도구에서 일본군 한 부대를 전멸시키고 있었다. 다음 날인 21일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와 홍범도 연합 부대는 함께 어랑촌에서 전투를 벌여 일본군을 격파했고, 이로부터 26일 새벽까지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 어랑촌, 천수평, 고동하 등 동서로 약 25킬로미터에 달하는 청산리 계곡에서 대소 10여 회 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많은 무기를 노획했다. 이것이 청산리 대첩이다.
이 전투에서 1,600여 명의 김좌진 부대와 홍범도 연합 부대 1,400여 명의 독립군은 5천여 명의 일본군과 싸워서 전사자 60여 명, 부상자 90여 명만 낸 데 반해 일본군 전사자 1,200여 명, 부상자 2,100여 명을 내며 대승을 거두었다.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13년 만에 총을 든 우리 군대가 한 사람당 겨우 감자 3개와 한 줌의 쌀로 연명하면서 일제의 정규군을 물리친, 독립군 사상 최대 전과를 거둔 빛나는 승리였다.
2장 | 긴 밤이 끝나고 빛이 돌아오다 1931~1945년
한국광복군 - 광복을 향한 임정의 군대대한민국 임정은 초기 외교 독립론에 치중한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1919년에 이미 군사 조직법을 제정하는 등 수립 당시부터 군사 활동에 관심을 두었다. 1920년대에 침체기를 지낸 임정은 한인 애국단 윤봉길의 거사를 계기로 장제스가 중앙군관학교 뤼양 분교에 한인 특별반 설치를 배려하면서 중국 국민당 정부와 가까워지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따라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92명이 독립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사관이 되기 위해 한인 특별반에 입학했고, 1935년 4월 지청천과 이범석의 주관하에 62명이 졸업하게 된다.
중일 전쟁을 전후한 시기 임정은 조국 광복을 위해, 또 국제 정세상으로도 일본과 일전을 벌이는 것이 불가피하며 그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에 임정은 충칭 도착 1년 전쯤 시안에 군사 특파단을 파견해 병력을 모집하는 한편, 중국 정부와 군대 조직에 대한 양해와 재정 지원을 교섭했다. 그 결과 임정이 중국의 임시 수도 충칭으로 옮긴 직후인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 임정 산하 군대인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창설되었다. 당시 임정을 이끌던 주석 김구는 “한국과 중국 공동의 적인 일제를 타도하고 독립을 회복할 목적으로 연합국의 일원으로 항전하기 위해서”라는 한국광복군 창설 취지를 선포했다.
총사령관 지청천, 참모장 이범석의 한국광복군 창설은 대한민국 임정의 군사 활동이 더욱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고, 1941년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도발했을 때 대한민국 임정은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1942년 4월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 의용대 병력이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통합되면서 이범석의 제2지대와 함께 지청천 사령관 휘하 3개 지대로 한국광복군은 그 병력이 증강되었다.
한국광복군은 항일 전투에 참가한 것을 포함하여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 국제적 위상을 높이려 했다. 특히, 일본군에 강제로 편입되어 중국 등의 전선에 배치되었던 한국 청년들을 광복군에 복귀시키는 활동을 펼쳤다. 일본군이 미얀마를 점령하자 미얀마, 인도 전선에까지 파견되어 영국군과 함께 대일 투쟁을 전개했고, 한국광복군이 독립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국내 동포들에게 알려 독립에 대한 의욕을 높이기도 했다.
더 나아가 일본의 패망이 예견되자 한국광복군은 우리 손으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했다. 미국에서 독수리 작전이라 불렀던 이 작전을 위해 한국광복군은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 전략 사무국과 연합해 비행 편대를 편성하고 국내에 침투해 활동할 특수 요원을 훈련시켜 미국 잠수함이나 전투기를 이용해서 국내에 잠입한 뒤 중요 지역을 파괴하거나 점령하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가 예상보다 빨리 패망하면서 1945년 8월 20일에 예정되어 있던 국내 진공 계획은 무산되었다. 김구 주석은 8ㆍ15 광복 소식을 접하고 “내게는 이것이 기쁜 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라고 개탄하면서 “가장 걱정되는 일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차 국제 정치에서 발언권이 박약하다는 것이다.”라고 우려했다. 그리고 이것은 광복 이후 한반도의 정세를 정확히 예견한 것이었다. 한국광복군은 광복 이후 미군정의 요구에 따라 무장을 해제한 채 귀국했고 1946년 6월에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다만 그 일부가 국방 경비원 요원으로 흡수되어 이후 국군 창설에 이바지한다.
3장 | 세계가 그은 선, 비극의 시작 1945~1961년
한국 전쟁 - 한반도, 가장 아픈 상처를 얻다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조선 인민군은 선전 포고 없이 38선을 넘어 남침했다. 당일 12시에 포천을, 다음 날 의정부를 점령했고 불과 3일 만인 28일에는 서울을 점령한다. 이처럼 초반에 북한이 파죽지세로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북한이 남한에 비해 군사력이 우세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 정부가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던 이유도 크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최초 전황을 보고받고 긴급 명령 제1호를 하달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강구했지만, 상황 파악이 미처 안 돼 계엄령이나 전시 체제로 전환하지 않았다. 심지어 북한군의 공격을 받은 한국군 전방 사단들은 사단장들이 며칠 전 단행된 인사이동으로 자리를 비우고 있어 전황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비록 미국의 즉각적 대응과 참전에 존 무초 주한 미국 대사를 통한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 할지라도, 정부는 이미 1949년부터 북진 통일을 주장하고 있었고 5ㆍ30 선거 기간 동안에도 당시 정황상 북의 침공 가능성을 높게 보았으면서도 충분히 대비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전쟁 초기 민심의 동요를 막는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해 비상 철수 계획을 수립하지 못한 것도 부적절한 대응이었다. 정부 지도자와 관료들은 우왕좌왕했고 서울 시민을 포함한 피란민은 보따리를 매다 풀다를 반복하며 초조한 시간을 보냈다. 무질서로 일어날 불상사를 최대한 막기 위해 전쟁 발발 당일 시민들에게 군경을 신뢰해 동요하지 말라는 포고문을 발표했지만, 그런 속에서 대통령과 국무 위원들, 정부 기관과 요원들의 철수는 진행되었다. 그리고 철수 과정에서 북한군의 진군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28일 새벽 2시 30분 한강 인도교를 폭파시키면서 다수의 사상자를 발생시키고 서울 시민들의 피란도 함께 막았다. 이 때문에 피란을 간 ‘도강파’와 가지 못한 ‘잔류파’가 나왔으며, ‘잔류파’는 그날부터 3개월간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게 맞닥뜨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많은 우익 인사들이 체포되거나 인민재판을 받아 희생되었고, 서울 수복 후 도강파가 잔류파를 인민군에 협력한 부역자로 몰면서 한때 좌익에 가담했던 국민 보도 연맹원들의 전국에 걸친 처형과 맞물려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부산으로 피란한 한국 정부는 7월 14일, 미국으로부터 지휘권을 인수받은 지 1년여 만에 미 극동군 사령관이자 유엔군 사령관인 맥아더에게 한국 작전권을 양도한다. 이제 한국군은 법적으로는 유엔군이 아니지만 실질적으로는 유엔군의 일원처럼 전쟁을 수행했고 이때부터 전쟁은 북한군 대 남한군의 싸움에서 북한군 대 유엔군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9월 15일, 맥아더 사령관이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하면서 전세는 역전된다.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유엔군과 한국군이 38선에 도착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 명령을 하달하며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 유엔군도 이에 동의했다. 반면 중국은 유엔군이 북진하면 전쟁에 개입하겠다고 경고했고, 소련은 즉각적인 휴전 및 외국군의 철수를 제안한다. 그럼에도 유엔군과 한국군은 10월 1일 38선을 통과, 10월 20일 평양을 장악하고 청천강을 넘어 압록강을 눈앞에 두었고, 동부 전선에서도 청진 지역까지 진출했다.
결국 중국군이 11월 전면적인 개입에 나서자 이제 전쟁은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맞붙은 세계 최초의 전쟁이 되었다. 중국군에게 패배하면서 11월 30일을 기해 철수가 시작된 서부 전선의 미 8군은 평양에서 38선 부근까지 철수했고 동부 전선의 미 10군단과 한국군 1군단은 중국군에게 퇴로가 차단되어 흥남 부두에서 부산으로 해상 철수를 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맥아더는 원자폭탄의 사용을 포함한 화학 무기 사용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3차 세계 대전으로의 확산을 우려한 영국 등 여러 나라의 반대와 압력으로 그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고 트루먼은 확전론자인 맥아더를 해임시키고 리지웨이를 임명했다.
중국군의 남진은 리지웨이 장군이 이끈 유엔군의 반격으로 평택-제천 선에서 저지되었으며 이후 유엔군은 반격을 거듭해 서울을 재탈환(1951. 3. 15)하고 3월 하순에는 문산-임진강 선까지 진출한다. 이후 휴전이 될 때까지 2년여 동안 현재의 휴전선 근처에서 전선은 교착되었고 일진일퇴하는 소모전은 계속되었다. 팽팽한 힘의 균형이 유지되는 가운데 38선 부근의 치열한 전투는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백마고지, 저격 능선, 금성 전투 등 수많은 고지 쟁탈전으로 남았다.
4개월에 걸친 휴전 협정 끝에 휴전선의 위치가 결정되자 다음에는 포로 송환 문제가 18개월간 휴전을 지연시켰다. 중국군과 북측은 제네바 협정에 따라 자동 송환을 주장했지만 미국 측은 인도주의를 내세워 자유의사에 따라 처리하자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1953년 1월 미국 아이젠하워 신임 대통령이 휴전하도록 압박했고 3월 휴전을 반대하던 스탈린이 사망하자 회담은 급진전된다. 그동안 휴전을 반대해 온 이승만 대통령은 6월 17일 반공 포로 2만 명을 석방시켜 휴전 회담을 저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1953년 7월 27일 결국 휴전 협정은 체결되었고 한국 대표가 빠진 채 미군, 중국군, 북측 대표가 이에 서명을 한다. 한국 정부는 휴전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해 대표를 참석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