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맞수 열전
전국역사교사모임 외 지음 | 북멘토
동아시아 맞수 열전
전국역사교사모임 외 지음
북멘토 / 2022년 10월 / 296쪽 / 19,000원
수요시위 vs 금요행동 - 피해자의 투쟁과 가해국 시민의 양심어느 수요일,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 피켓을 든 인파가 몰려들었습니다. “소녀상을 철거하라!”, “위안부 앵벌이 STOP!” 어느 금요일, 도쿄의 미쓰비시 중공업 본사 앞에서는 조롱 섞인 외침이 들려옵니다. “너희가 일본 사람이냐, 한국 사람이냐? 한국이 좋으면 한국에나 가서 살아라!” 전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수요시위’를 반대하는 집단의 구호이고, 후자는 근로 정신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해 열리는 ‘금요행동’에 쏟아진 야유입니다. 일제가 벌인 전쟁 범죄의 피해자들과 그들에게 공감하는 시민들은 왜 거리에 나서야 했을까요? 상식적 요구를 하는 시민들에게 비난을 쏟아 낸 이들은 대체 누구일까요?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 동원의 역사적 배경: 1920년대 말, 세계 대공황 시기에 일본에서는 군부가 크게 성장했습니다. 일본 군부는 1931년 만주 사변을 일으켰고 이듬해에는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워 만주 일대를 지배했습니다. 일본 국민의 지지를 등에 업은 군부는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일제는 국제 연맹을 탈퇴하고 침략 전쟁을 이어 나갔습니다. 1937년에는 중일 전쟁을 도발해 중국과 전면전에 돌입했고, 같은 해 히틀러의 독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와 방공 협정을 완성하며 추축국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일제는 유럽 각국이 식민지 관리에 소홀한 틈을 타 연합국의 텃밭인 동남아시아를 점령하기 시작했고, 미국 등은 전쟁 확대를 차단하고자 일본에 석유와 철강 등 전략 물자 수출을 제한했습니다. 그러자 일제는 1941년에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 기지를 공습해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도발했습니다.
일제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대동아 전쟁’이라고 포장해 선전했습니다. 대동아 전쟁이란, 아시아 민족이 서양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일본을 중심으로 ‘대동아 공영권’을 건설하자는 의미가 담긴 표현입니다. 그러나 일제가 중일 전쟁 때 저지른 난징 대학살, 전시 체제하의 민간인 강제 동원과 일본군 ‘위안부’ 운영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일제는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아시아 민족의 자유와 평화를 서슴없이 짓밟았습니다.
1938년 일제는 국가 총동원법을 제정해 모든 사람과 물자를 의회의 승인 없이 전쟁에 동원할 수 있게 만듭니다. 긴 전쟁으로 일본 국민의 삶도 궁핍해졌지만, 식민지 조선인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수많은 조선인이 일본군 ‘위안부’로, 군수 노동자로 강제 착취당하며 죽어 갔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수요시위, 조선 여자 근로 정신대 피해자에 대한 미쓰비시 중공업의 손해 배상을 요구하는 금요행동은 이런 역사의 연장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끝난 지 45년이 지나도록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가해국인 일본에서는 자성의 목소리가 없었고, 가부장적 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던 한국에서는 피해자의 목소리가 나오기 어려웠습니다. 1991년에서야 피해자 김학순이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고백했습니다. 이후 용기를 낸 몇몇 피해자들이 연대해 일본 정부에 보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 소송이 화제가 되어 일본 사회에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1992년 1월 8일 수요일, 당시 일본 총리였던 미야자와 기이치의 방한을 계기로 최초의 수요시위가 한국에서 열렸습니다. 서른 명 정도가 집결한 최초의 수요시위에서는 “일본 정부는 정신대 희생자 위령비를 건립하라!”, “역사 교과서에 정신대 강제 연행 사실을 명기하라!”고 쓴 현수막이 걸렸습니다. 이후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가 정례화되어 종로에 있는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 정오 무렵에 열리게 되었습니다.
수요시위를 정례화하는 데에는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지금의 정의기억연대)을 비롯한 여성 단체, 사회단체, 종교계, 평화 운동 단체 등의 지원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시위가 반복될수록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도 커졌습니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돕고자 하는 자원가와 전문가들, 세계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는 평화 운동가 등 외국인의 참여도 늘어 갔습니다. 2011년에는 1000번째 수요시위를 기념해 ‘평화의 소녀상’이 제작되었습니다.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은 ‘위안부’ 운동의 상징이 되었고, 운동을 시각화하고 확산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나고야 소송 지원회와 금요행동: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일본에서는 박경식 등 재일 조선인 역사학자의 주도로 조선인 강제 동원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박경식이 저술한 『조선인 강제 연행의 기록』은 일본 사회에 조선인 강제 동원 문제를 알린 선구적 연구입니다. 박경식의 연구 활동은 일본 지식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등학교 역사 교사였던 다카하시 마코토는 박경식의 강연을 듣고 조선인 강제 동원이라는 중대한 사건이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 실리지 않은 것을 의아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군수 산업 중심지인 나고야의 조선인 강제 노동 문제를 파헤치는 데 전념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미쓰비시 중공업에 강제 동원된 조선 여자 근로 정신대 여섯 명이 지진으로 희생되었는데도 회사 측에서 의도적으로 숨겼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폭로하여 일본 내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그는 희생자 유족과 접촉해 나고야 소송 지원회를 결성했고, 1999년부터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근로 정신대 피해자들의 손해 배상 청구 소송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재판부는 피해자의 손을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어떠한 손해 배상 청구권도 주장할 수 없다.” 2005년 2월, 나고야 지방 재판소는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개인 청구권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는 논리를 펼치며 피해자의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6년간의 법정 투쟁이 무색하게 1심 재판의 판결 시간은 불과 10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피해자들과 나고야 소송 지원회는 곧바로 항소했습니다. 2007년 5월에 열린 항소심에서는 재판부의 입장에 진전이 있었습니다. 현 일본 정부와 전범 기업의 책임을 조금이나마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개인 청구권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는 결론에는 변함이 없었고, 1심과 마찬가지로 원고의 청구가 기각되었습니다.
2007년 7월 20일 금요일, 나고야 소송 지원회는 미쓰비시 중공업 본사가 있는 도쿄 시나가와역 남쪽 출입구 앞에서 조선인 강제 동원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시위에 나섰습니다.
“5ㆍ31 나고야 고등 재판소, 미쓰비시 중공업의 강제 연행 강제 노동을 단죄!”
“5ㆍ31 나고야 고등 재판소 판결에 근거해 조선 여자 정신대 피해자의 구제 실현을!”나고야 소송 지원회는 두 장의 현수막을 들고 통근자가 가장 많은 오전 8시 45분부터 한 시간 동안 시나가와역 앞에 머물렀고, 이후에는 미쓰비시 중공업 본사 현관 앞으로 이동해 12시 45분까지 시위를 지속했습니다. 다섯 명이 함께한 조촐한 시위, 금요행동의 시작이었습니다.
수요시위와 금요행동,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2021년에 제1500차를 맞은 수요시위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장기 지속 집회입니다. 금요행동은 2020년에 제500차를 맞았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과 일본 시민 사회의 성숙함을 보여 주는 자랑스러운 기록이지만, 한편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강제 동원 피해자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지표이기도 합니다.
수요시위는 많은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한 자릿수에 불과했던 공식 피해자가 238명으로 늘었고, 30여 명의 인원으로 출발한 시위 인원은 연간 8만여 명이 참여하는 거대한 사회 운동으로 진화했습니다. 피해자의 용감한 고발이 해외로 파급되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가 아시아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밝혀졌습니다. 김학순의 피해 사실을 고발한 8월 14일은 2021년에 ‘세계 위안부 기림일’로 지정되어 세계 여성 단체 연대의 장이 되었습니다. 또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한국 내 활동을 넘어 전 세계의 전쟁 성폭력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인권 운동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금요행동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2008년 도쿄 최고 재판소에서 원고의 청구가 최종 기각되었지만, 이후 한국 법원을 통하여 손해 배상 청구에 진전이 있었습니다. 2012년 광주 지방 법원에 미쓰비시 근로 정신대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 승소하고 위자료 6억 8,000만 원 배상 판결을 받아 낸 것입니다. 미쓰비시가 항소했으나 2018년 11월, 피해자들이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고, 2019년에는 한국 내 미쓰비시 자산을 압류해 피해자에게 지급하라는 판결이 나왔습니다.
나고야 소송 지원회의 헌신으로 지금도 금요행동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지원회의 꾸준한 노력이 한국에도 여러 차례 조명되었습니다. 2019년에는 한국의 한 다큐멘터리 감독이 나고야 소송 지원회의 활동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고, 유명 방송사에서도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습니다. 2020년에는 나고야 소송 지원회의 주축인 야마카와 슈헤이의 에세이가 일본과 한국에서 출간되기도 했습니다.
누가 그들을 비난하는가?: 일본 정부는 일제의 식민 지배와 전쟁 범죄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 왔을까요? 일본 정치권에서 사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는 한일 관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주었습니다.
<고노 담화>
위안소의 설치ㆍ관리 및 위안부 이송에 구 일본군이 관여했다. 몸과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모든 분께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드린다. 같은 잘못을 결코 반복하지 않겠다. _1993년 8월, 고노 요헤이 관방 장관
<무라야마 담화>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각국에 많은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 의심할 여지없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한다. _1995년 8월,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그러나 이후 이어진 일본 정권들은 지속적으로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의 정신을 파기하고자 했습니다. 게다가 2015년에는 한일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의 의사는 무시한 채 합의하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으로 불가역적으로’ 종결되었다고 선포해 운동에 중대한 차질을 빚기도 했습니다. 수요시위, 금요행동에 대한 무분별한 비난도 운동의 동력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한국에는 수요시위를 반대하는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으며, 일본에도 금요행동에 공격적으로 반응하는 시민이 많습니다.
현재 세계에서는 과거에 발생했던 역사적 상황이나 사실을 부정, 은폐, 왜곡하는 역사 부정의 흐름이 역사 해석의 장을 크게 뒤흔들고 있습니다. 진보적인 사회 변화에 반발하는 정서가 세계 여러 나라에서 표출되고 있으며, 온라인 플랫폼은 역사 부정주의자를 수월하게 결집하도록 합니다. 역사 부정주의자의 온라인 콘텐츠가 실제 수익으로 연결될 뿐 아니라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세력까지 합세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금요행동의 핵심 인물인 야마카와 슈헤이는 그의 에세이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죄하고 배상하는 것 말고는 길이 없다. 가해자가 배상하지 않으면 누가 피해자에게 배상할 것인가? 이것은 회피주의와 인도주의의 싸움이다. 이 싸움에 참가하는 것이야말로 나 자신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보루(양심)인 것이다. (…) 인류의 역사는 인도주의에 의해 지탱되었다. _『인간의 보루』‘인도주의’라는 ‘인간의 보루’ 말고는 기댈 곳이 없는 사람들은 또다시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 미쓰비시 중공업 본사 앞에 섭니다. 인도주의에 기반한 공동체가 일본 정부의 정치 논리와 전범 기업의 배상 거부 그리고 역사 부정주의에 맞서 승리하는 날이 언제쯤 올까요?
호찌민 vs 수카르노 - 독립을 이끈 이들의 서로 다른 길호찌민과 수카르노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과 지배에 맞서 조국의 독립을 이끌었던 인물입니다. 호찌민은 프랑스의 식민지인 베트남에서, 수카르노는 네덜란드의 식민지인 인도네시아에서 서양 제국주의에 맞섰고,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이 잇달아 무너지자 이를 기회로 조국의 독립을 달성했습니다. 독립 후에도 이들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에 의해 붕괴 직전까지 내몰렸던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전쟁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반도와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해 또다시 야욕을 드러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호찌민과 수카르노는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을까요?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다: 호찌민은 1890년 프랑스 지배하의 베트남 중부 응에안성에서 태어났습니다. 유학자였던 호찌민의 아버지는 1905년경 호찌민을 초등 수준의 프랑스식 예비 학교에 입학시켰고, 호찌민은 꾸옥 응우(國語)와 프랑스어, 한문 세 가지 언어를 함께 익히며 서구식 학문을 배웠습니다. 1911년 사이공(지금의 호찌민시)에서 프랑스로 떠난 호찌민은 2년 가까이 알제리, 튀니지, 인도, 세네갈, 수단, 마다가스카르, 미국과 영국 등 세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습니다.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 호찌민은 프랑스에 사는 베트남인을 위한 조직을 결성하고 베트남처럼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조선 사람이나 튀니지 사람들과 교류를 이어 갔습니다. 1919년 1월에는 판쭈찐 등과 함께 프랑스의 베르사유에 모인 연합국 지도자들에게 <베트남 인민의 요구>라는 성명서를 내며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의 이상을 동남아시아에서도 적용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호찌민은 프랑스 사회당을 거쳐 프랑스 공산당에서 활동하면서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 민족 착취를 거세게 비판했고, 1923년에는 사회주의 혁명의 본고장인 소련으로 건너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일명 스탈린 학교)에서 단기 과정을 수료하며 코민테른의 일원으로 활약했습니다.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5차 세계 대회에서 호찌민은 각국의 공산당 대표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재 자본주의라는 뱀의 독과 생명력은 본국보다 식민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식민지는 산업 원료를 공급합니다. 식민지는 군대에 병사를 공급합니다. 장차 식민지들은 반혁명의 요새가 될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식민지를 통해 자신을 부양하고, 자신을 방어하고, 사회주의자인 우리를 탄압하는데, 동지들은 왜 식민지를 무시합니까?”1924년 11월, 호찌민은 열차를 타고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해 동쪽 끝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다시 배로 갈아타 중국 광저우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베트남 혁명 청년회’를 결성했고, 1930년에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 나갔습니다. 그러던 중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베트남을 식민지로 차지하고 있던 프랑스가 독일에 의해 무너졌고, 이 상황을 틈탄 일본이 베트남을 침공했습니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호찌민은 베트남으로 돌아와 1941년 베트남 독립 동맹(이하 베트민)을 조직하고 이후 독립운동에 매진해 1944년 12월에는 최초의 정규군인 베트남 해방군을 조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