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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첼라이 정원의 산책자들

강인순 지음 | 더좋은책


루첼라이 정원의 산책자들

강인순 지음

더좋은책 / 2022년 10월 / 252쪽 / 18,000원





1부 그리스 - 아리아드네에서 메르쿠리까지



건축물에도 그리스 철학이 - 파르테논 신전


아테네의 첫인상은 유럽 여느 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새벽에 공항에 도착할 때 하늘에서 내려다본 풍경도 그렇고, 시내로 들어올 때 마주친, 밤의 정적을 감싸고 있는 고요한 도시의 불빛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에 들어섰을 때 유리창 너머로 한눈에 들어오는 아크로폴리스를 보면서 비로소 그리스의 아테네에 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처음에는 좋은 호텔이라서 아크로폴리스가 다 보인다고 좋아했는데, 다녀 보니 아테네 시내에서는 어디에서나 아크로폴리스가 보였다.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나 여신을 모시는 파르테논 신전을 폴리스에서 가장 높은 언덕 위에 건축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고대 아테네 시민들이 도시의 수호신을 얼마나 신성시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정의가 구현되던 ‘신의 언덕’:
아테네에서의 첫 일정은 아레오파고스를 오르는 것으로 시작했다. ‘아레스 신의 언덕’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곳은 전쟁의 신 아레스의 살인죄를 판결하기 위한 재판이 열렸던 장소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아레스는 자신의 딸을 겁탈하려던 포세이돈의 아들을 죽인 살인죄로 고대 그리스 최초로 신의 재판을 받게 된다. 그리고 딸을 구하기 위한 아버지의 정당방위가 인정되면서 무죄 판결을 받았던 법정이 열렸던 역사적인 장소다.

신만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최초의 배심원 재판도 이곳에서 열렸다.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 중 「자비로운 여신들」에 나오는 이야기다. 오레스테스는 아폴론의 신탁에 따라 아버지 아가멤논을 살해한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복수를 감행했다. 하지만 존속 살인죄를 묻는 복수의 여신 에리니에스 세 자매의 추격을 견디다 못해 아테나를 찾아와 이 법정에 서게 된다. 아테네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들의 투표에서 유죄와 무죄가 동수로 나오자, 재판장인 아테나 여신은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하며 그의 무죄에 손을 들어 줌으로써 마침내 오레스테스는 무시무시한 복수의 여신에게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저주받은 아트레우스 가문에 대대로 내려온 처절한 보복과 한풀이를 마침내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엘렉트라, 크리소테미스 두 누이 대신 막내인 오레스테스가 모친 살해라는 어려운 결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오레스테스의 고충을 떠올리며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직 2월이었지만 아테네의 날씨는 늦가을처럼 청명해서 걷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더구나 비수기라 관광객이 많지 않아 여유롭게 이동할 수 있어 상쾌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 최초로 배심원 재판이 열렸던 역사적인 장소로 오르는 길이 계속 완만한 경사로로 이어지지만은 않았다. 언덕으로 오르는 대리석 계단을 얼마나 많은 관광객이 오르내렸던지 너무도 반들반들하고 미끄러워 오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행히 바로 옆에 철제 계단이 있어 그리로 올라갔다.

도심에서 암벽투성이의 작은 언덕을 만난 것은 독특한 경험이었다. 바위 위도 평평하지 않아 발밑을 조심하면서 자리 잡아야 했지만, 힘들게 올라온 만큼 감동도 그에 비례해 커졌다. 마침내 아테네 시내가 발아래 펼쳐졌다. 사도 바울이 아테네 시민들에게 처음 기독교 교리를 전파했던 곳도 이 바위 위라고 하니 역사적으로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눈길을 돌리니 더 높은 곳에 아크로폴리스가 당당하게 서 있었다. 아레오파고스는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오르는 첫 번째 관문인 셈이다.

파르테논 신전의 ‘현관’ 프로필라이아:
그 옛날 신들을 모셨던 신전으로 오르는 길도 아레스의 언덕 못지않게 미끄러워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가파른 등산로처럼 높은 계단으로 오르는 길이 나타났다. 다시 기운을 내서 오르니 발밑으로 아레오파고스가 눈에 들어왔다. 가쁜 숨을 내쉬며 뒤돌아보니 웅장하고 아름다운 대리석 기둥의 건축물이 보였다. 신전으로 들어가기 전 오늘날 건물의 현관이라 할 수 있는 ‘프로필라이아’(입구 건물)에 도착한 것이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대리석 기둥은 무척 높고 장엄했지만, 기둥마다 세로로 홈을 파 만든 줄무늬가 단아한 우아함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야말로 대리석을 떡 주무르듯이 조각한 고대 그리스 조각가들의 솜씨에 절로 경탄이 나왔다.

첫 번째 관문인 프로필라이아의 높은 기둥을 통과하자, 마침내 탁 트인 넓은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갠 지중해 하늘 아래 외롭게 서 있는 파르테논 신전이 그곳에 있었다. 아침에 호텔 식당에서 유리창 너머로 바라본 신전 건축물은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는데, 바로 눈앞에서 마주친 모습은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주춧돌과 돌기둥으로 쓸쓸한 아름다움만 남아 있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제1호의 아름다움은 고색창연한 폐허 그 자체였다. 그 옛날 찬란했던 황금기를 보내고는 줄곧 타민족의 지배하에 살아온 그리스인들과 함께 2,500여 년의 힘든 세월을 버텨 낸 건축물이라 생각하니 신전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영광의 흔적은 주춧돌과 돌기둥뿐:
심한 폭풍우로 제1차 그리스 원정에 실패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2년 후인 기원전 490년 2차 그리스 침공 시 아테네 동북부 마라톤 해안에 상륙했다. 아테네의 명장 밀티아데스는 스파르타의 지원군을 기다릴 수 없어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총공세를 펼쳐 승리를 거두었다. 오늘날 마라톤 경기의 기원이 된 마라톤 전투이다. 다시 10년 후 기원전 480년 다리우스 1세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가 대군을 이끌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로 쳐들어왔을 때, 해군이 강한 아테네는 좁은 살라미스 해협으로 적을 유인해 승리를 거두고 페르시아를 패퇴시켰다.

대제국 페르시아를 두 번이나 물리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아테네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그래서 전쟁으로 폐허가 된 옛 신전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도시를 지켜 주는 처녀신 아테나 파르테노스에게 바치는 멋진 신전을 다시 건축하게 된다. 아테네 민주주의를 완성한 지도자 페리클레스의 주도하에 기원전 447년 시작된 파르테논 공사는 16년간 이어져 기원전 432년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 옛 신전 터에 다시 우뚝 서게 됐다. 아테네는 그리스 최고의 폴리스라는 자부심으로 최전성기를 맞게 되지만 페르시아 제국의 재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300여 개의 도시 국가들이 전쟁 기금으로 공동 마련한 델로스 동맹의 재원을 아테네가 독단으로 사용하면서 신전 완공 1년 후인 431년 도시 국가의 몰락을 재촉하는 내전에 휘말리게 된다.

아테네 시민들의 정체성과 자긍심은 페디먼트로 불리는 동쪽 삼각형 박공지붕에 새겨진 여신의 탄생 과정을 보여 주는 부조에 잘 나타나 있다. 올림포스 12신 중 유일하게 아버지 제우스 신의 머리에서 탄생한 아테나 여신은 놀랍게도 머리에는 투구를 쓰고 한 손에는 방패를 든 채 태어났다. 후면인 서쪽 박공지붕에는 그리스 최고의 폴리스 아테네의 수호신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아테나 여신과 포세이돈이 각축전을 벌이는 모습을 부조로 남겼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인지라, 수호신 자리를 얻기 위해 두 신은 아테네 시민들에게 선물 공세를 펼쳤다. 포세이돈은 삼지창으로 바위를 뚫어 샘을 만들어 주었고, 아테나는 평화와 풍요의 상징인 올리브 나무를 선사했다. 혜안을 가진 아테나 여신 덕분에 올리브는 지금도 그리스의 중요한 수출품이다.

우아하고 단아한 여성미 에렉테이온 신전:
아크로폴리스로 올라올 때는 오른편에 있는 웅장한 파르테논 신전만 눈에 들어왔는데, 왼쪽에 있는 아담하고 독특한 형태의 에렉테이온 신전이 비로소 눈길을 사로잡는다. 아테네의 건국 시조로 알려진 전설적인 왕 에렉테우스를 기리는 이 신전은 크기에 비해 다소 복잡한 디자인으로 건축돼 첫눈에 그 독창적 아름다움을 간파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예쁘고, 여행이 끝난 후에도 사진으로 자꾸 보니 독특한 디자인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파르테논 신전이 압도적으로 웅장하고 간결한 남성적인 면모로 대칭적 통일감을 보여 주고 있다면, 에렉테이온 신전은 우아하고 단아한 여성적인 비대칭성이 돋보인다. 에렉테이온 신전 동쪽 6개의 이오니아식 기둥은 도리스식 기둥머리를 한 파르테논과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원래 그리스 신전 공식대로라면 동쪽에 세운 이오니아식 6개의 기둥을 맞은편 서쪽에서 똑같이 세워야 하지만, 지면의 높낮이가 다른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기둥을 4개만 세우고 북쪽 신전의 기둥을 측면으로 서쪽에 세웠다. 그래서 서쪽에서 바라본 신전은 북쪽 기둥 2개, 서쪽 기둥 4개 그리고 남쪽 카리아티드 기둥 1개까지 각각 다른 크기와 모양의 6개 기둥을 모두 품고 있었다. 너무 복잡한 디자인으로 자칫 통일감이 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전체 건물 중 가장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어 천재적인 건축가의 재능이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서쪽 기둥 앞에서 자라고 있는 올리브 나무를 보니 아직도 수호신 아테나가 시민들을 지켜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꽤 넓은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에 파르테논 신전만 남아 있었다면 정말 황량했을 것 같다. 하지만 왼편 모퉁이에 에렉테이온 신전이 함께하고 있어 파르테논의 웅장한 아름다움이 다시 한번 눈에 들어왔다. 정면에서 바라본 신전의 기단과 기둥은 모두 직선으로 보이지만, 파르테논 건축물에 직선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 눈의 착시 현상까지 고려해 모든 기둥은 중간 부분을 조금 볼록하게 만든 배흘림 기법으로 건축했다. 수호신 아테나 여신에게 바치는 신전을 이렇게 세심하게 건축한 아테네 시민들의 지극정성이 눈물겹다. 아테나 여신을 위해 지은 신전이지만 그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은 고스란히 인간들 몫이므로, 파르테논 신전은 신을 위한 건축물인 동시에 인간을 위해 건축한 건축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약소국의 아픔, 부서지고 뜯기고:
복원 공사로 철제 빔에 둘러싸인 신전을 보고 있으면 파르테논 신전의 기구한 역사가 떠오른다. 오스만 제국 통치기에는 탄약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였는데, 1687년 베네치아군의 총사령관 모리시니가 오스만을 공격할 때 쏜 포탄이 화약고에 떨어지면서 신전 내부가 대부분 파손됐다. 설상가상으로 19세기 초 당시 영국 외교관이었던 엘긴 경이 신전 안쪽 기둥의 연속돌림띠장식(프리즈) 조각 대다수를 오스만 제국 묵인 하에 뜯어 갔다. 때문에 파르테논 조각들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크게 훼손되었지만, 오늘날까지 정확한 복원도가 남아 있는 것은 선견지명이 있었던 한 화가 덕분이라고 한다. 이런 불상사를 예견한 듯, 그는 베네치아의 폭격이 있기 바로 몇 해 전 이곳을 답사하고 건물 세부를 스케치로 자세히 남겨 놓았다.

엘긴 경이 영국으로 가져간 대리석 조각은 현재 대영 박물관 주요 전시실에 고이 모셔져 있다. 그리스에 남아 있는 파르테논 대리석 조각상보다 대영 박물관에 있는 부조가 양적으로는 물론 질적으로도 더 뛰어나기 때문에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상을 제대로 보려면 꼭 영국 런던에 있는 박물관에 가서 봐야 하는 슬픈 역사가 이렇게 탄생했다.

세계적인 성악가 마리아 칼라스만큼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리스인은 아마도 동시대를 살았던 영화배우 멜리나 메르쿠리일 것이다. 그녀는 배우로 전성기였던 1962년 런던을 방문했을 때 대영 박물관의 엘긴스 룸에 전시돼 있던 그리스 유물을 보고 이렇게 분노했다고 한다. “이 유물들은 엘긴의 조각이 아니라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들이다.” 그 후 여성 최초로 문화부 장관이 된 그녀는 1983년 공식적으로 그리스 유물의 반환을 영국 정부에 요구했지만, 다음 해 영국 정부는 정식으로 반환 요청을 거절했다. 하지만 그녀의 유지는 멜리나 메르쿠리 재단의 활동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메데이아를 위한 변명 - 코린토스 운하


아테네에서 아침 일찍 출발해 한 시간쯤 지나 서둘러 내린 곳은 특별한 지형지물도 없는 황량한 국도변이었다. 왜 이런 곳에 내렸을까 의아해하며 앞에 보이는 다리를 향해 걸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운하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진을 찍기 위해 포토 존에 서서 다리 밑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다리 난간을 꽉 잡았다. 수직으로 깎아지른 벼랑 사이로 에메랄드빛 바다가 보였다. 바위산을 깎아 그 사이로 배가 다닐 수 있도록 운하를 만들었는데, 사진을 찍기 위해 자리 잡았던 곳은 이 운하 위로 걸쳐 있는 두 다리 중 한 곳이었다. ‘만약 다리가 무너진다면…….’ 이런 상상만으로도 무서웠지만, 좁은 수로 사이로 흐르는 코발트빛 바다에 저절로 탄성이 났다. 세계 3대 운하 중 하나로 꼽히는 유명한 운하니 당연히 강폭도 넓고 웅장한 규모로 위풍당당하지 않을까 싶었던 내 상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코린토스 운하는 폭이 몹시 좁고 마주 보는 두 절벽은 까마득히 높아 날렵하기까지 했다.

수에즈 운하 건설한 레셉스가 완공:
코린토스는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지협으로 연결해 주고 있었기에, 해상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폴리스다. 지중해 동쪽의 에게해와 서쪽의 이오니아해를 항해하는 배들은 그리스의 남단을 지나가는 위험한 항로를 피하고 싶어 했기에, 배의 화물을 지협 위의 좁은 노면에다 올려놓은 다음, 지협 반대편에 있는 다른 배에다 그 화물을 다시 싣는 방식을 선호했다. 코린토스는 이런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해 에게해에서 이오니아해로 또는 그 반대 방향으로 항해하는 선박을 절벽 위로 끌어올리는 길을 만들어 통행료를 톡톡히 챙겼다고 한다.

코린토스 운하를 통해 뱃길을 단축하기 위한 시도는 고대 로마 시대 네로 황제 때부터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하다, 수에즈 운하를 건설했던 프랑스인 토목 기술자 레셉스가 1882년에서 1893년에 걸쳐 12년간의 대역사 끝에 마침내 완성했다. 운하는 길이 6.2킬로미터, 폭 24미터, 수심이 약 8미터로 소형 배들만 통과할 수 있는 작은 규모이지만, 운하 개통으로 항로가 400킬로 정도 단축되었다고 하니 서울에서 부산 가는 거리만큼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코린토스 운하를 즐길 수 있었던 시간은 사진 찍는 순간으로 아주 짧았지만 그 여운은 길었다. 첫 만남은 다리 위에서 수직으로 내려다보기였지만, 만약 다음에 또 한 번 코린토스에 올 기회가 온다면 크루즈를 타고 운하를 건너 보고 싶다. 닿을 듯 말 듯 폭이 좁은 두 절벽 사이를 배를 타고 지나며 느끼는 아슬아슬함과 함께, 다시 넓은 바다를 만나는 탁 트인 시원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사랑을 위해 모든 걸 버린 메데이아의 비극:
그러나 이런 낭만과는 거리가 먼 비장함으로 이 코린토스 지협을 건넜던 사람이 있었다. 그리스 신화 이야기 중 가장 무서운 여자라 알려진 메데이아다. 그녀는 본래 그리스 변방 코르키스의 공주로 뛰어난 마법사였다. 그녀는 아르고호를 타고 황금 양털을 찾으러 온 이아손에게 첫눈에 반해, 아버지 아이에테스 왕이 애지중지하던 양털을 덥석 건네주고 그와 함께 도망치다 정착했던 곳이 바로 코린토스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메데이아』를 통해 새로 탄생한 메데이아는 남편 이아손과 자식 둘을 낳고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아손이 갑자기 코린토스의 공주 글라우케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한다. 거기다 코린토스 왕 크레온은 메데이아에게 즉시 추방령을 내린다. 이아손에게 받은 모욕으로 분노가 폭발하며 그녀 마음속의 악마가 살아나 통제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른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들까지 죽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남편을 사랑하는 메데이아의 열정 앞에 이아손은 얼음장처럼 차고 냉정했다. 글라우케 공주와 결혼하는 이유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는 이아손의 말을 듣자, 메데이아는 확신한다. 이아손에게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에게서 소중한 모든 것들을 다 앗아 버리겠다는 분노로 결국 자신이 낳은 아이들까지 죽음으로 몰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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