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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만 모르는 비밀 하나

후이 지음 | 미디어숲


그대만 모르는 비밀 하나

후이 지음

미디어숲 / 2022년 9월 / 208쪽 / 16,800원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 모르지만



나를 채워 주는 사람, 나를 망치는 사람


소희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결혼은 아직 새파랗게 젊을 때, 대학을 졸업하자마자였다. 왜 그리 결혼을 서두르냐는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랑 이렇게까지 닮은 사람은 평생 찾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소희의 말대로 그녀와 첫 남편은 부부라기보다 이란성 쌍둥이, 혹은 태어나면서부터 함께할 운명으로 묶인 사람들 같아 보였다. 둘은 같은 해, 같은 달에 태어났고, 같은 도시에서 나고 자라 같은 대학의 같은 과를 졸업했다. 둘 다 달달한 음식과 공포 영화, 만화책을 좋아했고 심지어 왼손잡이인 것마저 같았다. 외모마저 같다면 ‘도플갱어’라 불릴 만했다.

아마 살면서 이렇게까지 자신과 닮은 사람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일 것이다. 그래서 소희는 자신을 행운아로 여겼고, 그와의 결혼을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 역시 두 사람이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기를 진심으로 축복하고 기원했다. 그러나 3년 후, 그들이 헤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두 사람은 편안하게 헤어졌다. 다툼도 눈물도 없었다. 소희의 말을 빌리자면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기에,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상대가 동의한” 그런 이별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서로를 잘 알고 이해하는데 어째서 헤어진 것일까? 소희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거야. 서로 너무 잘 알아서, 너무 닮아서. 모든 게 익숙하고 예상 가능해서. 그 사람과 살면 아마 늘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친구들을 만나고, 매년 같은 곳으로 휴가를 떠나서 같은 호텔에 묵겠지. 심지어 섹스도 늘 똑같을 거야. 내가 새로운 자세는 어색해서 싫다고 하면 기다렸다는 듯 자기도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이었거든.”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그녀는 그와 사는 한은 평생 새로움을 느낄 수도, 낯선 것을 배울 수도 없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이해하는 것은 그녀도 다 이해했다.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는 그녀도 흥미를 못 느꼈다. 그가 그녀에게 밀란 쿤데라의 작품을 추천할 가능성은 제로였다. 그 자신부터 전혀 읽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가 그에게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롤러코스터를 타 보자고 제안할 일 역시 없었다. 그녀에게 그럴 용기가 없는 만큼 그 또한 절대 타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술 영화를 본 적이 없고, 겨울 스포츠를 즐기지 않았으며, 매운 음식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둘 다 금융을 전공하고 관련 계통에 종사하고 있어 서로에게 새로운 분야의 화제를 들을 일도 거의 없었다.

작년 그녀의 생일에 그는 그녀가 정말 좋아할 만한 선물을 준비했다고 했다. 그녀는 짐짓 기대하는 척했지만 사실 선물이 무엇인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브랜드의 향수겠지. 마침 향수가 떨어져 간다는 것을 그도 아니까. 그는 그녀가 좋아하는 것의 대부분을 알았고, 그녀는 그가 자신이 늘 사용하던 것만 선물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얌전한 포장의 선물 박스 안에 짐작한 대로 향수가 들어 있는 것을 본 순간, 소희는 이별을 결심했다.

“어렸을 때 엄마가 내게 늘 하던 말이 있어. 너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 줄 수 있는 사람과 결혼해라, 그래야 오래갈 수 있다.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지금은 그 말을 절실히 실감 중이야. 나랑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났어야 해. 그래야 서로 채워 줄 수도 있고, 사는 재미도 있지.”

소희의 눈에 묘한 갈망이 번뜩였다. 완전히 새로운 것을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나서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말 거야.’ 그렇게 선언하는 듯했다.

두 번째 결혼은 신중하게 접근했다. 수없이 많은 선을 봤고, 소개팅이나 우연한 만남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소희는 서진이라는 남자를 만났다. 도시에서 풍족하게 자란 그녀와 달리 서진은 작은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궁핍한 환경에서 어렵게 스스로 생활비와 등록금을 벌어 가며 대학까지 마친 자수성가형 인물이었다.

그는 IT 계열에 종사하고 게임을 좋아했으며 소설은 전혀 읽지 않았다. 소희가 가장 신선하게 느낀 부분은 그가 군사학과 정치학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서진은 무려 두 시간 동안 중동과 관련된 국제 정세에 대해 떠들어 댔다. 전혀 알지 못하는 분야였기에 소희는 외려 흥미진진하게 들었고, 눈앞의 남자에게 지대한 호기심을 느꼈다. 소희는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분석했다.

“그는 나랑 전혀 다른 세상의 사람 같아. 사실 그 점이 제일 좋아. 서로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있으니까 늘 궁금해할 수 있잖아. 이런 사람과 함께라면 평생 지루할 일은 없을 거야. 안 그래?”

서진과 결혼하고 몇 년 동안 소희는 이전에 상상조차 해 보지 않은 일들을 많이 경험했다. 그의 손에 이끌려 난생처음 겨울 산행을 해 보았고, 냄새만 맡아도 눈물이 나는 매운 짬뽕도 먹어 보았다. 서진은 그녀의 생일마다 다른 선물을 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갈수록 소희는 점점 짜증이 늘고 쉽게 화를 냈다. 부부 싸움이 잦아지고 각방을 쓰는 날도 늘었다.

친구들과 만날 때 역시 넋을 놓고 있지 않으면 별것 아닌 말을 예민하게 받아들여 벌컥 성을 냈다. 결국 친구들도 그녀를 피하기 시작했으며 몇몇은 아예 연락을 끊었다. 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소희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친구 몇이 작정하고 그녀를 불러냈다. 걱정 어린 질문과 안타까운 하소연 끝에 마침내 그녀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그냥 요 몇 년간 내 감정 상태를 솔직히 말해 볼게. 너희들이 판단 좀 해 줄래?” 소희의 표정은 꽤나 심각했다.

“결혼하고 나서 같이 살아 보니까 우리 둘이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 알겠더라. 과장 좀 보태서 말하자면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다 달라. 그런데 그게…, 생각보다 너무 힘들었어.” 예를 들어 함께 쇼핑을 가면 서진은 화들짝 놀라며 이렇게 말한다고 했다. “겨우 티셔츠 한 벌에 이 가격이라니 말도 안 돼. 당신, 남편 월급은 얼마인지 알지? 설마 나더러 더 벌어 오라고 압박 주는 거야? 우리 엄마는 이 돈이면 한 달을 먹고살아!”

두 사람은 경제관념만이 아니라 사는 모습도 전혀 달랐다. 소희가 자기 전에 책을 읽으면 서진은 자기 방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웹 서핑을 했다. 거기서 끝이면 좋으련만 기사를 보면서 습관적으로 욕을 퍼붓는 게 문제였다. 특히 정치나 국제 정세와 관련해서 울분을 토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는 소희도 흥미롭게 들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서진이 이성적인 분석을 하는 게 아니라 단지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욕을 할 뿐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나중에는 그가 기사를 보며 내뱉는 욕설을 듣기만 해도 심장이 떨리고 두통이 몰려왔다.

신혼 초까지만 해도 소희는 퇴근 후 직장에서 있었던 일을 서진에게 이야기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더는 말하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그날 하루를 공유하고 싶었을 뿐인데, 서진은 들으면서 화를 내거나 욕을 했기 때문이다. “그 동료 자식이 못돼 먹었네! 일도 더럽게 못하는 새끼, 그걸 그냥 두고 봤어? 아니, 당신네 사장도 병신 아니야? 다 똑같은 놈들 아냐!”

자기 직장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할 때는 훨씬 더 가관이었다. 누구든 그의 입만 거치면 밥값 못하는 무능력자에 성격 파탄자로 돌변했고, 바보 천치에 일말의 쓸모도 없는 인간으로 전락했다. 그런 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까. 시간이 갈수록 소희 역시 성마르고 조급하며 화를 잘 내는 성미로 변해 갔다. 그리고 그렇게 변한 자신을 의식할 때마다 고통에 몸부림쳤다.

“나는 그저 내 부족함을 채워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았을 뿐이야. 그런데 대체 왜 이런 꼴이 되어 버렸을까?” 나는 한참 생각하다 그녀에게 물었다. “네가 채워지길 바랐던 부분은 결국 뭐였어?” 그녀는 텅 빈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 같이 롤러코스터를 타러 가는 것 정도의 단순한 부분이었을 거야. 그렇지?”

채식을 즐기는 사람과 육식을 즐기는 사람이 서로 채워 준다면 두 사람은 균형 잡힌 식사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다름’만 찾느라 채식도 육식도 아닌, 전혀 다른 제3의 식성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 그녀의 문제였다. 단순히 제3의 식성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식성만은 옳다고 여기며 다른 것들을 배척하고 비난하는 사람을 만난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나는 연애 소설을 좋아하는데 상대가 SF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도박을 좋아한다면 문제다. 나는 쇼핑, 상대는 여행을 좋아한대도 갈등의 소지가 없다. 그러나 성실히 노력하며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나와 달리, 상대가 나태하게 집구석에 틀어박혀 게임만 한다면 갈등이 폭발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사자끼리 만나면 성격이 달라도 서로 힘겨루기를 하며 상대를 알아 가고, 사냥 기술을 익히고, 결국은 좋은 동반자가 된다. 그러나 사자와 하이에나가 만나면 사자가 하이에나를 물어 죽이거나 혹은 사자가 하이에나에게 물려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 어느 쪽이든 사자 입장에서는 시간 낭비일 뿐이다.

결혼으로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줄 수 있으려면 두 사람 모두 상당한 수준의 성숙함과 배려심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최소한 둘 다 긍정적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즉, 다른 부분은 전부 다르더라도 에너지의 방향만큼은 같아야 한다.

그러나 긍정적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 부정적 에너지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부정적 에너지가 보완되는 게 아니라 긍정적 에너지가 사라져 버린다. 근묵자흑, 그저 똑같이 부정적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 되어 버린다. 이런 관계에서는 아무리 노력한들 서로의 부족함을 채울 수 없다.

감정은 재물보다도 얻기 어렵다. 사람은 재물을 내어줄 때보다 감정을 내어줄 때 훨씬 더 깐깐하고 까다롭게 따진다. 그렇게 어렵게 감정을 나누고 만난 관계에서 줄 것도, 얻을 것도 없다면 얼마나 절망스럽겠는가.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어서 만난 사람이 오히려 나를 망치는 주범이라면, 이 얼마나 비참하고 슬프겠는가.

사랑의 문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망설이고 헤매고 갈팡질팡하며 더 나은 자신이 되기를, 혹은 그런 자신으로 만들어 줄 사람을 만날 수 있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그러려면 나와 모든 면에서 대등한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래야 받을 수도 있고, 줄 수도 있다.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면 서로에게 이득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잘못된 만남일 뿐이다.



이왕이면 마음 편하게 행복하게



원하는 대로, 내키는 대로 살아도 괜찮아


유럽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 이륙하자마자 옆자리의 말쑥한 숙녀가 두꺼운 책을 꺼내 조용히 읽기 시작했다. 호기심에 슬쩍 곁눈질해 보니 어렵기로 소문난 철학서였다. 소위 현대인의 필독서라고 해서 나도 가지고 있는 책이었다. 매우 훌륭한 저서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지만, 결코 만만하게 도전할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나 역시 수차례 도전했다가 첫 번째 챕터도 못 넘기고 단지 시도했다는 데 만족하고 책장에 처박아 둔 지 벌써 몇 해던가. 보아하니 옆자리 숙녀도 이제 막 도전을 시작한 모양인지 넘어간 책장이 얼마 되지 않았다. 잠시 흥미를 느꼈지만 그뿐, 곧 피곤함이 몰려왔다. 나는 담요를 어깨까지 끌어올리고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온갖 기상천외한 자태로 실컷 자고 깨어난 뒤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장면은 옆자리 숙녀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고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었다. 얼추 다섯 시간쯤 지난 듯했는데 설마 내내 저렇게 책을 봤을까? 그 어려운 책을, 보는 것만으로 눈이 핑글핑글 돌고 졸음이 쏟아지는 책을 진작 내던지지 않고 끈질기게 붙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존경심이 절로 솟아났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대중해 보니 다섯 시간 전과 비교해 열 페이지 정도밖에 넘어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유심히 바라봤는지, 그녀가 시선을 눈치채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살포시 웃으며 가볍게 목례했다. 이를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이고 용기 내어 말을 걸었다.

“책이 재미있으신가 봐요. 전 꽤 어렵던데….” 그녀는 곤란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아뇨. 사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순간 당황했지만 그녀의 솔직한 태도에 호감이 생겼다. “그렇죠? 이 책 진짜 어렵잖아요. 에이, 그럼 읽지 마세요. 장시간 비행하는 것 자체도 힘든데 좀 쉬면서 가셔요. 영화라도 보시면서….” “그건 그닥 내키지 않아요. 시간 낭비 같아서 죄책감이 들거든요.” 미처 예상하지 못한 답이었다. 더욱 호기심이 생겼다. “그럼 장거리 비행할 때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세요? 쉬지 않고?”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네, 비행기를 탈 때면 항상 일을 하거나 평소 읽기 어려웠던 책을 읽으려고 해요. 그냥 쉬어 본 적은 없네요.” “그럼 혹시 그런 건가요? 비행할 때 특별히 집중이 잘 돼서 이 시간을 활용하는 거라든가….” “아니요. 딱히 일이 더 잘 되지도 않고, 이런 책은 더 읽기 싫어요. 솔직히 말하면 로맨스 소설이나 읽었으면 딱 좋겠네요.” 그녀가 가벼운 한숨과 함께 내뱉은 말에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녀도 따라 웃었다.

“정말이에요. 원래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는데 대학 합격하고 상경하는 기차에서 옆자리 아주머니가 할리퀸 소설을 빌려줘서 처음 읽어 봤거든요. 그때까지는 교과서랑 학교에서 내준 권장 도서 목록에 있는 책 외엔 읽은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얼마나 재미있던지! 내가 그렇게 책을 빨리 읽는 줄 그때 처음 알았다니까요.” “잘됐네요!” 나는 짐짓 과장되게 말했다.

“그럼 그런 류의 소설을 보세요. 좋아하는 걸 해야죠. 공항 서점에도 로맨스 소설 많이 팔잖아요. 원래 장거리 비행 때는 좋아하는 소설 보면서 쉬기도 하고, 피로도 풀고 그러는 것 아닌가요?” 그녀는 잠시 망설였지만 꿋꿋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안 돼요. 그런 책을 보는 건 시간 낭비잖아요. 저희 어머니가 늘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신 말씀이 있어요. ‘좋아하는 일을 다 하고 살 수는 없다. 시간은 유한한 자원이다. 네가 쓸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고 그 안에 최대한 유용한 일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후회하게 된다.”

장거리 여행의 피로로 경계가 느슨해진 탓일까, 아니면 드디어 말할 대상을 찾았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녀는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내게 옛 기억 몇 개를 털어놓았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엄격한 어머니 밑에서 자유라고는 모르고 자라 왔다. 네댓 살쯤 되었을 때, 밖에서 노는 친구들이 너무나 부러웠던 그녀는 글씨 쓰기 연습하던 것을 놓아두고 몰래 나가 그날 오후 내내 놀았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들켜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이 났다. 그녀가 펑펑 울며 ‘나도 놀고 싶다.’고 하자,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면 인생을 망친단다.”

중학교 때, 같은 반 남학생을 짝사랑하게 된 그녀는 그 사실을 일기장에 적었다. 자신의 일기를 어머니가 몰래 보는 줄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그녀 앞에서 일기장을 갈가리 찢고 대학 졸업하기 전까지 연애는 꿈도 꾸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공부에 집중해야 할 시기에 이딴 엉뚱한 생각이나 하다니. 지금 해야 할 일을 잊고 본능에 끌려 움직이는 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야!”

대학에 들어간 뒤 그녀는 브리지(Bridge, 카드 게임의 일종)에 매료됐다. 브리지 동아리에도 들어갔다. 그녀의 실력을 본 회원들은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고 칭찬하며, 동아리 대표로 브리지 대회에 나가 보라고 수차례 권했다. 그녀는 고민했지만 결국 거절했고, 아예 동아리를 탈퇴하고 브리지도 그만뒀다. 브리지가 도박이 아닌데도 늘 죄책감에 시달렸는데 그 이유는 그녀 자신이 브리지를 너무나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좋아하다 보면 브리지도 중독에 빠지게 하고 타락시키는 노름이나 다름없다고 여겼다. 그녀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공부에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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