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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위트컴

오상준 지음 | 호밀밭


리차드 위트컴

오상준 지음

호밀밭 / 2022년 5월 / 224쪽 / 15,800원





부산에 베푼 선행



전쟁 폐허에 ‘희망꽃’ 피운 위트컴 유엔군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1953년 11월 27일 발화한 부산역전 대화재는 6ㆍ25 전쟁으로 인한 폐허를 딛고 재건을 일구려는 부산 시민의 희망을 삼켜 버렸다. 부산 중구 영주동 산비탈 피란민 판자촌에서 시작된 불은 당시 부산의 번화가였던 40계단, 동광동, 부산역(당시 중앙동 소재) 등지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 화재로 29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주택 332채가 전소됐다. 피해 규모는 현재 가치로 1조 8,0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집을 잃은 6,000여 세대 3만 명의 이재민은 추위와 배고픔에 떨어야만 했다.

이때 파란 눈의 구세주가 나타났다. 리차드 위트컴 유엔군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이 미군 창고를 열어 이들에게 잠을 잘 천막과 먹을 것을 나눠 줬다. 매일 2만 3,100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과 텐트, 의류, 침구류 등 군수 물자를 긴급하게 지원했다. 장군은 화재 다음 날부터 곧바로 공병 부대를 투입해 지역을 정리했고, 일반 장병들은 4만 명이 기거할 수 있는 임시 천막촌을 준비하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장군은 12월 9일에 첫 번째 텐트촌을, 12월 10일에는 두 번째 텐트촌을 제공하겠다고 계획을 밝히면서 “이재민 중 누구라도 굶거나, 잠잘 곳, 진료 받지 못하는 경우가 없을 것.”이라고 확고한 의지를 밝혔다(1953년 12월 5일 자 《성 조지 태평양판》). 참고로 위트컴 장군이 쳐 준 천막에서 생활한 이종철 씨는 “천막촌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꿈을 키워 대학교수가 됐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전쟁은 총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


위트컴 장군은 1953년 11월 부산역전 대화재 때 군법을 어기고 군수 물자를 이재민에게 나눠 줬다는 이유로 군법 회의에 회부되고 미국 의회 청문회에 불려 갔는데, 그는 청문회에서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War is not done with sword nor the rifle. Genuine triumph is for the shake of the people in the country.)”라고 말해 의원들의 기립 박수와 함께 많은 구호금까지 받고서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전쟁이 벌어진 현시점에서 진정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전쟁을 하는지 되새겨 봐야 할 대목이다.

위트컴 선행 지도


위트컴 장군의 혼은 부산 곳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부산은 장군의 제2의 고향이다. 장군과 부산 사람은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돕거나 억울함을 풀어 주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는 의로운 마음이 강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6ㆍ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1월, 혹한이 예년보다 빨리 찾아오자 부산시가 피란민과 당시 잦은 화재로 집을 잃은 이주민에게 자기 집의 방 한 칸을 비워 주는 운동에 나섰다.

국제신문 1951년 11월 13일 자 2면에는 ‘방 없는 전재피난민(戰災避難民)에 낭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정부가 겨울을 앞두고 요정, 여관, 음식점 같은 방 많은 집을 개방해 무주택 피란민을 수용하는 방안을 추진했지만, 방이 모자라 원하는 피란민 모두에게 제공할 수 없었다. 이에 부산시 사회과는 방을 구하지 못한 피란민, 이재민과 이들에게 방을 비워 줄 시민 가정을 알선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시는 피란민에게 방세를 비싸게 받으면 100만 원 이하의 벌금 및 과태료를 부과하고 구류 처벌까지 한다고 밝혔다. 참고로 부산시는 2012년 11월 1~3일 해운대구 벡스코에서 ‘치유의 인문학’을 주제로 열린 유네스코ㆍ교육과학기술부 주최 ‘2회 세계인문학포럼’에서 이 같은 부산 시민의 휴머니즘을 국내외에 알리고, 토론 소재로 활용하기도 했다.

장군은 전후 복구를 위한 미군대한원조처(AFAK) 기금을 수동적으로 집행하지 않고 부산 시민의 편에서 발 벗고 찾아다녔다. 부산 지역 역사 연구가인 강석환은 “위트컴 장군의 헌신적인 전후 복구 노력이 없었더라면 부산의 재건은 훨씬 더뎠을 것.”이라며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라도 장군을 제대로 재조명하고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군이 부산 시민에게 베푼 주요 선행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부산대 장전캠퍼스:
부산대는 1946년 9월 부산 서구 충무동에서 단과 대학으로 개교했고 1953년 종합 대학으로 승격했으나, 이에 걸맞은 캠퍼스 부지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윤인구 초대 부산대 총장은 1954년 6월 8일 부산대를 찾은 위트컴 장군에게 종 모양의 캠퍼스 배치도를 그린 그림을 보여 주며 “교육에 대한 내 꿈을 사 달라. 부산대의 미래에 투자하라.”고 부탁했다. 윤 총장의 비전에 감동한 장군은 당시 경남 지사와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해서 50만 평의 장전동 부지를 확보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술 더 떠 장군은 캠퍼스 조성에 필요한 25만 달러 상당의 건축 자재를 AFAK 사업을 통해 지원하는가 하면 당시 전차와 버스 등 대중교통의 종점인 온천장(현재 부산은행 온천동 지점)과 부산대 무지개문을 연결하는 진입 도로(길이 1.6km)를 미군 434 공병 부대를 동원해 건설해 줬다.

메리놀ㆍ침례ㆍ성분도병원:
위트컴 장군은 전쟁 후 각종 질병에 노출된 아픈 이를 위한 병원 건립에 주력했다. AFAK(미군대한원조) 프로그램으로 메리놀ㆍ침례ㆍ성분도ㆍ복음ㆍ독일적십자병원 등 각종 병원 건립을 지원했다. 참고로 병원 건립 기금이 모자라자 그는 한복 차림에 갓을 쓰고 부산 시내를 활보하며 거리 모금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또 그는 1950년 4월 메리놀수녀의원으로 출발한 메리놀병원의 신축을 돕기 위해 예하 부대원에게 월급의 1%를 공사비로 기부하게도 했다. 메리놀병원은 우여곡절 끝에 착공 8년 만에 1962년 11월 종합 병원으로 신축됐다. 아무튼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부산 지역 의료 수준이 전국 최고로 평가받는 데는 장군의 역할이 컸다.

부산역전 대화재로 그을린 축대:
부산역전 대화재 때 그을린 축대가 중구 동광동, 영주동, 보수동 일대에 남아 있다. 이들 축대에서 화재 열기에 돌이 달궈진 뒤 비바람에 식으면서 일부가 깨진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부산 시민들이 부산역전 대화재 발생 1주년을 맞아 1954년 11월 위트컴 장군을 기리며 세운 공덕비는 도시철도 1호선 중앙역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도 조산원:
위트컴 장군은 1954년 6월 영도구 피란민촌을 시찰하던 중 만삭의 임산부가 보리밭에 들어가 아기를 낳는 장면을 목격하고 조산원을 설치했다. 참고로 피란민촌 천막에는 7, 8세대 40여 명이 집단 생활하는 터라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여건이었다.

양정동ㆍ청학동 이재민 주택:
위트컴 장군은 AKAF(미군대한원조) 기금과 부산시 시비를 투입해 부산역전 대화재 이재민을 위한 주택을 양정동, 청학동, 동래 등에 지었다. 부산 미군군수사령부는 한국군 장병과 함께 양정동에 111세대 규모의 이재민 주택을 지었고, 이를 기념해 1954년 6월 30일 ‘부산시 화재 이재민 주택 준공 기념비’가 부산진구 양정2동 59의 6 도시철도 1호선 양정역에서 동의의료원으로 올라가는 길가 씨엔에프치킨가게 앞에 높이 178cm의 첨두 피라미드 형태로 세워졌다.

UN기념공원ㆍUN평화기념관:
위트컴 장군은 ‘제2의 고향인 한국의 UN 묘지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1982년 7월 12일 숨졌는데, UN기념공원에 묻힌 유일한 장성이기도 하다. 부인 한묘숙 여사가 2017년 1월 1일 별세한 뒤 이곳에 함께 잠들어 있다. 인근 UN평화기념관 2층에는 위트컴 장군 상설 전시실이 2018년 7월 12일 문을 열었고, 장군의 따뜻한 인류애는 이곳을 찾는 시민과 교감하고 있다.



위트컴 장군과 한묘숙 여사의 러브스토리



31살 나이 차이 극복


위트컴 장군과 부인 한묘숙 여사의 러브스토리는 극적이고 감동적이다. 6ㆍ25 전쟁 이후 전쟁고아를 위한 활동을 하면서 서로 알고 지내다가 1964년 결혼했다. 참고로 31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사랑을 이루었으며, 한 여사는 재혼이었다. 한 여사는 결혼 이후 친정 가족과 생이별했다. 당시로는 이혼이 드문 데다 외국인과의 재혼으로 가족들은 여사와의 연락을 끊었다. 가족들은 ‘노랑머리 아기가 나올 수 있다.’며 반강제로 한 여사를 병원으로 데려가 자궁 적출 수술을 받게 했고,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자녀는 없다. 위트컴 장군은 한 씨가 데려온 1남 1녀를 끔찍이 사랑했다.

위트컴 장군과 한 여사 모두 부산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 위트컴 장군은 1953, 1954년 미군 부산군수기지 사령관을 지냈고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잠들었다. 한 여사 역시 아버지 한석명의 직장 관계로 부산에서 4년간 살면서 부산고등여학교(현 부산여고)를 다녔다. 한석명은 경찰관 출신으로 부산 동래군수, 경남 하동군수 등을 지냈다. 한 여사의 친언니는 작고한 유명 여류 소설가 한무숙 씨다.

위트컴 장군, 왜 귀국하지 않고 한국에 남았나?


위트컴 장군은 준장으로 퇴역하고도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위트컴 장군은 민간 차원의 한국 재건과 부흥 원조를 목적으로 하는 한미재단을 주도적으로 만들어 전쟁고아를 위해 보육원을 설립하고 후원했다. 그래서 그는 ‘한국 전쟁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위트컴 장군이 부인 한묘숙 여사를 만나 1964년 결혼한 것도, 한 여사가 충남 천안과 서울 한남동에서 고아원을 운영했고 위트컴 장군이 이를 후원한 게 인연이 됐다. 참고로 위트컴 장군과 부인 한 여사가 한평생 목을 매다시피 한 일이 있다. 1950년 장진호 전투에서 사망한 미군 해병대의 유골을 미국으로 가져오는 일이다. 저자는 2012년 6월 11일 한 여사를 서울 한남동 자택에서 만나 인터뷰했는데, 위트컴 장군이 미국으로 귀국하지 않고 한국에 남은 까닭은 전쟁고아 돕기와 북한 내 미군 유해 발굴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남아 있는 흔적 재조명



사라진 공덕비를 찾아라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전 대화재로 집을 잃은 부산 시민들을 위해 위트컴 장군이 군수 물자를 나눠 주고 천막촌을 직접 지어 줬다. 그가 베푼 선행에 도움을 받은 부산 시민들은 부산역전 대화재가 발생한 지 1주년을 맞아 1954년 11월 그를 기리는 공덕비를 세웠다. 부산 시민들은 공덕비에 ‘위트컴 장군은 우리 화재민을 위하여 이곳에 학교, 산원, 교회를 짓도록 후원하여 주었다. 우리는 영원히 그 공적을 찬양하는 바이다.’라는 글을 새겼다. 안타깝게도 위트컴 공덕비는 사진만 남아 있을 뿐 비석 존재 여부와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한편 위트컴 장군 재조명 작업을 벌여 온 김재호 부산대 전자공학과 교수와 강석환 부산관광협회 부회장은 “위트컴 공덕비가 어디에, 어떻게 세워졌는지를 조사하고, 시민 공감대를 전제로 필요하다면 다시 세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 교수는 부산대 문화콘텐츠개발원장 보직을 맡았을 당시 부산대 장전캠퍼스 조성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위트컴 장군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유튜브에 올려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그의 휴머니즘을 널리 알렸는데, 그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것이 그에 대한 고마움을 나타내는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한다.”며 “나아가 대학 안에 위트컴 기념 공원을 조성하는 등 그를 기억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산에 오기 전 위트컴의 삶



위트컴 장군 일대기 개관


위트컴 장군의 리더십을 연구하고 있는 박주홍 경북대학교 경상 대학 교수는 장군의 삶 속에 묻혀 있는 리더십의 뿌리를 찾고자, 그의 삶을 5개의 시기로 나눠 개관한다. 박 교수는 이 같은 내용을 2021년 11월 11일 유엔평화기념관 3층 컨벤션홀에서 열린 ‘제3회 위트컴 장군 기념 세미나’에서 ‘위트컴의 삶에서 발견하는 참 군인의 리더십’이라는 제목으로 주제 발표했다. 박 교수는 5군수지원사령관을 지낸 예비역 준장으로 사령관 재직 시절인 2017년 12월 부대에 ‘위트컴 장군실’을 만들었다.

박 교수는 어린 시절 가정 환경 속에서 어떻게 장군의 리더십이 형성되었는지, 임관 후 참전한 전쟁에서 리더십이 구현됐던 과정을 추적하고, 마지막으로 한국에 부임해 폐허가 된 부산의 재건 과정에서 종합적으로 발현된 장군의 리더십에 관해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연구하고 있는데, 이는 장군이 부산에 오기 전의 삶을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여서 박 교수의 허락을 받아 이 책에 소개한다.

성장기(1894~1917)는 출생부터 대학을 졸업한 시기이다. 미국 캔자스주 토피카(Topeka) 지역의 유복한 집안에서 훌륭한 부모의 가정 교육을 받으며 형제들과 함께 성장했다. 건전한 가정 환경은 위트컴을 따뜻한 가슴을 가진 자립심과 책임감이 강한 청년으로 성장하도록 했다. 캔자스의 워시번(Washburn) 대학 시절은 적극적인 학생 활동을 통해 미래의 삶에 대한 신념을 확고히 하는 시기였다.

사회 활동기(1915~1940)는 워시번대학을 졸업 후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기 전까지의 시기이다. 위트컴은 대학 졸업 후 하와이의 YMCA에서 일하면서 1917년 주 방위군 및 예비군 장교로 임관했다. 그는 다양한 회사에서 간부로 근무하고, 지역 사회의 활동에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기업 및 정부 기관의 예산, 조직, 기술 등에 관한 많은 지식과 경험을 습득했다. 여러 통신 회사에서 세일즈 매니저, 지역 책임자로 근무했고, 보스턴 시 정부의 업무 개선을 위해 다양한 지원 활동을 했다. 또 300만 달러 이상의 실업자 구호 펀드를 모금했으며, 시 정부의 자문 위원회에서 정책에 관한 조언을 통해 100만 달러 이상의 예산을 절감하는 역량을 발휘했다. 위트컴의 다양한 사회 활동의 경험은 차후 참전과 재건 과정에서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하는 중요한 토대가 됐다.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및 냉전 시대 임무 수행기(1941~1952)는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종전 후 냉전 시대에는 소련의 남하를 막기 위해 그린란드 일대 기지의 수송 및 보급 작전을 지휘했던 시기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뒤 미군의 참전이 결정되자 장군은 미군 최초로 1941년 아이슬란드에 파견돼 모든 항만을 지휘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출중한 임무 수행 덕분에 대령으로 진급한 이후 1944년에는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핵심적인 군수 부대인 11항만단의 지휘관으로 보직되어 오마하 해변 상륙 작전 지원은 물론, 계속되는 보급 지원 및 폐허가 된 도시의 재건 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했다.

이후 유럽 전선이 안정화됨으로써 1945년 11항만단은 미국 본국으로 귀국했으나, 장군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필리핀 마닐라 항만의 지휘관으로 보직되어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 그리고 종전 후 1950년부터 그린란드 툴레 공군 기지 건설을 위한 상륙 작전을 지휘했고, 1952년까지 뉴펀들랜드 항만 등 다수의 항만과 기지에 대한 수송 및 보급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부산 재건기(1953~1954)는 1953년 한국에 부임한 이후 1954년까지 화재로 인해 폐허가 된 부산을 재건했던 시기이다. 장군은 1953년 11월 부산역전 대화재가 발생하자 가능한 모든 예산, 부대, 정부 기관 등을 총동원해 도시를 재건하는 데 매진했다. 부산 재건 프로젝트는 단순히 이재민을 구호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영구적인 거주 단지 조성, 도로포장, 교량 건설, 병원 건립, 고아원 건립 등 도시 전체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는 데 중점을 뒀다. 그리고 이 같은 위트컴 장군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부산은 1년도 안 돼 정상적인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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