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노동
데니스 뇌르마르크, 아네르스 포그 옌센 지음 | 자음과모음
가짜 노동
데니스 뇌르마르크, 아네르스 포그 옌센 지음
자음과모음 / 2022년 8월 / 411쪽 / 16,800원
사라진 시간
지나친 노동량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 1930년 건축가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미래 도시를 풍부한 공간과 여유 시간이 있는 곳으로 전망했다. 일과 사생활이 분리되고 노동자들은 오전 10시에 도시로 몰려왔다가 오후 4시면 빠져나갈 것이며, 일주일에 사흘만 그렇게 일하고 나머지 4일은 자신의 미래 구상 작품인 <브로드에이커 시티> 같은 곳에서 정원을 돌보며, 삶을 즐기고 자연과 교감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넘치는 여유 시간을 걱정하는 사회: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처럼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 역시 1930년까지의 추세에 근거해 “100년 내로 경제적 문제는 해결될 수 있거나 적어도 해결 방법이 보이게 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 결과 2030년까지 평균 노동 시간은 주 15시간이 될 것이며, 그 시간조차 경제적이기보다는 인간적 필요를 반영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예상과 너무 다른 현재: 1932년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60세에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냈는데, 노동 시간 단축이라는 단 하나의 요소를 가지고 완전히 새로운 사회 건설을 궁리해보자는 제안이었다. 러셀은 하루 노동 시간을 4시간으로 줄이는 안을 제시했고 당시 많은 지식인이 동의했다. 그러나 종전 이후 러셀의 제안은 실현되지 못했다. 만일 라이트, 케인스, 러셀이 ‘2020년은 상황이 어떤가? 많은 여가 시간을 사랑하는 이들과 보내고 있는가?’ 하고 묻는다면 우리는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우리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그들이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도시에서 오랜 시간을 사무실에서 보내며 무의미하게 보이는 일을 하고 있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노동에 대한 신앙: 19세기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산업 혁명이 영국에서 처음 일어나 미국을 거쳐 남유럽과 독일에 도달하기까지 왜 그리 오래 걸렸는지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되고, 재미있는 해답을 떠올린다. 종교 개혁이 근대 자본주의 산업의 길을 닦았다는 결론이다. 다시 말해 증기 기관과 공장, 임금 노동의 기폭제는 기술이 아니라 이념이었다는 것이다. 베버는 그 증거로 초기 자본가이자 가장 진취적이었던 자본가 몇몇이 매우 신앙심 깊은 금욕적 개신교도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들은 검소한 삶을 살았으며 세속의 쾌락을 거부하고 신을 섬긴다는 추상적 이상으로 자신의 욕구를 승화시키려 노력했는데, 이것이 지속적인 고된 노동에 대한 산업 혁명의 필요에 잘 맞아떨어졌다는 것이다.
더 최근 연구들은 16, 17세기 미국과 영국에서 칼뱅주의, 퀘이커파 등 독실한 개신교 분파들이 방직, 주물 공장과 조선소에서 초기의 노동 조직화를 주도했다는 점을 확인시켜주는데, 이 독실한 신자들은 게으름을 모든 악의 근원으로 보았다. 참고로 1850년 영국 산업에서는 주 70시간쯤, 미국에서는 그보다 조금 더 오래 일하게 됨에 따라 인간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일하게 되었다. 전무후무하게 말이다. 산업화는 유례없이 많은 이득과 거대한 부를 낳았고 이는 새로운 계획과 확장에 재투자되었다. 현대의 가장 중요한 발명 중 다수가 이때 싹텄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손발이 닳도록 일했고, 그렇게 새롭게 찾은 풍요가 미래의 모두에게 더 많은 자유 시간을 가져올 거라는 희망이 싹텄다.
한편 1880년에서 1940년 사이는 위대한 발전의 시대였다. 이때 전기, 증기 기관, 기차, 농기계, 내연 기관, 전화, 백신, 자동차, 비행기, 타자기, 전신, 라디오, 페니실린 같은 신기술이 들불처럼 번졌다. 고된 노동이 눈부신 진보를 낳았고 진보는 신세계에 대한 대담한 희망을 고양시켰다. 증기 기관과 이후에 등장한 디젤 엔진이 엄청난 양의 수작업을 대체했으니, 마침내 인간이 좀 느긋해질 수 있는 날이 곧 다가올까?
아니었다. 노동자들의 대량 이탈을 막고 계속 회사에 붙잡아 둘 방법들이 새롭게 고안되었고, 결국 인간은 여전히 그물 침대에 누울 수 없었다. 19세기 말 산업 노동자들은 더러운 작업복을 벗고, 점차 손톱까지 다듬고 펜을 들기 시작했다. 겉보기에 그들은 예전과 달라진 것처럼 보였으나 자본주의 정신은 온전히 유지되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일해야 했다. 다만, 이제는 사무실에서 노동할 뿐이었다.
가짜 노동하는 사무직의 탄생: 사무직의 출발은 느렸다. 18세기가 되어서야 유럽과 미국의 큰 항구에서 서기들이 교역과 재화를 기록하기 시작했고, 1855년 뉴욕의 사무직 노동자는 피고용인 가운데 세 번째로 큰 부류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1860년 보스턴에서는 전체 인력의 40%를 차지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직종은 곧 노동 시장의 전반적인 풍경을 바꾸기 시작했다. 사무실을 잔뜩 품고 있는 건물들이 사방에 들어섰고, 생산 시설은 도시 밖으로 옮겨졌다.
참고로 니킬 서발은 『큐브, 칸막이 사무실의 은밀한 역사』에서 사람들은 처음에 사무 노동을 가혹한 육체노동에서의 해방으로 보았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차츰 사무직이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사무실에서 하는 일은 진짜 일이 아니라는 불만이 나타났다. 오피스 빌딩이 여기저기서 솟아나고 그 빌딩을 채우는 노동과 함께 싹튼 관료제 사회는 아예 새로운 직업, 새로운 업무를 고안하게 되었다.
새로운 발명은 원래 일을 더 쉽게 만들려는 의도였지만, 종종 온갖 종류의 새로운 절차와 새로운 형태의 감독, 그리고 새로운 직업을 요구했다. 전화 같은 연락 수단이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 새로운 의사소통 기술은 빠르고 효율적으로 점점 더 많은 일자리를 가져왔다. 노동자는 이를 처리해나가며 많은 생산물을 만들었지만 동시에 더 많은 문서(청구서, 영수증, 계약서, 보고서, 손익 계산서)가 생겨났고 더 많은 타자수와 통신물을 나를 더 많은 운송업자, 즉 미국에서 사무직의 초기 급증을 가져왔다.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공간은 점점 더 좁아졌고, 결국 사람들은 유례없이 빽빽하게 들어선 고층 건물의 셀 수 없이 많은 사무실 공간, 조그만 네모 칸막이 안에서 일하게 되었다.
끝없이 확대되는 사무직 일자리는 올더스 헉슬리, 허먼 멜빌 같은 작가로 하여금 사무실 업무의 삭막한 본성에 대해 성찰하게 했다. 특히 프란츠 카프카는 관료제의 괴물과 서류로 가득한 복도의 미로에 대해 세 편의 장편 소설과 수많은 단편 소설을 썼다. 하지만 아무리 작가들이 사무직의 유용성에 대한 질문, 그게 ‘진짜 일’이느냐는 의문을 제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무직은 완벽한 승리를 거뒀다. 그렇게 사무직의 지배는 전 세계로 퍼졌다.
그렇다면 사무직의 근무 시간은 어떨까? 처음 사무실은 공장을 모방했다. 직원들은 아침 일찍 출근해 오후 늦게 퇴근했다. 그런데 사무실 업무가 공장을 모방하긴 했지만 실제로는 기계나 동료와의 근무 교대 등이 공장만큼 구애받지 않기에, 직원들은 사무실에서 종종 더 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런던이나 보스턴의 초기 사무원들의 근무 일지를 조사한 니킬 서발에 따르면, 직원들은 사무실에서 보낸 모든 시간을 진짜 일에 쏟은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어떤 회사의 서기는 일찍 출근해 그날 우편물을 개봉해 읽고 난 다음 세관과 은행에 갔다가 정오에 델모니코에서 점심을 먹고 와인을 한 잔 마시거나 생굴을 먹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은행에 가서 다양한 수표에 서명하는 등의 금융 업무를 1시 반까지 본 다음 회계 사무실로 돌아와 저녁 먹을 때까지 자리를 지켰고, 정기선 같은 것이 존재했을 때는 밤 10시나 11시까지 시내에 머물러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 잠자리에 들었다.
노동의 효율을 위한 변명, 관리직의 증가: 사무직은 여전히 노동 시간 단축에 미온적이었다. 물론 현대 노동자들이 사무실 혹은 산업 현장에서 산업 혁명 당시보다 더 적게 일하는 것은 분명하다. 1870년에는 평균 70시간 언저리였던 것이 2000년에는 40시간가량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미미한 수준의 단축이다. 계산기가 암산을 대체하고, 컴퓨터와 인터넷이 문서 보관과 전달의 수고를 대신하고, 다른 수많은 기술이 절차를 더 효율적으로 만들고, 인력의 필요를 감축시킨 데 비하면 말이다.
전보가 전화에 자리를 내주고, 전화는 다시 이메일과 모바일 메시지에 자리를 내주었다. 도서관에 가서 찾아야 했던 정보를 요즘은 인터넷에서 찾는다. 예전에는 서기가 은행에 갔다 오는 데 반나절이 걸렸지만 지금은 전화, 아니 마우스를 몇 번 클릭하면 단 몇 초에 된다. 게다가 여성들이 노동 시장에 진입하면서 인력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싸우러 간 사무직 남성들을 대신했다가 한번 일의 맛을 본 여성은 평화가 돌아와도 집으로 가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남는 모든 노동력은 너무나 효과적으로 시장에 흡수되어 케인스가 그렸던 주 15시간 노동제는 또다시 저지되었다. 결국 대부분의 사무실은 이런 풍부한 인력과 그들의 시간을 아주 잘 사용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우린 대체 온종일 뭘 그렇게 하는가: 노동 시간이 짧아지기를 멈춘, 심지어 어떤 경우는 더 길어지기까지 하는 이유는 우리 사이에 퍼져 있는 어떤 통념 때문이다. 인류가 더 큰 차원에서의 유용한 진보와 개개인의 잠재적 자유 시간을 맞바꿨다는 통념을 우리는 믿지 않는다. 자료가 이런 통념을 뒷받침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예전에 비해 더 잘살게 되었을지는 몰라도 결정적 발명은 별로 이뤄내지 못했다. 미래에는 여가 시간이 점점 더 많아지고 노동은 줄어들 거라고 생각했던 케인스, 라이트 등이 오늘날의 상황을 봤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진보가 정체되어 있을 뿐 아니라, 게다가 여전히 줄지 않은 긴 근무 시간에 아마 크게 충격을 받을 것이다.
이 책에서 우리는 1세기 전에는 피할 수 없는 미래로 보였던 노동 시간 단축의 포부가 실현되지 못하고, 모든 사무직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노동이 과거만큼 사회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해답의 일부는 노동의 역사 안에 들어 있다. 인류의 탄생 이래 노동의 역사를 연구해보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인간은 재량 시간이 더 확보될 때마다 자신을 계속 분주하게 만들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냈다. 심지어 실질적인 일에서 점점 멀어지면서도 노동의 속도를 늦추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주로 실내에 틀어박혀 앉아서 일하는, 더욱더 추상적이고 점점 더 이해하기 어려운 유형의 일을 하느라 결국 더 바빠졌다.
이런 역사에 대한 조망은 지금 상황의 역설을 강조한다. 니킬 서발이 『큐브, 칸막이 사무실의 은밀한 역사』에 기록한 대로 사무직 노동자들, 즉 서기, 화이트칼라, 중간 관리자, 지식 노동자 등은 종종 의아하고 자주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이 새로운 직군의 시초는 심지어 기성 질서에 위협을 가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들의 ‘여성스러움’ 때문에 혹은 그들이 종이 말고는 생산하는 게 없기 때문이다. 또한 (쓰고 또 써야 하는) 서기, (책상에 못 박힌) 하인, (세세한 것에 얽매이는) 현학자, (뭐든 못마땅한) 관료들이 자기 일을 한 발 떨어져 구경하며 한바탕 비웃고픈 욕구를 느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게 아니라면 스콧 애덤스의 『딜버트』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미국 만화는 사무직 노동자 생활을 신경질적으로 웃기고 종종 기이할 정도로 정밀하게 묘사하여, 좌절감에 사로잡힌 팬들을 오랫동안 즐겁게 해주었다. 무능한 상사들과 의미 없는 업무, 소모적인 힘겨루기 등은 많은 사람이 아주 잘 알고 있는 풍경이다.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에서 『딜버트』에 이르는 작품들을 보면 현대의 노동 생활이 좌절감을 낳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우리는 케인스, 라이트 등이 전망했던 모든 여가 시간과 진보를 누군가에게 사기당하고 빼앗긴 듯하다. 무슨 이유에서든 간에 우리는 거의 이해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분명히 하지 않기를 선호하는 온갖 종류의 일을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텅 비어가는 노동
사회적 금기, 바쁘지 않다는 말: 2014년에 우리가 스웨덴 사회학자 롤란드 파울센을 만나게 된 것은 그의 ‘텅 빈 노동(Empty Labor)’에 대한 연구 때문이었다. 파울센은 수년간 노동 문화에 관심을 가져오다가 ‘텅 빈 노동’에 대해 자발적으로 말해줄 지원자를 찾는 광고를 내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이때 ‘텅 빈 노동’이란 ‘봉급을 받는 이가 하리라고 고용주가 기대하지 않는 활동’이라고 정의된다.
그의 연구는 많은 놀라운 사실을 밝혀냈는데, 파울센은 직장인들이 뭔가 그럴듯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사적인 행동과 전반적 게으름을 은폐할 간편한 구실을 잔뜩 가지고 있었다. 참고로 현황 조사, 인맥 관리, 고객 지원, 통상 점검, 연구 조사, 시장 분석, 사정 평가 등. 이런 일들이 어떤 절차로 구성되고,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여기서 핵심은 이런 일들이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점이다.
파울센은 책에서 일부 직원이 다른 직원들을 위해 보초 역할을 맡는 현상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보초는 동료들에게 상사가 오고 있다고 알린다. 이런 식의 책략은 대부분의 경우 무언의 동의로 이뤄진다. 일례로 늘 예정보다 늘어지게 마련인 티타임을 들 수 있다.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휘적휘적 자리에 돌아가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시간을 얼마나 보냈는지에 대해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노동의 본질과 변화
텅 빈 노동의 네 가지 유형 - 빈둥거리기, 시간 늘리기, 일 늘리기, 일 꾸며내기: 롤란드 파울센이 정의한 ‘텅 빈 노동’의 네 가지 유형을 살펴보자. 첫 번째, ‘빈둥거리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소스타인 베블런은 노동과 여가 시간의 관계를 분석하면서 빈둥거림은 상층 계급의 결정적 특징이라고 했다. 상층 계급은 돈이 많아서 스스로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계급 사람들이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돈을 줄 수 있었다. 예로 주인들이 만찬을 즐기는 동안 하인들은 한구석에 돌기둥처럼 똑바로 서 있곤 했는데, 이상한 일도 아니었을뿐더러 당시에는 이것이 단연 세련된 일로 여겨졌다.
참고로 요즘 사람들도 빈둥거리지만, 대부분은 몰래, 가끔씩만 공개적으로 빈둥거린다. 파울센이 예를 든 건, 하루에 1시간가량 일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서로 음악을 골라주거나 아니면 인터넷을 돌아다니는 직장인들이었다. 그들은 이런 상황이 옆 팀에 늘 알려지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종종 자신들이 하는 일을 숨긴다. 그렇다면 모니터 앞에 그냥 앉아 있는 것보다는 키보드라도 두드려대고 전자 달력을 색색의 칸으로 채우는 게 더 나은 위장이 아닐까?
한편 빈둥거리기가 모두의 취향이라고 할 수는 없기에 어떤 사람들은 시간을 많이 쓸 수 있는 다른 전략을 세운다. 잉여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한 두 번째 전략인 ‘늘리기’에 의존하는 것이다. 시간 단위로 봉급을 받는 조직에서는 특히 시간 늘리기가 흔하다. 늘리기의 목적은 관리자의 눈을 속이는 것만이 아니다. 사실은 자신이 필요 없는 존재라는 사실에 직면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직장이 필요해서, 출근할 곳이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그리고 ‘늘리기’ 전략을 취한 사람은 근무 시간을 넉넉히 쓰며 온갖 관계없는 일로 하루를 채운다. 뉴스를 읽고 SNS나 블로그에 게시물을 올리고 채팅을 한다. 혹은 할 일을 만들어낸다. 필요도 없는 문서 보관 체계를 재구성한다거나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일거리를 늘리려는 여러 방법을 곧바로 알아채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