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맛의 세계사
미야자키 마사카츠 지음 | 탐나는책
처음 읽는 맛의 세계사
미야자키 마사카츠 지음
탐나는책 / 2022년 5월 / 232쪽 / 17,000원
세계를 지배한 짠맛
소금을 지배하는 상인과 권력자
소금을 두고 경쟁한 베네치아와 제노바: 소금의 수요가 매우 방대했기 때문에 상인에게 소금은 큰 부를 얻을 수 있는 원천이었다. 소금은 식염뿐만 아니라 고기나 생선의 보존용으로도 많은 양이 사용되었다. 특히 14세기 이후에는 발트해에서 대량으로 잡아 올린 청어가 소금에 절여져 유럽 각지에서 판매되었다. 예수가 광야에서 수행하며 쌓은 유덕을 기리기 위한 사순절의 40일 동안은 교회가 고기 섭취를 금지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소금에 절인 청어로 연명해야만 했다. 참고로 청어를 소금에 절이기 위해서는 청어 무게의 3분의 1 이상의 소금이 필요했다. 1875년에는 청어 약 30억 마리가 소금에 절여졌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경우 약 1억 2,300킬로그램의 소금이 사용된 것으로 계산할 수 있다.
지중해 상권에서도 소금은 매우 중요한 상품이었다. 르네상스기에 부와 패권을 뺏기지 않으려 경쟁했던 베네치아와 제노바도 모두 소금 판매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도시 국가 베네치아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토르첼로 섬 주변의 라구나(갯벌)는 베네치아 최초의 제염소로도 알려져 있다. 토르첼로 섬의 염전에서는 6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 농도가 다른 몇 단계의 못을 만들어 염수의 농도가 진해질 때마다 못을 이동하는 합리적 제염을 시행하였다.
11세기가 되자 베네치아는 유럽 내륙 지역에 소금을 판매하면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14~15세기의 베네치아는 키프로스 섬에서 스페인 발레아레스 제도에 이르는 염전을 지배하고, 소금을 독점 판매해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었다. 당시 베네치아의 선박이 운반한 상품의 30~50%가 소금이었으며, 15세기 중반 소금의 연간 판매량은 3만 톤에 가까웠다. 결국 베네치아는 소금 판매를 통해 부를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베네치아의 경쟁 상대인 제노바 또한 흑해에서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많은 제염소를 지배하고, 이비사 섬을 지중해 제1의 소금 생산지로 성장시켰다.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소금을 둘러싸고 격렬한 경쟁을 펼쳤던 것이다.
네덜란드 독립 전쟁(1568~1609)에서는 ‘워터구젠(바다의 거지)’이라고 불린 신도교의 독립파가 영국의 항구를 거점으로 하여,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역에서 생산된 소금을 한자 동맹의 여러 도시로 보내는 경로를 차단하였다. 이로 인해 경제에 큰 타격을 받은 스페인은 네덜란드의 독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이 네덜란드의 독립을 승인한 1648년의 웨스트팔리아 조약에는 모든 교전국에 불이익을 주는 소금 교역의 봉쇄를 금지하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민중에게 원망의 표적이 되었던 소금세: 서민들의 생활과 깊은 관계가 있는 소금은 생산지가 한정적이기 때문에 권력에 의해 지배되는 경향이 강했다. 유럽의 왕권이 강해진 16~18세기에는 쉽게 통제할 수 있는 소금이 절호의 과세 대상으로 간주되었으며 전매품으로 고액의 소비세가 부과된 것이다. 16세기 중반, 프랑스 앙리 2세의 시대에는 소금에 대한 체계적인 과세가 시작되었다. 소금이 왕실의 주요 재원이 된 것이다. 프랑스의 정치가 콜베르는 1680년, 8세 이상의 개인에게 매주 정해진 가격에, 정해진 양의 소금 구매를 의무화하였다. 원래 프랑스에서 ‘가벨’이란 단어는 물품세를 지칭하는 단어였지만, 점차 소금세를 가리키는 단어가 되었다.
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으로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자, 혁명 정부는 1790년 소금세를 폐지하였다. 소금세 폐지는 민중에게 새로운 정권의 존재 의의를 나타낼 수 있는 지극히 알기 쉬운 방책이었다. 하지만 1805년, 소금세는 나폴레옹에 의해 부활하였다. 징병제에 의한 군대로 유럽의 패권자가 된 나폴레옹에게는 막대한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소금세를 부활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소금세는 1945년까지 유지되었다. 소득세의 도입은 그 후의 일이며, 근대적 세금의 근원은 소금세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 왕조의 흥망성쇠와 소금: 소금이 주요한 세원이 된 것은 프랑스뿐만이 아니다. 일본에 비해 면적이 26배나 되지만 해안선의 길이는 3분의 2에 지나지 않는 중국에서도 권력이 소금을 지배하였다. 중국에서는 내륙 지방의 염지나 염정(소금 우물)에서 소금이 최초로 생산되었다. 샨시성에는 260㎢나 되는 큰 염지가 만들어졌으며, 염정은 쓰촨이나 원난 등의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한나라 시대(기원전 202~기원후 220) 이후가 되자, 바닷소금이 식염의 중심이 되었다. 염분 농도가 3.5%인 바닷물은 77.9%가 염화나트륨이었는데, 소금을 골라내기 위해서는 수분을 제거해야 하는 노력이 필요했다. 염전으로 적합한 평탄한 해안이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국가가 소금을 관리할 수 있었다. 흉노족과의 대전쟁, 한반도와 베트남으로의 대원정을 반복하며 재정난에 빠진 전한의 한무제 시대 이후, 소금이 전매품이 되어 정부는 막대한 수입을 거두어들일 수 있었다. 양귀비에 빠진 당 현종에게 반기를 든 안녹산의 반란군에게 수도 장안을 점거당하여 쇠퇴한 당제국도, 반란 중이었던 758년에 소금의 전매를 시작하고 소금 가격의 10배나 되는 소금세를 부과하였다. 지방에 대한 지배력이 약했던 조정은 소비세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세금이 부과된 소금의 가격이 크게 상승하면서 소금 밀매는 빅 비즈니스가 되었다. 소금으로 오늘날의 마약 판매에 필적할 만한 거액의 이윤을 얻을 수 있었다. 소금 밀매상은 많은 부하와 지방의 유력자, 조직폭력배, 공무원을 끌어들여 대규모 밀매 조직을 만들고, 적발될 것 같으면 반란을 일으키고 도망갔다. 당나라 말기의 황소의 난(875~884)은 소금 밀매 상인이 일으킨 농민 반란으로, 이는 당나라의 몰락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소금 밀매 상인의 적발이 대제국의 붕괴로 이어진 것이다.
북송 말기, 송나라 사람인 송강의 반란군이 거점을 둔 장소는, 후에 108명의 호걸이 활약한 중국의 대표 장편 소설 『수호전』의 무대인 ‘양산박’이 되는데, 이곳은 산둥성 서부에 있는 양산 산기슭에 있어 황하가 자주 범람하는 곳으로, 소금 밀매 상인이 기승을 부리는 지역이었다.
당나라 시기부터 20세기 초, 청나라가 몰락할 때까지 소금의 전매가 이어졌는데, 소금에 대한 왕조 재정의 의존이 계속되어 대부분 국고 수입의 40%를 소금세가 차지하였다. 원나라 시대처럼 소금세 수입이 80%를 차지하는 시기도 있었으며, 소금의 판매 가격은 원가의 37배에 달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소비세율과 비교하면 당시 소금세는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가격이었다.
인도인을 분기하게 만든 23그램의 소금: 소금에 대한 무거운 세금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도 부과되었다. 20세기 민족 운동으로 유명한 ‘소금 행진(단디 행진)’은 마하트마 간디가 영국 식민지 정부에 의한 소금 통제를 무너뜨리고, 소금을 다시 민중의 품으로 되찾으며 독립에 큰 물결을 일으킨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를 지배한 영국은 인도에 도착한 영국 선박의 안정을 위한 바닥짐(선박평형수)으로서 소금을 운반하고, 50%의 소금세를 붙여 소금 판매를 독점하였다. 또한 제염 금지법을 제정하여 인도에서 소금 제작을 금지하였다. 소금이 소위 민족 억압의 상징이 된 것이다.
인도 민중의 곤궁을 강제한 제염 금지법의 폐지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61세의 독립운동 지도자, 간디가 일어났다. 1930년 3월 2일, 백의를 몸에 걸치고 둥근 안경을 쓴 간디는 79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수행처가 있는 사바르마티의 아쉬람에서 390km 정도 떨어진 단디의 해안을 향해 행진을 시작했으며, 행렬이 통과하는 약 170개의 마을에서 소금세와 소금 전매제의 폐지를 호소하였다. 민중들은 그가 가는 길에 나뭇잎을 깔고 물을 뿌리며 소금을 인도인의 품으로 되찾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일행을 맞이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소금 행진’이다.
25일 후 단디의 카티아와르 해변에 도착한 간디는 이른 아침, 바다에 들어가 제염 금지법을 어기고 아주 적은 양인 23그램의 소금을 만들었다. 매우 미량이긴 하지만 민족의 자랑스러운 소금이었다. 이로써 마침내 권력에 의한 소금의 지배가 무너진 것이다. 이를 방관할 수 없었던 식민지 정부는 간디를 체포했다. 하지만 23그램의 소금이 계기가 되어 제염 운동이 확산되었으며, 6만 명 이상의 인도인이 체포되었다. 이와 함께 인도 전역에서 영국 상품 불매 운동도 일어나 인도에 대한 영국의 지배가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간디는 ‘소금 행진’을 통해 인도의 주권자가 영국인이 아닌 인도인이라는 사실을 민중에게 알려주었다. ‘소금 행진’ 사건 약 15년 후에 영국의 인도 식민 지배는 막을 내렸다.
자연이 베푼 맛의 선물
큰 사랑을 받은 단맛
단맛의 매력: 혀의 가장 앞쪽에서 감지되는 단맛은 생명을 뒷받침하는 에너지원을 찾아내기 위한 미각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에너지의 기본이 되는 당류가 단맛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맛에 대한 인류의 욕구는 탐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며, 때로 달콤함에 대한 욕망은 충동적이기까지 하다. 인류는 자연 속에서 단맛을 끊임없이 추구해왔다.
달콤함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매우 강렬하며, 단맛은 혀에 만족감을 줄 뿐만 아니라 신맛과 쓴맛 등을 마비시킨다. 단맛이 가진 기분 좋은 달콤함에 혀가 속고 마는 것이다. 양고기처럼 향이 강하고 개성 있는 고기에 달콤한 소스를 사용해 향을 옅게 하거나, 조금 오래되어 맛이 변한 생선을 요리할 때 설탕을 많이 사용하는 것은 인간의 단맛에 대한 동경을 이용하는 것이다. 19세기 이후에는 항상 똑같은 맛을 유지해야 하는 가공식품과 청량음료가 대량 생산되었는데, 여기에도 미각을 모호하게 만들 목적으로 많은 양의 설탕 또는 인공 감미료가 혼입되었다.
생명 활동에서 단맛을 빼놓을 수 없다. 피곤하면 단것이 생각나는 것은 동맥 속의 혈당치가 떨어지면 인간은 견딜 수 없는 공복감에 시달리고 당분을 섭취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기 때문이다. 혈중 당도의 저하가 음식을 먹어야만 한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운동선수가 경기 후 당분을 찾거나, 성장이 빠른 아이들이나 임신한 여성이 단것을 매우 좋아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인간은 달콤함의 유혹에 약하다. 쾌락을 ‘꿀맛’이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단맛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가장 첫 번째 맛이 되었다. 상대방의 감정을 자아내도록 교묘하게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달콤한 말을 한다’고 하며, 듣는 사람에게는 그다지 기분 좋은 말은 아니지만 그를 위해 일부러 하는 말을 ‘쓴소리를 한다’고 한다. 기분을 좋게 하는 단맛과 혀에 불쾌감을 주는 쓴맛을 잘 구분하여 사용한 표현이다. 또한 다른 사람을 이용하여 이익을 취하는 것을 ‘단물을 다 빼먹는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단물’은 가치가 있는 것,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세계로 확장되는 맛의 영토
감칠맛을 끌어내는 발효
발효는 ‘맛의 대혁명’: 발효는 맛의 세계를 혁신하는 엄청난 발견이었다. 발효에 의해 맛의 세계는 범위가 넓어지고 깊이는 깊어졌다. 인간에게 발효는 매우 유익한 부패다. 식품의 부패는 미생물에 의해 일어나는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며, 일상생활의 어느 곳에도 존재한다. 인류는 경험적으로 미생물의 부패 작용을 이용해야 한다고 깨달은 것이다.
발효란 인류에게 유용한 작용을 하는 곰팡이, 효모(이스트), 세균(바이러스) 등 미생물(유익균)의 이로운 분해 작용을 통제하는 미시적 세계에서의 현상이다. 물론 맨눈으로 유용한 미생물을 식별할 수 없으며, 곰팡이를 식별하기 위해서는 배율 100~150배, 효모는 배율 400~600배, 세균은 배율 1,500~2,000배의 현미경이 필요하다. 인류와 발효의 만남은 굉장한 우연이었으며, 인류는 경험적으로 발효에 의한 맛을 축적해왔다.
부패나 발효가 무엇인지 몰랐던 시대에는 방치된 식품을 먹고 복통과 설사가 일어나는지 여부에 따라 유용한 발효와 해로운 부패를 식별했다. 부패한 식품을 용기 내어 먹어 보고, 냄새와 외형은 나쁘지만 맛은 더욱 좋아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맛의 세계가 확장되었다. 미생물이 가진 효소의 작용으로 새로운 감칠맛과 향미가 올라온다는 사실을 이해한 것이다.
발효는 자연계의 흔한 현상이지만 미묘한 단계에서 발효를 멈추면 맛의 깊이와 복잡함, 감칠맛이 더해진다. 무엇이 발효 식품이 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주관적인 미각이었다. 이상한 냄새를 풍기는 낫토나 블루치즈도, 맛있어지는 발효 식품도 악취를 풍기는 부패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자연계에서는 포도, 야자, 벌꿀 등 당분이 많은 식자재가 자연 상태로 발효하기 쉬웠기 때문에, 맛의 세계에는 일찍이 와인, 야자 주, 벌꿀 술이 등장했다. 발효는 농업보다 더 역사가 깊은 것이다.
어로와 유목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짧은 기간에 대량으로 수확한 생선과 고기를 부패로부터 지키기 위한 방법이 굉장히 큰 과제였는데, 이로 인해 소금을 활용한 보존법이 연구되었다. 식자재의 발효를 소금으로 통제하려고 한 시도가 젓갈, 생선장, 절임 등 새로운 짠맛의 세계를 탄생시켰다. 소금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는 지역에서는 건조, 훈증으로 부패를 억제하고 미생물의 작용을 통제하여 가다랑어포 등의 새로운 맛을 만들어냈다. 또 염소나 양, 소의 우유도 유산균의 작용으로 요구르트나 치즈로 가공되었다.
보리, 밀 등을 먹는 사람들은 딱딱한 껍질을 제거한 가루로 빵을 만들었는데, 재워두었던 생지에 우연히 효모가 혼입하게 되면서 발효 빵이 탄생하였으며, 빵에 타액이 첨가되면서 맥주로 바뀌었다. 쌀과 조를 먹는 사람들은 취사한 밥에 생긴 곰팡이 가운데 누룩이라는 유용한 곰팡이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이용해 술과 장을 만들었다.
1935년 이라크에서 발굴된 ‘모뉴망 블루’라는 두 장의 점토판은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에 농업과 풍요의 여신에게 바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여기에는 탈곡과 맥주 제조를 위해 긴 막대기로 항아리를 젓고 있는 인물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 그림 주위의 설형 문자를 통해 맥주 제조에 대맥의 맥아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문명의 탄생기부터 발효가 맛의 형성에 이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향력을 키우는 매운맛
거대 상권을 움직인 향신료
향신료는 지위?: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친 맛의 재료는 말할 것도 없이 향신료다. 유라시아 세계를 동양, 중양, 서양, 세 부분으로 나누면 향신료는 주로 인도 등의 중양에서 생산되었다. 그리고 아라비아해를 경유하여 서양으로, 남중국해를 경유하여 동양으로 엄청난 양의 향신료가 전달되면서 유라시아 상권의 형성에 공헌하였다. 향신료는 유라시아의 거대 상권을 구축할 수 있는 매혹적인 맛과 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인도와 남아시아에서는 더위로 인해 식자재가 쉽게 부패하였기 때문에 악취를 제거하고 살균하기 위해 저렴한 향신료를 복합적으로 요리에 이용하였다. 이러한 동방의 향신료는 지중해와 유럽 세계에서 사치품이자 동방의 선진 문명의 맛이었다. 지중해와 유럽 세계에서는 향신료가 주술력을 가진 약재, 문명의 맛, 지위를 나타내는 사치품으로 사랑받아 향신료 거래에 관여하는 원거리 상인에게 큰 부를 가져다주었다. 향신료는 매우 적은 양이라도 고가였기 때문에 세계적인 상품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허브도 강한 향과 다양한 약효가 있다고 여겨져 왕성하게 이용되었으나, 유력 상품은 되지 못했다. 향신료의 맛은 지위의 맛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