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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콘서트

김관웅 지음 | 더좋은책


와인 콘서트

김관웅 지음

더좋은책 / 2022년 5월 / 320쪽 / 18,000원





1부 전쟁과 와인



영국과 프랑스 백년전쟁은 와인 전쟁


1340년 6월 23일 새벽 잉글랜드를 출발한 코그선 147척이 도버해협을 건너 제일란트 앞바다 슬라위스에 들이닥칩니다. 슬라위스는 지금의 벨기에에 위치한 항구 도시로 당시 유럽에서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는 프랑스가 제노바 등 인근 해상 국가와 연합 함대를 구성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연합군이 보유한 갤리선은 속도가 빠른 데다 무시무시한 충각과 투석기까지 갖춘 첨단 군함이었습니다. 게다가 선단 규모는 잉글랜드군의 2배가 넘었습니다. 반면 잉글랜드군이 타고 있는 코그선은 양모 등을 실어 나르는 상업용 배로 전투 장비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형편없는 배였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전투가 시작되면 승부가 순식간에 갈릴 게 뻔해 보였습니다.

잉글랜드군은 겁을 잔뜩 집어먹었는지 멀리서 프랑스 연합군을 지켜보기만 할 뿐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잉글랜드 코그선 군단이 갑자기 프랑스 연합군 함대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진격하기 시작합니다. 아침이 되면서 바람의 방향이 뒷바람으로 바뀌자 이를 이용해 돌격에 나선 것이었습니다. 잉글랜드 코그선단이 순식간에 가까이 다가오자 항구에 집결해 있던 프랑스 연합군 전함들이 우왕좌왕합니다. 그러던 중 하늘에서 커다란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집니다. 잉글랜드 장궁에서 발사된 화살이었습니다. 순식간에 프랑스군 수백 명이 쓰러졌습니다. 장궁은 활대 길이가 2m가 넘는 큰 활로 200m 밖의 먼 거리에서도 기사가 입은 철갑옷을 관통해 죽음을 선사하는 정말로 엄청난 살상력을 자랑했습니다. 강력한 맞바람을 등에 업고 밀려드는 잉글랜드의 충파 공격과 이어지는 근접전에 프랑스군은 큰 바다로 나오지도 못한 채 항구에서 전멸을 당합니다. 당시 해전을 기록한 역사서에 따르면 프랑스 연합군은 단 한 척도 온전한 배가 없었다고 합니다.

백년전쟁은 이 전투를 기점으로 잉글랜드로 전세가 확 기웁니다. 잉글랜드는 이어 크레시 전투 등 잇단 전투에서 연전연승하며 거의 100년 동안 프랑스 국토 전역을 유린하게 됩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무려 116년 동안 벌인 백년전쟁은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놓고 벌인 전쟁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보르도 와인을 차지하기 위한 ‘와인 전쟁’이었습니다.

1328년 프랑스 왕 샤를 4세가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죽자 그의 사촌인 필리프 백작이 프랑스 왕위에 올라 필리프 6세가 됩니다. 그러자 당시 잉글랜드의 왕이던 에드워드 3세가 자신은 죽은 샤를 4세의 여동생이 낳은 아들이었으므로 자신에게 프랑스 왕위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하여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 갈등이 시작되고 마침내 백년전쟁으로 발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내막은 조금 다릅니다. 백년전쟁은 프랑스가 자신들의 영토 내에 있지만 잉글랜드가 소유하고 있는 가스코뉴 지방을 차지하기 위해 벌인 ‘와인 전쟁’이었습니다.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한 가스코뉴 지방은 그 유명한 보르도와 당시 최대 와인 산지이던 까오르, 가이약이 속해 있는 곳입니다. 주류에 붙은 세금은 당시에도 엄청나게 높았습니다. 보르도는 이 일대 와인이 모이는 집산지로 이곳에서 유럽 곳곳으로 뿌려졌습니다. 이 때문에 와인 무역으로 거둬들이는 세금이 당시 프랑스 내 다른 모든 지역에서 나오는 세금을 합친 것보다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스코뉴의 소유권이 잉글랜드에 있어 그곳에서 나오는 막대한 세금을 잉글랜드가 다 가져가니 프랑스로서는 환장할 노릇이었습니다.

반대로 잉글랜드에게 보르도는 정말 보물과도 같았습니다. 와인 수출로 거둬들이는 세금이 어마어마한 데다 자신들은 세금 한 푼 물지 않고 저렴한 가격으로 품질 좋은 와인을 맘껏 즐길 수 있었으니까요. 보르도에서 공급하는 포도주의 양이 얼마나 많았던지 잉글랜드에서는 극빈자 가정에서도 보르도 와인을 충분히 마실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가스코뉴 지방은 백년전쟁이 일어나기 187년 전까지만 해도 잉글랜드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1152년 프랑스 영토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던 아키텐 공국의 공주이자, 프랑스 루이 7세의 왕후인 알리에노르가 결혼한 지 15년 만에 이혼하면서 양국 간에 전쟁의 씨앗이 뿌려집니다. 이혼녀가 된 알리에노르는 나이가 서른 살이었지만 그녀가 결혼할 때 가져갔던 아키텐 공국의 땅을 루이 7세로부터 다시 돌려받았으므로 엄청난 부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미모까지 뛰어났으니 유럽 귀족들에겐 최고의 신붓감으로 꼽혔습니다. 그런 알리에노르가 선택한 새로운 배우자는 9살 연하의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이자 앙주의 백작인 헨리 2세였습니다. 헨리 2세는 1154년 잉글랜드 왕에 오르면서 잉글랜드와 자신이 가지고 있던 프랑스 북부의 노르망디와 프랑스 남서부의 아키텐 지방까지 거대한 영토를 다스리게 됩니다.

프랑스는 당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가스코뉴 지방의 소유권을 어떻게 가져올까 고민하다 프랑스 북부 지역에 위치한 플랑드르 지방을 무력으로 점령하며 잉글랜드를 자극합니다. 플랑드르는 지금의 벨기에 지역으로 오래전부터 모직물 산업이 발달한 곳으로, 사실상 프랑스 국왕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이었지만 잉글랜드에서 양모를 수입해 모직물을 만들다 보니 상업적으로 잉글랜드와 더 친했습니다. 주민들도 자신들이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기를 원하던 상황이었습니다.

잉글랜드에 많은 돈을 벌게 해주는 경제 공동체인 플랑드르가 봉쇄당했어도 에드워드 3세는 꾹 참았습니다. 혹시나 프랑스가 가스코뉴 지방에 쳐들어 와 그 지역을 복속해버릴 것을 염려했던 것이죠. 당시 잉글랜드는 프랑스에 비해 인구나 군사력 등 모든 면에서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열세인 데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와 내전을 치르고 있는 상황이어서 프랑스와 전쟁을 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왕 필리프 6세는 잉글랜드가 웅크린다고 쉽게 물러날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1337년 5월 24일 필리프 6세는 “잉글랜드 국왕이 프랑스와 짐에게 거역하고 불충을 저질렀기에 에드워드에게서 아키덴을 몰수한다.”고 선언하고 가스코뉴 지방을 공격합니다. 프랑스는 3년간에 걸친 공세 끝에 지롱드강 하구 북안의 블라예를 점령한 데 이어 1340년에는 도르도뉴강 어귀에 있는 부르마저 손에 넣게 됩니다. 프랑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사략선(해적선)을 이용해 영국의 양모선을 공격해 나포하는가 하면 잉글랜드 본토까지 넘보며 공격을 계속합니다.

그러던 중 잉글랜드가 슬라위스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며 전쟁이 시작된 지 3년 만에 백년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킨 것이었습니다. 잉글랜드는 이후 자그마치 100년에 가까운 시기 동안 프랑스 전역을 유린합니다. 하지만 1429년 프랑스의 성녀 잔다르크가 등장하면서 반전이 일어났고 결국 1453년 프랑스의 승리로 끝납니다. 그리고 가스코뉴 지방 소유권도 300년 만에 프랑스로 돌아오게 됩니다.

두 나라 5명의 왕이 대를 이어 무려 116년 동안 벌인 백년전쟁은 와인 산업에도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포르투갈의 포트 와인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됐으며 앞서 영국인들의 보르도 와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새롭게 꼬냑을 탄생시키기도 했습니다.

와인 마니아 나폴레옹, 와인으로 죽다


“샹베르탱 와인 한 잔을 보는 것 이상으로 미래를 장밋빛으로 만드는 것은 없다.” ‘샹베르탱’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입니다. 프랑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불과 24살에 장군이 되고, 30살에 프랑스 정권을 장악한 후, 32살에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은 유명한 와인 마니아입니다. 포탄이 오가는 전쟁터 막사에서도 지브리 샹베르탱 와인을 즐기며 작전을 구상했다고 전해집니다.

샹베르탱 와인은 프랑스 부르고뉴 꼬뜨 드 뉘 지역의 지브리 샹베르탱 마을에서 만드는 피노 누아 와인입니다. 강력한 산도와 타닌이 특징으로 부르고뉴에서 가장 남성적인 와인으로 손꼽힙니다. 지브리 샹베르탱 마을에는 9개의 그랑크뤼 밭이 있습니다. 그중 나폴레옹이 좋아했던 와인은 샹베르탱 끌로 드 베제라는 밭에서 나는 와인이었습니다. 샹베르탱 끌로 드 베제는 샹베르탱과 더불어 9개의 그랑크뤼 밭 중 최고 품질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지브리 샹베르탱 와인을 볼 때면 뿌연 포연이 자욱한 전장의 막사에서 향기로운 루비빛 샹베르탱 와인잔에 코를 박고 세계 정복의 장밋빛 미래를 그리는 나폴레옹의 미소 띤 얼굴이 연상됩니다. 사실 지브리 샹베르탱 와인을 잔에 따라놓으면 잔에 코를 가까이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꽃향기부터 젖은 낙엽 향, 싱그러운 풀 향 등 온갖 향기가 주변을 휘감습니다. 입에 넣어보면 우아한 신맛과 함께 “피노 누아 와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강한 타닌이 혀에 내려앉습니다. 미디엄 라이트 바디임에도 지브리 샹베르탱이 남성적인 와인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자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와인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요.

나폴레옹은 정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당시 프랑스령인 지중해의 작은 섬 꼬르스, 이탈리아 명 코르시카에서 변호사이던 아버지의 8명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납니다. 어릴 적부터 수학과 지리, 역사 등의 과목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고 합니다. 불과 16살에 프랑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장교가 된 그는 주변국과의 연이은 전쟁에서 뛰어난 작전 능력으로 승리를 거듭하며 일약 프랑스의 영웅으로 떠오릅니다. 이후 유럽 국가 대부분을 정복하며 불과 32살에 황제에 오릅니다. 샤를마뉴 이후 800년 만에 처음입니다.

그러나 그의 앞날은 장밋빛만이 아니었습니다. 황제에 오른 후 대륙 봉쇄령을 어긴 러시아를 단죄하기 위해 45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떠난 러시아 원정은 나폴레옹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놨습니다. 러시아 국토를 거의 무혈 입성하듯 정복해 들어갔지만 러시아는 워낙 넓은 땅을 가지고 있어 결국 후방 보급로 차단으로 큰 고난을 겪다 물러나고 맙니다. 러시아 원정 실패는 다른 유럽 국가들의 반기로 이어져 나폴레옹은 위기에 몰리고 맙니다. 더구나 영국군과의 워털루 전투에서 예상을 뒤엎고 패하면서 나폴레옹의 모진 시련이 시작됩니다.

나폴레옹은 영국군에 의해 대서양 오지인 세인트헬레나섬에 유폐됩니다. 아내조차 찾아오지 않는 그 섬에서 그의 유일한 낙은 와인을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지브리 샹베르탱 와인은 아니었습니다. 영국 정부에 프랑스 와인을 제공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습니다. 그나마 나폴레옹의 와인 관리인이던 몽톨롱 백작이 프랑스 와인 대신 가져오는 남아프리카 와인 뱅 드 콘스탄스를 마셨습니다. 이 와인은 프랑스 와인과 비슷한 맛이 났다고 합니다.

“내 유골을 센 강변에 묻어 내가 그토록 사랑한 프랑스 국민 속에 있게 해 달라. 나는 영국과 영국에 고용된 암살자들 때문에 내 명을 다 못 살고 가노라.” 유배지에서도 절도 있는 생활과 규칙적인 습관을 유지했던 그는 유폐 6년 만인 1821년 52살로 숨을 거두게 됩니다. 공식적인 사인은 위암이었지만 일각에서는 비소 중독이었다는 설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와인을 주기적으로 가져다주던 몽톨롱 백작이 와인에 비소를 섞어 서서히 암살을 했다는 것인데요. 몽톨롱은 그의 부인 아르빈과 결혼하려고 할 때 나폴레옹이 극심한 반대를 했고, 그가 결혼을 강행하자 그를 해임시켰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원한을 가진 몽톨롱이 나폴레옹에게 일부러 접근해 그가 마시는 와인에 수년간 비소를 섞어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프랑스, 군대, 조제핀” 단 세 마디였다고 합니다. 조제핀 드보아르네는 나폴레옹의 첫 번째 부인으로 그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었습니다. 조제핀은 결혼 전부터 강렬한 개성으로 프랑스 사교계를 주름잡던 스타였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과 결혼해 아이를 낳지 못해 그의 가문에 의해 쫓겨났습니다. 나폴레옹은 이후 오스트리아 왕녀를 비롯해 많은 여자들을 만났지만 죽을 때까지 그리워한 여인은 바로 조제핀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조제핀에게 썼던 편지 내용에는 “내 사랑, 조제핀, 오늘은 씻지 말고 나를 기다려주오.”라는 문구가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조제핀에게서 늘 그가 좋아하는 샹베르탱 와인의 냄새를 느꼈다고 합니다. 조제핀은 나폴레옹이 1814년 엘바섬에서 첫 번째 유배 생활을 할 때 먼저 세상을 뜹니다. 나폴레옹은 조제핀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단 하루도 그대를 사랑하지 않은 날이 없소. 단 하룻밤도 그대를 내 팔에 끌어안지 않은 적이 없소. 어떤 여인도 그대만큼 큰 헌신과 열정, 자상함으로 사랑하지 않았소.”라며 크게 비통해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과 샹베르탱 그리고 조제핀……. 어떤가요. 공통점이 보이나요. 오늘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샹베르탱 와인 한번 열어보면 어떨까요.



2부 와인에 취한 인류



노아부터 성직자까지…… 8,000년 전부터 와인에 취한 인류


“형님, 아우님! 어서 와 보세요. 하하하. 아버지가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자고 있어요.” 노아가 대홍수를 겪은 후 땅에 정착한 첫해, 기쁜 마음으로 포도를 수확해 만든 와인에 취해 그만 벌거벗은 채 잠들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둘째 아들인 함이 아버지의 취한 모습을 보고 마치 구경거리라도 난 것처럼 행동합니다. 깜짝 놀란 첫째 아들 셈과 셋째 아들 야벳은 겉옷을 가져다가 자신들의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질로 다가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덮어줍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들의 종들의 종이 될 것이다.” 술에서 깬 노아가 자초지종을 알고 둘째 아들 함에게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성경 속 창세기에서는 노아와 그의 세 아들, 그리고 와인이 얽힌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와인은 이처럼 성경의 창세기에도 등장할 만큼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노아가 대홍수를 겪은 후 방주에게 나와 처음 밟은 땅은 터키 남동부의 아라라트산 높은 계곡이었습니다. 이 땅에 정착해 처음 심은 게 바로 포도나무입니다. 아라라트산은 터키 동부와 아제르바이잔 사이에 위치한 아르메니아 고원 지대로 높은 봉우리는 해발 5,000m가 넘습니다. 여기에서 발원한 물이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을 만들게 되며 이곳에서 인류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 문명이 시작됩니다.

아라라트산이 있는 아르메니아 고원 북쪽에는 조지아가 위치해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 산지로 그 역사는 무려 8,500년에 달한다고 전해집니다. 조지아에서는 와인을 그비노라고 부릅니다. 이게 이탈리아로 넘어와 비노로, 프랑스에서는 뱅으로, 독일에서는 바인으로, 다시 영국으로 넘어가 와인으로 불리게 됩니다.

조지아 와인은 사페라비라는 품종을 이용해 항아리처럼 생긴 크베브리에서 발효와 숙성을 진행합니다. 아직도 고대의 제조 방식 그대로를 따라서 만듭니다. 조지아는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시원한 아열대 기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포도 생육에 최적화된 기후로 낮에는 뜨거운 햇살이 포도의 당분과 타닌을 높여주고, 밤에는 해발 5,000m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산도를 높여줍니다. 덕분에 구조감이 완벽한 아주 뛰어난 와인이 생산됩니다.

이처럼 방주에서 내린 노아를 취하게 만든 와인은 8,000년이 넘게 인류의 입맛을 사로잡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리스 북방에서는 기원전 4,500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포도씨가 발견되기도 했고, 기원전 2,500년에 그려진 이집트 벽화에는 와인을 제조하는 모습이 실감 나게 담겨있습니다. 또 기원전 1,700년경 만들어진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는 “술버릇이 나쁜 자에게는 와인을 팔지 말라.”는 규정이 기록돼 있습니다. 당시에도 사람들이 와인을 많이 마셨으며 심지어 주정뱅이까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인지 절제와 중용을 중시하던 그리스 로마 시대 사람들은 와인을 원액으로 즐기지 않고 물에 희석해 마셨습니다. 와인을 원액으로 마시면 야만인 취급을 당했습니다. 고대 시대 와인은 암포라라고 하는 술 저장 용기에서 크라테르라고 하는 커다란 그릇에 옮겨 담아 물과 희석한 후 큐릭스라는 잔에 덜어서 마셨습니다. 비율은 와인 1에 물이 3 또는 4, 혹은 그 이상이었습니다. 물에 와인을 타서 먹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아주 옅게 마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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