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의 뿌리
김세진 지음 | 호밀밭
한국군의 뿌리
김세진 지음
호밀밭 / 2022년 3월 / 298쪽 / 15,000원
여는 말한국군의 뿌리는 무엇일까? 2018년경부터 한 슬로건이 요란하게 나왔다. “한국군의 뿌리는 독립군이다.” 대통령은 김원봉을 한국군의 정체성과 연결하려 하고, 육군사관학교는 독립운동가 5인의 동상을 교내에 세우며 한국군의 뿌리가 독립군인 근거와 논리를 급하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국군의 뿌리는 도대체 뭘까? 군대는 시대별 정치, 제도, 인물과 리더십, 문화, 사상, 국제 관계 등에 영향을 받으며 형성된다. 이 책은 조선 중?후기, 대한 제국, 일제 강점기,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한국 전쟁 시기를 다루며 한국군의 뿌리를 드러낸다. 한국군의 역사를 더듬다 보면 결국 한국 근현대사를 만나게 된다. 어제는 오늘을 비추는 거울이다. 한국군의 뿌리를 찾는 여행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저물다 - 조선군
일본이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꿀 때, 조선은 관직 다툼만 하고 있었다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조총을 활용해 그때까지 창, 칼, 활로 싸우던 전쟁 양상을 바꿨고 당시 가장 강했던 다케다 신겐의 군대를 격파했다. 임진왜란 17년 전, 일본이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을 때 조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금으로 따지면 ‘청와대 비서관’에 해당하는 이조 전랑 관직을 두고 당파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반면 국력을 키우는 것에 대한 논의는 뒤로 밀려나 있었다. 1592년 4월 13일(음력) 일본군이 동래(부산)에 상륙하며 임진왜란이 시작됐다. 지난 수십 년간 피비린내 나는 전투 현장에서 살아남았던 일본군은 조선군을 간단하게 섬멸하며 압도적인 속도로 북진했다. 7년간 이어진 이 전쟁을 한국에선 ‘임진왜란’, ‘정유재란’이라고 부른다.
참고로 1392년 조선을 건국할 당시의 군사 제도는 ‘진관 체제’였다. 각 도의 관찰사 아래 둔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가 군사 업무를 담당하고 현장 지휘는 군/현의 수령이 맡는 방식이었는데, 지역을 지키기엔 유리하지만 국가적 규모의 전쟁에는 취약한 제도였다. 또한 수령은 대부분 성리학을 공부한 문관들이어서 군사적 전문성도 부족했다. 그래서 조선은 1555년 왜구 침략과 1583년 여진족 침입(이탕개의 난)을 거치며 ‘제승방략 체제’로 바꿨다. 적이 대규모로 침입하면 각 지역에선 군사를 한데 모으고, 중앙 정부는 지휘관과 중앙군을 내려보내는 방식인데, 북쪽에서 여진족을 상대할 때는 나름의 효과도 있었다. 하지만 교통과 통신이 열악한 상황에서 대규모로 빠르게 침입하는 적을 적시에 상대하긴 어려웠다. 게다가 조선은 일반 양민이 스스로 돈을 들여 군인의 역할을 맡는 부병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평소에 군사 훈련을 진행하기도, 위기 상황에서 병력을 빠르게 모으기도 힘든 현실이었다.
흥선대원군, 멸망하는 조선에 인공호흡기를 달다1863년 12월 8일(음력), 철종이 사망했다. 철종의 어머니 조 대비는 흥선군의 12살짜리 둘째 아들 이명복을 후임자로 지목했는데, 그가 조선 제26대 국왕 고종이며, 흥선군은 어린 아들을 대신해 권력을 장악하며 흥선대원군이 됐다. 그는 기존 제도들을 보완하며 개혁을 시도했다. 흥선대원군은 내정 개혁에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왕권을 강화하고자 경복궁을 중건하고 새로운 화폐(당백전)와 청나라 화폐를 유통하는 과정에서 민생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도 가문을 몰아내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하고 군사력을 강화했던 덕분에 프랑스군, 미군과 맞붙으며 강제 개항을 조금 늦출 수 있었다. 즉, 흥선대원군은 이미 기력을 잃은 조선이 조금 더 살 수 있도록 인공호흡기를 달았다.
껍데기만 남은 조선군조선은 과거 제도를 통해 무관을 선발했는데, 1800년 정조가 사망하고 몇몇 세도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등용 과정이 문란해졌고, 고종 때는 이름만 쓰면 벼슬을 주는 ‘공명첩’이 거래되는 등 관료 체제가 망가졌다. 지방군은 임진왜란을 거치며 ‘속오군+잡색군 체제’로 바뀌어 양민, 상민, 천민 등이 동시에 복무했지만, 양민들은 천민과 함께하는 것을 기피했고, 매년 일정 금액을 내며 병역을 면제받았다. 결국 상민과 천민만 남았고 무관들도 박한 대우를 받았다. 훈련도 없는 오합지졸이었다.
한국군의 뿌리와 아시아 정세 변화의 특이점 - 임오군란군대의 뿌리를 인식하는 관점은 시기, 사건, 의사 결정 또는 인물 등에 따라 달리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임오군란은 중요한 특이점이다. 국가가 군대를 어떻게 인식하고 다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이 사건으로 인해 국내외 정세도 크게 요동쳤기 때문이다. 특히 이 사건을 계기로 한반도에 외국군이 처음으로 주둔하게 되었다. 외국군은 주둔하는 국가의 정치, 사회, 경제, 군대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는 모든 제국이 이익이 걸린 지역에 군대를 배치하려 했던 이유기도 하다.
어쨌든 임오군란을 전후로 조선군은 매우 짧은 기간에 여러 번 개편됐다. 기존 군대 체제를 모두 없애고 청나라식으로 5천 명 규모의 신건친군영을 창설했는데, 이는 ‘왕이 지휘하려고 새롭게 만든 군대’란 뜻이다. 이들은 청나라군의 옷을 입고 청나라 방식으로 훈련했다. 그리고 조선은 청나라의 지나친 간섭을 조금이나마 견제하려고 일본식 군대인 친군 전영과 후영도 만들었다. 조선, 청나라, 일본 방식이 뒤섞인 부대들은 복장, 무기, 구령, 지휘, 훈련 등이 모두 달랐다. 1884년에 친군 5군영 체제로 개편하며 겉으로나마 군사 제도를 통합했지만, 외세 침입에 대응하는 건 기대조차 할 수 없었고 기껏해야 궁궐을 지키는 수준에 불과했다. 아무튼 국가 단위에서 국방 전략과 제도, 재정/행정 기반을 운영하고, 국가를 수호하려는 의지 등은 임오군란을 기점으로 소멸됐다.
움트다 - 대한 제국군
러시아식 군대로 탄생한 대한 제국 중앙군과 지방군대한 제국은 조선과 달리 군사적인 면에선 근대적인 발전을 추구했다. 오래도록 군대다운 군대가 없어 수모를 당하고 벌벌 떨었던 고종이 그래도 군대, 정확히는 본인을 지키는 군사들을 기르는 데에는 과감하게 투자했기 때문이다. 그는 1899년 6월 22일 <원수부 관제>를 반포하며 황궁 안에 원수부를 만들었다. 말 그대로 군대를 지휘하는 ‘원수’의 부서다. 대한 제국 국군 통수권자인 고종 황제는 대원수, 황태자는 원수가 되었고, 전국 군사 행정권(군정권)과 군사 명령권(군령권)은 대원수가 장악했다.
군대 지휘 권한과 체계를 통합하긴 했지만 곪아 있는 문제는 많았다. 예산을 확보하는 것부터 힘들었다. 각종 이권은 서구 열강과 일본에 넘어갔고, 경제 성장 동력을 스스로 찾아내지 못했다. 게다가 나라 곳곳에선 부정부패가 성행했다. 군사 제도는 농민이 평소에 농사를 짓다가 유사시 무기를 들고 싸우는 병농 일치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수시로 창설되고 혼합됐던 각 부대의 갈등과 반목도 극심했고, 원래 군부에서 담당한 작전, 군대 편성, 교육 등의 임무가 원수부로 통합되며 생긴 업무 혼란과 공백도 컸다. 게다가 군대는 짬뽕 그 자체였다. 군대는 그전까지 각각 청나라식, 일본식, 러시아식, 미국식으로 훈련받았다. 구령, 부대 편성, 병력 규모, 인원 배치, 무기, 복장, 훈련 방식, 생활 방법, 전술 교범 등도 전부 달랐다. 대한 제국 군인이자 훗날 독립군, 광복군 활동을 한 황학수(1879~1953)가 이를 통합하기 전까지 대한 제국군은 큰 혼란을 겪었다.
참고로 대한 제국군은 서울 친위대(1895년 9월)와 시위대(1897년 3월), 지방 진위대와 지방대로 나뉘었는데, 주력은 황실을 지키는 시위대(러시아식)였다. 대부분 보병으로 1개 연대에 2개 대대와 대포를 담당하는 포병 중대가 있었다. 1899년에는 기병 대대(정원 424명)를 창설했고, 1900년 12월 포병 중대를 포병 대대(정원 215명)로 증강하고 군악대(정원 102명)를 배치했다. 이로써 시위대는 보병, 포병, 기병, 군악대를 갖춘 전투 부대의 모습을 갖고 덕수궁을 지켰다. 어느 정도 군대다운 모습을 갖춘 중앙군과는 달리 지방군의 사정은 극도로 열악했다.
대한 제국 육군무관학교대한 제국은 간부를 기르는 정책도 추진했다. 1898년 3월 군부대신 이종건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가며 무산됐던, 무관 학교를 설립하자고 건의했다. 그리고 5월 14일 <무관 학교 관제, 칙령 제11호>를 개정하며 대한 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했다. 학교는 6월에 1기를 모집했고, 약 1,700명이 지원해 9:1 경쟁을 뚫고 200명이 뽑혔다. 1900년 1월 제1회 졸업 시험을 통과한 1기 128명이 졸업했는데(중도 하차 72명), 그들은 1년 6개월 교육 과정을 마치고 육군 참위로 임관했다. 1903년 12월 제2회 졸업 시험을 거친 37명이 졸업한 뒤, 1909년 해체되기 전까지 장교 약 500명을 배출했다.
대한 제국, 멸망하다이토 히로부미는 대한 제국 통감 임기를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 천황을 보좌하는 기구인 추밀원의 의장으로 부임했다.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가 그 뒤를 이어 2대 통감이 됐다. 그리고 1910년 5월 30일, 병에 걸린 소네 통감을 대신해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새롭게 임명됐다. 그는 러일 전쟁 전부터 육군 대신을 맡은 일본 군부 최고 실력자였는데, 그는 대한 제국을 빠르게 병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일본은 그가 서울에 도착하기도 전인 6월 24일, ‘대한 제국 경찰 업무를 일본 부에 넘긴다’는 각서를 내부대신(임시) 박제순에게 보내 체결하며, 공문서 하나만으로 경찰권을 빼앗았다.
그리고 7월 23일, 인천으로 들어오는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이완용 총리부터 모든 정부 대신이 나가 맞이했다. 그리고 이완용은 자신의 심복이었던 『혈의 누』 작가 이인직을 시켜 한일 합방을 제의했고, 8월 16일 이완용과 데라우치가 만나 합방에 합의하고 2일 뒤 내각 회의는 이를 통과시켰다. 8월 22일 창덕궁 대조전 흥복헌에서 순종, 내각 대신, 황족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일 합방안이 확정됐다. 순종은 이완용에게 전권을 위임하며 조약 체결을 지시했고, 이완용은 곧바로 데라우치 통감을 찾아가 조약에 서명했다. 이렇게 조선 왕조 27대 519년 역사는 모두 끝나고 대한 제국은 멸망했다.
갈라지다 - 의병, 독립군, 광복군, 일본군, 만주군, 중국군
수많은 갈래로 나뉜 ‘독립군’‘한국군의 뿌리는 독립군이다’에서 뜻하는 독립군은 도대체 누구를 지칭하는 걸까? 현재 대한민국에서 어느 누구도 이 질문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독립군’은 매우 다양한 갈래로 나뉜다. 민족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등 이념과 가치관, 자본과 이해관계, 활동 지역과 시기 등을 기준으로 수많은 단체와 개인이 ‘독립군’이란 하나의 관념으로 퉁쳐서 정의된다. 이제부터는 수많은 단체의 이름이 등장한다. 전체적인 흐름을 짚으며 때에 따라 세부적으로 들여다볼 예정이다. 독립군을 한국군의 뿌리로 여기는 근거는 무엇인지, 타당한 주장인지, 그래서 독립군이라는 게 누구를 가리키는 건지, 어느 지점에서 독립군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되는지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1910년대 국제환경과 독립운동의 기반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 대전 후 처리를 논의하는 회의가 파리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렸다.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각 민족은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고, 다른 민족이 간섭할 수 없다’는 ‘민족 자결주의’를 선언했다. 당시 식민 지배를 당하던 국가들은 큰 희망을 가졌다. 그런데 이는 패전국인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불가리아, 오스만 제국이 지배했던 식민지에만 해당되고, 승전국 일본의 식민지들은 전혀 관련이 없는 주장이었다. 식민지 조선인들은 이런 맥락을 파악하지 못한 채 ‘서구 국가들이 우리를 도와줄 것’이란 막연한 희망을 가졌다.
한편 의병들은 일제 총독부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경기, 강원, 황해, 함경도 산악 지역에서 소규모로 뭉쳐 활동하며 지역 경찰서, 헌병소 등을 공격했다. 하지만 그 횟수와 병력 규모는 판을 뒤집거나 국권 회복을 꾀할 수 있는 수준이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총독부는 조선인 헌병 보조원과 일제에 우호적인 조선인을 활용해 일반인과 의병을 철저하게 분리하고 색출했고, 조선인끼리 서로를 감시하고 일제에 밀고하는 경우도 잦았다. 그 결과 의병은 급속도로 사라졌다.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1919년 1월 22일 고종이 사망했다. 서울에 ‘일제가 고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조선인들이 일제에 가진 반감은 더욱 커졌다. 이후 2월 8일,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 600명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자 국내외 독립운동가들도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고종 장례식을 이틀 앞둔 3월 1일, 천도교?불교?기독교 계열 대표 주자들이 독립 선언을 하면서 3?1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해외에서도 만세 운동이 펼쳐졌다.
이에 조선 총독부는 온갖 폭력을 동원해 가며 어렵사리 운동을 진압했다. 한편 뜻있는 사람들은 본격적이고 체계적으로 독립을 추구하려고 임시 정부를 조직했다. 동시다발적으로 7개가 등장했고 3곳이 주로 활동했는데, 3월 17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의 대한국민의회(의장 문창범), 4월 11일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국무총리 이승만), 4월 23일 서울의 한성정부(집정관 총재 이승만)가 바로 그것이다. 상하이와 서울은 동시에 이승만을 지도자로 추대했고, 인재 구성도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었지만, 각 정부마다 이념, 이해관계, 방향성이 서로 달라 갈등했다.
끝없는 내부 갈등과 반목, 배반으로 와해된 임시 정부독립운동가가 맞서야 할 대상은 민족주의도, 사회주의도, 출신과 지역 할당도 아닌 ‘일본 제국’이었다. 하지만 독립운동을 했다는 대다수 기간은 조선인끼리 서로 싸우고, 이를 봉합하려고 회의를 열곤 중재 기관을 만들고 다시 분열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서로를 밀고하고 암살한 경우도 많았다. 일본 제국은 이런 ‘조선인의 성향’을 활용하며 독립운동을 치밀하게 방해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군대 조직이 와해된 이유임시 정부에는 다양한 행정 조직이 있었고 군무부가 군사 업무를 맡았다. 구성원 대부분은 대한 제국군 출신이었다. 총장 노백린, 차장 김희선은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대한 제국군에서 복무했고, 참사 황학수는 대한 제국 육군무관학교 1기 졸업생이었다. 군무부는 <대한민국 육군임시군제>, <대한민국 육군임시군구제>, <임시 육군무관학교 조례> 등을 발표하며 임시 정부 군사 활동을 계획하고 추진했다. 먼저 외부에서 지원받은 자금으로 무관 학교를 세워 만 20세 이상 남자들을 선발했다. 학교에선 육군 예식, 보병조전, 체조, 지리, 지형학, 축성학, 병기학, 전술학 등을 가르쳤다. 1920년 6월 8일, 약 6개월간 훈련받은 1기생이 졸업하고 곧바로 2기 훈련을 시작했는데 국방을 총책임지던 무관 학교장 김희선이 변절해 일본 제국으로 투항했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도인권과 황학수가 교장, 교관을 맡았지만 잘 운영되지 않고 자금도 떨어졌다. 12월 2기 24명이 졸업하고 3기가 입교했지만 결국 중간에 폐교됐다.
신흥무관학교와 무장 투쟁34년 11개월 일제 식민 지배 기간을 통틀어 ‘독립군’이 가장 활발하게 일제와 전투를 펼친 곳은 간도(남만주) 지역으로, 그 시기는 1910년대 후반에서 1920년대 초반이다. 1911년 5월 서간도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자치 기관인 ‘경학사’를 조직해 농업, 교육, 군대 등을 꾸렸다. 그리고 6월 10일, 이상룡, 윤기섭, 이시영, 이회영 형제와 김형선, 이장녕, 이장직, 이동녕 등 대한 제국군 출신들은 지린성 류허현 삼원포에서 중국인에게 빌린 옥수수 창고를 기반으로 신흥 강습소를 설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