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하다
김아타 지음 | 맥스미디어
이어령하다
김아타 지음
맥스미디어 / 2022년 7월 / 240쪽 / 19,000원
대화하다
내 마지막 모습을 찍으세요마지막 수를 놓듯, 들숨 사이 날숨 사이 말을 빚던 선생께서 당신을 사진하라 했다. 선생도, 나도, 침묵했다. 선생을 만난 지 7년, 선생은 언제나 당당했다. 한순간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듯, 우주를 지휘하듯, 때로는 온화하고 때로는 격정적으로 당신을 통제했다. 이제, 초월했다. 겁(劫)의 시간이 흘렀다. 선생의 말을 받았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詩)가 된 이어령을 사진했다. 아름다운 영혼이다.
선생은 이른 시간 동시했다. 동요했다. 시를 쓰고, 소설하고 희곡하고 평론했다. 평생을 인문의 정점에서 만다라보다 더 화려하고 섬세한 언어로 동서양을 직조했다. 그림하고 지우기를 90해를 계속했다. 이제 거푸집이 된 당신을 ‘사진하라’ 했다. 블랙홀에 가까운 선생의 마지막 시간이다. 도배지도 걷고, 미장도 걷고, 벽돌마저 걷어 낸 골조만 남은 언어적 구조가 시라면, 모든 인간은 결국 한 편의 시가 된다. 가장 난해하고 단순한 서사, 당신은 시가 되었다.
선생의 마지막 초상선생의 마지막 시간을 사진할 상상은 없었다. 사진은 내 마음 밖에 있었다. 오직, 선생과 마지막 대화를 하고 싶었다. 마지막 시간, 마지막 순간, 사진하는 일보다 더 절박함이 있었다. 대화였다. 선생께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상처가 있었다. 상실의 시간, 아버지와의 대화였다. 아버지의 죽음이다. 30년 전, 당신께서 마지막 시선을 거두기 3일 전, 아버지 사진을 찍었다. 앙상했다. 바싹 마른 장미 한 송이를 들었다. 한마디 말이 없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질풍노도의 시절, 내 정신은 카메라 뒤에 숨어 있었다.
아버지, 당신의 마지막 초상은 필름에서 화석이 되었다. 필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 그렇게 30년을 보냈다. “내 마지막 모습을 찍으세요.” 선생의 말은 초봄 아지랑이 같았다. 실바람 같았다. 나의 상상 밖에 있었던 일이다. 말하는 선생께서도, 듣는 나도, 아프지 않았다. 침묵했다. 침묵으로 답했다. 오직 믿음만 있었다. 겁의 시간이 지났다. 겁은 모르는 시간이다. 겁은 의식하지 않는 시간이다. 겁했다. 선생은 나를 보고, 나는 선생을 보았다. 서로 마주했다. 아름다운 영혼이다. 아름다운 시간이다.
비워 있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대로다. 향기가 난다. 선생의 마지막 초상이다.
내 마지막 예술의 혼을 함께해 주신 고마움을 담아몇 년 전 봄날, 마당 한쪽에 이랑을 치고 호박씨를 심었다. 2주일 남짓 되었을까? 떡잎에 밀려 올라오는 호박씨를 보았다. 여린 떡잎은 기도를 하듯 이 두 손을 모으고 자신을 내어 준 호박씨 껍질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비장하고 장엄했다. 호박씨는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고 거푸집이 되어 있었다. 거푸집이 된 호박씨의 전설처럼, 육신이 빠져나간 모든 인간은 결국 거푸집이 된다. 세포 하나도 남겨 두지 않고, 완벽한 거푸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생의 마지막 모습, 언어를 내려놓았다. 맑고 여리다. 호박씨 껍질을 밀어 올리는 여린 떡잎을 닮았다.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다. 초침이 지나는 소리, 아침에 지나간 바람 냄새, 창밖을 지나는 겨울 미소, 그 시절로 간다. 여림한다.
“내 마지막 예술의 혼을 함께해 주신 고마움을 담아.” 선생께서 혼신의 힘을 다해 선생의 마지막 책, 『메멘토 모리』에 자필 서명했다. 아다지오, 아다지오~~ 한없이 느린 슬로우 비디오처럼, 내가 만난 가장 오래된 춤이었다. 음악이었다. 음악을 해방시킨 존 케이지도, 춤을 자유한 머스 커닝햄도 이르지 못했다. 음악이다. 춤이다. 선생께서 책에 서명을 하는 그 순간, 많은 것이 함께했다. 따뜻한 겨울 볕이 가득했다.
“창가에 우는 새 / 혹시 너냐 / 보고 싶어 왔느냐” 먼저 간 딸을 그리는 통절한 선생의 시가 왔다. 까치 소리가 들렸다. 우주를 압축한 듯 야무진 찻잔, 오랜 세월 당신을 받아 준 소파, 여유로운 슬리퍼, 여기저기 하는 책들, 부유하는 먼지, 선생과 시공을 공유했던 자재하는 존재들, 계량할 수 없는 선생의 우주가 춤을 추었다. <메멘토 모리>를 축제하라! <메멘토 모리>를 축제하라! 선생은 눈을 감고, 눈을 떴다. 나는 하얀 춤을 추었다. 선생을 축복했다. 모든 것을 축복했다.
아타 선생은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 계시다2015년 8월 26일, 이어령 선생께서 당시 파주 출판 단지에 있던 나의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눈물이 난다. 아타 선생은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 계시다.” 선생님은 자연이 그림을 그리는 프로젝트, <자연하다>를 긍정했다. 선생의 긍정은 내가 절망처럼 붙잡고 있었던 <자연하다>에 생명이 되었다. 나는 “부활했다”고 『백정의 미학』에 썼다. 이틀 뒤, 나의 감사 편지에 선생의 회신이 왔다.
“충격과 어쩌면 질투에 가까운 부러움을 지니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뜻밖에 우리 가까운 곳에 지적 모험과 영혼의 탐험자들이 있기에 우리는 절망하다가도 한국을 잊지 못합니다.” 선생께서 한참을 뒤에 서 있는 서툰 사람에게 마음을 내어 주셨다. 몇 년이 지났다.
아르테논하다10년을 더 자연했다. 죽어서도 후회하지 않을 작업에 올인했다. 처음 선생을 만난 후 몇 해가 지났다. 바람이 되었다. 2020년 4월, 경기도 여주에 <아르테논>을 조성했다. <자연하다>에 대한 선생의 긍정이 큰 용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미 선생의 건강은 <아르테논>까지 나들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르테논>은 나의 총합이다. 신학과 미학과 철학이 함께한다. 이곳에서 선생과 대화를 하고 싶었다. 삶과 죽음, 이곳에서 존재와 실존을 해방하고 싶었다.
선생의 초상을 찍었다<아르테논>을 방문할 수 없는 선생의 건강을 염려했다. 선생의 초상을 역사에 남기기로 했다. <이어령얼굴하다>, 선생의 미수(米壽) 생신을 기념했다. 선생은 큰 스승이시다. 사람들은 선생을 지성의 상징으로 말하지만, 나는 창조적 인간 이어령에 초점한다. 선생은 예술 너머에 있다. 어떤 수식도 선생을 한계할 수 없다.
“아! 내가 죽음을 앞에 두고 유일한 지기를 얻은 것 같습니다.” 동산에 불과한 내 자연을 보듬어 주셨다.
마지막 메일2022년 1월 23일.
“규술이라도 꼭 쓰겠습다 먼저 누워 맀다가이제서야 열어보았 니다 전화로 설명드리지요”
당신께서 워드를 할 수 없어 구술이라도 더하겠다 하셨다. 세상에 처음 소개되는 <자연하다> 책에 선생의 말을 부탁했다. 예술사에 처음 하는 자연이 그림을 그리는 <자연하다>가 세상에 소개된다. 선생의 혜안으로 길을 내어 달라 청했다. 선생께서 보내온 마지막 메일이다.
선생의 실존은 무엇입니까?“예수의 실존이 무엇이겠습니까?” “지저스의 새크리파이스(sacrifice)는 ‘피’입니다.”
선생께 실존을 물었다. 본질에 앞서는 사르트르의 ‘실존’은 고전이다. 선생의 ‘실존’은 지저스의 피다. 마호메트의 피다, 너의 피다, 나의 피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실존’은 ‘피’로 생명한다.
선생과의 마지막 대화에서 마지막 질문을 했다. 살아남은 자인 내 가혹한 실존을 선생께 물었다. “실존이 무엇입니까?” “사르트르는 본질에 앞선다 했는데 선생의 실존은 무엇입니까?” 나도, 선생도 잠시 침묵했다. 선생께서 가쁜 숨을 쉬었다. 지저스의 희생은 피라 했다. 나는 지저스의 피, 붓다의 피, 마호메트의 피, 너의 피, 나의 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피로 받았다.
피는 본성이고 본질이다. 대단한 화두였다. 사르트르의 실존은 고전이다. 나도 60년을 더, 영락없는 실존주의자로 살았다. 본성과 본질을 떠난 실존의 정체는 없다. 실존을 비켜 갈 지성은 없다. 실존을 외면할 선생은 아니다. 위대한 지성의 실존은 추상이 아니다. 그 자체다. 죽음을 앞둔 위대한 사람, 이어령의 실존이다. 창조적 인간의 완성이다.
선생의 마지막 시간, 선생께 실존을 물었다.
편지하다
눈물이 난다이어령 선생께서 파주 출판 단지에 있던 나의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중앙일보 남정호 기자와 오랜 지기인 철학하는 수원대학교 이주향 교수가 자리를 함께했다. 남정호 기자는 2006년 중앙일보 뉴욕 특파원으로 근무할 당시 뉴욕 타임스에 소개된 ICP(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 New York) 나의 개인전 리뷰를 뉴욕발로 한국에 소개했다. 그해 뉴욕 타임스는 아츠 섹션 2페이지를 할애했다. 속된 말로 대서특필했다. KBS에서는 <젊은 그대>란 스페셜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남정호 기자는 예술에 이해가 깊은 사람으로 백남준에 대한 두 권의 책을 썼다. 이주향 선생은 소리 없는 죽비처럼 매섭지만, 이름처럼 향 맑은 사람이다.
나는 이어령 선생께서 스튜디오를 방문하기 전날 밤을 꼬박 설쳤다. 자연이 그린 그림, <자연하다>에 대한 선생의 이해가 궁금했다. 절박했던 시절이다. 이어령 선생은 모든 것이 열려 있는 창조적 인간이다. 스튜디오에는 몇 점의 <자연하다> 작품이 걸려 있었다. 선생께서 <자연하다> 제작 과정을 기록한 15분짜리 다큐멘터리를 감상했다. 이 프로젝트는 다큐멘터리를 보지 않으면 작업 배경을 이해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작업이 상식 밖에 있어 그렇다.
“눈물이 난다. 아타 선생은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 계시다.” 선생께서는 <자연하다>를 극찬했다. 수억 년을 쟁여 온 내 업(業)이 다 녹은 듯했다. 두 시간이 바람같이 지나갔다. 선생은 공감하고 감동했다. <자연하다>에 대한 선생의 공감은 나를 살게 했다. 그랬다. 선생의 공감은 나를 살게 했다. <자연하다>를 마주한 여러 외국 친구들이 눈물을 흘리며 공감했지만, 나는 이어령 선생의 <자연하다>가 궁금했다. 그리고 위로받고 싶었다.
한국 미술판에서 영원히 추방될 것이다“대단하다. 감동적이다. 이게 말로만 듣던 그 작업입니까?” 자연이 그림을 그리는, 자연 드로잉 프로젝트
였다. “그렇습니다.” “아타 선생, 그런데 아타 선생이 이 프로젝트를 한국에서 전시를 하는 그날부터 한국 미술판에서 영원히 추방될 것입니다.” 내 귀를 의심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렇게 알고 계세요.” 나는 애써 웃으며 이유를 물었지만, 그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평생을 대학에서 미학을 가르치며 인문학을 공부했던 사람이다. 2015년 3월 12일, 당시 파주 출판 단지에 있던 나의 스튜디오에서 있었던 일이다.
나의 충격은 컸다. 그는 나의 작업을 매우 긍정했던 몇 안 되는 미술 평론가 중 한 사람이었다. 기가 찼다. 그로부터 5개월 사이, 두 미술관에서 기획되었던 전시가 공염불이 되었다. 전시 포스터까지 만들어 와서 눈물을 흘리며 간절하게 전시를 요청했던 미술관이 있었다. 그녀는 미국 유학 중에 내 작업에 대한 논문을 썼다.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그 미술관의 책임 있는 위치에 자리했다. 그녀는 절절한 내용의 손 편지를 써 왔다. 전시 포스터까지 만들어 내 스튜디오를 찾아왔다. “간절히 원하면 이룰 수 있다.”라는 성경 구절을 써 온 그녀의 간절한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미술관을 방문하여 공간을 확인하고, 전시 스케줄이 완성되었을 무렵, 한마디 이유 없이 “전시를 할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가 끝이었다. 한 곳의 미술관이 더 있었다. 미술관 오너가 직접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에 감동했다. 자신의 미술관에서 먼저 전시를 하고 싶어 했다. 전시 경비 등 모든 절차가 완료되었다. 졸지에 “전시를 할 수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끝이었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작가에 대한 상식적 배려도 없었다. 21세기 문명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무리들의 경고가 작동하고 있었다. 비참했다.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5년째다. 새로운 프로젝트가 세상과 소통을 해야 하는 이유는 예술의 존재 이유다. 아티스트가 전시를 하는 일은 세상과 소통하는 일이다. 이는 아티스트들에게는 숨을 쉬는 것과 같다. 촌스러운 말 같지만, 소통은 생명이다. 전시를 하지 않으면 시나브로 결국 소멸된다. 소통하지 못하면 유통하지 못하고 결국은 죽는다. 몸이 먼저 죽고, 정신이 따라 죽는다. 순수해야 할 예술 세계에서 무리 지어 협박하고, 숨통을 죄는 것은 폭력 이상이다. 해서는 안 될 짓이다. 그러나 아티스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가 않다. 오직 작업을 계속하는 일이 전부다. 죽기를 각오했다. 지독한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 이어령 선생께서 나의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 계시다.” 선생의 말 한마디가 나를 살게 했다. 나는 이 순간을 2019년 발간했던 『백정의 미학』에서 “나는 부활했다.”라고 썼다. 나의 의지는 더 선명해졌다. 한 발을 더 내었다. 직접 전시 공간을 조성하기로 했다. <아르테논>은 그렇게 조성되었다. 미학과 신학과 철학이 함께하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이곳에서 이어령 선생과 걸림 없는 대화를 하고 싶었다. 하여 삶과 죽음, 실존을 해방시키고 싶었다. 구원의 메시지를 준 선생께 감사하고 싶었다.
평화로운 땅을 만나다
2015년 12월 31일 이후, 몇 년 동안 선생께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큰 수술을 받은 선생의 건강을 우선했다. 간절했지만, 공간을 조성하고, 선생을 초대하기로 했다. 전시 공간을 직접 만들기로 했던 것이다. 좋은 땅을 만나기 위하여 여러 곳을 다녔다. 강원도,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전국을 다녔다. 작은 땅이라도 경매가 나온 매물이 있으면 한달음 했다. 자연환경을 우선할 처지가 아니었다. 공장 지대, 바다, 산, 어디라도 좋았다. 어디든 내가 가면 그곳이 명당이라 의지했다. 나는 60년을 더 살면서 땅을 우선하지 않았다. 땅은 내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거시 경제에 무지했던 탓이다.
2006년 말, 뉴욕 ICP 국제사진센터의 개인전을 크게 다루었던 뉴욕 타임스 리뷰, KBS 스페셜을 통해 나의 예술 철학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작품이 팔리기 시작했다. 10년을 더 밀려 있던 빚을 갚을 수 있었다. 전셋집에서 벗어나고, 작업 공간을 지을 여유가 생겼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작업의 외연을 세계로 확대했다. 오직 내가 그려 왔던 그림을 재현하기 시작했다. 지금이라 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철들지 못한 나의 경제관이었다. 지혜롭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제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오매불망 땅만 찾았다. 그렇게 전국을 헤매고 다닌 지 몇 년 만에 평화로운 땅을 만났다.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이다. 복숭아밭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100년 가까이 산 사람이 그곳을 무릉도원으로 만들어 놓았다. 감사했다. 직접 터를 고르고 건물을 조성했다. 여전히 갈 길은 남았지만, 유일한 공간을 만들고 있다. 사유와 성찰의 공간, <아르테논>이다. 작은 공간이지만, 자존감은 충만하다.
선생은 <아르테논>을 조성한 큰 이유이다. 4년 만에 이어령 선생께 소식을 전했다. <아르테논>에서 선생과 속 깊은 대화를 하고 싶었다.
아르테논하다
백수(白壽)하다
2020년 12월 29일 작은 퍼포먼스를 했다. 선생의 미수 생신날 점심 초대를 받았다. 밥맛이 좋은 여주 진상미 한 가마를 가져갔다. 쌀 포대를 열고 한 알의 알곡을 가져왔다. “백(百)에서 한 획을 가져가겠습니다.” 한 획을 뺀 99, 백수(白壽)하시라는 의미였다. 선생께서 그대로 받고 즐거워하셨다. 함께 웃었다. 한 개의 알곡을 유리 앰플에 담았다. 자자손손, 선생을 상징하는 식의 자양분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