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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콘서트

만프레트 뤼츠 지음 | 더봄


기독교 콘서트

만프레트 뤼츠 지음

더봄 / 2022년 6월 / 407쪽 / 22,000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 유일신교는 인류의 위협인가?




신은 위대하다! 오늘날 세상에서는 어디선가 이러한 외침이 들리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몸을 피한다. 사람들은 종교란 말을 들으면 폭력, 배타주의, 몰상식을 떠올린다. 평화를 사랑하는 상당수 무슬림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기독교 신자는 기독교에도 폭력의 역사가 있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사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인도에서 힌두교도들이 이슬람 사원에 불을 지르고, 미얀마에서는 불교도들이 무슬림 자국민을 모조리 절멸시키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결국 종교를 완전히 배제하고 사랑과 평화를 추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20세기에 이러한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3명의 독재자인 이오시프 스탈린(Josef Stalin),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마오쩌둥(毛澤東)은 공통적으로 무신론 이데올로기를 신봉했는데, 그들의 국가에서 약 1억 6천5백만 명의 사람들이 살해당했다. 2천 년 전 인류 전체 수가 이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에 대한 회의는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

유일신교의 출현


고대 이집트를 연구하는 고고학자 얀 아스만은 유일신만이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논제를 발표해 세계적으로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유일신을 믿는 사람들이 오로지 자기들만 진실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고약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한편 철학자 오도 마르쿠아르트는 다신교를 열렬히 찬양한 바 있다. 왜냐하면 다신교 신자는 여러 신 중에서 자신이 섬길 신을 자유롭게 고를 수 있으며, 다른 신을 믿는 이들을 죽이는 일은 없기 때문이란다.

한편으로는 납득이 될 만한 주장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론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과학이 추악한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이 멋진 이론을 없애 버릴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기반으로 삼아, 오늘날 역사학은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그리고 이때 우리는 그 민족만 섬기는 신들로 이루어진 민족 신화에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권리, 특히 생존권이 전적으로 자기 민족에게만 있으며 다른 민족에게는 없다고 여기는 바람에, 다른 민족을 상대로 벌이는 무자비하고 잔혹한 전쟁이 일상다반사로 일어났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에게 살인과 살육은 전혀 살인과 살육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기 민족에 소속되어 있으면 다른 사람과 이 민족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데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대략 기원전 1300년에 어떤 민족에 속하는 어떤 사람들이 위태롭고 막연하게 유일신을 믿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유일신의 정체는 점점 명확하게 드러났다. 즉 이 유일신은 온 세상을, 온 민족을, 온 인류를 창조했다. 이것은 혁명적이었다! 각각의 종족이 섬기는 신들은 자기 부족만 관장하는 존재일 뿐이었고, 이 신들은 자신을 섬기는 민족이 치르는 유혈이 낭자한 대전투에서, 자신의 시각에서는 허약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상대방 민족의 신들에게 분노를 표출하며 싸우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모두를 위한 신이 등장한 것이다!

여기에 담긴 의미는 겉보기보다 훨씬 더 많았다. 즉 이제 사람들은 이 유일신을 신심의 차원은 물론 이성적 차원으로도 믿었거나, 아니면 아예 믿지 않았다. 또한 사람들은 신의 말씀에 기꺼이 귀를 기울였거나, 아니면 전혀 경청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내면적인 것, 심리적인 것, 그러니까 정신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개인적인 것이었다. 참고로 얀 아스만은 다음과 같이 썼다.

인간은 “공생하는 세상과의 관계에서 해방되고, 세상 밖에 있지만 세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유일신과 파트너 관계를 맺어 자주적이거나 또는 신의 지배를 받는 개인으로 발달한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더 이상 단순히 외적 의식을 통해 부족의 영원한 질서를 확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고, 복수심에 찬 신들의 욕구를 진정시키기 위해 희생 제물, 심지어 사람을 희생시키는 제도를 유지하지 않았다.

욕구가 없고 초월적인 유일신은 개인적이고, 자유로우며, 윤리적인 판단을 인간에게 요구했다. 신은 내면적인 것을 요구했다. 결국 시대는 이러한 신들의 법정에 서게 됐다. 이후 인간은 오로지 홀로, 단독으로, 신 앞에 섰다. 이제부터는 인간보다 신에게 더 복종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그런 생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명백해져서, 인간은 자유로웠고, 자유롭게 판단했고, 자신이 내린 판단이나 대답에 책임을 져야 했다. 여기서 대답이란 신의 심판도 감수한다는 의미에서의 대답이다.

이런 방식으로 인간은 종교의 자유라고는 전혀 모르던 부족 종교라는 감옥에서 탈출했고, 관용을 배워야 했다. 신 자신은 오로지 내면적인 복종만 바라서, 강요된 복종은 전부 의미가 없게 됐다. 자유롭게 신앙을 갖는 유일신교이기 때문에, 유일신교의 기원은 오늘날 인간의 자유와 자율로 이해할 수 있는 성향을 보인다. 그런데 당연히 이 모든 것은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게 아니라, 수 세기 동안 발전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스라엘 예언자들과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다신교에서 해방되어 외부 종교 유형과는 거리를 둔 채 이와 같은 발전을 촉진시켰다. - 얀 아스만이 말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에서는 ‘마음의 문화’로, 고대 그리스에서는 ‘영혼의 문화’로 향했다.

세계 사회는 어떻게 발명되었는가


유일신교를 통해, 하나뿐인 신 앞에 자유로울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시각도 등장했다. 십계명 중 제6계명인 “너는 살인하지 말라.”는 같은 부족 사람을 살해하지 말라는 것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인간을 죽이지 말라는 보편적인 의미로 해석됐다. 첫 번째로 이 유일신을 상대로 인류라든가 세계사에 대해 말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우선 이를 지나칠 정도로 분명하게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된 민족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에 기독교 교리를 전파할 신자들을 보냈다. 그리고 결국 유대인인 베드로도 이를 깨닫는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사도행전 10장 34~35절) 기독교는 모든 민족이 평등한 권리를 행사하도록 했다.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이 단언하기를, 세계 종교는 “말하자면 세계 사회를 미리 구현한다.”

예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예수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요구했다. 원수 죽이기를 포기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사랑하라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세상 물정에 어두운, 정신 나간 도발로 보였을 것이 분명하다. 이전에는 친척, 씨족, 부족, 인종을 우선적으로 중요하게 여긴 반면, 기독교는 사람들을 어떤 민족이냐에 상관없이 완전히 동등하게 교회로 불러 모았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에게는 더 이상 선택된 민족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바로 선택된 민족이고, 이는 모든 민족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독교는 처음부터 사람들이 사는 세상 전체를, 또는 오늘날 쓰는 용어로는 글로벌화를 목표로 삼았다. 아울러 유일신교에는 또 다른 기원이 싹을 틔우고 있다. 선사 시대 우주론적인 종교에서는 일상적으로 남성은 태양, 여성은 달과 일치시켰다. 이로 인해 여성은 항상 남성을 반영하는 존재일 뿐이며 절대 동등한 권리를 얻지 못했다. 이와 반대로 유일신교는 남성과 여성 모두 똑같이 인간의 품위를 누린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예를 들어 결혼에 대한 개념도 바꾸었는데, 이제 결혼은 점차 동반자 관계에 합의하는 형태가 되었다.

세계사의 전개 과정을 보면 자유, 평등, 인간의 품위는 유일신교를 통해 비로소 실현됐다. 근대 법치 국가는 이러한 정신적 토대를 바탕으로 한다. 근대 법치 국가는 시민의 내적 동의를 기반으로 법과 정의를 열렬히 추구하며, 이에 따라 폭력의 감소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유일신교는 혁신적, 혁명적이었던 반면, 부족 종교는 기존 관계가 옳다고 계속 고집했다.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신의 심판은 억압받는 자, 약자, 인생의 희생자를 위한 희망이었고, 신의 정의가 마침내 성취될 거라는 희망이었다.

이 모든 것은 유일신교가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해서도 설명해야 제대로 고려할 수 있다. 얀 아스만은 인간이 자기만이 진실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으면 유혹에 빠진 것이라고 했는데, 그의 말이 확실히 맞다. 그리고 유일신을 믿는 종교의 광신도들의 경우, 이론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비관용과 과도한 폭력을 보인다. 하지만 결정적인 질문은, 역사적으로 보면 대안, 즉 유일신교가 없는 세상이 훨씬 평화적이고 인간다웠냐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결과는 최근에 이루어진 학문 연구에서 명확하게 나온다. 즉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결론이다!

심지어 얀 아스만도 원래 주장했던 논제를 2015년에 수정했는데, 그는 결국 유일신교의 전환기에는 “과도한 폭력과 유혈 사태가 뚜렷하게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전의 부족 종교도 똑같은 현상이 있었으며 이러한 폭력 형태 중 상당수는 “유일신교 세력이 신장되는 변화 과정에서, 유일신교에 의해 억제되고 교화되고 근절되었다.”고 옹호했다. 그래서 얀 아스만이 결국 다음과 같이 요약하는 상황은 전혀 놀랍지 않다. “유일신교가 세상에 폭력을 몰고 왔다고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다. 이와 반대로 유일신교는 살인을 금지하고, 사람을 희생물로 삼는 것과 억압을 혐오하고, 하나뿐인 신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을 옹호하고, 이 세상에서 폭력적인 행위를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중세와 성전(聖戰) - 새로운 인간의 발명부터 기형아의 최후까지



유럽 연합과 십자군, 그리고 터키


십자군 전쟁은 엄청나게 중대한 질문을 던진다. 수천 년 동안 기독교는 평화의 종교로 두드러진 면모를 보였다. 전쟁을 저지할 수 없는 곳에서도, 기독교는 전쟁을 막고 호전적인 정신 상태를 약화시키려고 애썼다. 비잔틴 제국은 여전히 그렇게 했다. 하지만 이제 서양 기독교의 최고위 대표자가 무기를 들라고 호소했다. 그래서 첫 번째로 성전(聖戰)에 대한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십자군 전쟁이, 예언자 무하마드가 무슬림에게 명령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성전이었을까?

이슬람학자 틸만 나겔은 이슬람에서의 성전은 ‘이슬람 영역을 인간이 사는 세계 전체로 확장한다는, 모든 인류사의 목표에 다가가기 위해’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이슬람 성전은 맨 처음에는 내부 투쟁이 전개되지만, 이후 추가로 ‘이교도에 맞선 전쟁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것’도 중요하게 된다. 하지만 버나드 루이스는 예언자의 시대 이후 지하드라는 개념이 주로 군사적인 의미로 사용된다고 보고, 한스 큉은 이슬람은 “시작과 유래부터 군사적인, 신의 전사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 이러한 관점에서 초기 기독교보다는 초기 유대교 및 그들이 내세운 ‘여호와의 전쟁’에 훨씬 가깝다.”고 설명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기독교는 항상 평화의 종교였으며, 성전이라고는 전혀 몰랐다. 그래서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라고 촉구하자 기독교 비판가들, 특히 교회법학자들은 반대했으며, “사라센인(중세 유럽인이 서아시아의 이슬람교도를 부르던 호칭)이 기독교인과 평화롭게 살면 공격받거나 살해당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보였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학자 벤야민 Z. 케다르는 기독교 진영이 일반적으로 이슬람을 증오한다고 추정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특히 교회가 전쟁에 대해 적대적인 견해를 보였다.

1139년에 실시된 제2차 라테란 공의회는 ‘석궁술과 궁술이라는 치명적이면서 신의 미움을 사는 전쟁 기술’을 비난했다. 훗날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대략 1467~1536)는 자신이 보기에 전쟁은 ‘모든 재앙이 모인 거대한 바다’라고 했다. 그리고 에라스무스는 기독교가 평화주의를 지켜 나가도록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알리는 사람은 언제나 평화도 알린다. 당신은 검으로 형제의 심장을 찌르면서, 입으로는 공동체의 아버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외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당시 기독교도는 진공 공간에서 살지 않았다. 현대 국제법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신의 법을 옹호할 수 있어야 했다. 교회도, 교황도 그래야 했다. 5세기에 교황 레오 1세는 훈족을 되돌려 보냈고, 150년 뒤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호전적인 랑고바르드족을 방어했다. 이후 교황은 피핀의 기증(756년 프랑크 왕 피핀 3세가 교황에게 자신이 점령한 옛 라벤나 총독부 지역을 기증한 사건) 덕분에 세속 권력으로부터 자주성을 확보하기는 했다. 피핀의 기증으로 교황은 자신의 영토를 소유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제 평화의 종교인 기독교의 대표자인 교황은 실제로 호전적인 분쟁이 일어나는 상황에 말려들었다. 846년 아라비아인들이 바다를 건너와 로마를 파괴하고 성 베드로 대성당을 약탈하자, 교황 레오 4세는 극도의 노력을 기울여 결국 적을 퇴각시켰다. 당연히 군사적 노력을 통해서였다. 이 시기에는 불가피하게 치러야 할 자유의 대가였다. 심지어 교황이라도 말이다.

기독교도의 평화에 대한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서 비롯됐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인간의 천성을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에서도 기인한다. 그래서 라둘푸스 니제르는 제3차 십자군 원정이 단행되자, “무슬림의 천성은 우리와 똑같다.”라고 상기시켰다. 그리고 이교도도 우리와 대체로 같으며, “비록 신앙이 없기는 하지만 엄연히 인간이다.”라고 주장했다. 반면 인간의 천성에서 권리가 나온다는 생각은 이슬람교도에게는 없었다. 그들은 오로지 신의 계율만 알았다. 이는 터키의 술탄 메흐메드 4세(1642~1693)가 한 말만 보아도 설명할 수 있다.

또 다른 질문은 십자군 전쟁이 과연 기독교 신앙을 힘과 폭력으로 전파하려 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 또한 스캔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선교에 대한 생각이 십자군 전쟁에서 결여됐다는 사실은 놀랍다. 교황 우르바노 2세의 호소를 다룬 보고서는 여러 차례 나왔지만, 이 중 어느 것도 교황이 무슬림의 개종을 촉구했다고 주장하는 내용은 없다. 그리고 벤야민 Z. 케다르가 연구 조사에서 찾아낸 것처럼, 나중에 나온 교회 성직자들의 호소에도 비신자의 개종을 요구하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

이는 기독교도가 기본적으로 선교를 대하는 방식과 완전히 일치했다. 하지만 중요한 신학자 중에서는 유일하게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1090~1153)가 선교에서 때로는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1140년에 편찬된 중요한 교회법 법령집인 『그라티아누스 교령집』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씀을 설명하는 부분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누구에게도 신앙을 강요할 수 없다.”

아무튼 십자군 전쟁은 알라의 이름으로 전 세계에 이슬람 영토를 확장하려는 지하드 같은 성전이 아니었다. 불과 검을 앞세운 선교도 아니었다. 십자군 전쟁은 공격전이 아니라, 성지에 사는 기독교도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전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한편 십자군 전쟁은 대단히 독특한 전쟁이었다. 처음에는 종교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무장한 이들의 성지 순례였고, 교황들이 십자군 전쟁을 이끈 것은 아니었다.

유럽 권력층이 연합해 주도했는데, 그들은 오늘날 유럽 연합(EU)의 선배 격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교황이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도록 역할을 했고 후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군 전쟁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대변하고 옹호하던 것에 전부 위배됐다. 십자군 전쟁은 게르만족의 폭력적인 전통과 기독교의 평화를 사랑하는 전통 사이에서 태어난 기형아였다.

십자군 전쟁 시대 말기에는 에스파냐 출신의 후안 루이스 비베스(1493~1540)가 우뚝 서 있다. 당시 터키인은 신의 재앙과도 같았다. 그들은 1453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무자비하게 콘스탄티노플을 유혈 정복했고, 1529년에는 빈을 위협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베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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