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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커피 이야기

우스이 류이치로 지음 | 사람과나무사이


세계사를 바꾼 커피 이야기

우스이 류이치로 지음

사람과나무사이 / 2022년 6월 / 329쪽 / 18,000원





이슬람 세계를 지배한 ‘검은 음료’ 커피



이슬람 신비주의 종파 수피교 수도사들은 왜 ‘커피’에 매료되었을까


커피가 맨 처음 이슬람에서 유럽으로 전해졌을 때 난생처음 이 독특한 상품을 만난 유럽인들은 단숨에 매료되었다. 여태껏 본 적이 없는, 콩처럼 생긴 알맹이를 갈아 만든 검은색 음료에는 아득히 먼 땅 아라비아 저편이 지닌 이국적이고도 낭만적인 행복감이 스며 있었다. 커피의 기원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에티오피아의 산양치기 칼디의 이야기를 꼽을 수 있다. 이야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칼디는 새 목초지를 찾아 산양 무리를 몰고 갔다가 어둑어둑한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한데 웬일인지 낮 동안 배가 부르도록 실컷 풀을 뜯어 먹은 양들이 흥분한 채 밤늦도록 잠들지 못했다. 당황한 칼디는 가까운 수도원의 스키아들리 수도원장을 찾아갔다. 스키아들리 수도원장은 면밀한 조사 끝에 산양들이 어느 작은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결과 일어난 사태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는 호기심이 발동해 그 열매를 잔뜩 따다가 온갖 실험을 해 보았다. 그러다가 급기야 그걸 물에 넣고 끓여서 마셔 보았다. 그날 밤 그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밤새도록 침상에서 뒤척이던 중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젊은 수도사들에게 그 열매를 끓인 음료를 먹여 보자는 생각이었다. 밤에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 꾸벅꾸벅 조는 수도사들이 몇 명씩 있었다. 수도사들에게 나무 열매 끓인 음료를 마시게 한 결과 저녁 예배에서 조는 수도사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에 스키아들리 수도원장은 크게 기뻐하며 저녁 예배 때마다 수도사들에게 그 음료를 마시게 했다.

이 밖에 여러 가지 커피의 기원 전설에는 예외 없이 이슬람의 수도사가 등장하는데, 그들은 모두 ‘수피’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슬람 신비주의의 수도사들이다. 수피교 수도사들이 동아프리카를 원산지로 하는 커피나무에서 커피라는 이름의 독특한 음료를 만들어 내는 데 기여했다고 전해진다.



커피의 상업적 가치를 간파하고 이익을 극대화한 이슬람과 유럽 상인



17세기 전 세계 커피 시장의 유일한 공급원이던 국가, 예멘


『구약성서』에 전해져 오는 대홍수가 지나간 후 노아가 방주에서 처음 발을 내디딘 곳은 어디일까? 오랫동안 터키의 아라라트산을 비롯한 몇몇 장소가 주요한 후보로 거론되었다. 그런데 아라비아에도 노아가 방주에서 첫발을 디딘 곳으로 꼽히는 산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예멘의 오래된 도시 사나 옆에 우뚝 선, 해발 3,660미터로 아라비아반도에서 가장 높은 나비수아이브산이다. 이 산기슭에서 커피 재배가 시작되었다. 대홍수가 잠잠해진 뒤 노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흥미롭게도 와인을 만들기 위해 포도를 심었다고 한다. 이 점을 생각하면 나비수아이브산 기슭은 ‘이슬람 와인’ 카와의 재배지로 매우 적합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커피나무는 연중 서리 내리는 날이 전혀 없을 정도로 온난한 기후와 연간 1,200밀리미터의 강우량을 필요조건으로 한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계곡이나 비탈은 아무리 ‘행복한 아라비아’ 예멘이라고 해도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도 2,000미터를 넘으면 서리가 내릴 위험이 있고 고도 1,000미터 이하는 여름에 열기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최적의 장소는 남서 아라비아의 서쪽 비탈, 마나하를 중심으로 하는 해발 1,100~2,200미터 지점을 꼽을 수 있다. 계곡의 풍부한 비탈이 커피 생육에 필요한 일정하고 따뜻한 기온을 보장해 주었으며, 홍해에서 올라오는 구름이 습기를 제공해 주었다.

예멘의 커피 재배는 대부분 목가적인 가정 농원에서 소규모 형태로 이루어졌기에 최고 성수기에도 연간 1만 톤을 넘지 못했다. 커피를 재배하자면 우선 밭을 개간해야 하고, 제대로 된 관개 시설을 갖춰야 한다. 그리고 너무 강한 햇빛이나 해충을 막기 위해 커피나무 주위에 키 큰 나무도 심어 주어야 한다. 커피 생산 과정은 복잡한 데다 돈이 많이 들었다. 게다가 커피나무를 심은 뒤 열매를 맺기까지 5년쯤 걸리는데, 그때까지는 수익이 전혀 없다. 따라서 커피 재배는 일정한 자본 축적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커피라는 상품은 애초 든든한 자본이 뒷받침되어야만 시도해 볼 수 있는 만만치 않은 산업이다.

커피를 마시는 습관은 순식간에 아라비아, 페르시아, 터키 등 이슬람 세계를 넘어 퍼져 나갔다. 커피 하우스도 아라비아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는 동시에 차츰 유럽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1652년에는 런던, 1666년에는 암스테르담, 1671년에는 파리, 1683년에는 빈, 1686년에는 뉘른베르크, 프라하, 1687년에는 함부르크, 1694년에는 라이프치히……. 이런 식으로 유럽 각 도시에 생긴 최초의 카페가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커피 수요는 갈수록 늘어나는 데 반해 커피 원료의 유일한 공급 국가는 예멘뿐이었다. 예멘은 세계 커피 시장을 독점하는 국가로 위세를 떨쳤다. 커피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으며 예멘은 미증유의 풍요를 구가했다. 당시는 ‘행복한 아라비아’의 낙원 시대였다.

생산자에게 구매한 커피는 최종적으로 티하마 평원에 위치한 마을 베이트알파키에 집결했다. 베이트알파키는 예멘에서 가장 큰 것은 물론 세계 최대 커피 시장으로도 유명했다. 이집트, 시리아, 이스탄불, 모로코, 페르시아, 인도, 그리고 유럽 각지에서 온 커피 상인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커피를 출하하는 곳은 모카, 호데이다 등 홍해에 접해 있는 항구였다.

‘아라비아 모카’라는 명칭은 커피 문명이 갖는 독특한 문제를 명확히 보여 준다. 아라비아에서 생산된 커피가 출하되는 항구 이름을 따서 ‘모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딱히 이상할 것이 없다. 모카는 17세기 중반 무렵 이미 연간 8만 포대(1포대는 약 60킬로그램)를 출하하고 있었다. 하지만 커피 출하가 모카항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호데이다나 그 밖의 항구에서도 양적으로 따지면 모카보다 더 많은 물량을 출하하고 있었다. 모카가 예멘 커피를 대표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유럽 중심주의 사관에 따른 현상이다. 모카항의 특수성이란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의 유럽 선박이 오직 이 항구에서만 직접 기항을 허락받아 커피를 매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커피 교역은 처음부터 거창한 국제성을 띠었다. 초기 커피 교역을 주도한 이는 모카나 아덴을 비롯한 아라비아 소도시의 상인들이었다. 그러나 반드시 아라비아인일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옛날부터 아라비아에 살면서 상업 활동에 깊이 관여해 온 유대인을 빼놓을 수 없다.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가장 오래된 커피에 대한 노래로 『카트와 커피』가 있다. 17세기 예멘의 유대 상인들 사이에서 불린 이 노래는 아라비아 문자로 기록된 히브리어 노래다.

커피 교역 독점권을 남아라비아 상인에게서 빼앗은 카이로 거상들


커피 교역에는 수많은 중소 상인이 관여했다. 그런데 커피가 이슬람 세계에서 정당성을 확보하고 여러 대도시에 1,000곳이 넘는 커피 하우스가 들어서게 되면서 커피 교역은 이전과 달리 막대한 이익을 낳는 사업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카이로의 거상들이 이러한 커피 교역을 가만히 두고 보기만 할 리 없었다. 그들은 곧바로 남아라비아 상인들에게서 커피 교역 독점권을 빼앗았다. 이는 약삭빠른 이익 계산에 따른 것만은 아니었다. 카이로의 거상들은 커피를 그들 교역 활동의 중심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역사적 필연에 쫓기고 있었다.

카이로는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를 창시한 살라흐 앗딘이 건설한 도시다. 1517년 오스만 제국이 이집트를 정복한 이후 카이로는 제국의 엄청난 위력과 결합해 한층 더 강성한 상업 도시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카이로의 거상들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세 대륙을 아우르는 특권적 위치를 점한 채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16세기에 유럽인의 인도양 진출이 본격화됨에 따라 카이로의 거상들은 오리엔트 교역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그 손실분을 메우기 위한 대응책을 찾느라 고심했다. 그때 신이 내려 준 선물처럼 갑작스럽게 출현한 신상품이 바로 커피였다. 그리고 커피는 17, 18세기에 그들의 대표 상품으로 우뚝 서게 된다.

카이로의 창고는 예멘에서 재배된 커피가 수납되는 주요 장소였다. 경로는 두 가지였다. 예멘에서 육로로 북상하면 이슬람을 상징하는 도시 메카가 있다. 메카는 이슬람인의 성지일 뿐 아니라 당시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시장이 열리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메카를 찾는 성지 순례자의 카라반 부대가 자연스럽게 거대한 수송 기관이 되었다. 예멘 커피는 이들 카라반 부대를 통해 카이로로 운반되었으며 1720년 무렵 그 운반량은 연간 2,000여 상자(1상자, 185킬로그램)에 달했다. 그러나 그것은 홍해 바닷길로 운송되는 양의 고작 10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커피는 예멘 연안 항구에서 홍해를 건너 카이로로 옮겨졌다.

아프리카 대륙과 아라비아 대륙 사이에 있는 좁고 긴 바다 홍해는 바닷속 해조 때문에 물빛이 붉은빛을 띠곤 해서 홍해로 불리게 되었다. ‘행복한 아라비아’와 ‘루주 빛 바다’ 같은 모카커피에 스며 있는 이국적 정서는 유럽으로 확산되는 커피의 이미지를 이상 행복감(Euphoria, 감정의 흥분성 장애로 근거 없는 병적 행복감에 젖는 것)의 흥취로 물들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달콤하지 않았다. ‘루주 빛 바다’는 그 우아한 닉네임과 달리 역풍과 저류, 얕은 여울 등의 변수가 많은 난항 지역이었다.

커피는 처음부터 투기성이 강한 상품이었다. 커피콩의 생육 상태는 물론이고 홍해를 건너는 선박의 행운과 불운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지다와 수에즈에서 카이로로 전달되었다. 그리고 그에 비례해 커피 가격이 가파르게 오르내렸다. 1732년에는 강풍으로 커피 3,000상자를 실은 배 12척이 침몰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로 인해 커피 가격은 순식간에 50킬로그램에 35.5피아스터까지 치솟았다.

이런 가격 불안정 문제를 해결하려면 카이로 상인들은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여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우선 홍해는 난코스 지역이므로 획기적인 항해술 개량이 뒤따라야 한다. 좀 더 성능 좋은 나침반과 좀 더 정확한 지도가 필요하고 승선 여건도 질적인 개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상품으로서의 커피는 기상 조건에 크게 좌우된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런 터라 날씨를 미리 예측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가능하지가 않다. 그러나 이런 점이 오히려 커피가 지닌 재미있는 요소이기도 하다. 커피는 저장이 수월한 상품이다. 실제로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창고에 넣어 두어도 그다지 품질이 떨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어찌 된 일인지 쥐들이 다른 곡식을 다 건드려도 커피만은 건드리지 않는다. 이는 저렴할 때 잔뜩 사서 쌓아 두었다가 커피가 흉작일 때 방출하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다. 바로 이 점을 파고들어 투기적 매입이 생겨난다.

역사상 최초로 커피 플랜테이션을 운영해 이익을 극대화하고 커피 산업의 메커니즘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네덜란드 상인
동지중해 연안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통일된 이후 안정된 정세를 기반으로 상업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그곳에서 활약한 유럽 각국 상인을 ‘레반트 상인’이라고 불렀다. 레반트 상인은 외국 무역을 통해 막대한 자본을 축적했다. 동지중해에서 싸게 사들인 상품이 커다란 이익을 남기면서 유럽 각국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간 덕분이었다. 커피도 마찬가지였다. 유럽 상인에게 커피는 막대한 수익을 보장해 주는 상품이 되었다.

그런데 당시 레반트 상인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커피 교역에 참가한 이들이 있었는데 바로 네덜란드의 로테르담과 암스테르담 출신 상업 자본가들이었다. 예멘 커피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가기 시작할 당시 홍해는 이슬람 세계와 유럽의 그리스도교 세력이 접하는 지점으로, 국제 상업 전쟁의 격전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17세기 전형적 자본주의 국가 네덜란드의 활동에는 독특한 점이 있었다.

모카커피가 암스테르담에 정기적으로 수입된 것은 1663년의 일이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그 이전부터 이미 본격적으로 커피 교역에 뛰어들었다. 네덜란드인이 사고파는 커피는 사실 네덜란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커피는 배에 실려 다른 이슬람권 지역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메카와 메디나에서 형성되기 시작한 커피에 관한 지식과 습관은 인도와 인도네시아의 이슬람권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그런데 과연 누가 인도와 인도네시아 시장으로 커피를 싣고 갔을까? 우선, 메카 순례자 무리에 끼어 사막을 가로지르는 카라반 부대를 꼽을 수 있다. 그 밖에 바닷길로 커피를 나르는 방법도 있었다. 그 동인도 항로를 마치 주머니 속 제 물건인 양 마음껏 활용한 주체가 바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였다.

1602년에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642년에 커피 3만 2,000킬로그램을 인도의 캘커타에 들여왔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왜 그토록 커피 교역에 열의를 쏟았을까? 그것은 모카에서 싸게 구매한 상품이 인도에 가면 비싸게 팔리는 ‘가격 차’가 주된 이유였다. 커피 소비량은 날로 늘어 가는 데 반해 커피 산지라고는 예멘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 상인은 마침내 커피 원두를 사서 파는 것보다 직접 생산해서 파는 것이 훨씬 이익이 크다는 것을 간파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식민지에 커피 플랜테이션을 구축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였다.

첫 시도는 실론, 즉 오늘날의 스리랑카에서 이루어졌다. 1658년의 일이다. 그러나 네덜란드 커피의 대표 산지가 된 곳은 스리랑카가 아니라 인도네시아의 자바섬이다. 바타비아(자카르타가 네덜란드의 식민지일 당시의 이름) 총독은 자바섬에서 커피를 재배하기로 계획을 세운 뒤 모카에서 커피 묘목을 들여왔다. 1680년 즈음의 일이다. 향신료의 섬이던 자바는 머지않아 온통 커피나무로 뒤덮였다. 이것이 자바 커피의 탄생 배경이다.

1712년 자바 커피 894파운드가 바타비아에서 암스테르담과 미델뷔르흐로 보내졌다. 아라비아 상인이 개입하지 않은 최초의 ‘식민지 커피’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커피 재배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막대한 수입원이 되어 주었고, 바타비아 총독은 본국 정부로부터 유능함을 인정받았다. 또한 자바 커피의 독특한 풍미와 빛깔, 아로마는 전 유럽에서 호평받았으며, 순식간에 스탠더드 커피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바야흐로 커피는 유럽의 식민지주의 역사를 검게 물들이는 상품으로 자리 잡아 갔다. 또한 커피는 글자 그대로 지구 위의 자연과 인간을 개조하는 근대 대표 상품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는 네덜란드 상인이 예전처럼 커피를 아라비아 상인에게 최대한 싸게 사들인 뒤 다른 상인들과 경쟁하면서 되도록 비싸게 팔던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 커피를 생산하는 방식을 취하면서부터 일어난 근본적인 변화였다.

자바섬은 오랜 옛날부터 쌀을 재배하는 지역이었다. 그곳에 어느 날 갑자기 서구인이 몰려와서는 주식인 쌀농사를 커피 재배로 바꿔 버렸다. 이처럼 유럽 시장을 위한 상품을 생산하는 과정에 발생하는 제3세계의 식량 부족 상황은 구조적인 모순이 되어 버렸다.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에 혈안이 된 토지 소유주는 유럽 상류층이 부럽지 않은 호사스러운 생활을 즐기는 반면 빈곤층은 먹을 쌀이 없어서 한 지역 전체가 굶어 죽는 참극이 일어나곤 했다. 이는 제3세계의 기본적 생산 구조가 유럽의 소비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방향으로 형성돼 있음을 말해 준다. 게다가 그 상품이 내수보다는 세계 시장에 지나치게 의존했기 때문에 국가의 자율 경제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제3세계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고질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유럽을 화려하게 물들인 커피와 커피 문명을 위해 커피콩을 제공한 생산자의 실제 모습이었다.

커피는 ‘자연적’ 음료라고 말하기 어렵다. 말하자면 그냥 두어도 개나 고양이가 마시는 그런 음료가 아니라는 의미다. 실제로는 창고에 쌓아 둔 커피콩을 굶주린 쥐조차 거들떠보지도 않을 정도다. ‘마시면 잠이 오지 않는’ 커피를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한 이는 수피교 수도사와 신도다. 그들은 왜 커피를 마셨을까? 그들의 특수한 인간적, 정신적 욕구가 그것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이들도 당연히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커피가 대량으로 유통되고 소비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상업 자본은 인위적으로 사람들의 커피 욕구를 만들어 내야 했다. 상업 자본주의는 인간과 자연을 내재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거대한 장치다. 커피라는 신종 음료 소비를 늘리기 위해 상당한 재력을 가진 상인은 호화로운 커피 하우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커피 마시는 방법을 보여 주면서 커피 욕구를 돋우고 정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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