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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눈으로 서울을 다시보다: 정동ㆍ광화문 편

강동완, 전병길 지음 | 너나드리


통일의 눈으로 서울을 다시보다: 정동ㆍ광화문 편

강동완, 전병길 지음

너나드리 / 2020년 4월 / 176쪽 / 21,000원





도로 원표 공원




‘도로 원표’와 ‘나라길 시작점’:
세종대로 사거리 인근에는 도로 원표 공원이 있다. 도로 원표란 도로의 기점ㆍ종점 또는 경과지를 알리는 표식이다. 각 도시의 출발점이자 종점의 상징물인 도로 원표는 도로법에 의해 설치ㆍ운영된다. 도로법 시행령 제23조 1항은 “도로 원표는 특별시, 광역시, 시 및 군에 각 1개를 설치하여야 한다.”고 규정했다. 서울의 도로 원표는 서울특별시장이 설치ㆍ관리하며, 그 위치는 광화문 광장의 중앙으로 한다.

각 나라마다 도로 원표 제도가 있다. 미국 도로 원표는 워싱턴의 백악관 앞에 설치한 ‘제로 마일스톤’이며, 프랑스 도로 원표는 노트르담 성당 앞에 설치한 ‘제로 포인트’다. 북한은 도로 원표를 ‘나라길 시작점’이라 부른다. 그 위치는 평양 김일성 광장 주석단 아래다.

우리나라에 도로 원표가 처음 설치된 것은 일제 강점기 때인 1914년이다. 1914년 4월 11일 일제 조선총독부는 경성(서울)ㆍ인천ㆍ군산ㆍ대구ㆍ부산ㆍ마산ㆍ평양ㆍ진남포ㆍ원산ㆍ청진 등 10개 도시에 도로 원표의 위치를 결정했다. 도로 원표가 설치된 도시들은 경성과 평양을 제외하고 대부분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외부 세계에 개항된 항구 도시들이다.

서울 도로 원표는 원래 현재의 이순신 장군 동상 자리에 있었다(해발 30.36m, 동경 126도 58분 44초, 북위 37도 34분 2초). 1935년 주변 도로가 정비되면서 교보문고 건물 인근 고종 즉위 40주년 창경비 옆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1997년 12월 29일에 마침내 한국식 도로 원표가 설치됐는데, 새 도로 원표는 원래 위치에서 남쪽으로 151m 떨어진 세종로 광화문 파출소 앞 광장에 설치되었다. 도로 원표 조형물에는 국내 51개 도시와 세계 64개 도시까지의 거리가 한글과 영문으로 새겨져 있다.

동서남북 한반도 4방진 - 중강진은 어떤 의미일까?:
한반도는 광화문 도로 원표를 기점으로 동서남북 4진이 있다. 관광지로 유명한 강원도 강릉의 정동진은 이곳 서울 도로 원표에서 정동 쪽이라는 의미에서 지어졌다. 인천의 정서진, 전남 장흥의 정남진도 같은 의미이다. 도로 원표에서 한반도의 정북은 정북진이 아닌 북한의 중강진이다. 한반도에서 제일 춥다는 (기상 관측 사상 영하 43도를 기록) 그 중강진이 바로 한반도 도로 원표의 정북이다. 그래서 세종대로 사거리 도로 원표를 기점으로 하는 동, 서, 남, 북 육지의 끝을 한반도의 사방진이라 한다.

세종대로 사거리는 국가 중심 거리이자 한반도 도로의 기준점이다. 물리적인 중심일 뿐 아니라 세대, 생각, 가치가 소통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때로는 목소리가 지나쳐 갈등이 일어나기도 한다. 다양한 가치가 세종대로 사거리로 몰려들고 또한 이곳을 기점으로 퍼져 나간다. 동, 서, 남, 북으로 향하는 세종대로 사거리는 한반도 도로의 원표를 넘어 다양성 속 통일의 원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오갈 수 없는 길은 더 이상 길이 아니기에:
눈길을 함부로 걷지 말라 했다. 그 길 위에 새겨진 발자국이 뒤에 올 사람들의 이정표가 되기 때문이다. 동서남북 어디든 통한다는 한반도의 사방진에 서서 통일의 길을 그려 본다. 지금 우리가 걷는 이 길은 훗날 어떤 이정표로 기억될까?

길은 어디든 통한다고 했던가? 하지만 우리는 지금 분단된 조국에서 길을 잃었다. 사방으로 뚫렸지만 그 길은 어쩌면 열림이 아닌 어디에도 이를 수 없는 닫힘의 길일지도 모른다. 분단은 우리의 길을 끊고 막아 버렸다. 사람들은 더 이상 오갈 수 없고, 마음의 장벽은 슬픈 자화상이 되었다. 오갈 수 없는 길은 더 이상 길이 아니기에, 분단의 막힌 담을 허물고 한 발짝 내디뎌 본다. 그 길 끝에 과연 무엇이 있을까? 통일의 그 길은 과연 우리에게 안겨 올는지….



서울시의회 청사(옛 국회의사당)




4ㆍ19 혁명의 중심지:
서울시의회 건물은 1954년부터 75년간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1960년 이곳을 중심으로 4ㆍ19 혁명이 일어났다. 이외에도 서울시의회 건물은 참 많은 사연을 간직한 곳이다.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인 1935년 부민관이란 이름으로 처음 문을 열었는데, 경성전기주식회사의 기부금을 바탕으로 지어진 일종의 문화 회관이었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건물로 45m 높이의 시계탑이 있으며, 대강당 1,800석, 중강당 400석, 소강당 160석 규모였다. 이외에도 회의실ㆍ식당ㆍ이발실까지 갖춘 근대식 다목적 회관으로 당시로서는 드물게 냉ㆍ난방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부민관의 건립은 각 사회ㆍ문화 단체들로부터 환영을 받았고, 시설도 좋아서 다양한 문화 예술 공연이 이어졌다.

한편, 이곳은 ‘부민관 폭파 의거’가 일어난 장소이기도 하다. 이 사건은 해방 직전인 1945년 7월 24일 대한애국청년단원 강윤국ㆍ조문기ㆍ유만수 등이 친일파 박춘금이 조직한 대의당 주최로 아세아민족분격대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연단을 폭파한 사건이다.

1945년 해방 후 미군정 시설로 사용되었고 6ㆍ25 동란 직전인 1950년 4월 29일에는 국립 극단이 창단되면서 국립 극장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전쟁 이후인 1954년 6월부터는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었다. 그해 집권 세력이었던 자유당이 사사오입을 내세워 당시 정족수 미달로 부결되었던 대통령 중임제 철폐를 골자로 한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일명 사사오입 개헌도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이후 반공법, 월남 파병, 3선 개헌과 같은 굵직한 의안들이 이곳을 거쳤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데 밑바탕이 된 경제 개발 지원 법안들 역시 이곳에서 제정되었다. 또한 국회의사당 주변은 1960년 4ㆍ19 혁명의 중심 역할을 했다.

1960년 4월 부정하게 치러진 ‘대통령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로 전국이 들끓었다. 4월 18일(월) 낮 12시 50분경, 3,000여 명에 달하는 고려대 학생들이 “민주주의 역적을 몰아내자.”며 시내로 행진하였다. 이들은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건물) 앞에서 마산 사건 책임자 처단과 경찰의 학원 출입 금지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다음 날 4월 19일. 국회의사당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결국 이승만 정권의 퇴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서울시의회 청사도 분단과 이념 갈등의 아픔을 또렷이 보아 왔다. 6ㆍ25 전쟁 당시 북한군의 서울 점령 기간 동안 서울시의회 청사(당시 국립 극장) 주변에서는 크고 작은 정치 재판이 열렸다. 이른바 인민재판이다. 이 재판은 법관 대신 민중에 의해 공개 형식으로 진행되는 무법적 재판인데 6ㆍ25 전쟁 중에는 북한 점령 지역에서 주로 반공주의자, 자본가, 반동주의자 등에 대한 처벌을 할 때 이루어졌다. 서울시의회 건물은 이처럼 그 기능이 여러 번 바뀌면서 한국 근현대사의 영욕과 맥을 같이했다.



덕수궁 석조전




근대식 석조 건물:
덕수궁은 조선 말기 고종 임금의 거처로 이용된 궁궐이다. 원래는 몇몇 임금들의 임시 거처로 사용되었으나 19세기 후반 조선 왕조가 열강 사이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고종 임금은 외국 공사관들과 가까운 덕수궁으로 궁궐을 옮기고 전면 개축을 했다.

덕수궁에는 석조전(현 대한 제국 역사관)이라 불리는 3층 규모의 근대식 석조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의 기본 설계는 영국인 G. R. 하딩이, 내부 설계는 영국인 로벨이 했다. 1910년에 완공된 이 건물의 기둥 윗부분은 이오니아식, 실내는 로코코풍으로 장식한 서양식 건축 기법을 활용했다. 이 건물은 당시 조선에 건축된 서양식 건물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다.

1945년 해방 이후 석조전은 한반도를 가르는 극단의 현대사를 목도하게 된다. 1946년~47년 두 차례에 걸쳐 이곳에서 미소 공동 위원회가 열렸다. 1945년 12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 외무 장관이 한반도를 5년간 신탁 통치하는 것을 협의하기로 결정했다. 이른바 ‘모스크바 3상 회의’이다. 1946년 3월 20일 미국과 소련은 서울 덕수궁에서 모스크바 3상 회의 후속 조치로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를 개최했다.

하지만 미소 공동 위원회 결렬로 우익 진영의 세 지도자 가운데 이승만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나섰고, 김구는 반탁 자주독립으로 나섰다. 김규식은 미군정의 후원하에 미소 공동 위원회 재개에 의하여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결정한 통일 임시 정부 수립을 목표로 여운형을 상대로 좌우 합작을 추진하였다.

북한에서는 1946년 2월부터 소련의 도움으로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임시 인민 위원회가 세워졌고, 실질적인 정부 역할을 했다. 또한 북한 지역에 남아 있던 우익 세력의 대표인 조만식은 반탁을 이유로 숙청되었다.

1947년 5월, 우여곡절 끝에 제2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열리지만 갈수록 심해지는 냉전 시대의 좌우 대립 속에서 합의점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한반도의 정부 수립 문제는 UN으로 넘어간다. 미소 공동 위원회가 성과 없이 끝나자 석조전은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설치된 유엔(UN) 한국 임시 위원단의 업무 공간으로 활용된다. 하지만 소련은 유엔(UN) 한국 임시 위원단의 38선 이북 지역 입북을 거부하였고 결국 1948년 5월 10일 남한만 제헌 국회 의원 선거를 치르게 된다. 그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북한에서는 9월 9일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은 유엔 한국 위원회로 개편된다. 유엔 한국 위원회는 소련과 북한의 협력을 얻지 못하였으나, 한반도 분단으로 야기되는 경제적ㆍ사회적 및 기타 교류 장애를 제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또한 제4차 UN 총회의 결의에 따라 38선 경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군사적 위협에 관하여 국제 연합에 보고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이는 6ㆍ25 전쟁에 대한 UN의 태도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석조전에 있는 덕수궁 역시 6ㆍ25 전쟁을 피해 갈 수 없었다. 1950년 9월 서울 수복 당시 덕수궁에는 수백 명의 북한군이 집결해 있었다. 덕수궁을 포격하면 수백 명에 달하는 북한군 병력을 괴멸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포격으로 인한 덕수궁 소실은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미 제7사단 31야전포병대대 소속 제임스 해밀턴 딜 중위는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남다른 인물이었다. 한참을 고심한 그는 앤더슨 대위와 상의해 덕수궁을 살리는 데 최대한 노력을 하기로 했다. 즉, 적들이 덕수궁을 빠져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공격하기로 한 것이다. 1950년 9월 25일 자 제임스 해밀턴 딜 중위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초조한 시간이 한참 흘러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관측자의 보고가 들어왔다. 적군이 덕수궁을 빠져나와 을지로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1초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포격 개시 명령을 내렸다. 오늘날 덕수궁이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 나는 그것만으로도 흐뭇함과 자부심을 갖는다. 그날 그 시점에 내렸던 판단과 행동은 내가 살아 있는 한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다.” (<폭파 위기의 덕수궁> 국방군사연구소, 1996)


오늘날 덕수궁이 고스란히 보존되기까지는 미국 장교 제임스 해밀턴 딜의 고민이 있었다. 1998년 대한민국 정부는 해밀턴 딜 중위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정동교회(현 정동제일교회)




한국 교회의 산역사:
개신교가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1882년 무렵이다. 서상윤을 비롯한 몇 명의 조선인이 만주에서 존 로스 목사와 함께 『누가복음서』를 간행했고, 1883년에는 『요한복음서』를 간행하는 데 참여했다. 1884년에 서상윤이 이 성경들을 조선에 몰래 가지고 들어와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1885년에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와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 목사가 조선에 입국했다. 기독교는 선교뿐 아니라 교육, 의료 활동을 통해 사회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활동 무대가 바로 정동 일대였다.

서양인 선교사 언더우드가 1887년 그가 머물던 정동 13번지의 한옥 사랑채에서 처음 예배를 드렸다. 오늘날 한국장로교회의 모교회인 새문안교회의 시작이다. 아펜젤러도 한옥을 사서 그곳 이름을 베델예배당이라고 칭했다. 이 예배당이 한국 최초의 감리교 교회인 정동교회다. 정동교회는 1897년 10월에 완공된 고딕풍의 붉은 벽돌 건축물이다. 빅토리아식 건축 양식으로 정동교회의 내부는 별다른 장식 없이 간결하고 소박하며 기단은 석조이고 남쪽 모퉁이에 종탑이 있다.

인근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있어 학생들이 정동교회의 교인이 되었고 개화 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독립운동가 서재필과 초대 대통령 이승만, 유관순, 윤치호 등 많은 독립운동가와 민족 지성들이 이 교회에 출석하였다.

1919년 3ㆍ1 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이필주 목사와 박동완 전도사는 당시 정동교회에서 목회자로 사역하고 있었다. 정동교회는 종교 활동뿐 아니라 수많은 토론회와 음악회ㆍ성극 등을 열어 민주주의 훈련과 신문화 수용, 민족의식, 여성 인권 의식 등을 고취시켰다. 1918년에는 국내 최초로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어 교회 음악의 중심 역할을 했다. 한국 현대 음악의 초창기 선구자들은 대부분 정동교회 파이프 오르간과 정동교회 성가대에 대한 추억을 갖고 있다.

목회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손정도 목사는 1915년에서 1918년까지 정동교회 담임 목사로 시무했다. 평안남도 강서 출신인 손정도 목사는 1910년 만주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안동(단동), 하얼빈, 북간도, 블라디보스토크를 다니며 선교 활동을 하는 한편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는 1912년 일본 수상 가쓰라 다로 암살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하얼빈에서 체포돼 참혹한 고문을 받았다. 1915년 정동교회에 부임한 손정도 목사는 아픈 몸으로 유관순 열사 등에게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를 함께 가르쳤다.

1919년 손 목사는 3ㆍ1 운동 직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안창호와 김구, 이승만 등과 함께 임시 정부 설립과 운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임시 정부의 의회격인 임시 의정원 의장이 되었고, 국무 위원(교통부 장관)도 역임했다. 그러나 손정도 목사는 임시 정부 내부의 파벌 싸움에 실망해 상하이를 떠나 다시 만주로 간다.

만주에서 손 목사는 노선과 이념을 뛰어넘어 독립운동에 매진했고 동포들을 섬겼다. 손정도 목사의 큰아들인 손원일도 독립의 꿈을 다지며 독일 유학길을 떠났다. 손원일은 대한민국 해군 창설의 주역으로 초대 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여 ‘해군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손정도 목사는 일제로부터 받은 고문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1931년 49세의 젊은 나이에 만주에서 세상을 떠난다.

아담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매력의 정동교회는 그곳을 거쳐 간 수많은 사람들의 나라와 민족 사랑의 이야기가 오롯이 배어 있다.

남쪽에서는 교회가 세워진 날 북쪽에서는…:
정동제일교회 벽면에 새겨진 100주년 기념비를 바라본다. 새 예배당과 사회 교육관이 봉헌된 날이 4월 15일이다. 북한에서 4월 15일은 김일성의 생신인 태양절로 기념한다. 남쪽에는 교회가 세워졌고, 북쪽에는 한 사람이 신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랑을 이 땅과 온누리에 전파하는 일에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다짐한다.”는 비문. 우리는 무엇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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