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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공무원은 어떻게 살았을까?

권기환 지음 | 인물과사상사


조선의 공무원은 어떻게 살았을까?

권기환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22년 4월 / 267쪽 / 16,000원





양반, 그들은 누구인가?



조선에서 양반으로 살아가기


양반은 원래 조선 시대 문관과 무관을 총칭하는 것으로서 현직 관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조선 중기까지는 관료만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점차 대를 이어 관직이 세습되면서 신분적인 성격을 띠게 되자 지배 신분층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양반 관료 체제가 정비되면서 기존에 관료의 직을 가진 사람뿐만 아니라, 그 가족과 후손들까지도 양반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조선 전기에는 양반의 아들이라도 군역을 부담해야 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16세기 이후부터는 점차 양반 가문의 후손들이 군역을 면제받는 특권까지 누리게 되면서 신분적 성격은 점차 강화되었습니다. 심지어 잘못을 저질러 처벌을 받아야 할 때에도 양반들은 특혜를 받았습니다. 관료가 죄를 범한 경우에는 조사를 거쳐 임금에게 보고한 후에야 구속되었고, 도덕과 인륜을 어긴 강상죄가 아니면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를 저지르더라도 참형에 처하기보다 사약으로 대신했습니다. 정치적 사건과 연루된 경우에는 주로 유배형을 받았기 때문에 상황이 풀리기만 하면 언제든지 재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지역 사회에서도 양반은 굳건한 사회적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한곳에 대대로 살았던 그들은 지역마다 향안이라는 명단을 만들고 대표자를 선출했습니다. 그리고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을 보좌하며 지방 통치의 한 측면을 담당하면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또 사회적 네트워크를 통해 집단의 결속력을 강화해 나갔는데, 그들은 수령을 보좌하는 자문 기관이자 향촌의 자치 기구인 유향소, 풍속 교정과 마을 질서의 안정을 도모하는 향약, 교육과 선현의 제사를 담당하는 서원을 통해 사회적으로 결집했습니다.

조선의 양반은 유학이라는 사상과 가치를 공유하는 하나의 문화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그들은 계층 내에서는 경쟁 관계였지만 사회 전체에서 보면 같은 목적과 이익을 추구하는 동반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관직이나 가문, 지역과 관계없이 서로를 예우했으며 서로의 이익을 보호하고 지켜 주었습니다.



과거 급제를 위해 책벌레로 살아가다



기초 교육의 산실, 서당


양반가 아이들은 가정에서 한문 강독 능력을 기른 다음 7, 8세가 되면 서당에 들어가 『천자문』, 『동몽선습』등 학문의 초보와 습자를 익힌 뒤, 15, 16세가 되면 서울의 아이들은 사학에, 지방의 아이들은 향교에 들어가 5, 6년간 『소학』, 『효경』을 거쳐 『사략』과 사서삼경을 공부하고 소과에 응시했습니다. 조선의 서당 교육은 유교적 가치관을 익히게 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였습니다. 유교 이념에 입각한 인간 양성과 충효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고, 남을 존중하는 인성의 함양을 추구했습니다.

서당에서는 보통 하루에 10~12시간 수업이 진행되었으므로 아침 일찍 서당에 나가 해 질 때가 되어서야 수업이 끝나는 긴 일정이었습니다. 평소 하루 일과를 보면 아침 일찍 훈장 앞에서 전날 배운 것을 검사받고 그날 공부 과제를 받았습니다. 오전과 오후에는 당일 배운 내용을 암송할 때까지 낭송하고 문장의 뜻을 파악하거나 쓰기 연습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다른 학생들과 함께 그날 배운 내용을 서로 묻고 답하거나 다음 날 배울 내용을 예습했습니다. 심지어 야간 수업을 하는 서당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는 훈장도 함께 합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서울과 지방의 중등 교육 기관


많은 양반가 자제가 모여드는 서울에는 그들을 공부시켜야 할 교육 기관이 필요했고, 그 역할을 담당하도록 국가가 만든 것이 사학이었습니다. 사학(사부학당)은 서울의 4곳(중학, 동학, 남학, 서학)에 위치한 중등 교육 기관으로, 성균관에 입학하기 위해 필요한 유학 교육을 담당했습니다. 성균관에서 교수가 파견되었고, 교육법도 성균관의 것을 그대로 따랐기에 사실상 부속 기관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지방에 거주하는 이들을 위한 중등 교육 기관으로는 향교와 서원이 있었습니다. 향교는 행정 조직상으로는 예조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일차적인 관리는 지방 수령이 책임졌습니다. 교육은 중앙에서 파견된 교관이나 지방 행정 책임자가 임명하는 관리가 담당했습니다. 대략 16세 전후의 학생들이 향교에 입학했으며, 입학 조건은 그다지 까다롭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학인 서원의 위상이 올라가자 관학인 향교는 자연스레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고종 때에 과거제의 폐지와 함께 교육 기관으로서의 기능은 상실한 채 공자를 모신 사당의 역할만을 수행할 뿐이었습니다.

서원은 선현의 제사를 모시는 ‘사(祠)’와 학생들을 교육하는 ‘재(齋)’가 결합한 곳입니다. 16세기 서원의 사림들이 중앙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그들의 정치적, 학문적 중추 기능을 한 서원이 주목받기 시작했고, 성균관을 중심으로 한 관학이 관리 등용을 위한 출세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더욱 위상을 떨쳤습니다. 하지만 무분별한 설립과 제 역할을 상실한 채 백성을 착취하는 곳으로 변질되면서 지탄을 받다가 결국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이 47개소만 남기고 전국의 서원들을 철폐했습니다.

조선 최고의 교육 기관, 성균관


『경국대전』에는 성균관을 ‘성현을 봉사하는 사묘의 기능을 겸비하고, 고급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 기관’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나라에서는 개국 초기부터 국가 최고 교육 기관으로서 성균관을 중요하게 생각해 토지를 지급하고 노비를 두어 학교 운영을 돕도록 하는 등 물질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성균관의 정원은 조선 개국 초에는 150명이었으나 세종 때 200명으로 증원되었습니다. 참고로 소과에 입격한 유생들은 성균관에 입학해서 문과 급제를 위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성균관의 하루는 아침 식사 후 명륜당에서 유생들이 교수인 학관에게 절을 한 다음 앞서 배운 내용에 대해 질문을 한 뒤 수업에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수업은 질의응답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유생들은 주로 과거 과목인 사서오경 등의 유교 경전과 글짓기인 제술을 익혔습니다. 사서오경은 성균관의 기본 교재였으며 과거 시험의 필수 과목으로서 특히 중요하게 다뤄졌습니다.

유생들의 생활은 수시로 치러지는 시험의 연속이었습니다. 학관일강(學官日講)이라고 해서 매일 학관이 지정하는 경서의 대목을 외우는 강경 시험을 보고, 열흘마다 학관순제(學官旬製)라는 제술 시험을 쳤습니다. 또한 매달 예조가 주관하는 월강(月講)을 보고, 매년 3월과 9월에는 의정부와 육조에서 실시하는 제술 시험인 연고(年考) 평가를 받았습니다. 유생들이 고단한 수험 생활을 감내했던 것은 연말에 시험 결과를 합산해 우수한 자는 추천받아 등용하거나 문과 시험을 볼 때 일부 면제 혜택 등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균관의 재학 연한은 제한이 없었으며, 출석 점수인 원점을 따서 초시 응시 자격을 획득하면 성균관을 나갈 수 있었습니다. 1417년 윤5월에 예조에서 상정한 규정에 따르면, 성균관 유생이 문과에 응시하려면 원점 300점을 따야 했는데, 성균관 식당에서 아침과 저녁 2끼를 먹어야 원점 1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곧 300일간 성균관에서 공부해야 함을 의미했습니다.



공무원을 어떻게 뽑았을까?



과거제의 역사


조선 시대 과거에는 문과, 무과, 잡과가 있었는데, 문과에는 예비 시험 성격의 소과가 포함되었고, 소과는 다시 생원시와 진사시로 나뉘었습니다. 잡과에는 역과, 의과, 음양과, 율과가 있었습니다. 역과에 합격하면 사역원에서 역관으로 생활했고, 의과를 통과하면 내의원과 혜민서 등에서 일했습니다. 음양과의 합격자는 관상감에서 근무하고, 율과의 합격자는 형조에서 일했습니다. 사회적 분위기와 경제적 부담으로 인해 문과와 무과에는 양반들이 응시했고, 잡과에는 주로 중인과 서얼이 응시했습니다.

문과는 글짓기와 교육을 담당할 관료를 선발하는 시험이다 보니 글짓기의 비중이 높았습니다. 그러나 문과에 급제하기 위해서는 경전뿐만 아니라, 역사, 제도와 문화 등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정해진 형식에 맞추어 글을 지을 수 있는 자질도 갖추어야만 했습니다.

양반들이 주로 응시했던 시험은 생원진사시와 문과(대과)였습니다. 흔히 소과 또는 사마시라고 불리는 생원진사시는 일종의 예비 시험으로 정원은 각 100명이었습니다. 정식 과거가 아니어서 등수 안에 들어도 합격이라 하지 않고 입격이라고 불렀습니다. 생원시는 유교 경전의 이해도를, 진사시는 문장 능력을 시험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정된 교재와 범위에서 출제되는 생원시는 시골 양반들에게 유리했고, 풍부한 견해와 안목, 화려한 문장력이 요구되었던 진사시는 서울 양반들에게 유리했다고 합니다.

생원진사시에 입격했다고 해서 바로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유교 사회에서 양반 지식인으로서의 신분을 유지하는 데에는 효과적이어서 선비들은 시험에 열심히 도전했습니다. 그 결과 생원진사시의 경우에도 50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고 합니다. 과거 제도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유명무실해지다가 1894년 5월에 마지막 시험을 치른 뒤, 그해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습니다. 과거 제도가 폐지된 이후에는 고등 문관 시험이 실시되었습니다. 이 시험은 행정관, 외교관, 판사를 뽑는 현대식 고급 관리 시험이었습니다. 주로 법률 과목과 외국어 능력을 평가했습니다. 이후 1949년 고등 고시와 1973년 행정 고등 고시 등을 거쳐 2011년부터 지금의 5급 공개 경쟁 채용 시험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등골이 휘는 과거 준비


예나 지금이나 시험을 준비하는 데 많은 돈이 들어갑니다. 과거 합격자들은 대부분 30대 중반이었고 50세를 훌쩍 넘긴 경우도 꽤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오랜 기간을 공부에만 전념하려면 필요한 건 충분한 돈과 가족의 희생입니다. 조선의 수험생들은 과거 준비에 상속받은 재산을 몽땅 바치기도 했고, 이제 막 결혼한 부부라면 1년에 절반 이상을 떨어져 지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한편 무관을 선발하는 무과도 문과와 동일하게 3년마다 실시하는 정기 시험인 식년시와 수시로 개최하는 부정기 시험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식년시는 초시, 복시, 전시의 3단계를 거쳐 최종 28명을 선발했습니다. 그러고 나면 임금 앞에서 무술을 직접 겨뤄 갑과 3명, 을과 5명, 병과 20명으로 순위를 가렸습니다. 그러나 시대 상황에 따라 무과의 선발 인원은 자주 변경되었습니다. 양인이면 누구나 무과에 응시할 수 있었으며, 천민도 시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너무나 부족해진 병력을 채우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양반 가문의 자제들이 무과에 도전했습니다. 기본적으로 한자를 알아야 했고 병법과 경전 시험도 치렀기 때문에 양반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양반들에게는 무과가 문과보다 합격하기 쉬웠기 때문에 공부를 못하더라도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게다가 실기 시험을 대비한 말타기와 활쏘기를 연습하는 데 많은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양인이 도전하기 힘들었습니다.

과거 시험의 관문을 통과하라!


관직에 나아가는 방법은 과거, 천거, 음서 등 3가지 제도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과거였고, 과거의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문과였습니다. 문과는 초시와 복시, 전시의 세 차례 시험을 거쳐야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초시는 9월 초에 성균관, 서울, 지방 등 전국에서 동시에 실시했으며, 그다음 해 봄 서울에서 성균관 50명, 서울 40명, 지방 150명으로 이루어진 초시 입격자 240명을 대상으로 복시를 시행해 33명의 합격자를 선발했습니다. 전시는 이 33명을 대상으로 대궐에서 임금이 참석한 가운데 당시 정치 상황이나 민생과 관련된 대책을 물어 순위를 매기는 최종 시험이었습니다.

합격자는 성적순으로 성명과 인적 사항을 기록했는데, 1등에서 33등까지의 합격자를 갑과ㆍ을과ㆍ병과로 삼등분해 갑과에는 3명, 을과에는 7명, 나머지 23명은 병과로 배정했습니다. 즉 갑과 1등이 장원이고, 을과 1등은 4등이며, 병과 1등은 전체 11등에 해당합니다. 한편 시험 문제는 시험일 새벽 시험관들이 모여 상의해서 출제했습니다. 출제 준비가 모두 끝나면 입문관이 응시자 명부인 녹명책을 보고 응시자를 호명하며 들여보냈습니다. 응시자들은 시험장에 한번 들어가면 끝날 때까지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시험 문제가 게시판에 게시되면 응시자들은 답안을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시험 시간은 정해진 것이 없었고 통행 금지 시각인 밤 10시까지만 답안지를 내면 되었습니다.

어쨌든 장고 끝에 답안 작성이 끝나면 수권소에 답안지를 냈습니다. 수권관 두 명과 군졸 여러 명이 제출 순서대로 답안지를 정리하고, 시험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제출할 수 없도록 즉시 포장이나 멍석을 답안지 위에 덮었습니다. 채점 과정에서도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봉미법이라고 해서 응시자의 인적 사항이 기록된 답안지 부분을 3~4번 말아 접은 다음 실로 꿰매어 시험관이 볼 수 없도록 했습니다. 인적 사항을 기재하는 방식도 엄격한 형식이 정해져 있어서 내용을 누락시키거나 불필요한 사항을 쓴 경우에는 합격이 취소되었습니다.



조선의 통치 시스템



정1품부터 종9품까지, 조선의 관직


『경국대전』에 의하면 중앙 관제는 크게 문관과 무관으로 나뉘고, 둘은 다시 내와 외의 직으로 나뉘었습니다. 품계는 종9품에서 정1품까지 모두 18개 등급이 되었고, 품별로 더 세분화된 계를 두고 운영했습니다. 이 중 정1품부터 종6품까지는 품마다 2개의 계를 둔 반면, 정7품 이하는 1개의 계만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4품 이상은 ‘~대부’, 5품 이하는 ‘~랑’으로 불렀습니다.

한편 관과 직은 이와는 다르게 구분했습니다. 정3품을 기준으로 크게 당상관과 당하관으로, 6품을 기준으로 다시 참상관과 참하관으로 구분했습니다. 여기서 당상은 조정에서 업무를 볼 때 대청에 올라가 의자에 앉을 자격을 갖춘 자를 가리킵니다. 즉 임금과 함께 중대사를 논하고 정치적 책임이 있는 관서의 장관을 맡을 자격 요건을 갖춘 최고위 관료층인 것입니다. 그리고 6품으로 승진하면 지방 수령으로 나아갈 자격이 주어졌고, 참상관은 반역, 불효, 살인 같은 강상죄를 짓지 않는 한 관직을 빼앗지 않았습니다. 7품 이하의 참하관은 관청의 실무를 담당하는 하급 관리였습니다.

과거 시험 급제자 중 11~33등에 해당하는 병과는 정9품, 4~11등에 해당하는 을과는 정8품, 갑과 2등과 3등은 정7품의 관직에 임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갑과 1등인 장원은 종6품 관직을 제수받았습니다. 종6품은 지방 현감에 해당하는 지위였기 때문에 이는 파격적인 대우일 뿐 아니라 9품에서 6품까지 승진하는 데 대략 8~10년이 걸리므로 동기들보다 엄청 앞서가는 것이었습니다. 제도적으로 장원에게는 종6품직을 제수하게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중앙 관직을 내리기도 해, 정6품인 육조의 좌랑 등에 임용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장원 급제자를 더 존중하고 우대했던 것입니다.

한편 문반과 무반은 동일한 지위로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문반이 무반에 비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더 대접받았습니다. 국정을 논의하고 집행하는 의정부와 육조의 당상관은 거의 문반으로만 임명되었고, 인재를 추천하거나 각종 국가 행사에 참여하는 경우에도 무반보다 높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무인의 품계는 정3품 절충장군이 가장 높았기 때문에 정2품 이상의 관직은 문인이 거의 독차지했습니다. 따라서 군의 최고 통솔권도 문인이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한된 관직 수에 비해 관직을 받고자 하는 사람이 많아서 관직은 자주 교체되었는데, 이는 장기 집권을 통한 권력자의 출현을 막고 중앙 집권 체제를 유지하려는 목적과도 관련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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