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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미술관

니시오카 후미히코 지음 | 사람과나무사이


부의 미술관

니시오카 후미히코 지음

사람과나무사이 / 2022년 3월 / 292쪽 / 17,500원





빵집 광고로 활용된 페르메이르의 <우유를 따르는 여인>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은 왜 16세기 유럽 예술가들의 밥줄을 끊어 놓았나


16세기 종교 개혁으로 유럽 미술사는 그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다. 이유는 뭘까? 프로테스탄트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우상 숭배를 엄격히 금지하고 교회를 장식하는 회화와 조각 등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했다. 그런 살벌한 분위기가 이어지자 예술가들이 몸을 사리며 새로운 작품 제작에 극도로 신중을 기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미술계의 큰손이자 든든한 후원자였던 교회에서 들어오는 주문이 딱 끊기자 예술가들은 글자 그대로 ‘밥줄이 끊기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맞닥뜨렸다.

그러나 위기라는 씨앗 안에 새로운 기회의 싹이 숨어 있다고 하지 않던가! 놀랍게도 이후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회화 열풍이 거세게 일어났다. 한 세기 동안 이 나라에서만 무려 600만 점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회화가 그려졌으니 과연 ‘열풍’이라 할 만했다. 어떻게 그런 기적 같은 일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미술계가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 새로운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데 성공한 덕분이었다. 그로 인해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미증유의 회화 열풍이 불게 된 것이다. 지금은 회화의 대명사가 된 정물화와 풍경화는 바로 이 시기 네덜란드의 평범한 시민이 주도한 회화 시장에서 독립 장르로 탄생했다. 대표적으로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가 그린 <우유를 따르는 여인>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이러한 새로운 미술 마케팅의 생생한 목격자이자 시금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시작은 15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 수도사 마르틴 루터가 작센의 소도시 비텐베르크의 교회 문에 95개 조에 달하는 반박문을 정리한 벽보를 붙여 로마 교황청의 부패한 실태를 고발한 역사적 사건이 바로 그때 있었다. 이 사건은 훗날 ‘종교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일련의 움직임에 불을 붙이는 부싯돌 역할을 했다. 종교 개혁 운동으로 유럽의 기독교는 신교인 프로테스탄트와 구교인 가톨릭으로 양분되었고 유럽 전역에서 피어오른 종교 개혁의 불길이 갈수록 뜨거워졌다. 이 과정에서 프로테스탄트는 종교 미술을 성경이 엄격히 금지하는 우상 숭배 행위로 규정하고 교회를 장식한 회화와 조각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기 시작했다.

이때 프로테스탄트가 근거로 삼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구약 성경』에 나오는 모세의 「십계명」이 바로 그것이다. 「십계명」은 『신약 성경』의 「산상 수훈」과 함께 기독교의 기본 가르침을 설파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등의 율법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너는 나 이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라는 두 번째 계명이 우상 숭배를 금하는 내용이라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두 번째 계명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애초에 마르틴 루터가 95개 반박문을 교회 문에 붙이며 로마 교황청을 고발한 진짜 이유도 사실 이 문제에서 기인했다고 할 수 있다. 즉, 루터는 당시 화려한 그림과 호화로운 조각으로 장식해 우상의 소굴이 돼 버린 로마 교황청이 가톨릭교회의 개보수 자금을 마련하는 방편으로 신도의 죄를 사해 주는 면죄부를 판매하는 참담한 상황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한 것이었다. 이렇듯 “성경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라는 모토를 내건 당대 프로테스탄트는 교회를 장식한 제단화와 조각상을 성경 계명에 어긋나는 죄악의 상징으로 여겼다. 종교 개혁 운동과 함께 독일에서 불씨가 지펴지기 시작한 교회 미술 파괴 운동은 거대한 불길이 되어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우상 숭배’라는 죄목으로 교회 미술을 강하게 탄압한 네덜란드에서 근대 시민 회화가 화려하게 꽃피다
그러나 종교 개혁의 불씨를 지핀 마르틴 루터는 미술에 대해 관대한 편이었다. 실제로 그는 회화와 조각이 오히려 기독교 교리를 전파하는 데 도움 되는 부분이 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루터의 뒤를 이은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 중에는 교회에서 온갖 미술품을 단호히 거부하고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구교도를 망설임 없이 화형대에 세우는 등 냉혹하리만치 엄격한 신권 정치가로 알려진 장 칼뱅은 교회 미술을 철저히 배격하고 파괴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장 칼뱅은 루터 사상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그는 개혁파에 대한 탄압이 갈수록 거세지는 고국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로 망명했고 이후 그곳에서 프로테스탄트를 대표하는 논객으로 자리매김했다. 칼뱅은 “나무와 돌 등을 깎아 만든 상을 하나님이나 성인으로 보이게 만드는 우상이 인간의 감각을 현혹하고 마비시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게 한다.”라며 강력히 규탄했다. 또한 칼뱅은 불순한 제단화와 조각상을 완벽하게 처분한 ‘순수한’ 교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에 적합한 장소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의 주장에 따라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철저한 ‘교회 정화’ 운동에 착수했으며 제단화와 조각상을 찾아내 집요하게 파괴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십계명」을 가장 엄격히 지킨 대표적 프로테스탄트 국가 네덜란드에서 렘브란트와 페르메이르라는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을 시작으로 오늘날까지 최고 인기를 구가하는 인상주의 화가 고흐, 추상 회화의 시조이자 최고봉으로 꼽히는 몬드리안 등 전 세계적 명성을 떨친 예술가들이 줄줄이 등장했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다’라는 가르침을 이보다 더 명징하게 보여 주는 역사적 사례도 드물지 않을까.



천재 중의 천재 다빈치가 경제적으로 궁핍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모나리자>와 달리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이유


1796년 밀라노를 침공한 나폴레옹은 서둘러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을 찾아갔다. 그는 왜 만사를 제쳐 놓고 이 성당부터 찾았을까? 그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그림 <최후의 만찬>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델레 그라치에 성당 식당 벽에 그려진 벽화를 프랑스로 가져갈 궁리를 진지하게 했다. 하지만 작품이 그려진 거대한 벽의 무게를 고려하면 애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회화가 벽화나 천장화로 교회나 궁전 등 건축물의 일부로 존재했을 때 사람들은 오로지 그 회화가 존재하는 공간에서만 그림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다.

<최후의 만찬>은 작품의 ‘부동성’을 인정받아 회화로서는 매우 드물게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980년의 일이다. 반면 목판에 그려진 ‘동산’인 <모나리자>는 <최후의 만찬>보다 훨씬 많은 관람자를 루브르 미술관으로 불러 모으고 있으나 세계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 문화유산 등록 기준과 인정 대상이 ‘부동산’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회화가 시장에서 사고파는 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동산화’가 필수 전제다. 부동산인 벽화와 천장화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될 수 있으나 동산인 회화는 개인 자산이기에 등록될 수 없다.

회화가 동산이 되도록 촉진한 것은 바로 르네상스 중기에 등장한 ‘캔버스’다. 배의 돛과 깃발에 쓰이던 직물을 활용한 캔버스는 그 무렵 급속히 부상하던 유화의 가장 적합한 밑바탕이 되어 주었다. 화폭이 커지더라도 둘둘 말아서 운반할 수 있는 편리성도 한몫한 덕분에 캔버스는 매우 빠르게 보급되어 기존의 벽화, 천장화, 제단화에는 존재하지 않던 상품으로서의 유동성을 회화에 부여했다.

보티첼리가 비너스를 주제로 그린 두 점의 유명한 작품이 있다. <봄>과 <비너스의 탄생>이다. 이 중 <봄>은 목판에 그려진 데 반해 <비너스의 탄생>은 캔버스에 그려졌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달걀노른자로 안료를 녹인 물감인 템페라로 그려졌다는 점이다. 그 무렵 템페라를 대신해 급속히 보급된 기법이 바로 ‘유화’다. 네덜란드에서 탄생한 유화는 템페라보다 훨씬 풍부한 색채와 음영을 표현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사실주의 묘사 기법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며 유화의 밑바탕으로 적합한 재질이던 캔버스도 매우 빠르게 보급되기 시작했다.

캔버스의 등장은 회화라는 예술의 존재 양식을 근본부터 뒤바꿔 놓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목제 틀에 못을 박아 고정하기만 하면 바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캔버스는 무게가 가벼워 대형 작품도 둘둘 말아서 운반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이런 장점 덕분에 캔버스는 회화라는 형식의 예술에 ‘그리는 공간’과 ‘장식하는 공간’을 가리지 않는 획기적인 유동성과 기동성을 갖게 해 주었다.

기존의 목판은 어느 정도 이상 크기의 그림을 그리려면 제작과 관리가 까다로워 적지 않은 수고를 감수해야 했다. 실제로 보티첼리의 그림 <봄>도 세로로 긴 포플러 판자 여덟 개를 옆으로 연결한 패널에 전나무 목재 두 개를 가로질러 접착해 강도를 보강했다. 온도와 습도 차이에 따라 휘거나 갈라지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한 처리로, 목재 접착에는 석탄과 치즈를 혼합해 강력 접착제와 함께 서른 개가량의 금속 재질 보강 장치를 사용했다. 두께도 3센티미터 정도로 두툼하고 무게는 캔버스에 그린 <비너스의 탄생>보다 훨씬 무겁다. 목재라서 충해에도 약한 <봄> 패널을 복원 검사하던 중 나무를 갉아 먹은, 미라가 된 벌레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처럼 목판에 그려진 제단화와 교회?궁전의 벽화, 천장화가 특정 건축에 부속되는 형태로 보여지는 데 반해 캔버스에 그려진 회화는 자유롭게 옮길 수 있어 소유자가 좋아하는 공간을 장식할 수 있는 고급 소비재로 거듭날 수 있었다. 르네상스에 뒤이은 바로크 시대에 네덜란드에서 시민 회화가 폭발적으로 꽃핀 것도 캔버스가 도입되면서 그림에 본격적으로 ‘동산성’이 부여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회화의 ‘동산성’은 화가의 작업 방식을 근본부터 바꾸어 놓았다. 그도 그럴 것이 벽화와 천장화는 화가가 그곳에 가서 그려야 하지만 동산인 회화는 화가가 자기 집이나 작업실에서 그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불후의 명작으로 남은 <최후의 만찬>이 당대에는 실패한 회화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최후의 만찬>이 완성된 직후 밀라노를 침공한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 역시 후대의 나폴레옹과 마찬가지로 수도원을 통째로 부수고 벽화를 들어내서라도 <최후의 만찬>을 프랑스로 가져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무리 절대 권력을 가졌더라도 벽화를 마치 휴대 가능한 미술품처럼 가져간다는 것은 기술적인 차원에서 불가능한 일이었다. 말하자면 벽화를 떼어 내 온전히 소유한다는 것은 당시 기술 수준으로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벽화는 건축물이 파괴되면 그 건축물과 운명을 함께할 수밖에 없다.

반면 캔버스에 그려진 동산 회화는 피난길에 가져갈 수 있다. 실제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수많은 명화가 방공호와 지하 수장고로 옮겨졌는데, <최후의 만찬>은 이동할 수 없는 작품이었기에 수도원과 함께 연합군의 폭격으로 인한 엄청난 충격을 고스란히 견뎌 내야 했다. 무참히 파괴된 수도원 잔해 속에 이 벽화만 남아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당시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도 마치 기적의 순간을 생생히 목격한 것 같은 감격을 느끼게 된다.

동산 회화, 부동산 회화 모두 일장일단이 있다. 좋든 나쁘든 프레스코(회반죽 벽에 그리는 벽화 기법)는 부동산 회화인 벽화에 가장 적합한 기법이었다. 게다가 다빈치가 질색하던 투박한 붓질도 벽화와 천장화를 감상할 관람객과의 거리를 고려하면 오히려 투박한 터치가 대담하고 시원시원하게 느껴지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가 <천지창조>를 그린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 높이는 20미터가 넘는다. 그런 터라 이 작품을 마주하는 사람은 가장 짧게 잡아도 20미터 이상 떨어진 거리에서 그림을 볼 수밖에 없다. 이 거리는 물리적으로 더는 좁혀질 수 없다. 시스티나 예배당 정면 제단에 그려진 <최후의 심판>도 최소 6미터는 떨어진 지점에서 감상하게 된다. 프레스코는 이렇게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감상한다는 점을 전제로 그려졌기에 섬세한 묘사보다는 전체적인 조형미와 균형감을 잘 살려야 웅장한 느낌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캔버스에 유화 물감으로 그리는 작품의 경우 몇 밀리미터의 근거리에서 감상하는 상황까지 고려해야 한다. 프레스코가 공공 공간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감상하게 되는 부동산 회화에 적합한 기법이라면 유화는 사적 공간에서 감상하게 되는 동산 회화에 적합한 기법으로 가까이에서 감상해도 실망하지 않을 만큼 정밀한 묘사가 요구되었다.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에서 범한 뼈아픈 실패 원인은 동산 회화에 필요한 정밀 묘사를 부동산 회화인 벽화에서 추구한 데 있었다.



메디치 가문 지하 금융의 도움이 없었다면 르네상스도 없었다?



메디치 은행을 유럽 최고 은행으로 키운 뛰어난 경영자 코시모 데 메디치가 교회와 예술 후원에 그토록 열성적이었던 숨은 이유
오늘날 ‘예술 후원’의 좋은 본보기처럼 받아들여지는 메디치 가문은 알고 보면 오히려 예술에 의해 보호받은, 즉 예술을 매우 유용한 보호막으로 활용한 영리한 가문이다. 피렌체 서적상 베스파시아노 다 비스티치는 자신이 거래하던 메디치가에 관한 전기를 남겼다. 여기에 소개하는 에피소드는 그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로마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가 피렌체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메디치가의 주요 인물로 메디치 가문이 세운 은행을 유럽 최고의 대은행으로 키운 뛰어난 경영자 코시모 데 메디치는 마음의 안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교황에게 조언을 구했다. 코시모는 왜 교황에게 그런 조언을 구했을까? 자신이 저지른 ‘불미스러운’ 행실로 인한 양심의 가책으로 마음이 말할 수 없이 괴로웠기 때문이다. 코시모가 저지른 ‘불미스러운 행실’이란 뭘까? 그것은 흔히 생각하기 쉬운 성적 타락, 문란한 취미나 행위가 아니라 메디치 가문의 생업이던 금융 사업상의 부도덕함을 말한다. 당시 기독교가 금지한 이자 징수, 즉 금융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코시모는 교황을 알현해 죄를 사면받고자 했다.

코시모가 그 일로 오래도록 번민하고 어떻게든 사면을 받고자 애쓴 데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당시 금융업자는 사망한 후에도 교회 묘지에 매장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회는 불경죄를 저지른 금융업자의 장례 미사를 거부했으며, 유해도 마치 동물의 그것처럼 취급하는 등, 오늘날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부당하게 대우했다. 실제로 금융업자 중에는 민중의 집단 공격을 받아 살해당한 뒤 아무도 유해를 수습하지 않아 들짐승의 먹이가 되는 비참한 운명에 처한 자도 있었다. 또 사후에 묘가 파헤쳐지고 교수형에 처해진 후 강에 폐기되는 끔찍한 일을 당한 금융업자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교회 미사에서 ‘금융업은 저주받은 직업이다.’라는 메시지가 성직자의 입을 통해 자주 화제에 올랐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 금융업자의 장례식 날 밤 지옥의 악마들이 그를 마중 나왔다는 이야기, 죽어서도 영혼의 안식을 얻지 못한 채 망령이 되어 이승을 떠돈다는 이야기 등이 반복적으로 전해지고 확대 재생산되며 금융업자의 부도덕성을 민중의 뇌리에 각인시켰다. 성직자 중에는 당시 창궐한 페스트를 금융업자에게 내리는 천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 시대 금융업자의 삶은 여러모로 서글프고 고달플 수밖에 없었다. 살아서는 삿대질과 조롱, 돌팔매질을 당하며 생지옥에 살고 죽어서는 지옥행이 예약돼 있는, 안식을 얻을 수 없는 가련한 영혼이었다고나 할까.

르네상스 문학의 효시로 인정받는 『신곡』은 시인 단테가 지옥과 천국을 순회하는 대서사시다. 이 작품 속에서 금융업자는 지옥의 불꽃에 영원히 태워지는 것으로 묘사된다. 르네상스 문학의 또 다른 대표작 중 하나인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페스트가 창궐한 피렌체 교외의 별장에서 열 명의 남녀가 서로 나눈 여러 편의 이야기를 갈무리한 모음집이다. 단테의 작품이 ‘신곡’이라면 인간의 생생한 삶을 주로 다룬 『데카메론』은 ‘인곡’이라 할 만하다. 이 책에서 작가는 보복 폭행을 두려워하는 금융업자의 이야기로 시작해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이 내용을 통해서도 우리는 당시 금융업이 그야말로 ‘금단의 직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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