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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식물의 세계사

리처드 메이비 지음 | 탐나는책


처음 읽는 식물의 세계사

리처드 메이비 지음

탐나는책 / 2022년 3월 / 447쪽 / 18,000원





인간의 스토커인가, 동반자인가?




내가 잡초를 직접 보게 된 것은 처음으로 가까운 곳에서 여러 풀을 볼 수 있게 되면서였다. 20대 중반에 나는 런던 외곽의 한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근무했는데, 당시 칠턴스에 있는 집에서 런던 근교로 매일 출퇴근을 해야 했고, 런던 근교인 그 지역은 첨단 기술 산업에 서서히 잠식되어 가던 거대한 불모지인 미들섹스의 경계 지대였다. 한편 내 업무는 주로 사회 초년생들을 위한 시사 문제와 사회 연구를 다루는 개발서와 관련되었고, 우리가 목표한 도전적인 글을 담았던 그 책(사실 잡지에 더 가까운)은 끊임없이 신랄하게 변화하는 세계를 살아갈 독자들을 위해 기획되었었다. 그런데 사무실 창밖의 요란한 초록색 물결을 내다보면 그런 세계가 이미 우리 쪽으로 빠르게 오고 있는 것처럼 보였었다.

이 지역의 초목은 예쁘거나 매력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영국 전원 지역의 야생화나 영국이라는 나라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들은 생명으로 맥박이 뛰고 있었다. 원초적이고, 범세계적이며, 광합성을 하는 생명 말이다. 그 오래된 쓰레기터의 흙무덤에서는 독성을 지닌 독미나리가 군락을 이루며 자라났고, 화장실 세제 냄새를 풍기는데도 온갖 곤충이 모여드는 히말라야물봉선이 버려진 병들을 뒤덮었다. 층층이 퍼져 있는 일본산 마디풀 꽃가지와 자홍색 꽃이 피는 지중해산 넓은 잎 연리초, 이제는 전 세계에 너무 많이 퍼져서 원산지를 알 수 없게 된 잡초이자 백조 목 모양의 매우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독말풀, 그 위로는 키가 9m나 되는 관목인 중국산 부들레야가 솟아올라 있었다.

그 아래로는 압생트의 원료인 향쑥과 가짓과에 속하는 3가지 종류의 풀, 편자 모양 이파리를 가진 머위, 울퉁불퉁한 잎이 마치 산업화라는 여드름에 들볶인 것처럼 보이는 쇠서나물 등 좀 더 성질이 온순한 잡초들이 플라스틱과 한 몸이 되어 땅을 치장하고 있었다. 또 이 불모지가 아니라면 영국 땅 어디서도 함께 자라는 것을 보기 힘들 것 같은 커민, 야생 호리병박 같은 낯선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마치 ‘불모지’라는 주문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듯 이 풀들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나는 점심시간에 이 풀들이 자라나는 목가적 이상향을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그곳의 의기양양한 무성함에 감탄하며, 낭만적인 생각이지만 그러한 재생력이 마치 우리가 그 안에서 하려는 일을 보여 준다고 느꼈다. 나는 그렇게 해서 식물의 세계에 입문했다. 그리고 대개 잡초라고 비난받는 종들에 대해 영원히 변하지 않게 될 태도를 지니게 되었다. 잡초를 보면 나는 1초라도 더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그들의 왕성한 에너지에서 얼핏 볼 수 있는 긍정적인 특징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 미들섹스의 비범한 존재들에게 내가 가졌던 60년대의 열정이 유별난 것이며, 어쩌면 무책임했을 수 있다는 점도 인정한다. 그들은 대부분 잡초 중에서도 가장 나쁜 종들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많은 종이 자기 지역을 벗어나 남의 땅을 무단 침입한 것들이었다. 그들은 관상용 정원과 제약회사 농장의 체계적인 통제에서 벗어나 우후죽순처럼 미친 듯이 자랐다. 심지어 몇몇 종은 매우 치명적인 독성을 지녔다. 그 뒤에 적어도 두 가지 종은 너무나 급속히 퍼진 나머지 현재 ‘야생에서 키우거나 어떤 식으로든 자라게 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었다. 하지만 잡초는 환경이 중요하다. 어떤 풀이라도 그렇게 험한 환경에서 자라면 잡초가 된다. 그것들은 연좌제의 희생양으로 옆에서 자라는 좋지 않은 특성을 지닌 동료들과 싸잡아 매도당한다. 만약 풀이 쓰레기 더미에서 싹이 튼다면 그들은 그 자체가 쓰레기 중 하나가 된다. 식물 쓰레기 말이다. 잡초들이 이 행성에 끼치는 영향을 고려하면 결국 그들의 평판이, 그러니까 그들의 운명이 이런 종류의 개인적 판단의 문제라는 사실, 즉 그들이 악마 취급을 받느냐, 아니면 받아들여지느냐가 개인에게 달렸다는 사실이 항상 맞는 말 같지는 않다.

성경 창세기를 보면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저지른 죄에 대한 벌로 땅에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나게 되었다. 이후 잡초는 마치 세균처럼 문화적인 범주가 아니라 생물학적인 범주에 속한 것인 양 가치 판단을 초월해 어디서나 볼 수 있으며,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존재가 된 것 같다. 수천 년 동안 잡초들은 농작물을 말려 죽이고 생태계의 질서를 어지럽혀 왔다. 중세 시대에는 중독 사건을 일으키며, 사악함을 암시하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요즘에는 해충에 뿌리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화학 약품을 쏟아 부어도, 잡초는 여전히 농작물의 생산량을 10%에서 20% 정도 감소시키고 있다.

또한 잡초들은 해마다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국제 무역으로 인해 전 세계로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범세계적인 공짜 식객들이 전해졌다. 스트리가는 모양이 예쁘지만 기생적인 금어초이다. 원산지 케냐에서는 유명 인사들이 지나가는 길에 뿌리던 꽃이었다. 1956년에 이 풀은 미국 동부로 가는 길을 발견하고는 몇십만 에이커의 옥수수밭을 그루터기만 남기고 초토화시켜 버렸다. 그리고 무늬왕호장근은 숲 정원에서 볼 수 있는 우아한 관목으로 빅토리아 시대에 영국으로 들어왔는데, 정확히 1세기가 지난 후 무늬왕호장근의 여린 꽃술과 작고 우아한 가지는 우리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되었고, 이제 우리는 그것을 이 나라에 들어온 가장 위험한 침입 식물로 여기게 되었다.

현재 런던 동부의 올림픽 개최지에서 무늬왕호장근을 퇴치하는 데 예상되는 비용은 무려 7천만 파운드에 달한다. 이들 불법 식물종 중 잡초 신세를 면하고, 자신의 정체성이나 그냥 호칭이라도 바꾼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이들 두 사례만 봐도 블랙리스트에 오른 잡초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정의가 정확하다고 볼 수는 없다. 어떤 곳에서는 관상용인 식물이 다른 곳에서는 악성 침입자가 된다. 수 세기 전에는 농작물이나 약초로 대접받던 식물이 그 지위를 잃고 숲속의 무법자로 변신한다. 그에 못지않게 잡초는 식용 식물이나 아이들의 놀잇감 혹은 문화적 상징으로 길들여지기도 한다.

잎이 파삭파삭한 흰명아주는 이런 문화적 돌연변이 과정을 모두 거친 식물이다. 바닷가에서 야생으로 자라던 흰명아주는 해변에서 벗어나 신석기 시대 농부들의 두엄 더미로 이동했다. 그 뒤에는 기름진 씨앗을 얻기 위해 경작되었다. 그러다가 맛이 변하면서 사탕무(얄궂게도 사탕무는 명아주과에 속하는 식물이다.) 같은 작물에 침입하는 혐오종이 되었고, 현대에 와서는 약탈자들이 가끔 찾는 식물이 되고 말았다. 물론 ‘모든 것은 전적으로 여러분이 잡초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달려 있다. 그 정의를 알면 잡초가 한 문화권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어디에서 어떤 방법과 어떤 이유로 식물을 달갑지 않은 존재로 분류하는가? 그것은 자연과 문화, 야생과 길들여짐을 구분하려는 끊임없는 시도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현명하고 관대하게 그 경계에 선을 긋는지가 지구의 표면을 덮은 초록색 식물의 성격을 결정한다. 잡초는 ‘부적절한 장소에서 자라는 식물’로 정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당신이 다른 풀이 자라기를 바라는 곳, 또는 어떤 풀도 자라지 않기를 바라는 곳에 존재하는 식물이다. 이것은 꽤 그럴듯한 정의이다. 하지만 이 정의는 정교하지 못하다. 어떤 식물에 ‘적합한 장소’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못해서이다. 자연의 온화한 삼림 지대보다 물푸레나무에 더 적합한 장소를 상상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수목 관리원들은 수목들 사이에서 자라는 상업적으로 더 유용한 목재용 물푸레나무를 ‘불량목’이라 부른다. 그 이유는 물푸레나무가 수목 관리원들이 힘들여 키워 낸 성과물에 그늘을 드리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명백하고도 객관적인 ‘적합한 장소’란 ‘영토’, 즉 더욱 개인적이며 문화적으로 결정된 어떤 공간, 그곳에 대한 긴밀한 조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잡초를 정의하는 기준도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질 수 있다. 호주 빅토리아에 정착한 스코틀랜드 이주민들은 그들의 동료가 어떻게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존재에서 불법 침입자로 전락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날 우리는 마구간 근처 통나무 옆에서 자라는 스코틀랜드 엉겅퀴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말의 사료에서 우연찮게 발견된 씨앗이었죠. 그것을 신문으로 조심스럽게 싸서 돌 밑에 두었습니다. 며칠 후 그것은 자리를 잡고 자라나서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었죠. 그때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어요. 스코틀랜드에서 온 그 엉겅퀴가 20년 후에 온 대륙에 퍼져서 성가신 존재가 되고, 급기야 여러 지방의 관공서에서 그것을 뿌리 뽑기 위해 특별법을 제정할 만큼 큰 골칫거리가 되리라는 것을 말이지요.”

다른 정의들은 다른 종류의 문화적 부적합성 또는 무자격성을 강조해 왔는데, 랄프 왈도 에머슨은 유용성을 선택했다. 그는 잡초란 ‘아직 그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식물’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유죄 선고를 받은 것들의 집행 유예가 여전히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관대하고 식물 친화적인 발상이다. 하지만 흰명아주처럼 한 식물의 가치는 동시대 사람들의 평가에 달려 있다. 아무튼 잡초는 부적절한 곳에서 자라는 식물일 뿐 아니라 어쩌다 잘못된 문화로 들어오게 된 식물이기도 하다.



잡초는 인간의 생태적 협력자


그러한 모든 정의는 인간의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잡초는 인간의 계획을 방해하는 식물이다. 그것들은 농작물의 영양분을 빼앗고, 정원 설계자들이 섬세하게 계획한 풍경을 망치고, 우리가 사회적으로 정한 기준에 따르지 않으며, 불쾌하게도 사람들이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도시의 쓸모없는 사람들의 은신처가 된다. 하지만 그것들도 식물학적인, 혹은 적어도 생태학적인 정의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잡초들이 어떤 식으로든 가까운 생물학적 친척들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잡초라는 꼬리표가 붙은 식물들은 단순한 조류(藻類, 물속에 사는 하등 식물의 한 무리)에서부터 열대 우림에 사는 나무들까지 그 안에 있는 식물 집단 중 어느 하나에 속한다.

하지만 잡초들에겐 적어도 하나의 공통된 행동 양식이 있다. 그들은 인간과 함께 번성한다는 것이다. 잡초는 기생식물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 곁에서 유독 번성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자연계에서 그들의 생태적 협력자다. 잡초는 우리가 땅에서 하는 일을 좋아한다. 숲을 청소하고, 땅을 파고, 농사를 짓고, 영양분이 풍부한 쓰레기를 버리는 것 말이다. 그들은 경작 가능한 들판이나 전쟁터, 주차장, 여러해살이풀이 자라는 화단 가장자리에서 잘 자란다. 그리고 우리의 운송 시스템과 요리에 대한 모험심, 포장에 대한 집착을 잘 활용한다. 무엇보다 그들은 우리가 세상을 휘젓고, 안정된 질서를 어지럽힐 때 우리를 활용한다. 요즘 잡초가 제초를 가장 많이 하는 곳에 가장 무성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그러한 사실을 볼 때, 우리는 제초가 잡초를 장려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에 대해 질문해 보아야 한다.

인간의 친구라는 잡초의 이미지는 그들을 인간의 스토커로 보는 문화적 관점을 도덕적이고 중립적이며 생태학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보다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면 그들은 우리의 동반자로 지내 왔다. 우리는 잡초와 협력 관계, 말하자면 공생 관계를 유지하며 많은 혜택을 받아 왔다. 잡초들은 어디에나 흔하고, 채취하기 쉽고, 우리가 잘 아는 풀이기 때문에 가정에 채소가 필요할 때마다 요긴하게 쓰였다. 잡초는 최초의 채소이자, 최초의 가정상비약이며, 또는 염색 재료였다. 잡초를 독창적으로 활용할 방안은 무궁무진했다. 배수가 잘 안 되는 토양과 잔디에 끈질기게 나는 잡초인 쇠뜨기의 잎들은 작은 규토 알갱이들로 덮여 있다. 그래서 잎이 아주 거칠다. 그런 특징 때문에 쇠뜨기 잎은 연마제로 사용하기 좋아서 사람들은 한때 백랍 그릇과 화살대를 닦는 데 사용했다. 단단한 토양의 또 다른 침입자인 골풀(soft rush)의 중과피(열매에서 겉 과피와 속 과피 사이에 있는 두꺼운 육질 부분)는 기름을 빨아들이기 때문에 가는 초의 심지로 사용되었다.



초대받지 않은 문명의 침입자들




1945년 5월 1일, 유럽 전승 기념일 바로 1주일 전, 큐 왕립 식물원의 관리자가 런던의 피폭 지역에서 못 보던 잡초가 자란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전날 미군이 다하우 수용소를 해방시켰지만, 『타임스』는 그 강연 내용의 기이함, 아니 어쩌면 그 사실이 상징하는 좀 더 깊은 의미를 감지하고는 그것을 헤드라인 뉴스로 다뤘다. 에드워드 솔즈베리 교수는 폭격을 당한 사보이 예배당(이 예배당만 해도 4번 폭격을 맞고 11번 피해를 입었다.)에서 이 사실을 발표하면서 그 도시의 노출된 상처 곳곳에 완전히 새로운 생태계가 어떻게 뿌리를 내렸는지 설명했다. 그것은 전시라는 극적 사건뿐 아니라 뭔가를 떠올리게 하는 이들 식물 불사조의 이름으로 채색된 한 편의 이야기이며, 야생의 자연과 영국 수도에서 일어난 인간의 일이 우연히 연결된 것 그 이상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피커딜리에 있는 세인트 제임스 교회가 폭격을 맞자 의용 소방대가 뿌린 물로 외벽이 흠뻑 젖어 버렸고, 고사리들이 습한 환경을 마음껏 누리며 신도석을 뒤덮었다. 그리고 금방망이속 식물(옥스퍼드 금방망이―18세기에 에트나산 기슭에서 온 이주종)의 화려한 꽃들이 런던 월(London Wall)의 깨진 벽돌을 수놓았다. 또 독말풀은 나이 든 약재상들이 꼽는 가장 효능이 좋은 만능 약재 중 하나로 새로 빛이 들게 된 치프사이드(런던 중앙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큰 거리) 지하에서 싹이 텄다. 4세기 전 그것은 거기서 불면증 환자와 치통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판매되었을 것이다.

종전을 위한 겸손한 꽃인 양 교묘한 이름을 지닌 별꽃아재비(페루산)는 여덟 군데의 피폭 지역 중 한 군데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런던 사람들이 ‘폭탄 잡초’라는 이름을 붙여 준 분홍바늘꽃의 보랏빛 물결은 거의 온 사방에서 눈에 띄었다. 거기다 가는미나리아재비나 별꽃, 쐐기풀, 돌소리쟁이, 개쑥갓, 질경이, 마디풀, 창세기에 나오는 ‘가시와 엉겅퀴’ 등 조금 덜 매력적인 익숙한 풀들도 있었다. 솔즈베리 교수는 총 126개 종을 모두 기록해 두었는데, 그것은 잡초 폭풍이자, 누군가 필요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문명이라는 판이 야생을 얼마나 얇게 덮고 있는지 알려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런던 사람들이 파괴된 자기 도시를 이렇게 침입한 존재에 대해 어떻게 느꼈는지 알려 주는 것은 별로 없다. 그들은 그것을 일종의 치유, 그러니까 역경에 맞선 삶의 회복력으로 보았던 걸까? 아니면 매우 커다란 상처에 그런 무례가 가해진 걸로 느꼈던 걸까? 그것은 결코 영국의 알려지지 않고 있던 장미가 그 혼돈을 이용해 피어난 게 아니라, 기회주의자와 노름꾼들, 말하자면 식물 세계의 건달들이 일으킨 폭동이었다. 어쩌면 영원히 양가감정(하나의 대상에게 상반된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 것)으로 느껴질 잡초들, 그들은 양쪽 감정을 모두 느꼈을지도 모른다. 나는 런던 사람들이 그 교수가 그런 위대한 개화에 대해 설명하는 걸 듣고 많은 위로를 받았는지, 잡초의 관점에서 보면 런던 대공습은 어쩌면 그저 대대적으로 훌륭하게 땅이 뒤엎어진 것일 뿐인 건 아닌지 그런 의심이 든다. 그들 중 누군가 폭격당한 땅을 여기저기 때우며 장식하고 있는 약초 붕대를 놓고 독일 사람들을 욕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중 많은 씨앗이 날아온 곳이 자기 정원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식물학 저술가 마이클 폴란은 통상 ‘우리가 없으면 잡초는 생존할 수 없다.’라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경작지와 잔디밭, 빈터를 만든 인간이 없어지면 잡초들은 대부분 곧 사라져 버릴 것이다. 들판과 정원에서 너무나 감당하기 힘든 덩굴 식물은 다른 어떤 곳에서도 자랄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살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초대도 받지 않고 우리 공동체에 그냥 들어와 마침내 ‘잡초’라는 문화적 범주를 형성한 종들은 자기 제국의 확장을 시작한 야생 그 어딘가에서 근근이 살아 냈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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