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룰렛
데즈먼드 슘 지음 | 알파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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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즈먼드 슘 지음
알파미디어 / 2022년 3월 / 363쪽 / 16,800원
서문 - 성공 가도를 달리던 그녀가 사라졌다2017년 9월 5일, 휘트니 단이 베이징 거리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그날 우리가 함께 건설한 25억 달러가 넘는 개발 프로젝트인 제네시스 베이징의 사무실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 그녀의 사무실은 무장한 경비원들, 조경이 꼼꼼하게 설계된 정원, 수십 종의 이탈리아 대리석 장식을 통과해야 방문객이 그녀를 만날 수 있을 정도로 경비가 삼엄한 곳이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수십억 달러 이상의 부동산 프로젝트를 쥐고 흔드는 막강한 존재였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회사의 고위 간부 두 명과 가정부를 겸한 보조 직원 한 명도 함께 사라졌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나는 그녀 덕에 공산당 고위 간부가 된 친구들에게도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이 일에 상관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사건에 휘말릴까 봐 전전긍긍했다. 휘트니를 붙잡아 둔 기관으로 추정되는 공산당 감찰중앙위원회를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선뜻 도움을 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휘트니가 사라졌을 때, 그녀의 재산은 우리가 함께 사업을 시작한 초기에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았다. 가부장적 사회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던 그녀는, 공산당이 주장하는 ‘신중국’ 건설이라는 룰렛 도박판 같은 정치 환경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으로 거물급 정치 가문과의 협력을 최대한 활용해 상상할 수 없는 성공을 이뤄 냈다. 그녀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의 사랑, 나의 조국나는 1968년 11월 상하이에서 태어났는데, 우리 집안은 당시 중국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핍박받는 쪽(친가)과 그렇지 않은 쪽(외가)으로 완전히 갈렸다. 공산당 교리에 따르면, 우리 아버지 쪽은 이른바 ‘5대 요주의 그룹’, 즉 지주, 부유 농민, 반혁명주의자, 불순분자, 우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친가 쪽 가문이 천대를 당하면서, 아버지는 더 좋은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어머니의 가족은 해외에 연줄이 있었지만, 어머니와 중국에 있는 외가 친척들은 핍박을 모면했다. 1949년 공산주의 혁명 이전에, 외할아버지는 홍콩과 상하이를 오가며 두 도시에서 회사를 운영하셨다. 1940년대 후반, 장쩌민이라는 젊은이가 상하이 치약 공장의 노동자 대표로 회사와 협상에 나섰을 당시 외할아버지가 그 회사의 사용자 측 대표였다. 그로부터 40년 후인 1989년에 장쩌민은 공산당 총서기를 거쳐 1993년에는 중국 최고 권력자인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되었다.
1949년 공산당이 상하이를 점령하자 외가는 홍콩으로 이주했다. 그러면서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와 사이가 멀어졌고 딸(내 어머니)을 포함한 세 자녀를 데리고 상하이로 돌아왔다. 그러나 두 분은 이혼하지 않으셨고,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중국에 사는 외할머니에게 생활비를 보내며 가족들을 부양했다. 1949년 혁명 이후 중국 공산당은 우리 외가 같은 가문들을 외화 수입원으로 이용하면서, 미국이 중국에 취한 냉전 시대의 무역 금수 조치를 돌파해 나갔다. 당은 이런 가문을 ‘애국적인 화교’라고 불렀는데, 이는 관련 당국에 중국에 남아 있는 친척들을 관대하게 다루라는 신호였다.
홍콩에서의 유년 시절1978년 여름 방학이 되자 어머니와 나는 홍콩으로 갔고, 어머니는 곧 홍콩에서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녀는 수학 전공을 살려 섬유 공장에서 경리원으로 일했고, 밤에는 부기 강좌를 들으며 실력을 쌓았다. 그리고 어머니는 몇 차례 상하이로 돌아가 아버지도 함께 홍콩에 보내 줄 것을 당국에 요청했고, 마침내 2년 동안의 끈질긴 노력 끝에 어머니는 당국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홍콩으로의 이주는 이후 내 삶에서 여러 차례 있었던 이주의 첫 번째였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나는 아시아에서 미국으로, 다시 아시아로, 그리고 유럽으로 이주했다. 이 같은 계속된 이주는 내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덕분에 극적인 변화에도 전 세계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게 되었는데, 나는 대세에 순응하면서 다른 문화에 적응하는 법을 배웠다. 한편 나는 12살 때 남자 공립 중등학교인 홍콩 퀸스 칼리지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7학년을 마치고 위스콘신대학교에 들어갔다.
미국 유학 후 다시 홍콩으로나는 1993년 위스콘신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홍콩으로 돌아왔고, 투자 은행에 지원서를 보내며 일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씨티은행 비커스에 증권 브로커로 들어갔다. 하지만 증권 브로커로 9개월 동안 일한 후 다른 직업을 찾기 시작했고, 1994년 차이나베스트라는 사모 펀드 회사에 취직했다. 차이나베스트는 1981년 밥 텔린과 그의 아내 제니, 그리고 다른 두 명의 미국인이 설립한 회사였다.
한편 차이나베스트가 지분을 인수한 첫 번째 중국 기술 회사는 중국 인터넷의 중추를 구축하고 있던 아시아인포였는데, 이 회사는 에드워드 티안과 딩 지안이라는 중국인 유학생 두 명이 1993년 텍사스에서 설립한 회사다. 차이나베스트가 아시아인포의 지분을 인수하는 거래에서 나는 애널리스트 역할을 맡았는데, 티안은 차이나베스트의 경영진들이 생각지도 못한 액수의 돈을 요구했다. 아시아인포의 수익이 1,500만 달러도 되지 않았는데도 그는 1억 달러(1,200억 원)의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아시아인포에 관심을 보인 곳은 차이나베스트만이 아니었다. 결국 글로벌 사모 투자 회사 워버그 핀커스가 1,200만 달러, 우리가 700만 달러, 피델리티벤처스가 약 100만 달러를 투자했는데, 이는 당시 중국 내 사모 투자 기록으로는 최대 규모의 금액이었다. 이후 아시아인포가 2000년 3월 3일 나스닥에 주식을 상장했을 때, 주가는 24달러에서 110달러 넘게 급등했다가 75달러로 안정되면서 314퍼센트의 상승률을 기록했다. 결국 투자에 참여한 차이나베스트 파트너들은 적어도 장부상으로 8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중국 기업의 광풍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아시아인포의 거래에 참여한 사람들을 알게 되면서, 나는 중국 기업들이 빠르게 성장하기 위해 어떤 방식을 취해야 할지를 어느 정도 깨닫게 되었다. 핵심은 기업가적 인재를 어떻게 정치적 연줄과 연결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예를 들면 아시아인포가 뉴욕 증시에 상장하기도 전에 중국 공산당 총서기 장쩌민의 아들 장몐헝이 설립한 중국 국영 기업이 티안에게 넷컴이라는 회사에 합류하도록 유도했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티안의 성공은 장몐헝이 없었다면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티안이 가지고 있는 불굴의 정신력과 장몐헝이 가진 정치적 연줄이 결합해 마침내 중국의 성장을 견인한 셈이었다.
차이나베스트의 아시아인포 투자는 외국 회사들도 이 게임에 참여할 수 있다는 선례가 되었고, 외국 기업들은 중국 고위 관리의 아들딸을 이용해 체제 내부의 환심을 사는 데 관심을 가졌다. 한편 아시아인포가 이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영입한 은행가 중에 펑보라는 젊은이가 있었는데, 아시아인포 투자 거래가 성사되면서 차이나베스트는 베이징 지사의 첫 대표로 펑보를 고용했다. 그러나 겨우 1년 만인 1997년 가을, 펑보는 자신의 투자 회사를 설립한다며 회사를 떠났다. 참고로 펑보는 미국인 아내와 이혼하고 덩샤오핑의 손녀인 주오웨와 결혼했다. 아마도 펑보는 덩씨 가문과의 연줄을 이용해 상당한 부를 축적했을 것이다. 펑보가 차이나베스트를 떠난 직후 경영진은 회의를 열었는데,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텔린의 아내 제니가 나를 옆으로 끌어당기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봐요, 데즈먼드. 베이징으로 옮길 생각 없어요? 가서 중국 지부장을 맡으면 좋을 텐데.” 결국 나는 그 기회를 잡았다. 중국에서 태어나 홍콩과 미국에서 교육받은 내가 이제 중국 본토로 돌아가면 스물아홉 살의 내 인생은 완전한 순환을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곧이어 텔린이 내가 중국 지부장으로 승진했다고 발표했다.
잠에서 깨어나는 중국1997년 말 베이징으로 간 나는 새로운 중국을 발견했다. 덩샤오핑이 1992년부터 개혁을 재개한 이후, 중국의 경제 규모는 두 배가 되었고, 아마 2004년까지 다시 두 배가 될 것이다. 차이나베스트의 베이징 지부장으로 일하던 중 1999년 말, 나는 기업가이자 인민 해방군 장군의 아들인 란하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란은 통신업계에서 꽤 잘 알려진 인물이었으며, 란의 회사인 팜인포는 비서 업무와 은행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기존 콜센터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차이나베스트는 팜인포에 관심이 있었고, 우리는 궁극적으로 란이 400만 달러의 자금을 유치하는 것을 도왔다. 그런데 1999년 말 란은 내게 새 일자리를 제안했고, 그것은 내 인생에 또 다른 큰 변화를 가져왔다.
사실 란이 일자리를 제안했을 때 나는 사모 펀드 회사에서의 내 직업에 의구심을 품고 있던 참이었다. 결국 나는 2000년 초에 팜인포의 CEO로 합류했고, 란은 회장 자리로 한발 물러났다. 이후 우리는 모토로라 중국 법인 출신의 고위 간부를 영입했고 100명의 직원을 추가로 고용했다. 또 미국 캘리포니아 어바인에 지사도 개설했다. 하지만 팜인포에서 우리의 성과는 아쉬운 점이 많았다. 비용은 많이 늘어났지만, 수입은 미약했다. 우리는 중국의 은행들이 우리 서비스를 구매하도록 설득하지 못했다.
2001년 늦은 봄, 사업을 시작하고 18개월 만에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 봉착했다. 우리는 사무실 규모를 더 작게 줄였다. 직원도 해고했다. 나 역시 불필요한 존재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만뒀다. 나는 부모님이 계신 상하이로 향했다(이때 부모님은 홍콩에서 상하이로 다시 이사 오셨다). 아버지의 직장 상황은 나와는 정반대였다. 그는 타이슨의 중국 사업을 무(無)에서 연간 1억 달러 이상으로 성장시켰고, 성공에 대한 대가로 타이슨은 중국 본토에 법인을 개설하고 아버지를 중국 법인 대표로 임명했다.
나는 늘 발전하는 데 익숙했지만, 지금은 패배를 인정해야만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데일 카네기의『인간관계론』같은 자기 계발서에서부터 중국 철학자 공자와 맹자, 불교계의 영적 스승 난화이친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읽으면서, 자기비판과 자기 발견의 여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뛰고 싶으면 먼저 머리 숙이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라는 중국 속담의 의미를 이해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가끔 팜인포 일을 했는데, 우리는 통신업계에 하드웨어를 판매해 온 ‘그레이트오션’이라는 회사와 합병을 논의하고 있었다. 우리의 소프트웨어가 그들의 제품을 보완했기 때문에 고객이 겹칠 때가 많았고, 그레이트오션은 늘 현금 부족에 시달려 왔기 때문에 새로운 투자자들을 원했다. 2001년 겨울 베이징으로 가서 그레이트오션 사무실을 방문했고, 그곳에서 나는 단종(Duan Zong)이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녀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그레이트오션의 회장 휘트니 단이라고 합니다.” 나는 거의 6년 동안 중국을 누비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이렇게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여성 기업가는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우리가 만났을 때 그녀는 30대 중반이었고, 몸무게도 좀 불어난 것 같았다. 그래도 그녀는 타고난 인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통찰력과 에너지로 빛났다. 그녀는 중국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해 철학적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중국 사람들이 왜 외국인들과 다르게 반응하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아무튼 그녀는 사랑하는 조국과 나를 다시 연결해 주는 다리가 되었다. 더구나 그때 나는 인생의 전환기에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매력에 흠뻑 빠지고 말았다.
우리는 사귀기 시작했고, 하이킹을 하거나 영화를 보러 다녔다. 하지만 우리의 관계가 남달랐던 것은 토론이었다. 휘트니는 내게 중국 정치 시스템을 속성 과정으로 가르쳐 주었는데, 서방 세계에서 정당들은 선거에서 승리하고 정권을 장악해야만 권력을 가질 수 있으나, 중국에서는 중국 공산당과 싸울 경쟁자가 없다고 했다. 반면 나는 휘트니의 시야를 넓히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녀에게 와인과 서양 음식에 대해 가르쳐 주었고, 그녀를 체육관에 데리고 가서 내가 수년 동안 익힌 체력 훈련 방법을 이용해 몇 파운드의 체중을 감량시켰다. 참고로 우리가 사귀는 동안 그녀는 나를 영어 이름인 데즈먼드라고 불렀고, 나는 그녀를 샤오단(小段)이라고 불렀으며, 그녀와 만난 지 1년 만에 우리는 동거에 들어갔다.
휘트니와의 만남아시아인포의 에드워드 티안처럼 휘트니도 중국에서 성공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2개의 열쇠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첫 번째는 정치적 수완이었다. 중국에서 기업가들은 공산당의 이익에 영합해야만 성공할 수 있었는데, 사업을 하려면 이 시스템 안의 스폰서가 필요했다. 두 번째 열쇠는 기회가 왔을 때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바로 이 두 가지 열쇠를 모두 가지고 있어야만 중국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휘트니가 시작하고 내가 함께 가담한 이야기의 핵심이다. 휘트니와 나는 여러 면에서 잘 맞았다. 2002년 초여름, 휘트니는 이제 우리의 관계가 다음 단계로 넘어갈 준비가 되었으므로 우리의 결합을 승인해 줄 특별한 사람을 만날 때가 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우리가 왜 또 다른 사람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지 궁금했다. 이미 휘트니의 부모님도 만난 터였다.
놀라운 인맥, 원자바오의 부인휘트니는 베이징 그랜드 하얏트 호텔 지하에 있는 광둥식 레스토랑 ‘유팅’을 만남의 장소로 예약했다. 약속 시간인 6시 30분이 되기 전에 우리는 로비로 올라가 손님을 기다렸다. 이윽고 BMW가 미끄러지듯 들어왔고, 막스 마라 의상에 꽃무늬 스카프를 한 다소 평범해 보이는 중년 여성이 차에서 내렸다. 휘트니는 그녀를 ‘장 아이’(‘아이’는 이모라는 뜻임)라고 소개했다. 삶은 농어와 볶은 중국 브로콜리를 먹으면서 장 이모는 나의 배경과 교육 그리고 상하이, 미국, 홍콩에서의 생활, 사모 주식, 팜인포 등에 대한 질문을 연거푸 퍼부었다. 휘트니가 내게 사전에 귀띔해 준 거라고는 그녀가 친한 친구이자 중요한 존재라는 것뿐이었다.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도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나고 나서 휘트니는 그제야 장 이모가 중국 부총리 중 한 명인 원자바오의 부인 장페이리라고 말해 주었다. 원 부총리는 곧 중국 정부의 수장이자 중국 공산당의 이인자가 될 것이다. 휘트니가 그런 사람의 부인과 친구라니,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휘트니는 2001년에 장 이모가 참석한 어느 파티에 초대되었는데, 그때 그녀는 자신이 잘 아는 중국 고전을 인용하면서 장 이모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고, 두 사람은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장 이모는 휘트니에게 자신을 ‘이모’라고 부르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개인적으로 좀 더 친해질 의향이 있다는 표시였다. 그런데 휘트니는 웬만한 중국인들은 하지 못할 일을 했다. 바로 장 이모에게 연락하지 않은 것이다. 휘트니는 중국에서 힘 있는 사람과의 관계를 구축할 때, 너무 적극적으로 달라붙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일주일이 지난 후, 장 이모가 미끼를 물었다. 그녀가 먼저 휘트니에게 전화를 걸어 왔고, 왜 연락하지 않느냐고 꾸짖은 것이다. 그러면서 장 이모는 다시 만나자고 제안했다. 이번에는 더 친밀해질 수 있는 기회였다. 단 둘이 만나는 저녁 식사 자리였으니까.
악어의 이빨을 청소하는 물고기처럼2003년 원자바오가 총리로 임명된 직후 그의 가족은 베이징 중심가로 이사했다. 원 총리 부부가 새 집으로 이사하면서, 장 이모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방 광장에 휘트니와 함께 개인 사무실을 열었다. 휘트니는 장 이모의 가장 가까운 여성 동반자로서, 때로는 친구, 때로는 조언자, 때로는 가장 믿을 수 있는 보좌관 역할을 두루 담당했다. 나는 장 이모의 세계에 빠르게 스며드는 휘트니의 능력에 놀랐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장 이모와 친해지길 원했지만, 휘트니는 단연 최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