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중독
박수경 지음 | 가연
관계중독
박수경 지음
가연 / 2022년 1월 / 396쪽 / 18,000원
chapter 1 당신의 특별한 관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한없이 낮은 자존감의 역습요즘처럼 일상에서 중독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는 때도 드물었던 것 같다. 문화적으로 조금만 인기를 끌어도 ‘중독적’이니 ‘마약’이니 호들갑을 떤다. 가는 곳마다 ‘마약’을 달고 있는 상품들을 본 어느 외국인이 전에는 한국이 마약 청정국인 줄 알았는데 와서 봤더니 마약 천국이라고 혀를 내두르는 걸 모 TV 예능에서 본 적이 있다. 웃어넘기기에는 심상치 않을 정도로 한국인들은 중독을 입에 달고 산다. 이제는 물질중독을 넘어 관계에 이르기까지 중독을 입버릇처럼 말한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지만 물어보면 실상 정확히 알지 못하는 관계중독, 과연 관계중독은 무엇일까?
관계중독이란 무엇인가: 조관우의 <늪>이라는 노래가 있다. 화자는 끊임없이 멈추고 신고 돌아서고 싶지만 더 이상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관계중독의 상태를 늪에 비유하고 있다.
멈출 수가 없었어, 그땐. 돌아서야 하는 것도 알아.
기다림에 익숙해진 내 모습 뒤엔 언제나 눈물이 흐르고 있어.
(오늘 밤 내 방엔) 이미 나는 (파티가 열렸지) 늪에 빠진 거야.
마약과 알코올에 대해서는 경계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관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혹자는 관계중독이 과연 중독에 포함될 수 있느냐를 두고 명확한 정의와 평가가 내려지기 힘들다고 말한다. ‘과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관계중독이라고 볼 수 있는가?’ ‘하루라도 안 보고 못 배기는 관계가 관계중독인가, 일주일에 과연 몇 번 섹스를 해야 중독이 아닌가?’ 한편으로 선을 긋기가 참으로 애매하다. 산속에 틀어박혀 사는 자연인이나 교도소에 감금된 재소자들처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세상에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관계중독이라는 용어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중독도 엄연히 중독의 하나로 여길 수밖에 없는 세 가지 공통된 특징을 꼽을 수 있다. 첫째, 알코올이나 마약 같은 물질중독처럼 관계중독 역시 한 사람 혹은 특정 관계에 대한 갈망과 의존이 분명 존재하고 있으며, 둘째, 술을 끊으면 손이 떨리거나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계에 대한 갈망을 인위적으로 중단하려고 할 때마다 어김없이 금단증상이 발생하고 있으며, 셋째, 결국 그 갈망을 개인이 통제하거나 제어할 수 없어서 일상생활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술을 끊지 못해 다시 숨겨놓은 소주를 찾는 알코올중독자처럼, 관계중독자 역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관계를 찾아 끊임없이 뒷골목을 배회한다.
· 관계에 대한 갈망과 감정의 의존
· 관계 단절 시 찾아오는 금단증상
· 통제 불능으로 일상생활에 지장 초래
필자는 개인적으로 알코올중독자를 상담할 기회가 종종 있는데, 그들이 갖는 중독의 특징들이 그대로 관계중독에도 나타나는 것을 자주 본다. 술을 입에도 대고 싶지 않지만 음주에 대한 충동을 제어할 수 없어 자꾸 실수를 저지르게 되고, 이로 인해 회사에서도 제어할 수 없어 자꾸 실수를 저지르게 되고, 이로 인해 회사에서도 해고당하고 가족도 처참히 깨지는 한 중년의 남성을 상담한 적이 있다. 그는 필자만 만나면 똑같은 하소연을 한다. “소장님, 누군들 술을 마시고 싶겠어요? 저도 미치겠어요. 어쩔 수 없이 손이 간다니까요.” 그는 술 문제로 여러 번 재활병원을 들락거렸고 음주운전으로 실형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자꾸 술에 손을 대곤 했다. 그에게 이제 술은 쾌락의 물질이 아니라 고통을 유발하는 물질로 둔갑했다. 그럼에도 그는 술을 끊지 못했다.
관계중독 역시 알코올중독과 같다. 인간관계에서 감정적 의존 관계에 빠져 시간과 돈을 잃고 나중에는 몸에 병도 얻어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해질 정도가 된다. 상대방을 만나지 못하면 공허감과 불안증, 우울증, 공황장애 등 심리적 금단중상을 호소한다. ‘아, 내가 이러면 안 되지.’ 관계를 끊으려고 해도 더 이상 자신의 의지나 노력으로 상대방을 만나지 않거나 연락을 단절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미 병적인 관계로 인해 직장과 다른 인간관계가 모두 무너졌지만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은 관계의 늪에 빠지고 만다.
관계중독도 엄연히 중독의 일종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특성들을 감안할 때, 분명 관계중독은 중독의 일종이다. 특히 관계중독은 표면적인 징후가 명확하지 않아 병식을 특정할 수 없기 때문에 물질중독에 비해 예후도 나쁘고 결과도 훨씬 치명적이다. 또한 관계중독의 범주는 정의와 특성에 따라 매우 넓기 때문에 효과적인 치료법을 찾는 것조차 쉽지 않다. 어떤 상담가는 관계중독을 사랑중독과 사람중독에 한정하는 반면, 어느 유명한 상담가는 성중독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범주를 넓게 잡아 남녀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벌어지는 중독과 유사한 병리적 현상을 모두 관계중독으로 봐야 한다는 학자들도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 보니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관계중독은 과연 언제부터 연구되어온 걸까? 관계중독은 앤 윌슨 셰프에 의해 ‘공의존’이라는 개념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알코올중독자를 돌보는 배우자나 보호자에게서 보이는 특정 심리에서 공의존(condependency)이라는 개념을 끌어냈다. ‘공의존’ 또는 ‘공동의존’, ‘동반의존’이라고 불리는 이 개념은 알코올중독자의 배우자나 보호자가 상대방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집착하거나 의존적으로 굳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공의존의 위험성은 본인이 그것을 인지하기 매우 어렵다는 데에 있다. “이렇게 동반중독(공의존)이란 아주 은밀하고 교묘하다. 게다가 우리 문화에서는 이것이 사람마다 다르게 인지되기 때문에, 알아차리기도 쉽지 않다. 예컨대 알코올중독이나 다른 중독들은 대체로 모두에게 부정적 또는 나쁜 것으로 간주되지만, 동반중독은 오히려 사람들에 의해 적극 조장되는 면이 있다. 그래서 동반중독자들은 자신의 질병을 치유해야 할 필요성조차 잘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질병이 우리의 문화를 지지할 뿐 아니라 역으로 사회 문화에 의해 지지받기도 하기 때문이다.”(앤 윌슨 셰프, 『중독사회』(이상북스), 강수돌 역, 73.)
그러면서 셰프는 공의존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공의존은 첫째, 남(중독자)을 돌보려고 한다. 둘째, 매우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다. 셋째, 자신을 드러내거나 표현하지 않기 위해 감정을 억압하려고 한다. 넷째 특정 관계에 강박을 가질 수 있다. 다섯째, 스스로 힘들어 하면서도 벗어나려 하지 않고 상대의 통제를 받거나 상대를 통제하려고 한다. 여섯째, 자신이 처한 현실을 애써 부정하고 무시하려고 한다. 일곱째, 자신의 삶에 대해 불안해하면서 상대에게 의존하려고 한다. 여덟째, 보통 의사소통에 매우 서투르다. 아홉째, 겉으로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삶의 원칙이나 기준이 남들보다 미약한 경계를 가지고 있다. 열째, 타인을 신뢰하지 못한다. 열한째, 분노에 익숙하지만 밖으로 표출하지 못한다. 열두째, 성적 문제를 경험하지만 이를 인정하기 어려워한다. 열셋째, 지나치게 책임을 지려 하면서 동시에 책임을 방기하거나 회피한다.
특히 셰프는 공의존자에게서 보이는 완벽주의가 관계에서 스스로를 고문하고 학대하는 기제로 사용되는 상황을 종종 언급했다. “완벽주의는 최고의 자학이다.” 완벽주의라는 함정에 빠지면 일차적으로 자기 자신을 힘들게 하며 이차적으로 상대방까지 얽어맨다. 비록 겉으로는 많은 것을 성취하고 자신감이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 내면은 불안과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미국의 정신과의사 티먼 서맥은 1980년대 공의존을 하나의 질병으로 규정하면서, 이를 DSM-IⅢ 성격장애 항목에 포함시켜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그는 다음의 기준들을 제시하며 공의존을 질병으로 정의했다. 하지만 서맥의 이러한 기준들은 임상으로 뒷받침되는 데 실패했고 결국 공식적으로 등재되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다.
1986년, 멜로디 비에티(Melody Beattie)는 공의존 개념을 본격적으로 관계중독으로까지 확대했다. 그녀의 책은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어 있다. 그녀는 공동의존자를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정의했다. “공동의존자란 상대방의 행동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허락한 사람이자 그 상대방을 통제하고자 고심하며 집착하는 사람이다.”(멜로디 비에티, 『공동의존자 더 이상은 없다(학지사)』, 김혜선 역, 72~73.) 책에서 그녀 스스로를 공동의존자로 규정하며 어떻게 자신이 관계중독에서 벗어났는지 실증적이고 체험적인 내용들을 소개했다. 셰프가 철학적이라면, 그녀의 정의는 매운 단순하면서도 실증적이다.
“공동의존은 상대방이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지와는 상관없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습관의 틀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공동의존의 행동이나 습관은 자기 파괴적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파괴하는 사람에게 자주 반응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파괴의 행동이나 습관은 자기 파괴적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은 스스로 파괴하는 사람에게 자주 반응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교기하는 방법을 배우면서 반응한다. 이러한 습관은 파괴적인 인간관계, 더 이상 지속해야 할 의미가 없는 인간관계 속으로 우리를 이끌며 거기에 우리를 가두어 버린다. 또한 그 습관은 우리가 다르게 반응했다면 지속할 수 있을 인간관계조차도 파괴한다. 우리는 그러한 습관적 행동 때문에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존재인 우리 자신 안에서 어떤 평화와 행복도 발견할 수 없게 된다. 오직 우리 각자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즉 우리 자신만이 이러한 행동을 해결할 수 있다. 그 행동은 우리의 문제다.”
chapter 2 문제를 인지해도 외면할 수 없는 관계의 절실함
적당한 경계를 무시하는 관계의 독주흔히 관계중독 하면 부부나 연인, 이성 간에만 나타날 거라고 착각하는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관계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똑같이 발생할 수 있다. 남성과 남성, 여성과 여성처럼 동성 간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난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관계중독이 종종 발생한다는 연구도 있다. 수년 전 외동아들에 대한 집착이 강한 나머지 며느리에게 칼부림까지 한 시어머니 이야기를 신문기사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젊어서 남편과 사별한 어머니는 청상과부로 억척스럽게 외아들을 양육하며 남편의 빈자리를 채웠고,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키우며 아들에게 인생의 전부를 걸었다. 자신은 헐벗고 굶주려도 언제나 메이커 있는 좋은 옷을 사다 입혔으며 주변에서 아빠 없는 자식이라고 손가락질 하면 아들이 기죽을까 봐 모든 학교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찾아갔다고 한다. 아들이 필요하다면 즉시로 모든 걸 다 해줬고, 철마다 아들을 데리고 전국 각지로 여행을 다녔다. 아들도 그런 어머니를 끔찍이 생각하고 챙겼고 성인이 돼서도 그 효심은 변하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극성이라고 혀를 찼지만 남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느 샌가 하루는 아들을 너무 사랑해서 죽을 수 있겠다 싶었다. 아들이 아프면 자신이 대신 아플 수 있고, 아들이 불구가 되면 자신의 사지를 잘라다가 이어 붙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녀에게는 이미 아들이 아들이 아니라 남편이었던 것. 당연히 성인이 된 아들이 결혼할 여자가 있다며 집에 데리고 온 예비 며느리를 보고 어머니는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 마음 한구석에서 서운함을 느꼈다. 아들이 가정을 꾸리는 건 기쁜 일이었으나, 삶의 모든 것이었던 하나뿐인 아들이 이제 자신의 곁을 떠난다는 생각에 왠지 마음이 허전하고 헛헛했다. 소위 빈 둥지 중후군(empty nest syndrome)이 그녀에게 찾아 왔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정말이지 남 주기에는 너무 아까운 아들이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아들에게 결혼 후에도 자신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기 시작했다. 아들은 그런 어머니를 달래려고 앞에서는 그러겠노라 약속했지만, 그 일로 결혼 전부터 아내와 다투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예비 아내에게는 딱 1년간만 시어머니와 함께 살자며 손이 발이 되다시피 빌었다. 아내 역시 마지못해 그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난 뒤 바로 발생했다. 며느리에 대한 시기심이 일면서 급기야 어머니는 신방까지 점령하여 부부관계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아들과 며느리에게는 지옥 같은 신혼생활이 펼쳐졌다. 결국 시어머니의 비이성적인 행동에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며느리는 분가를 요구하면서 친정집으로 피신했고, 배신감에 치를 떨던 시어머니는 칼까지 들고 방에 들어가 며느리에게 행패를 부렸다.
관계중독의 시작은 사소한 감정에서 출발했다. 아빠를 찾는 아들이 너무 불쌍해서 자신이 아빠 몫까지 대신해야겠다고 다짐했던 어머니였다. 낮에는 옥장판을 팔았고 저녁에는 식당 설거지를 했다. 곱상했던 외모 때문에 주변에서 나이가 아깝다며 선 자리도 종종 들어왔지만, 아들이 새아버지 때문에 괜히 힘들어할까 봐 재혼은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다. 말 그대로 자신을 통째로 갈아서 오로지 아들 키우는 데에 몽땅 쏟아부은 셈이다. ‘이 나이에 내가 무슨… 그저 아들 하나 잘 키워야지.’ 솔직히 이런 절절한 모성애를 탓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이런 애착은 결국 아들의 결혼을 파탄내고야 말았다. 아들은 어머니의 집착과 같은 관심에 질려버렸고, 어머니에게 말도 않고 아내와 남미로 이민을 가버렸다. 말 그대로 야반도주를 한 셈이다. 아무리 모자관계라 해도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다.
인간관계에는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존재한다: 직장 내에서 관계중독은 노사관계와 얽혀 심각한 후유증을 낳을 수 있다. 보통 상사와 직원 사이에서 일어나는 감정 의존관계는 직장 내에서 ‘보이지 않는 손’처럼 작용한다. 직장인들은 상사에게 인정받고 자신이 받아들여졌다는 감정을 느끼기 위해 필요 이상의 신경을 곤두세운다. 상사의 인정이 그들의 자존감을 올리는 데 필수적인 발판이 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문제는 제쳐두고 상사의 문제를 걱정하느라 많은 시간과 돈을 허비한다. 당연히 자신의 일에 대해 우왕좌왕하기 쉬우며 상대방의 눈치를 보느라 자신의 업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반대의 경우도 심심찮게 발생한다. 직장상사는 선배랍시고 후배들에게 필요 이상의 간섭을 시전한다. 요즘 회자되는 ‘꼰대라떼’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다. 선배라고 해서 거리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후배의 개인 영역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정한 심리적 거리(psychological distance)를 지키는 게 필요하다.
인간관계에서 적당한 거리감을 갖는 것은 관계중독을 피하는 매우 현실적인 대안이 된다. 일찍이 미국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소위 ‘근접학’이라고 불리는 프록시믹스(proxemics) 개념을 통해 사람이 문화적으로 갖는 인간관계의 거리감을 연구했다. 그는 사람들이 타인과 공간을 점유하고 거리를 갖는 행동 패턴을 물리적, 심리적, 비교문화적 관점으로 이론화했다. 결론적으로 홀은 인간관계의 거리를 밀접한 거리, 개인적 거리, 사회적 거리, 공적 거리 등 넷으로 나누었다. 보통 친근한 거리(intimate distance)는 연인 사이처럼 껴안고 접촉하고 귀에다 대고 속삭일 수 있는 정도의 매우 긴밀한 거리(8인치, 약 20cm)로 아무에게나 허락하지 않는 공간이기 때문에 친분이 덜한 사람이 침입할 때 불안감이나 불쾌감을 느낄 수 있다. 반면 개인적 거리personal distance는 친한 친구나 가족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거리(2.5~4피트, 약 76~122cm)로 밀접한 거리보다는 넓지만 여전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으로 취급된다.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는 지인들이나 종종 알고 지내는 사이에 있을 수 있는 거리(7~12피트, 약 213~365cm)로 이해되며, 대중적 거리(public distance)는 대중 연설에서 있을 수 있는 거리로 사회적 거리 밖의 공간을 일컫는다. 이 위치에 서있는 사람이 나와 구체적 관련이 없는 타인으로 인식되는 공공의 영역인 셈이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나와 이정도 떨어져 있을 때 우리는 정서적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별 불편감을 느끼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