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으로 읽는 세계사
다마키 도시아키 지음 | 사람과나무사이
한 권으로 읽는 세계사
다마키 도시아키 지음
사람과나무사이 / 2022년 1월 / 236쪽 / 16,000원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오래 살았다면 자신이 지배한 광대한 영토를 질서정연하게 다스렸을까?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등 고대 문명과 관련 깊었던 마케도니아 왕국: 알렉산드로스(재위 336~323 BC)라는 걸출한 영웅을 배출한 마케도니아는 어떻게 그리스반도를 넘어 머나먼 인더스강에까지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 마케도니아왕국의 확장 과정을 살펴보면 이 나라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등 고대 문명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세 고대 문명은 오랜 기간 서로 활발히 교류하며 하나의 거대한 교역권을 형성했다. 이 교역권, 즉 통상로의 존재야말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대원정의 비밀을 푸는 중요한 열쇠이다.
마케도니아가 그리스와 페르시아제국을 제패할 수 있었던 비결은 ‘점’을 확보하는 방식의 지배가 아닌 ‘면’을 확보하는 방식의 지배 덕분이었다?: 마케도니아왕국의 부상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 시대에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 등으로 대표되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도시 국가) 세계는 급격하게 쇠퇴했다. 필리포스 2세는 카이로네이아 전투(338 BC)에서 테베와 아테네 연합군을 무찌르고 그리스 세계의 지배자 위치에 올랐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거대 통일국가가 형성되지 못한 채 1,000여 개의 크고 작은 폴리스가 분립했으며, 각각의 도시를 거점으로 지중해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말하자면 폴리스의 통치 체제는 ‘점’을 확보하는 방식에 가까웠다. 반면 필리포스 2세가 다스리던 마케도니아는 폴리스와 완전히 다른 형태의 통치 체제를 구축했다. 마케도니아의 지배 체제는 ‘면’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정복한 지역에서 농지를 확장하고 대규모 상비군을 조직해 지배 영역을 더욱 넓혀가는 방식이었다. 마케도니아가 실행한 방식은 사실상 ‘영역 국가’로서의 지배였다.
필리포스 2세 앞을 가로막은 가장 큰 적은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왕조였다. 세계사 교과서에는 대개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전쟁에서 아테네를 중심으로 뭉친 그리스의 폴리스가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에 승리했다”라고 이 시대를 간략히 다룬다. 그러나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는 고대 오리엔트 세계를 통일한 대제국이었다. 경제적으로도 이 왕조는 당시 그리스 세계보다 월등히 강력하고 풍요로운 나라였다. 그리스는 대제국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사활을 걸었으나 당시 페르시아는 서쪽 변방에서 발생한 소규모 분쟁 정도로 인식했다. 사실 페르시아전쟁의 결과가 어찌 됐든 아케메네스왕조의 국력은 그다지 쇠퇴하지 않았다.
게다가 역사 기록에 따르면, 페르시아전쟁 후 페르시아는 그리스 폴리스에 군자금 등을 지원하며 폴리스 사이의 갈등과 반목을 조장하고 부추겼다. 실제로 이 작전이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어 그리스에서는 폴리스 간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즉, 거대 제국 페르시아의 개입이야말로 그리스 세계가 쇠퇴한 주요 요인의 하나였던 셈이다.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필리포스 2세는 아케메네스왕조의 페르시아 정벌을 중요한 목표로 설정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받는 등 일찍이 필리포스 2세의 후계자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그러던 중 부왕 필리포스 2세가 암살당하자 알렉산드로스가 약관 스무 살 나이에 마케도니아왕국의 왕으로 즉위했다. 이는 기원전 336년의 일이다.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 원정 규모는 아버지 필리포스 2세의 계획보다 훨씬 원대했으며, 결국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그렇다면 알렉산드로스의 대원정은 어떻게 그토록 대단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이는 오리엔트에서 발전한 고대 문명과의 밀접한 연관성을 살펴봄으로써 이해할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인더스 문명이 서로 활발히 무역했다는데,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학자들은 아프리카대륙에서 700만 년쯤 전 탄생한 인류가 아프리카를 벗어나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고 추정한다. 현생인류(호모사피엔스)의 출(出)아프리카는 대략 15만~10만 년 전과 7만~5만 년 전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사건으로 밝혀졌다. 아프리카대륙을 떠나온 인류는 꽤 오랫동안 수렵·채집 생활을 하다가 차츰 정착 농경생활로 전환했다. 인류가 최초로 농업을 시작한 곳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이었으며,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기원전 3500년 무렵 시작되었다고 추정된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으로 둘러싸인 이 지역은 충적평야로 정기적으로 강이 범람했다. 당대인은 운하를 효과적으로 정비함으로써 풍성한 농업 수확물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관개 시설이 크게 발전했으며 농업을 기반으로 한 매우 풍요로운 문명이 건설되었다. 한편 인도의 인더스강 유역에서는 하라파와 모헨조다로 등의 고대도시 유적이 발견되었다. 인더스 문명의 성립은 기원전 2600년 무렵으로 추정하며 농경은 기원전 7000년쯤부터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인더스 문명은 해로와 육로 양방향으로 연결되어 두 문명 사이에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을 통일하여 오리엔트 세계를 지배한 ‘철’의 왕국 아시리아: 학자들은 이집트에서 동쪽으로 뻗어 나간 고대 문명 세계를 ‘고대 오리엔트 세계’라고 부른다. 이 고대 오리엔트 세계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출현할 때까지 1,0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매우 활발히 교류를 이어나갔다. 고대 이집트 왕조는 기원전 3,000년 무렵 시작되었으며 흔히 고왕국(2686~2185 BC), 중왕국(2040~18세기 BC), 신왕국(1570~1070 BC)으로 구분된다. 기원전 30년에 프톨레마이오스왕조가 고대 로마군에 의해 무너질 때까지 왕조는 3,000여 년간 이어졌다. 이집트(신왕국)가 힘을 잃고 종이호랑이 신세로 전략하면서 오리엔트 세계에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오리엔트 전체를 통일한 것이 바로 아시리아제국이다.
오늘날 이라크 북부 지역에 도시국가를 건설한 아시리아인은 철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해 오리엔트 일대를 주름잡는 최강자의 지위를 누렸다. 아시리아는 히타이트의 철기 제조 기술을 계승한 동시에 철광석 산지 아르메니아를 장악해 차츰 힘을 키워나갔다. 기원전 9세기에 철제 전차와 기병대를 도입한 아시리아는 기원전 8세기 말 시리아, 페니키아, 바빌론을 차례로 병합하고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기원전 663년 마침내 이집트를 정복함으로써 역사상 최초로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광대한 오리엔트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아시리아의 오리엔트 통일로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이 통일되었다.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의 번영을 가능케 한 ‘왕의 길’이 역설적으로 훗날 알렉산드로스를 끌어들여 패망을 앞당겼다?: 아시리아제국은 기원전 612년 신바빌로니아와 메디아 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이후 신바빌로니아, 메디아, 이집트 그리고 소아시아의 리디아로 분열된 오리엔트 세계를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가 재통일했다. 메디아에 복속되어 있던 아케메네스 가문은 키루스 2세(재위 559~530 BC) 시절 독립해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제국이 되었다. 이는 기원전 550년 무렵의 일이다. 신바빌로니아를 무너뜨리고 ‘바빌론 유수’로 사로잡혀 포로가 되었던 유대인을 해방한 사람이 바로 키루스 2세였다. 페르시아제국은 다리우스 1세(재위 522~486 BC) 시대에 이집트에서 인더스강 유역까지 통치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는 제국 안에서 ‘왕의 길(Royal Road)’로 불린 도로망을 정비했다. 이 도로는 이집트에서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인더스까지 이어지던 오리엔트 통상로를 기초 삼아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알렉산드로스 군대는 이 ‘왕의 길’을 지나며 페르시아제국을 제패하고 인도를 향해 나아갔을 것이다. 시대와 상황이 달라짐에 따라 소수의 상인이 지나다니던 통상로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대규모 군대가 통과하는 군사 도로로 바뀐 셈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오래 살았더라도 그가 전쟁으로 지배한 광대한 영토를 질서정연하게 다스리지 못했을 것으로 보는 근원적 이유: 그렇다면 알렉산더가 이끄는 마케도니아는 어떻게 그토록 강대해질 수 있었을까? 두 가지 점 덕분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마케도니아가 그리스 세계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 핵심에 들지 못하고 변방에 머무른 탓에 무사 안일주의에 빠지지 않고 도전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필리포스 2세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으로 이어지는 위대한 영웅 군주의 출현으로 잠재력과 에너지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폴리스 쇠퇴기에 본격적으로 굴기해 신흥 강자로 떠올랐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그리스 세계의 명실상부한 지배자 자리에 올랐고 그리스의 숙적 페르시아에 눈부신 승리를 거두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토록 빠른 속도로 놀라운 원정을 감행할 수 있었던 요인이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인더스 문명과 오리엔트의 상업망에서 시작해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가 공들여 정비한 교역로를 아우르는 장대한 교통망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인더스강 유역에 도달한 마케도니아군이 동쪽으로 더 이상 진군하지 않고 기수를 돌렸다는 사실이 방증한다. 인더스강 유역까지는 오리엔트―인더스 통상권이었으나 그 너머는 그때까지 아직 개척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이 동서 문화를 융합해 헬레니즘 문화를 탄생시켰다는 주장이 힘을 얻어왔다. 물론 그의 정복 사업이 많은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촉진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다 해도 ‘우수한 그리스 문명이 오리엔트와 인더스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라는 기존의 견해는 오늘날 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그보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전에도 동서 문화·경제 교류는 꾸준히 있어왔고, 그러한 과거의 유산이 오히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었다고 보고 있다. ‘앞서 가던 그리스에서 후진적인 오리엔트와 인도로 문명을 전파했다’는 구도가 아닌 서로에게 없던 것을 얻는 ‘더불어 이로운 교역 모델’이었다는 것이 역사에 더 가깝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국은 프톨레마이오스왕조의 이집트, 셀레우코스왕조의 시리아, 안티고노스왕조의 마케도니아 세 나라로 분열되었다. 만약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도 그 넓은 영토를 오랫동안 제대로 통치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광대한 영토를 질서정연하게 다스리는 데 필요한 체제와 지식, 경험 등이 당시 마케도니아로 대표되는 그리스에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오리엔트에서 중앙아시아에 걸친 정치적 통일은 훨씬 후대인 아바스왕조(750~1258)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신항로 개척시대 초기, 포르투갈이 아시아의 향신료보다 더 눈독 들인 물품은 무엇이었을까?
대항해시대 초기 포르투갈은 아시아의 향신료가 아니라 ‘아프리카의 황금’을 노렸다는데?: 콜럼버스의 아메리카대륙 발견(1492), 바스쿠 다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1498), 마젤란 함대의 세계 일주(1522) 등 15세기부터 17세기 중반에 이르는 ‘대항해시대’는 유럽의 세계 지배 원점으로 일컬어진다. 그렇다면 ‘대항해’라는 단어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그리고 대항해는 과연 유럽에 무엇을 가져다주었을까?
대항해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인도를 목표로 잡았다가 신대륙에 도착한 콜롬버스와 인도 항로를 개척한 바스쿠 다가마가 워낙 강렬한 인상을 남긴 덕분인지 ‘유럽인은 인도가 곧 아시아를 가리키며, 동양의 향신료 등 진귀한 물건을 찾아 대항해를 시작했다’라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포르투갈 뱃사람들은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도착했으나 포르투갈이 대항해를 시작했을 무렵에는 딱히 아시아를 목적지로 삼지는 않았다. 아시아보다는 아프리카로 가기 위해 대항해를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인 추론이다. 유럽인은 아시아의 향신료가 아니라 ‘아프리카의 황금’을 노렸던 것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아프리카의 황금이 절실히 필요했다. 14세기 무렵 유럽의 금 생산량은 소비량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유럽인은 부족한 금 수요를 서수단에서 산출한 금으로 메웠는데, 아프리카 금 유통은 아프리카 현지 상인과 이슬람 상인이 독점하다시피 했다.
아프리카 금을 둘러싼 무역의 역사는 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무렵 서아프리카에 가나왕국(7~11세기 후반)이 세워졌고 이슬람 상인은 사하라에서 암염을 캐내 가나왕국으로 들여왔다. 그러고는 소금을 금과 맞바꾸어 다시 사하라 사막을 동으로 가로질러 이슬람 세계로 금을 가져갔다. 가나왕국은 금광은 없었지만 금을 캐는 부족과의 교역을 독점해 금 유통 거점으로 번영했다. 가나왕국은 산업 육성을 위해 중앙집권화를 달성했다. 그런데 문제는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는 장거리 무역은 상당히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모된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사하라의 사막화가 꾸준히 진행된 터라 무역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어 차츰 쇠퇴해갔다.
사하라 동서 횡단로가 쇠퇴한 후 10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교역로가 탄생했다. 사하라 사막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새로운 교역로였는데 이를 담당한 것은 이슬람 상인이었다. 베르베르인이 북아프리카에 세운 무라비트왕조(1040~1147), 모로코에 세운 무와이드왕조(1130~1269)의 주도로 서아프리카에도 이슬람교가 전파되었다. 서수단에서 가나왕국이 붕괴하고 한 세기도 더 지나 건국된 말리제국(1240~1670)도 이슬람교를 받아들여 이슬람권에 편입되었다. 상업의 중요성을 깨달은 말리제국은 상업 촉진 정책을 시행하고 영토 내에서 안전하면서도 투명한 무역 체제를 수립했다. 이 교역에서 거래된 주요 상품은 암염과 금이었다. 유럽인들이 서아프리카의 금을 들여오려면 이제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금을 사야만 했다. 교역에서는 운송비용을 쥐고 있는 쪽이 아무래도 유리할 수밖에 없다. 결국 사하라를 거쳐 들여오는 금에 대해 유럽에서는 만만치 않은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뱃멀미로 배에 타지 못했던 ‘항해 왕자’ 엔히크: 서아프리카에서 이슬람 상인을 거치지 않고 직접 황금을 확보하는 일에 도전한 이가 바로 포르투갈의 항해 왕자 엔히크였다. 엔히크는 뱃멀미가 워낙 심했기 때문에 '항해 왕자'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몸소 먼 거리 항해에 나선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직접 배를 타는 대신 든든한 후원자로서 항해와 탐험사업에 자금과 인력을 지원하고 지휘했다. 엔히크 왕자가 파견한 항해자들은 1419년에 마데이라제도, 1427년에 아조레스제도를 발견했다. 이는 모두 대서양의 작은 섬들로 포르투갈령이 되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아직 ‘대항해’라는 용어를 붙이기에 이르다. 대항해의 목적이 서아프리카의 황금을 직접 수입하는 것이라면 그 시작점을 1444년으로 볼 수 있다. 그해에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서쪽 끝 카보베르데제도에 도달했고, 바야흐로 바닷길로 사하라 사막 남단으로 가서 직접 서아프리카의 황금 교역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항로를 성공적으로 개척한 덕분에 포르투갈에서 최초로 금화를 주조할 수 있었다. 이는 1452년의 일이다.
15세기 유럽인들은 처음에는 바닷길로 아프리카 기니로부터 황금을 수입할 목적으로 아프리카 서안을 따라 남하하다 보니 어느새 멀리 떨어진 미지의 고장에 도달했다. 이렇게 '대항해시대'의 막이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희망봉에 도착했다. 이 항해로 유럽인은 아프리카대륙 남단을 돌아 바닷길로 아시아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1498년 바스쿠 다가마가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했다. 이후 포르투갈은 인도양과 동남아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했고 유럽 각국은 앞다투어 아시아로 진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도달한 이후에는 아시아뿐 아니라 아메리카대륙까지 걷잡을 수 없는 신항로 개척시대의 쓰나미에 휩쓸리고 삼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