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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박영서 지음 | 들녘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박영서 지음

들녘 / 2022년 2월 / 307쪽 / 15,000원





조선의 복지 정책은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흉년에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해 : 구황


구황(救荒)은 천재지변이나 기근 등으로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현물을 지급하는 정책입니다. 정책 목표도 ‘굶주리는 사람이 없게 함’에 있죠. 조선은 구황 정책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여 집행했습니다. 진휼(賑恤)과 무료 급식소 사업, 환곡(還穀)입니다. 이 세 가지 정책은 사안에 따라 복합적으로 집행되었지만, 이해하기 쉽게 구분하여 짚어보고자 합니다.

긴급 재난지원금 - 진휼:
진휼이란 천재지변이나 기근이 발생했을 때 해당 지역의 사람들에게 곡식 등을 지급하는 제도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재난지원금이죠. 조선왕조실록에서 ‘진휼’이라는 키워드를 검색하면 2,949건의 기사가 검색됩니다. 특히 복지 정책에 관심이 많았던 세종(195건), 영조(382건), 정조(268건) 재위기, 그리고 역대급 대기근이 있었던 현종(403건), 숙종(407건) 재위기는 진휼이 국책 사업으로서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추진되었죠. 조선은 정말로 진휼에 진심이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천재지변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해서, 또 조선이라는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관리들에게 진휼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업무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진휼 담당관인 진휼사(賑恤使)와 담당 부처 진휼청(賑恤廳)의 권한은 막강했죠. 진휼청 조직 구성만 봐도 그들의 진심이 느껴집니다. 나라의 곳간을 책임지는 호조판서, 인사권을 책임지는 이조판서, 군량미 책임자인 병조판서, 오늘날로 치면 장관급이 되는 인사 세 명이 함께 일했으니까요. 진휼청의 중요 사안은 국무회의에서 가장 급선무로 처리되었습니다. 여기에 수령을 비롯한 각 공무원에 대한 강제권까지 갖춘, ‘전천후 재난재해 컨트롤타워’였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진휼 정책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역대급 재난이 불어닥쳤던 시기들의 진휼 기록을 살펴봤습니다. 1445년(세종 27년)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조정은 진휼에 전력을 다하여 217,000세대에 2,738,000석의 곡식을 무상 지급했습니다. 보수적으로 한 가족을 4인으로만 잡아도 약 80만 명이 혜택을 받았음을 알 수 있죠. 1400년대 조선 인구가 580만여 명으로 추정됨을 감안하면, 인구의 13% 이상이 재난지원금을 통해 아사(餓死)를 피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국민연금 - 환곡:
국제 무역 규모가 작았던 조선 시대에는 추수한 쌀이 다 떨어지고 그를 대체할 보리가 아직 익지 않은 봄마다 식량 부족에 시달렸습니다. 이를 춘궁기(春窮期)라고 불렀죠. 춘궁기에 쌀을 빌려주고 추수하는 가을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는 것을 ‘춘대추납(春貸秋納)’이라고 했는데요, 춘대추납 제도로 운영한 복지 정책이 환곡이었습니다. 조선은 환곡을 일상적으로, 매우 광범위하게 운영했습니다. 환곡을 운영하는 주무 부처도 운영 주체나 운영 목적, 수혜 대상자의 성격에 따라 상평창(常平倉), 의창(義倉), 사창(社倉) 등이 시대마다 그 역할을 조금씩 달리하면서 운영되었습니다. 각 지방 관아나 병영 등 대부분의 정부 부처도 다 환곡에 한 다리씩은 걸치고 있었죠. 그리고 환곡에 투입되는 쌀의 양도 어마어마했습니다. 1725년(영조 1년)에는 환곡으로 빌려주는 곡식이 약 3백만 석에 달했는데, 이는 당시 조선 인구 절반의 1년 치 식량에 해당하는 양입니다. 1808년(순조 8년)에 만들어진 정책 통계서 『만기요람』에는 18세기 후반 전국의 환곡 저장량이 9,995,599석에 이르렀다고 쓰여 있습니다. 물론 이 수치는 실제 저장량보다 곱절가량 과장된 것이었습니다만, 환곡이 조선 사회에서 얼마나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는 제도였는지 보여줍니다.

춘대추납 제도의 역사는 고구려의 진대법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고려 시대에도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규모 면에서는 결코 조선에서 시행된 환곡제도에 미치지 못하는데요, 유독 조선이 영혼까지 끌어모아 환곡제도를 시행했던 까닭은 환(還), 즉 ‘이자’에 있습니다. 조선의 관료들은 고려 시대의 춘대추납 제도를 반성하면서, 이자를 붙여야만 이 제도를 지속할 수 있다는 점을 깊이 고려했습니다. 만약 이자를 받지 않는다면, 한 해 농사가 망하는 순간 곡식이 바닥나고 더는 제도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잘 알았죠. 따라서 이전의 춘대추납 제도가 ‘백성에 대한 국가의 구제 의무’라는 성격을 띠었다면, 조선의 환곡제도는 ‘국가에 대한 백성의 상환 의무’에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국가와 백성이 연대 책임을 지는 사회보장제도의 성격이 더욱 두드러졌죠.

환곡은 매우 체계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가상의 인물 김 씨 아저씨가 환곡을 빌리는 상황을 생각해보겠습니다. 김 씨가 지역 관청에 환곡을 신청하면, 관청에서는 김 씨의 가족 구성원을 조사하고 지급 기준에 따라 평가를 진행합니다. 이때 중요한 평가 기준은 신청자의 상환 능력이었죠. 즉 일종의 신용 등급 평가를 진행한 것입니다. 평가가 끝나면, 관청에서는 지급 장부를 만들고, 장부를 기준으로 환곡을 지급합니다. 지역에 따라서는 몇 세대를 함께 묶어 지급하고 그 안에서 나눠 갖도록 했죠. 농사짓는 토지의 양에 따라 분배하기도 했습니다. 제도가 정상적으로 운영된다면, 이렇게 곡식을 받은 김 씨는 가을에 원곡과 약 10% 정도의 이자를 관청에 상환하게 됩니다. 이자는 꼭 쌀이 아니라 다른 곡식, 현금으로도 납부할 수 있었고, 때에 따라서는 할부나 탕감, 상환 연기도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조선의 시스템이 망가진 주요 원인 중 하나가 환곡제도라는 것을요. 앞서 ‘제도가 정상적으로 운영된다면’이라는 단서를 붙인 것도 그 때문입니다. 최초에 정한 환곡 이자율은 2%였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운영하기 어려웠죠. 그래서 16세기 중반에는 10% 정도로 정하고, 거두어들인 이자는 지방 재정에 충당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면, 환곡의 문제점을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지면을 한참 채울 수 있을 정도로 답 없는 상태에 봉착합니다.

간략하게 열거해보면, 첫 번째는 툭하면 곳간이 바닥났다는 것입니다. 진휼을 위한 무상 분배, 흉년으로 인한 원금 탕감, 열악한 저장 기술로 인한 자연 손실, 관리 비용 및 관리들의 횡령 문제 등 혼란해질 정도로 복합적인 원인으로 인해 환곡의 곳간은 좀처럼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는 절차적ㆍ행정적인 문제입니다. 빌려줄 땐 작은 계량기를 쓰고 받을 땐 큰 계량기를 쓰기, 질 낮은 곡식을 주었다가 질 좋은 곡식으로 돌려받기, 원치 않는 사람에게 강제로 빌려주고 이자를 받기, 환곡이 절실한 가난한 사람들은 외면하고 상환 능력이 있는 지주에게만 빌려주기, 혈연ㆍ지연을 보아 눈감아주기 등의 문제가 발생했죠. 무엇보다 지방관 및 일선 공무원의 횡령 문제가 극심했습니다.

한편 환곡을 국민연금 제도와 비교하는 의견이 많습니다. 둘 다 사회보장제도면서, 제도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다는 공통점이 있죠. 불만이 나오는 이유는 두 제도 모두 세금과 직접적으로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환곡이 보여줬던 빛과 그림자 중 그림자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국민연금에 대한 우려가 현실이 되었을 때의 일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조선은 환곡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환곡의 이자를 지방 재정에 충당하는 정책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낮은 세율을 유지하면서 수입과 지출을 항상 맞추려 했던 조선 정부의 조세 정책 때문에 지방 재정은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렸죠. 공무원들은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거나, 아예 ‘열정페이’로 때웠습니다. 자연스레 환곡은 세수 확보 수단이 되었습니다. 이자율은 점점 높아지고, 받기 싫다고 해도 억지로 지급하는 사례가 빈번해지죠. 제도의 부작용으로 발생한 폐해가 서민들의 짐이 된 것입니다. 나아가 환곡이 축재 수단이 되면서, 심각한 역진성 문제도 뒤따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소개하겠지만, 그 결과 조선은 우리가 잘 아는 ‘삼정의 문란’이라는 새드 엔딩을 맞게 되죠. 실제로 운영되었던 환경은 상당히 다르지만, 궁극적인 피해가 국민에게 돌아온다는 점에서 환곡은 국민연금과 공통점이 있습니다. 만약 국민연금의 재원이 고갈된다면 세금으로 메워야 하니까요. 우리 모두가 염려하는 상황도 그 지점이죠.

무료 급식소 사업 - 시식:
조선 조정은 시식(施食), 즉 무료 급식소를 운영했습니다. 당시 밥을 구걸하기 위해 떠돌아다니는 유민들에게 절이나 관청에서 무료로 음식을 나눠주는 관습이 있었는데, 조선은 이런 관습을 정책으로 발전시켜 진제소(賑濟所), 또는 설죽소(設粥所)라는 임시 기관을 운영했습니다. 지방에서는 각 지역 관아를 중심으로 흉년이 들 때마다 무상 급식 사업을 진행했죠. 무료 급식소는 중대한 국가사업이었습니다. 특히 숙종 시대에는 국무회의에 올라올 정도였죠. 그런데 시식 사업은 진행될 때마다 논란이 일었습니다. 첫 번째는 아래와 같은 부실 급식 문제입니다.

‘왕이 말했다. “지난번에 무료 급식소에 사람을 보내서 굶주린 백성들에게 주는 죽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때는 죽에 밥알이 꽤 많아서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계속 그렇게 주는지 궁금해서 이번에 사람을 또 보내어 죽을 받아 왔더니만, 물에 밥풀떼기가 스친 수준이었다. 계속 이따위로 하면 설죽소를 설치한 취지가 다 망가질 것이다. 또 백성들이 이런 걸 먹고 어떻게 기운을 회복할 수 있겠나. 설죽소 책임자들에게 내 말을 엄중히 전하라.” - 1696년 1월 25일 『숙종실록』’

기록이 부족한 까닭에 이 사태의 원인을 명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곡식이 부족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중간에서 누군가가 해먹었을 수도 있죠. 오늘날 군부대 부실 급식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예비역들이 ‘보나 마나 누가 해먹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처럼요. 그런데 이렇게 위에서 직접 감시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이번에는 또 다른 폐단이 생깁니다. 바로 다음과 같이 ‘무상 급식을 받는 것=거지 근성’이라는 인식이 발생한 것입니다.

‘진휼 담당자가 보고했다. “가끔 중앙 부서에서 무료 급식소로 감찰이 내려오는데, 담당 관리들이 문책을 받을까 두려워 밥을 먹으려고 모여든 백성들을 오히려 막아서고, 나아가 그들을 죄인처럼 취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더러워서 안 얻어먹겠다’며 급식소로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 1547년 5월 25일 『명종실록』’

조선의 무료 급식소 풍경은 우리 시대 정치권에서 벌어졌던 논의와 어딘가 유사한 맥락으로 흘러갔습니다. 그러나 왕과 신하들 모두 ‘배고픈 자에게는 마땅히 밥과 죽을 제공해야 한다.’라는 당위에는 적극적으로 동의했죠. 그것이 우리 시대와의 차이점이랄까요? 그러나 무상 급식 사업은 일시적이었다는 한계를 지닙니다. 모든 왕대에 걸쳐 꾸준히 집행되었지만, 실효성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하죠. 아사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전염병 집단감염의 진원지가 되거나, 서울의 식량난을 심화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죠. 그래서 무료 급식소 사업은 점차 마른 곡식을 지급하여 집으로 돌려보내는 방향으로 변화합니다. 대신 사찰이나 넉넉한 양반가가 직접 죽이나 밥을 제공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고요. 이후 무료 급식소가 국가사업으로 더 확대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 취약 계층 지원 정책


환과고독(鰥寡孤獨, 독신 남성ㆍ독신 여성ㆍ고아ㆍ독거노인을 가리킴), 즉 사회 취약 계층을 대상으로 한 지원 정책은 엄격한 선별적 복지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진휼과 환곡이 수혜 희망자를 대상으로 하는 ‘선 신청 후 검토’ 체계로 운영됐다면, 환과고독을 위한 복지 정책은 관청에서 대상자를 조사하여 추진했죠. 조선 초기에는 중앙정부에서 인구 통계를 만들면서 환과고독의 비율을 직접 조사하고 조치했습니다. 1413년(태종 13년)에는 전국의 환과고독을 조사하고 다음 해 1,156명을 대상자로 선정하여 혜택을 주었지요. 수혜 대상자들에게는 쌀, 콩, 면포와 같은 현물을 지급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이러한 현물이 곧 돈과도 같았죠. 지금으로 치면 기초생활수당을 지급한 것과 유사합니다. 때에 따라서 별도의 지원금을 지급하기도 했습니다. 나아가 각종 공납(현물로 납부하는 세금), 부역(국가에 대한 노동력 제공), 군역(군 복무 의무)을 면제받거나 감면받을 수 있었으며, 종종 이들을 도와주는 보조인에게도 이러한 혜택이 제공됐습니다.

환과고독을 위한 복지 정책은 대상자의 환경과 성격에 따라 달랐습니다. 어떤 부분은 법제화되었고, 어떤 부분은 관습적으로 행해졌죠. 오늘날의 복지 정책이 대상자의 성격에 따라 구분되는 것처럼, 조선의 복지 정책도 비록 기초적인 수준일지라도 대상자의 환경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함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대상자의 환경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대책을 실시하여, 대상자가 사회적으로 자립할 수 있게끔 돕는 정책을 고민했다는 뜻이니까요. 환과고독, 그들 각각의 상황에 맞는 정책은 어떻게 구성되었을까요? 현대의 복지 정책 분야처럼 아동복지, 노인복지, 장애인 복지 등 몇 개 영역으로 나누어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아동복지:
‘집을 잃은 아이는 양육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책임을 지워서 맡기고 관아에서 옷감을 지급한다. 10세가 넘어서도 돌려달라고 신고한 자가 없는 경우에는 양육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노비로 삼는 것을 허락한다. (1458년부터 시행) - 『대전통편』 「혜휼」’

조선의 아동복지 정책은 주로 유기아(遺棄兒), 즉 부모를 잃은 아이를 대상으로 했습니다. 따라서 아이가 탄생한 순간부터 어린이집에 가고 교육기관을 다니기까지 등 성장 과정 전반에 걸쳐 있는 현대의 아동복지 정책과 비교하면 약소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시대를 고려하면 유기아에 대한 복지 체계가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혁신적이죠. 물론 현대인의 시선으로는 ‘노비로 삼는 것을 허락한다’는 규정을 과연 복지 정책으로 볼 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 사회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가족을 잃고 노비조차 되지 못한 아이들이 길거리를 헤매다 굶어 죽거나 각종 전염병으로 안타깝게 생명을 잃는 사례가 부지기수였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유기아 보호 정책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재난이 심화함에 따라 조금씩 보완되었습니다. 최초에는 아주 간단한 간접 복지로 출발했지만, 유기아 문제가 대두될 때마다 차츰 친족 부양의 책임, 입양 절차, 입양 이후의 관리 감독, 국가의 직접 복지 등 다양한 상황을 고려한 맞춤형 정책이 구현되었죠. 특히 아동복지 정책에 각별히 관심을 기울인 왕이 있었으니, 바로 정조입니다. 정조 시기에는 그 어느 때보다 아동복지 정책이 강화되었는데요. 정조가 관심을 가지고 국책사업으로 밀어붙였던 덕분에 관련 자료가 조선왕조의 그 어느 시기보다 상세히 남아 있습니다.

복지 혜택은 수혜 대상자에 따라 다르게 정했습니다. 가령 똑같이 구걸하는 아이라도 부모가 양육을 포기한 아이인지 부모가 있지만 가난한 아이인지에 따라 혜택이 달랐죠. 심지어 아이의 나이에 따라 급식하는 양이나 지급하는 옷도 구분했습니다. 또한 일종의 ‘임시 보호’ 제도를 만들어 가난하지만 수유할 수 있는 여성을 책임자로 선발했습니다. 이들에게 곡식과 의복을 제공함으로써 아이와 여성을 모두 돕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기대했죠.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재원을 탄탄하게 확보하여 매뉴얼이 실효성 있게 추진되도록 조치합니다. 또 전 부처에 걸쳐 유기 아동 보호를 중요한 일로 여길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어사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도 유기 아동 조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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