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 속 예술여행
진성 지음 | 린
배낭 속 예술여행
진성 지음
린 / 2022년 1월 / 470쪽 / 24,000원
예술로 빛나는 그랜드 투어_ 르네상스의 탄생지 피렌체피렌체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중심 도시이자 역사상 중세, 르네상스 시대에는 건축과 예술로 유명한 도시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이곳에서 발흥하였고 도시 중심에는 둥근 돔을 가진 성당인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가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데, 이는 피렌체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매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을 끌어 모으고 있는 피렌체는 도시 전체가 문화유산이다 보니 거리 곳곳의 모든 게 예술품이자 이탈리아 정부의 중요재산이다. 과거 피렌체를 호령했던 메디치 가문의 예술애호사상에 따라 배출된 르네상스 대표 예술가들의 작품이 곳곳에 널려있어 마치 도시 전체가 박물관 같은 느낌을 준다. 굵직굵직한 르네상스의 예술가, 철학자, 과학자들이 모두 메디치 가문의 후원 아래 수많은 작품을 피렌체에 남겼다. 이 때문에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선정되었다.
피렌체 대성당이라 부르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거대한 둥근 돔은 르네상스의 상징이 되었다. 한편 미켈란젤로, 갈릴레오, 마키아벨리, 시인 포스콜로, 철학자 젠틸레, 작곡가 로시니 같은 이탈리아의 가장 저명한 이들이 묻힌 산타 크로체 성당은 아름다운 외관인 파사드를 자랑하고 있다. 또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작품들의 컬랙션을 소장하고 있는 우피치 미술관은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약탈품이 없어 피렌체의 정신이 잘 담겨있다. 피렌체 아카데미 미술관에는 미켈라젤로의 다비드상이 있으며 시뇨리아 광장에서는 피렌체의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동상들과 이곳에서 처형당한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를 기념하는 동판을 찾아볼 수 있다. 이외에 고고학 박물관, 바르젤로 미술관, 피티 미술관, 그리고 베키오 궁전과 산 로렌초 성당 등등 이루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 작품이 집중되어 있다.
르네상스 거장들의 자존심 대결_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1499년, 피렌체 시의회는 도시의 랜드마크와 같은 상징성을 갖는 조각상을 제작하기 위해 조각가를 공모한다. 이 무렵 피렌체 출신 미켈란젤로는 로마에서 피에타 조각상을 만들고 있었다. <피에타>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후에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의 무릎에 놓인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묘사한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피에타 조각에 미쳐 몸을 씻지도 않고 부츠를 신은 채 그대로 잠을 자기도 했다. 그는 항상 가난에 찌든 것처럼 살았고, 먹는 것에도 관심 없이 오직 조각에만 열중하였다. 이렇게 완성된 <피에타>는 대단한 찬사를 받으며 스물세 살의 미켈란젤로는 일약 로마의 별로 떠올랐다.
미켈란젤로는 고향 피렌체에서 조각가를 선발한다는 소문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리고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인근 공터 한 편에 놓여 있던 거대한 대리석을 보자마자 마음을 빼앗겼다. 이 대리석은 유명한 조각가인 도나텔로가 사들였으나 돌에 난 갈라진 틈을 발견하고는 반품하여 방치되고 있었다. 갈라진 틈 때문에 여러 조각가가 도전했지만 결국 포기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지금까지 없었던 독창적인 형태로 <다비드> 조각상을 구상하였다. 그는 갈라진 대리석 안에 있는 거인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누구도 이 대리석으로 조각하겠다고 나서지 않자 마침내 그 대리석은 미켈란젤로에게 돌아갔다. 그는 두오모 성당 근처에 작업장을 만들고 2년 동안 대리석과 씨름한다.
미켈란젤로가 피렌체로 돌아왔을 때,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그곳에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익히 다 빈치의 명성을 알고 있었기에 처음에는 그를 존경했으나 예술가적 관점에서 자신도 그에 못지않다 생각했다. 미켈란젤로는 조각가였고, 다 빈치는 천재적 화가이자 만능 예술가였다. 당시 다 빈치는 피렌체에서 이미 최고의 대우를 받는 인사였다. 피에타의 성공으로 자신감에 찬 젊은 미켈란젤로는 조각에서만큼은 다 빈치를 능가하는 절대적 우위에 있다고 자부하였다. 그런데 다 빈치가 조각을 폄훼하고 다니자 화가 났다. 다 빈치는 조각가는 예술인이 아니라 돌을 쪼개는 노동자일 뿐이라고 일갈했다. “조각가는 무거운 도구를 들고 종일 중노동을 해야 한다. 그리고 작업이 끝났을 때 온통 돌가루 먼지를 뒤집어 쓴 몰골은 공사판 노동자 같다. 반면에 화가는 작업이 끝나도 처음과 같은 우아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에 예술의 가장 고귀한 정점은 회화이다.”
이 말에 자존심이 상한 미켈란젤로는 가만히 있지 못했다. 그는 어떤 모임에서 다 빈치를 향해 반박하였다. “최초의 인류는 동굴 벽에 그림을 그리기 훨씬 전부터 돌에 새겼소. 그러니 조각이야말로 최초의 독창적인 예술이 아니겠소?” 이를 듣던 다 빈치는 예의 차분한 목소리로 미켈란젤로의 주장을 인정했다. 하지만 뒤이어 내뱉은 말이 더 아팠다. “적어도 그림이 생겨나기까지는 그랬소.”
잔뜩 화가 난 미켈란젤로는 다 빈치가 밀라노에서 실패했던 청동기마상을 언급하였다. 그가 언급한 청동기마상은 다 빈치가 밀라노의 통치자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를 기념하는 기마상을 의뢰받아 작업했던 것이다. 1489년부터 착수한 이 작업에서 다 빈치는 말의 높이만 7미터가 넘는 거대한 점토 모형을 만든 다음에는 청동으로 주조해야 했다. 그런데 마침 프랑스군이 밀라노로 쳐들어왔고, 스포르차 가문은 다 빈치의 작품에 쓸 청동으로 대포를 만들어야 했다. 다 빈치가 만든 점토 모형은 한동안 그대로 방치되다가 밀라노를 장악한 프랑스군이 사격 연습용으로 쓰는 바람에 무너져 버렸다. 미켈란젤로는 다 빈치의 아픈 구석을 찔렀다. 그리고 다 빈치가 지금까지 제대로 끝낸 작품이 없다고 조롱했다. 또한 과거 동성애 문제로 고발당했던 다 빈치의 이력을 끄집어내어 힐난하였다.
드디어 <다비드> 조각상이 완성되었다. 거대한 거인의 다비드는 위풍당당하게 돌을 던지려는 벌거벗은 나체였다. 보통 사람 키의 세 배 가까이 되는 4m 높이의 <다비드상>은 건강한 신체와 고전적 자세를 지닌 영웅의 면모를 담고 있다. 순간적으로 찡그린 표정 묘사와 손과 발, 혈관의 세부적이고 사실적인 묘사에서 보이는 정신적 긴장감은 <다비드상>의 고전적이고도 르네상스적인 생동감을 잘 보여준다. 다비드의 자세에는 다소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날카로운 눈매, 꼭 다문 입은 힘과 분노를 표현하고 있으며, 왼손에 쥔 돌멩이를 거인 골리앗을 향해 막 던질 듯 보인다. 피렌체를 구하기 위한 저항과 독립의 상징으로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다 빈치도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보고 감탄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아니 그는 애써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을 깎아내리려고 했다.
시의회는 <다비드상>을 어디에 놓을지 결정하기 위해 자문단을 꾸렸다. 자문단에는 다 빈치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사실을 안 미켈란젤로는 매우 불쾌했다. 다 빈치는 다비드의 드러나는 생식기를 문제 삼아 구석진 자리에 하반신이 가려질 위치를 찾자고 말하고 싶었으나 <다비드상>의 위용만은 거부할 수가 없었다. 여러 논의와 공방을 거쳐 지금의 베키오궁 문 앞에 세우기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이 거대한 조각상을 옮기는 일도 쉽지 않았다. 운반구에 조각상을 단단히 고정하고 마흔 명 이상이 달라붙어야 했다. 이동 속도 또한 시간당 몇 미터 정도에 불과했다. 결국, 조각상을 옮기는 데만 거의 일주일 이상 걸렸다. 이동 기간에 미켈란젤로는 매일 밤 잠을 자지 않고 조각상 옆을 지켜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다비드 조각상에 돌이 날아왔다. 미켈란젤로는 소리치며 쫓아갔으나 범인을 놓치고 말았다. 조각상에 흠집이라도 날까 봐 노심초사하던 미켈란젤로는 시의회에 부탁하여 무장 경비원을 잠복시켰다. 그리고 다시 괴한들이 나타났을 때 그들 중 여덟 명을 체포하였다. 돌을 던진 범인은 열다섯 살의 소년들이었다. 대부분 가족이 벌금을 내고 풀려났으나 주동자 세 명은 재판을 받았다. 그들은 벌거벗은 다비드가 신의 뜻을 거스르는 음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몇 년 전 극단적인 금욕주의로 피렌체를 휘어잡았던 사보나롤라의 추종자였다. 재판관은 ‘예술에는 무식이라는 적이 있다’는 속담을 인용하며 그들을 감옥에 가둔다.
드디어 <다비드상>이 베키오궁 앞에 자리 잡았다. 사람들은 <다비드상>을 프랑스에 대한 피렌체 공화국의 승리를 상징하는 조각이자 수호신이라고 찬양하였다. 미켈란젤로에게는 최고의 시간이었지만 그리 길게 가지 못한다. 당시 베키오궁 건물 내 벽화를 맡은 다 빈치가 밑그림을 공개했는데, 이를 본 사람들이 역시 다 빈치가 최고라며 여론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자존심이 상한 미켈란젤로는 다 빈치가 그렇게 자랑하는 회화로 정면 승부를 펼치기로 한다.
예술로 빛나는 그랜드 투어_ 운하와 낭만의 도시 베네치아유럽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운하의 도시 베네치아는 영어식 발음으로 베니스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의 베네치아는 5세기경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5세기 고트족과 훈족 등 온갖 이민족들의 끊임없는 침략으로부터 도망친 고대 로마 출신 난민들이 이 석호(潟湖)의 섬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섬 전체가 습지대인 이 섬에 영구히 정착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고트족이 떠날 때까지 잠시 머무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고트족이 이탈리아에 정착하자 이제 베네치아인들은 자신들의 영구 정착지를 늪지대 위에 건설해야 했다. 그때 그들이 떠올린 방법은 물컹한 토층 아래 단단한 층까지 닿는 기다란 나무판자들을 수직으로 섬 전체에 빼곡하게 박는 것이었다. 베네치아인들은 이 어마어마한 일을 기어코 해냈고 그 위에 석판을 깔아 비로소 건물을 지어 올린 ‘땅’을 마련할 수 있었다.
베네치아는 이후 유럽의 역사에서 동로마 제국의 지배와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외침을 겪어야 했고 그 와중에도 간척을 게을리하지 않아 도시가 성장하였고, 11~12세기 제4차 십자군 원정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동 지중해의 영토를 확보하고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후로는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들과 지역 패권을 두고 치열한 전쟁을 하게 된다.
15세기 들어 베네치아는 문화적ㆍ군사적으로 전성기가 된다. 특히 1527년 사코디 로마(로마 약탈) 이후 로마가 쇠락하자 베네치아가 르네상스 건축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가장 유명한 광장인 ‘산 마르코 광장’과 비잔티움 양식으로 건설된 ‘산 마르코 대성당’, 베네치아 공화국 정부 청사인 ‘두칼레 궁전’ 등과 운하를 따라 지은 도시의 미관은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멋진 광경을 보여주고 있다.
베네치아는 유럽의 귀족들이 선망하는 ‘그랜드 투어’ 장소였다. 그랜드 투어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의 귀족 계층 자제들이 사회에 나가기 전에 이탈리아를 돌아보며 문물을 익히는 여행을 말하는데, 당시 베네치아는 지금의 라스베이거스처럼 주로 남성 귀족 상류층이 여행하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증기선의 등장으로 세계여행이 점차 일반화되면서 귀족 계층의 특권으로 여겨졌던 그랜드 투어가 막을 내렸다. 인상파의 거장 클로드 모네는 1908년 베네치아를 여행해 여러 그림을 남겼다.
15세기 베네치아는 레반트의 여왕이라 불리며 동지중해 무역을 독점하였다. 1453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베네치아는 마침내 르네상스의 주역으로 떠오르고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과 끊임없는 전쟁을 벌이게 된다. 베네치아는 최전성기인 15세기에서 18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약 3세기 동안 음악, 미술, 연극, 출판 등 문화 전 분야에 걸쳐 황금기를 누리게 된다. 베네치아 풍경에서 가장 눈에 띄는 바로크 양식의 웅장한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은 1687년에 완공되었는데,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음악가 안토니오 비발디는 당시 아홉 살의 소년이었다. 베네치아 음악은 산 마르코 대성당을 중심으로 활약한 음악가들이 이루었다. 플랑드르 출신의 작곡가 아드리안 빌라르트를 비롯하여 안드레아 가브리엘리, 조반니 가브리엘리 등이 베네치아악파의 르네상스 음악을 전개하였다.
예술로 빛나는 그랜드 투어_ 음악의 도시 오스트리아 빈영어로 비엔나로 부르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은 흔히 음악의 도시라고 불린다. 음악 도시답게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 음악회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무도회 등이 열린다. 또한 빈에서 열리는 큰 축제 중 하나인 빈 축제는 매년 5월 중순~6월 중순에 열리며 다양한 예술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매년 7월 중순~9월 중순에는 뮤직 페스티벌을 펼친다.
빈은 모차르트와 베토벤 등 유명한 음악가들을 배출하였고, 가곡의 왕 슈베르트가 태어났으며, 요한 슈트라우스가 감미로운 빈의 왈츠를 작곡했다. 주요 관광지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훌륭한 고딕 양식의 건축물로 꼽히는 슈테판 대성당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별궁으로 사용되던 쇤브룬 궁전, 벨베데레 궁전, 빈 시립공원, 빈 중앙묘지 등이 유명하다.
슈테판 성당은 빈을 상징하는 모자이크 지붕을 하고 있는데 공사 기간만 65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건립연도가 1359년으로 당시의 기술로 이처럼 정교한 건축물을 만들었다는 게 믿기 어려울 정도로 웅장하다. 매년 12월 31일 빈 시민은 슈테판 대성당 앞 광장에 모여 새해를 맞이한다. 이때 와인을 마신 다음 잔을 바닥에 던져 깨뜨리고 자정이 되면 서로 키스를 하며 새해를 맞이하는 풍습이 내려오고 있다. 또한, 1782년에는 모차르트의 결혼식이 있었고, 1791년에는 모차르트의 장례식을 치른 곳으로도 유명하다.
쇤브룬 궁전은 17세기 초 마티아스 황제가 사냥 중 우연히 샘을 발견해 성을 세우고 ‘아름다운 샘’을 뜻하는 쇤브룬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궁전 내부에는 화려한 로코코 양식의 1,441개의 방이 있고, 넓은 부지 안에는 마차 박물관, 궁전 극장, 식물원, 동물원 등을 갖추고 있다. 쇤브룬 궁전의 동물원은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원으로 프란츠 카를 대공이 1752년에 개장한 것이다. 이 궁전은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가 태어나고 결혼식을 올린 곳이기도 하다. 궁전 내부의 서관에는 프란츠 요제프와 황후 엘리자베스의 살롱이, 동관에는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카를 대공의 살롱이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왕비가 되기 전에 사용했던 방도 서관에 있다. 거울의 방은 마리아 테레지아 앞에서 어린 모차르트가 피아노를 연주했던 장소로 유명하다.
벨베데레 궁전은 이탈리아어로 전망이 좋다는 뜻으로 궁전 테라스에서 보이는 경치가 매우 아름다우며 상궁과 하궁 사이에는 프랑스식 정원이 있어 산책을 즐기기에 좋다. 특히, 이곳은 구스타브 클림트의 회화 컬렉션이 충실하다. 그의 대표작 <키스> 한 점을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다. 하지만 자크 루이 다비드의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과 클림트에게 수학한 에곤 실러의 걸작 <죽음과 소녀>나 <포옹>, 오스카 코코슈카의 작품 등도 인기가 있다. 회화 작품 외에 독일 조각가인 프란츠 메서슈미트의 찌푸린 얼굴을 주제로 한 두상 연작 등도 만나볼 수 있다.
빈에서 첫 번째로 설립된 빈 시립공원은 1862년에 조성된 공원이며 빈강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 두 구역으로 나뉜다. 요한 슈트라우스, 슈베르트, 브루크너 등 빈의 저명한 예술가들의 동상이 세워진 공원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공원 남서쪽에 있는 르네상스 스타일의 고풍스러운 건물은 쿠어살롱으로 다양한 공연이 열리는 이벤트홀이다. 현재도 크고 작은 클래식 공연이 자주 열린다.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공원 내 볼거리는 바이올린을 켜는 요한 슈트라우스 상이다. 공원을 찾은 많은 이들이 황금색의 슈트라우스 조각상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빈 중앙묘지는 세계에서 가장 큰 공동묘지 중 한 곳으로 무덤만 33만 개에 달한다. 이는 빈 거주자 수의 2배 이상이다. 묘지 중앙에는 돔 형태의 묘지 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묘지는 종교별로 구획되어 있으며 정치인, 예술가, 연구가 등 여러 분야의 명사들의 묘가 곳곳에 자리한다. 그중 유명한 곳은 음악가들의 묘가 모여 있는 32A 구역이다. 이 구역에는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요한 슈트라우스 등의 묘가 모여 있다. 구역의 중심에는 커다란 모차르트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하지만 모차르트 묘는 이곳에 없고 구시가와 중앙묘지 사이에 있는 마르크스 묘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