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재건
찰스 테일러, 파트리지아 난츠, 매들린 보비언 테일러 지음 | 북스힐
민주주의 재건
찰스 테일러 외 지음
북스힐 / 2022년 1월 / 115쪽 / 12,000원
서문
민주주의가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다는 믿음이 서구 사회에 만연하다. 민주주의가 하나의 체제로서 신뢰를 잃어가고 있음을 수많은 여론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민주주의 가 형편없는 거버넌스이며 권위주의체제나 기술관료제가 더 나은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정국의 전개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들 간 심각한 분열을 초래하고 있다. 그 예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결정한 영국의 국민투표와 도널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미국의 대선을 들 수 있다. ‘위대했던’ 미국의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해 성공을 거둔 도널드 트럼프의 선거 유세는 외국인 혐오 감정을 불러일으켜, 미국 사회에서 ‘주변인’ 취급당하는 사람들에게 등을 돌렸다. 이러한 분열을 조장하는 호소가 이미 사회에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정조준해 다가간다.
사회복지제도가 서서히 붕괴하고 경제체제가 잠식되자 사람들은 그들이 시장경제체제에서 살 뿐만 아니라, 경제 문제가 더 이상 사회적 상호작용 안에 자리 잡지 않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다는 사실에 눈을 떴다. 이런 경제 문제와 사회적 상호작용 간 분리는 최근 군림해오고 있는 신자유주의(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시장의 기능과 민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중시하는 사상) 정책의 근간을 이룬다.
한편 소셜 미디어와 디지털 통신 기술도 전반적으로 지난 10년에 걸쳐 민주주의 문화를 서서히 붕괴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예를 들어 이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맹비난하는 ‘메아리방(echo chamber)’ 안에서 동조하는 사람들을 찾는 데 집중하는 방식으로 미디어를 사용하면, 종합적으로 배우고 오랜 시간 주의 깊게 생각하거나 논의하기가 힘들어지고, 전자 장비에 의존하는 포퓰리즘이 번성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제공할 뿐이다. 간단히 말해 자유민주주의가 직면한 두 가지 주된, 서로 뒤얽힌 문제는 문제해결 역량의 쇠퇴와, 정치 엘리트와 국민 사이의 갭이다.
많은 사람이 대의제를 그 중추적 역할을 하는 정당의 체계와 운영 방식에 변화가 나타날 때까지 개혁해야 하며, 대의제 내에서 과도한 금권(金權)을 억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소셜 미디어가 만든 소통하지 않는 메아리 방들이 조장한 전에 없이 분열된 공공영역 안에서 개혁을 이뤄야 한다고 제안하는 사람들도 있다. 개혁의 예로, 그들은 페이스북과 여타 소셜 미디어를 대체할 공공 플랫폼 또는 의도적인 허위 정보 유포를 통제하기 위한 국가 관리형 플랫폼 설립을 제안하곤 한다.
이러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개혁 의제를 더 추가하고 싶은데, 우리는 민주주의를 사회 저변에서부터 재건해야 책임 있는 정부를 복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 저변에서부터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새롭게 활성화해야만, 시민들이 무엇을 요구하고 그들의 공동체나 지역을 위해 미래를 어떻게 그려나갈지 스스로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지역 공동체가 그들을 대신해 정책 결정 기관에서 일하는 대표자들에게 압력을 가해 더 용감하고 단호한 정책을 추진하도록 만들 수 있다. 이 책에서 우리는 먼저 지역공동체와 그 주민들이 직면했던 난제를 기술할 것이다. 민주주의의 퇴보는 지역공동체의 점진적 붕괴와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지역공동체 재구축
민주주의 재건은 사회 저변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는 지역 공동체가 자신들의 어려움과 불만에 대응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효과적인 대응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할 것이다. 상공회의소, 교회, 지역 협회, 또는 능동적 참여 지원자 등 지역사회와 지역조직에서 주민을 대표해 일하는 다양한 대표자들이 함께 모여 당면한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지 그 방법을 결정하는 것이다.
현재 많은 지역공동체가 새로운 난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미국 애팔래치아 지방, 독일 브란덴부르크와 오버 작센(라우지츠 지방)처럼 지구온난화에 대처하기 위해 석탄 채굴량을 줄여야 한다고 인식하는 서구에서 이런 비효과적인 대응의 예를 발견하곤 한다. 미국과 프랑스의 러스트벨트 지역에서도 이런 예를 볼 수 있는데, 이들 지역에서는 새롭게 산업화하고 있는 사회와 자동화로 인한 경쟁이 합해져 지역 고유의 산업 활동을 점진적으로 약화시켰다. 이들 사례를 보면, 해당 지방들은 제조업 쇠퇴, 신자유주의적 재정정책, 정치적 방치로 인해 수십 년 동안 황폐해져, 현재와 미래의 난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자원이 부족함을 주민들 스스로 깨닫는 지경에 이르렀다.
제조업의 쇠퇴로 이들 공동체는 다른 무엇보다 자부심과 자존감을 주민 개인 차원은 물론, 지역 차원에서도 어느 정도 상실했다. 공동체가 경제적 쇠퇴로 자존감을 상실하면 정치효능감(political efficacy, 개인이 정치 과정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정치인이 시민의 요구에 반응할 것이라는 신념)도 함께 상실하는 경우가 많다. 정치인들은 세계자유무역과 신자유주의적 노동시장 개혁을 설파하며, 그 대가로 결국에는 모든 가구가 ‘낙수효과’ 혜택을 누릴 것이라고 확인했다. 그러나 라우지츠 지방의 러스트벨트는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계속 쇠락해와 사람들은 점점 더 이름 모를 기계에 당한 수동적 피해자가 된 것처럼 느끼면서 정치제도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다. 도심지로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은 떠난 반면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은둔해 틀어박혀 사는 형국이다.
실제로 이러한 지역공동체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스스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어 체계화하고 전개할 역량을 상실한 상태다. 지역 대표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능력 또한 상실해 매우 공격적인 자기 강화 집단을 결성하기 시작했다. 즉, 공동체의 정치적 무효능감(political inefficacy)이 지역 정치공동체 붕괴 상태를 유지하고 강화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유권자들은 변화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도, 결집해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 나아갈 방법을 파악하는 것도 어려워진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이러한 애팔래치아식 곤경이 점점 더 흔하게 나타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언급한 변화 메커니즘에 대한 유권자들의 이해력 저하는 보통 사람들의 요구사항과 열망이 대의민주주의체제와 단절되면서 도처에 나타나는 현상 중 일부다. 근대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달리 대의기관을 통해 운영되어야 한다. 그런데 대의기관을 전적으로 직접민주주의로 대체하는 것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아니다. 한편 동시에 민주주의가 ‘진정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대의기관과 시민들의 목표와 요구사항이 지속적으로 연결되어야 하지만, 불행하게도 여러 이유로 이 연결이 느슨해져 끊어지기 시작하고 급기야 단절될 수도 있는데,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현대 사회의 의제는 방대하고 다양하다. 각국 정부는 세계화된 세상에서 자국 경제를 관리할 뿐만 아니라, 복지제도 운영, 결혼과 가정생활 관련 중요 사안 결정, 외교정책 목표 추구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데, 이 모든 의제가 언제나 가장 중요할 수는 없다. 그 의제가 대중의 주목을 끄느냐 마느냐는 공공 영역, 특히 주요 미디어에서 그 의제가 어떻게 인식되는지에 따라 결정되는데, 몇몇 시민의 지극히 중요한 요구사항이 공론의 장을 장악한 다른 이슈들 때문에 도외시될 수 있다. 둘째, 민주주의 정치조직체에서 돈의 위력은 대단하다. 돈은 몇몇 개인이 언론을 통제하도록 만들고 바로 앞에서 언급한 관심의 왜곡을 지탱해준다. 또 오늘날 미국에서 목격할 수 있듯이, 로비와 선거운동 자금 지원을 통해 더 직접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셋째, 최근 시장의 본질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환상과 새로운 부의 공정한 분배를 보장하기 위한 환상에 따른 이른바 근사한 운영은 다 잘될 것이라는 이유를 달아, 노골적인 불평등 가운데 일부를 모호하게 만들거나 그 중요성을 경시했다.
앞에서 언급한 두 번째와 세 번째 동향은 많은 사람이 현재 서구 자유 민주주의의 위기로 설명하는 상황 전개의 일부 원인이기도 하다. 유럽과 미국에서 우익 포퓰리스트 운동의 등장은 전후(戰後) 기간 내내 구축하기 위해 노력해온, 미국 공화국과 유럽연합의 핵심 가치를 구현한, 평등민주주의와 열린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여기에 외국인 혐오 증가, 외부인 의심, 이민에 대한 저항은 점입가경이며 절박한 난민들조차 저항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의 결정적 원인은 의심할 여지없이 많은 국가의 일하는 중산층 사이에 널리 퍼진 깨달음이다. 자신들의 생활수준이 계속 하락하고 있다는 깨달음, 전후 번영 기간 이후 설 자리를 잃었다는 깨달음,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조차 양질의 안정된 일자리 부족으로 사회적 계층 이동이 하향화될 것이라는 깨달음, 다시 말해 그들이 마주하는 세상에서 일자리는 점점 더 부족할 것이고, 임시직과 불안정한 일자리가 점점 더 늘어날 것이라는 깨달음이다.
한편 최근 수십 년간 일어난 변화 메커니즘에 대한 일반 유권자들의 이해력 저하가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출마, 프랑스의 국민연합(Front National), 독일의 독일을 위한 대안(AfD)과 같은 포퓰리스트 운동이 성공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불가능한 과거를 회복시킴으로써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거나, 이와 같은 종류의 매우 기이하고 놀라운 호소가 성공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지는 중요하지 않다. 유권자가 너무 무지해 그와 같이 단순한 해결책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든, 유권자가 사실 그런 호소들이 얼마나 절망적인 해결책인지 알지만 너무 좌절한 나머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엘리트들을 충격에 빠뜨리는 몸짓을 하고자 한다고 생각하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일단 유권자가 자기 요구사항과 관심사가 민주적 절차를 통해 효과적으로 진척될 수 없다고 깨달으면, 이러한 절망적인 수사(修辭)적 슬로건이 유권자를 끌어 모으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가 설명하려는 시민과의 단절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므로 시민과의 연결을 회복시켜야 한다. 그러나 현재 전개되는 여러 정황을 보건대, 우리 민주 사회가 일상적으로 굴러가는 와중에 시민과의 재연결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로자 계층과 중산층의 요구사항 및 열망을 다시 대의기관과 연결시키기 위해 결단력 있게 행동해야 한다.
사회 저변에서부터 민주주의를 재건하는 것이 이 재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중요한 조치다. 사회 저변에서부터 민주주의를 재건하는 것은 우리가 거쳐야 하는 단계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해결책일 수 있다. 즉 지역주민들이 한마음으로 동시에 그들에게 필요한 프로그램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고 이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연대할 수 있다면, 그들은 국회의원 등 대표자들이(적어도 지역 차원에서) 반드시 귀를 기울여야 하는 정치세력이 될 수 있고, 지역의 요구사항 및 열망과 민주주의제도 사이에 새롭고 강력한 연결이 형성될 수 있다. 한편 사회 저변에서부터 민주주의 재건을 달리 설명할 수도 있다. 해나 아렌트(독일 출신의 미국 정치철학자)가 주장한 정치영역(political sphere)의 확대가 바로 그것이다. 해나 아렌트가 제시한 열린 심의(open deliberation)는 동등한 위치에 있는 시민들이 공동 목표와 행동에 대해 세심하게 생각하고 심도 있게 토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렌트의 열린 심의 관점에서는 정치영역이 전격적으로 확대되어 국회의원뿐만 아니라 박식하고 정치와 사회 문제에 적극 관여하는 새로운 시민 그룹도 그 영역 안에 들어올 것이고, 이로 인해 정치행위(the political)가 확장될 것인데, 바로 이 정치행위를 확장시킬 수 있는 여러 프로젝트를 이 책에서 들여다볼 것이다.
한편 지역공동체 재구축이 어떻게 유익한 영향력을 행사해 정치체제 확장에 기여했는지 질문하기 전에, 출발점에서 다음 사항들을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즉, 러스트벨트, 애팔래치아, 라우지츠 지방과 같은 지역공동체에서는 사회 저변에서부터의 민주주의 재건이 어떤 모습인가? 지역공동체 재구축이 탈산업화하고 있는 사회의 위험요인에 대처하기 위한 공동체 능력을 어떻게 향상시키는가? 지역공동체 재구축이 하나의 정치체제로서 민주주의의 부활을 어떻게 더 폭넓게 받쳐주는가?
이미 여러 지역공동체 안에서 이러한 종류의 자기조직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자기조직화가 일어나는 지역공동체가 훨씬 더 많아져야 하며, 라우지츠 지방이나 러스트벨트와 같은 지역을 설명할 때처럼 자기조직화가 절실하게 필요하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을 때는 어떻게 외부로부터 그 과정을 시작하고 키워갈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 시작해야 한다. 예를 들어 정부는 탄광을 폐쇄할 필요가 있다고 결정 내릴 수 있는데, 이때 지구온난화에 대처해야 하는 급박함으로 내린 폐쇄 조치를 지역공동체가 받아들이도록 납득시키려 할 것이다. 이런 일은 참으로 벅찬 과업이다.
먼저 결정적인 의문을 품고 있는 지역주민을 찾아내 접촉해야 하는데, 결정적인 의문을 품고 있는 지역 주민이란 석탄은 고용 창출원으로서 영원할 수 없기 때문에 일자리를 창출할 몇 가지 경제적 대안이 지역에 필요하다는 상황을 인식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둘째, 이러한 주민들이 서로를 찾거나 적어도 서로 접촉해야 한다. 그런 다음 해결책이 될 수 있는 대안을 찾아내는 힘든 과업을 시작하라. 이 작업에서는 지역공동체의 조언과 통찰력이 필요하다. 외부인들이 그 지역에서 대안이 될 수 있는 경제적 천직에 대해 어느 정도 아이디어를 낼 수는 있으나, 그러한 대안들이 지역사회에 어느 정도 울림을 주지 않는 한 외부인의 좋은 아이디어는 걸음을 뗄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대안 일자리가 가지는 경제적 전망만의 문제가 아니라, 업무, 생산, 또는 서비스 제공과 관련해 제안된 방향이 그 지역의 기술과 역량, 지역 정체성 면에서 합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 저변에서 공동체를 조직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첫째, 지역에서 실행 가능한 새로운 경제적 가능성(대안들)과 지역주민들이 이미 가지고 있거나 쉽게 습득할 수 있는 기술과 역량 목록 등 내적ㆍ외적 환경에 관한 실상을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둘째, 주민들은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말해야 하며, 자신들이 무엇을 열망하며,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가정 하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스스로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사실 이 점이 앞에 기술한 첫 번째 사항의 중요한 구성요소 또는 결정요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항들을 외부로부터 습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셋째, 이러한 내용들은 해당 주민들과의 대화 속에서 파악되고 사실 여부가 입증되어야 한다.
정치공동체의 재설립 지원
개방형 혁신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는 몇몇 사례를 살펴보자. 유럽과 미국의 몇 가지 사례는 연구할 가치가 있다. 먼저 랑게네크는 오스트리아의 국경 근처에 위치한 직선 모양의 정착촌으로 1,100명의 인구가 거주한다. 지역 내 삶이 서서히 멈추면서 한때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랑게네크를 버리고 타지로 떠났으며, 마을 중심가 상점들도 하나둘 문을 닫았다. 이에 시장은 여러 건의 연구 용역을 의뢰했고, 이는 농촌 이탈을 막고 인구 구조의 변화를 이끌기 위한 몇 가지 전략의 전개로 이어졌다. 그러나 아무것도 제대로 되는 것이 없는 듯 보였다. 그래서 결국 간단한 방식으로 실험을 시작했다.
먼저 마을의 탈바꿈을 조절하고 통제할 권한을 주민들에게 부여했는데, 여기에는 무작위로 선정된 주민 15명이 참여했다. 첫 번째 만남에서, 참가자들은 원하는 변화 목록을 작성하는 대신, 랑게네크에서의 삶의 긍정적인 면에 대해 이야기했다. 가령 제과점 점원들은 여전히 고객의 이름을 불러주고, 동네에서 일하면 출퇴근이 필요 없어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내용 등이었다. 또 참가자들은 마을에서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한 사람들의 명단을 만들었는데, 200명이 명단에 올랐고 지역 축제에서 이들에게 감사를 표명했다. 참가자 그룹의 규모가 몇 달 새 커지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이 지역 탈바꿈 과정에 참여했고, 소규모로 다양한 조정 팀(coordination team)이 만들어졌다. 시장은 이러한 단체에 합류하지 않고, 적극적인 주민들이 이 탈바꿈 과정을 주도적으로 이끌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