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 세계사 3: 서양 미술편
피지영 지음 | 행복한작업실
B급 세계사. 3: 서양 미술편
피지영 지음
행복한작업실 / 2021년 10월 / 308쪽 / 15,800원
나이키를 참수하라! _ 성상 파괴 운동으로 수난당한 예술품들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 다음으로 인기가 많은 작품은 <니케> 조각상이다. 19세기 그리스 북동부의 사모트라케라는 섬에서 발견되어 <사모트라케의 니케>라고도 불린다. 니케를 영어로 읽으면 그 유명한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가 된다. 니케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승리의 여신으로, 니케의 조각상은 뱃머리에 부착되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부적으로도 쓰였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니케 여신상>은 바람에 날리는 옷 주름이 결코 돌 조각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화려하고 아름답다. 사라진 얼굴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크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훌륭하지만 완전한 작품은 얼마나 더 대단했을까? 왜 이런 작품이 훼손됐을까? 운반 도중 깨지고 떨어졌을까? 의문이 이어진다.
작은 바위산 하나를 깎아 만든 이집트의 스핑크스는 코가 훼손돼 있다. 틀림없이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훼손한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나폴레옹의 군대가 이집트 원정 시 스핑크스의 코를 표적 삼아 대포 연습을 했다고 알고 있는데, 이것은 확실한 오류다. 당시 나폴레옹을 따라 다니며 기록화를 그렸던 장 레옹 제롬(1824~1904)의 <스핑크스 앞의 보나파르트>라는 작품을 보면 이미 스핑크스의 코가 깨져 있다. 예술에 심취해 전 세계 정복지에서 수많은 작품들을 약탈했던 나폴레옹의 성격으로 보아 프랑스 군대가 스핑크스를 훼손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나폴레옹보다 훨씬 앞서 이집트를 여행한 작가의 스케치에서도 스핑크스는 이미 정상적인 코 상태가 아니었다.
이집트의 역사가 알 마크리지(1364~1442)는 이슬람교 광신도 알다르가 1378년 스핑크스에 사람들이 제물을 바치는 것을 보고 격분해 파괴했다고 기록했다. 이슬람교도 입장에서는 우상 숭배로 생각한 것이다. 떨어져 나간 코 주변에 망치와 끌로 작업한 흔적이 남아 있어 신빙성을 더해준다.
8세기에서 9세기경 유럽에서는 성상 파괴 운동이 한창 기승을 부렸다. 성경 <출애굽기>에 기록된 십계명 중 두 번째 계명(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출 20:4)이 그 근거다. 수많은 신과 예수는 물론 성인들을 묘사한 그림과 조각 등의 형상이 우상으로 여겨져 파괴되기 시작했다. 당시는 로마 제국이 동과 서로 나뉘어 있었다. 성상 파괴 운동은 동로마에서 먼저 시작됐는데 그 이유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성경 문구 그대로를 따르겠다는 순수한 의도 외에 황제가 성직자를 견제하기 위해 성상 파괴 운동을 일으켰다는 주장도 있다. 일반 신도들이 성상이 있는 교회를 찾아 헌금하는 것을 금지시켜 국가 재정을 확충하는 한편 살아 있는 황제 숭배를 강화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서로마 쪽에서는 생각이 달랐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어서 그림과 조각은 신도들에게 기독교의 역사와 신앙을 알려주는 데 유용하게 쓰였기 때문이다. 서로마에서는 유명무실한 황제보다 로마에 있는 교황이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었다. 로마에 있는 교회와 유적지에 전시된 성스러운 예술품들을 보기 위해서는 전 유럽에서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교황이 이것을 포기할 리도 없었다. 서로마에서는 성상이 십계명에서 명시한 우상이나 형상과는 다르다고 역설했다. 단지 상징적인 의미라는 것이다.
서기 610년 무함마드에 의해 창시된 이슬람교 역시 성경의 구약을 따른다. 특히, 이슬람교는 우상 숭배를 철저하게 배격해 동로마에서 시작한 성상 파괴 운동을 적극 받아들였다. 기존에 남아 있던 수많은 예술 작품을 없애는 것은 물론 무엇을 떠올릴 만한 형상은 절대로 만들지 않았다. 이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이슬람 문화권에는 사람 모양을 한 조각과 위대한 성인들의 모습이 담긴 회화 작품이 없다. 이슬람 예술가들은 대신 화려하고 아름다운 문양으로 그들의 기술을 뽐낼 뿐이다.
16세기 마르틴 루터(1483~1546)의 주창으로 종교 개혁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가톨릭에 맞선 개신교는 여러 가지 이견과 해석으로 또다시 여러 종파로 나뉘어 서로 맞서기도 했다. 성상 파괴도 그 문제 중 하나였다. 루터의 경우 성상에 대해 비교적 관용적인 편이었으나 스위스의 울리히 츠빙글리는 교회 안에 그 어떤 형상도 두지 않도록 했다. 이때 교회에 작품을 납품할 수 없어 수입이 없어진 예술가들이 눈을 돌린 분야가 부유한 상인들의 인물 초상화와 정물화, 풍경화 등이다.
이슬람 세력권 안에 있는 예술품들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그리스 시대의 청동 작품들은 대부분 녹여 무기를 만드는 데 쓰였다. 그로 인해 현재까지 남아 있는 그리스의 청동 작품은 극히 드물고, 대부분은 대리석 작품이다. 그러나 대리석으로 만든 작품도 수난을 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돌은 녹여 없앨 수 없으니 바다 속에 밀어 넣거나 강물에 수장시키기도 했다. 그렇게 버리기에 어렵거나 작품 자체가 무거워 운반할 수 없었을 때는? 훼손했다.
예로부터 동양과 서양 모두 큰 죄를 진 사람은 목을 베어 참수했다. 그보다 작은 죄를 지었을 때는 코를 자르는 의형, 발꿈치를 자르는 비형, 생식기를 자르는 궁형 등을 시행했다. 예술 작품들은 생명이 없는 형상이지만 우상이라고 여겨 이러한 형벌을 가했다. 지금 남아 있는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을 조각한 작품들이 상당수 훼손됐다. 앞서 말한 루브르 박물관 니케의 형상도 아마 그렇게 훼손당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드디어 유다가 예수와 겸상을 하다 _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 유다 찾기2004년 출간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댄 브라운(1964~)의 『다빈치 코드』는 기독교의 오랜 미스터리였던 성배를 찾는 스릴러 소설이다. 여기에서 작가는 성배를 문자 그대로 컵이 아닌 여자의 자궁을 은유한 것이라 설정했다. 그 단서가 되는 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최후의 만찬>은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 머물던 1495년에서 1497년 사이에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벽에 프레스코화로 그렸다. 예수가 죽기 전날 밤,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이 중에 나를 배신할 제자가 있다”라고 말한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다. 르네상스의 특징인 선 원근법이 뚜렷하게 보이며, 레오나르도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인 안정된 구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작품의 세로를 삼등분하면 식탁과 예수 머리 위 창문을 정확히 가른다. 가로를 삼등분하면 인물이 각각 3명씩 들어가 있다. 또한 대각선으로 그림을 분할하면 소실점은 정확히 예수의 얼굴에서 만난다. 숨 막히게 꽉 짜인 수학적 비례지만 인물들의 살아 있는 듯한 표정과 몸짓이 그림을 생생하게 만든다.
댄 브라운은 예수의 오른쪽 인물과 벌어진 사이 삼각형이 성배의 모양을 상징한다고 했다. 예수 오른쪽에 앉은 사람은 그의 제자가 아니고 여성, 즉 예수의 아내라고 추정되는(물론 『다빈치 코드』 속에서) 막달레나 마리아라는 것이다.
소피는 예수의 바로 오른쪽에 앉은 인물을 면면히 들여다보았다. 인물의 얼굴과 몸을 살피는 동안 그녀 내부에서 충격이 일어났다. 그 인물은 흐르는 듯한 붉은 머리칼과 섬세하게 모아 쥔 손 그리고 살짝 솟은 가슴으로 보아 의심할 여지없는…… 여자였다. -『다빈치 코드』 2권 11p, 2004, 베텔스만
이 소설을 읽으며 깜짝 놀란 사람들이 많다. 왜 레오나르도는 여자를 그려 넣었을까? 정말 성배를 상징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은 완벽한 허구다. 사실 서양 미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댄 브라운의 소설 설정에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서양 미술에서 나타나는 사도 요한의 모습은 한결 같다. 여자같이 예쁜 얼굴에 다른 제자들과 달리 유독 수염이 없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열두 제자 중 가장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그렇게 그렸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서양 미술 속 요한은 무조건 그렇게 그렸다. 서양 미술에는 공식과도 같은 것이 있다. 당시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적었기 때문에 그림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상징으로 표현해야만 사람들이 헷갈리지 않는다. 이순신 장군을 그릴 때 거북선을 배경으로 해야만 어떤 인물인지 구별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은 밀라노 성당의 식당 벽에 그려져 있다. 중세 이전부터 최후의 만찬 장면은 서양 미술에서 중요한 소재였다. 특히, 식사하는 장소인 만찬장에 많이 그려졌다. 아무 생각 없이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신을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려는 것이다. 밀라노 성당처럼 벽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도 있고 캔버스에 그려서 식당 혹은 근사한 만찬 장소에 걸어두기도 했다. 물론 그 그림들 속에서 요한은 어김없이 수염이 없는, 마치 여자처럼 그려져 있다.
서양 미술 속 수많은 최후의 만찬 그림을 보면서 재미있게 감상하는 방법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유다 찾기”다. 가롯 유다는 예수를 은화 30냥에 밀고했고 그 죄책감에 자살을 한 열두 제자 중 한 명이다. 그래서 기독교 문화권에서 2천 년 동안 유다는 악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예로부터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나 성인들의 머리 부근 혹은 몸 전체 뒤쪽으로 ‘님부스’라고 하는 밝은 빛이나 원형 테두리 등을 그려 넣었다. 위대함과 성스러움의 표현이다. 흔히들 예쁘고 잘생긴 사람을 보고 이렇게 얘기한다. “와, 어제 누구를 봤는데, 뒤에서 아우라가…….” 아우라는 독일 철학가이자 예술 평론가 발터 벤야민(1892~1940)이 만든 말이다. 예술 작품에서 모조품이 도저히 따르고 흉내 낼 수 없는 원본의 분위기와 고상한 품격을 일컫는 것이다. 님부스는 기독교 인물뿐 아니라 불교문화, 더 나아가서는 이집트, 아메리카 대륙에서 신의 형상을 묘사할 때 그림과 조각에서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앞서 말했듯 서양 미술에서는 공식처럼 거의 ‘의무적’으로 삽입해야 했다. 현실 자각에 눈을 뜬 르네상스 시기에 와서 점차 희미해지면서 바로크 시대에는 종적을 감춘 미술 기법이다.
최후의 만찬 장면에서 ‘유다 찾기’는 매우 쉽다. 예수를 포함한 총 열세 명의 인물 중 유독 유다만 이 님부스가 없다. 예수를 배반한 악인이기 때문에 성스러운 장치를 해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는 르네상스 3대 천재다. 찬란한 르네상스를 정점으로 이끌었고 다음 예술 사조인 매너리즘과 바로크를 예고했다. 이들은 성인들에게서 님부스를 걷어낸 과도기적 예술가들이다. 라파엘로의 성화를 보면 님부스가 있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봐야 보일 만큼 아주 희미하게 그려져 있다. 거의 대부분의 그림을 교황의 주문으로 그려야 했던 라파엘로였기 때문에 기독교의 ‘공식’으로 님부스를 넣어야겠지만, 그것이 현실에 맞지 않다고 생각한 그는 겨우 그리는 ‘시늉’만 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최후의 만찬>에서 님부스를 모두 걷어냈지만 예수 뒤에 교묘한 장치를 두었다. 창문 위쪽의 아치형 장식이 마치 예수의 님부스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최후의 만찬 장면에서 열세 명 중 유다를 찾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겸상’하지 않은 사람을 찾으면 되는 것이다. 작가들은 유다가 감히 거룩한 만찬에 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멀찍이 두었다. 식탁 끄트머리에, 아니면 화면에서 보이는 예수와 제자들과는 달리 반대편 자리에 등을 돌리게 하고 앉혔다. 어떤 작품에서는 님부스 대신 머리 위에 악마의 형상을 그리기도 했다. 그래야 설명이 없어도 누구나 유다를 구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는 이런 판에 박힌 그림 구성이 싫었다.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그래서 드디어 유다를 예수와 ‘겸상’시켰다. 유다가 만찬 식탁 안쪽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렇다면 님부스도 없고, 앉은 자리 구분도 없는 유다를 레오나르도의 그림에서는 어떻게 찾아낼까? 유다를 찾는 마지막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바로 예수를 팔고 유대인에게 받은 은화 30냥이 든 돈주머니다. 그는 식사를 하면서도 돈주머니를 오른손에 꼭 쥐고 있다. ‘유다 찾기’의 세 번째 방법이다. 레오나르도 그림에서뿐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서양 미술 속 유다는 이 돈주머니를 놓지 않는다. 서양 미술의 공식이니까.
공모전 낙선자가 해결한 120년 난제 _ 피렌체 대성당 ‘돔’을 설계한 브루넬레스키 이야기지금은 누구나 알고 있는 원근법, 르네상스 시대의 산물이다. 철저하게 수학적으로 계산된 원근법을 만들어 그림은 물론 공학에도 활용한 인물이 필리포 브루넬레스키(1377~1446)다. 첫 번째 르네상스 건축물은 그가 만든 피렌체 고아원이다. 그의 영향으로 본격적인 르네상스 최초의 그림인 마사초(1401~1428)의 <성삼위일체>가 탄생했다. 이 그림은 정교한 원근법이 적용되어 처음 보는 사람을 놀라게 했다. 마치 벽을 파내서 만든 조각이라고 생각했다.
피렌체에서 태어난 브루넬레스키는 원래 조각가를 꿈꾸었다. 그가 20대 초반일 때, 피렌체에서 세례당 청동문을 공모했다. 12세기 건축된 산조반니 세례당은 지금의 대성당인 산타마리아 델피오레(피렌체 대성당, 두오모. ‘꽃의 성모 마리아’라는 뜻)가 지어지기 전까지 피렌체의 주성당 역할을 했다. 이곳은 피렌체 시민 대부분이 태어나자마자 세례를 받았던 중요한 곳이다. 세례당에는 동쪽, 남쪽, 북쪽 세 곳에 출입문이 있다. 이 가운데 동문에 청동 부조 조각을 새겨 넣고자 1401년 피렌체시가 공모전을 열었다.
공모 주제는 ‘이삭의 희생’이었다. 7명이 지원한 가운데 브루넬레스키는 결승까지 올라갔지만 결국 로렌초 기베르티 1등으로 당선됐다. 브루넬레스키는 이때부터 조각을 그만두고 친구인 조각가 도나텔로와 로마로 가서 고대 건축을 공부했다. 어찌 보면 브루넬레스키의 낙선은 피렌체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당시 피렌체는 1296년 착공한 대성당(피렌체 대성당)을 완성하지 못한 채 방치하고 있었다. 도시 국가 피렌체의 부를 과시하고자 약 3만 명이 들어설 수 있는 세계 최대의 성당을 설계했지만 당시는 이 거대한 성당의 지붕을 얹을 기술이 없었다. 브루넬레스키는 로마에서 특히 판테온에 관심을 갖고 연구했다. 2세기에 지어진 판테온은 그때까지 세계 최대의 돔을 가진 건축물이었다. 수년간 브루넬레스키는 판테온을 분석했다.
피렌체로 돌아온 브루넬레스키는 자기만이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완성시킬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피렌체시는 기베르티를 공동 관리자로 임명해 돔 제작을 시작한다. 공사를 이어가던 중 브루넬레스키가 병을 핑계로 출근하지 않아 작업이 진척되지 않았다. 집에 찾아온 관계자들에게 “그 잘난 공동 책임자에게 물어보면 될 것 아니오”라고 답했다. 사실 기베르티는 건축에는 서툴러 브루넬레스키의 건축 계획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결국 기베르티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브루넬레스키의 멋진 복수가 성공한 것이다.
사실 피렌체 대성당보다 앞서 지어진 건축물 중에는 이보다 더 높은 것들이 많다. 그 비밀은 플라잉 버트레스(공중부벽)다. 무게를 분산시키기 위해 높은 건축물 옆으로 축대를 대는 것이다. 사방에서 받쳐주는 공중부벽으로 무게를 분산시키면 높게 건축물을 올릴 수 있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과 쾰튼 성당이 이렇게 지어졌다. 이런 양식을 ‘고딕’이라고 하는데, 이탈리아 사람들은 끔찍이 싫어했다. 수학적으로 비례에 맞춰 정갈하게 짓지 않고 버팀대가 여기저기 삐죽삐죽 튀어나온 건물은 야만스럽다고 여겼다. 예전 로마를 침입하던 야만족 ‘고트족’이나 사용하는 것이라는 경멸을 담아 고딕이라고 이름 붙였을 정도다. 이탈리아 제1의 도시 피렌체에서 고딕 양식으로 건물을 짓는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르네상스 양식으로 바닥에서 51미터 높이에 지름 43미터의 돔을 세운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지금처럼 철근과 크레인이 없는 상태에서 비계(공사를 진행하기 위해 설치하는 임시 가설물, 버팀대)를 놓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작업하는 동안 비계가 과연 돔의 무거운 하중을 지탱해줄 수 있을지도 불확실했다. 어떤 기술자는 성당 안에 흙을 가득 채운 후 돔 작업을 하자고 제안했다. 흙 속에 동전을 많이 넣어두면 지붕이 완성됐을 때 너도 나도 흙을 퍼갈 테니 치우는 것도 문제없다고 했다. 이런 황당한 의견이 나올 만큼 돔 공사는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모두가 브루넬레스키에 주목한 것은 당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