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빈곤 사회
강남순 지음 | 행성B
질문 빈곤 사회
강남순 지음
행성B / 2021년 10월 / 356쪽 / 18,000원
1부 _ 권력과 언론에 물음 묻기: 비판적 질문을 찾아서
정치ㆍ기독교ㆍ미디어, 그 파괴적 삼각 동맹 정치ㆍ기독교ㆍ미디어의 개성적 동맹: “드디어 문재인은 이미 벌써 하나님이 폐기처분했어요. 지금 대한민국은 누구 중심으로 돌아가냐. OOO 목사 중심으로 돌아가게 돼 있어. (중략) 하나님 꼼짝 마, 하나님.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뉴시스, 2019. 12. 09.)
A목사의 발언이다. 그는 후에 “‘하나님 까불지 마. 나한테 죽어’라는 말의 본심은 ‘문재인 저 OO 빨리 죽여 달라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A목사는 ‘증오의 레토릭’을 애국 행동으로 포장한다. ‘세계기독청’이 완성되어 세계 각처에서 온 사람들의 회비와 면세점 수입까지 계산하면 한 달에 ‘1조 원’이 생긴다고 하는 A목사는 능란하고 기만적인 기독교 사업가다. 8.15광복절 집회에 오지 않으면 “인간으로 살 필요가 없다”며 “주민등록증 회수”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혐오와 공포, 이 두 가지가 바로 A목사의 레토릭을 구성하는 핵심이다.
그런데 ‘A목사’는 단지 예외적 존재인가. 유감스럽게도 나는 도처에서 무수한 ‘A목사들’을 본다. 예수를 내세우면서 자본주의적 욕망을 펼치는 사업을 하는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두 가지, 즉 권력과 물질적 이득이다. ‘A 목사들’과 같이 대중을 선동하는 기독교 사업가는 스스로 생명력을 지니고 자생할 수 없다. 기생해야 하는 다른 권력은 바로 극우 정치와 미디어다.
극우 정치ㆍ기독교ㆍ미디어의 기생적 동맹을 드러내는 장면을 보자.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는 A목사가 주도하는 집회에 등장해서 “A목사님과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만세!”라고 외쳤다. 이어 법무부 장관, 국무총리 그리고 대통령 권한 대행이라는 막강한 정치권력을 행사해 온 황교안이 연단에 등장한다. 환호하는 청중 앞에서 세 사람은 미소를 띠며 사진을 찍는다. 극우 기독교 사업가와 정치인이 각자의 권력 확장을 위해 서로에게 기생하는 모습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이 장면은, 극우 미디어를 통해서 선동적 제목을 붙인 기사로 확산된다. 이렇게 해서 각각의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진실을 왜곡하고 혐오와 공포의 정치를 확산시키는, 극우 정치ㆍ기독교ㆍ미디어의 그 ‘파괴적 삼각동맹’이 완성된다.
2005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나치가 파괴했던 한 유대인 회당을 방문했다. 교황은 그 자리에서 “독일과 유럽의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였던 20세기에, 신이교주의에서 태동한 광기적 인종차별주의이데올로기가 유럽의 유대인들을 몰살하는 정권을 탄생시켰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나치 치하에서 벌어진 ‘인류에 대한 범죄’를 ‘신이교주의’ 탓으로 돌려버리는 교황의 말은 당시 히틀러 치하의 정치와 기독교(가톨릭과 개신교)가 맺은 파괴적 동맹 관계를 보지 못하게 한다. 마치 A목사를 ‘이단’으로 치부하면 한국 기독교의 복합적 문제들이 가려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다.
히틀러는 자신의 권력 확장을 위해 ‘적극적 기독교’라는 이름의 새로운 기독교 운동을 전개하고, 1936년 독일의 국가 교회를 탄생시켰다. 성서의 자리에 《나의 투쟁》이, 십자가의 자리에는 꺾어진 십자가(하켄크로이츠)인 ‘나치 문양’이 대체되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나는 독일 민족과 국가의 지도자인 아돌프 히틀러에게 충성하고 복종할 것을 맹세합니다. 신이여, 도와주소서”라는 선서를 했다. 독일의 기독교인들은 히틀러를 지지하는 다수의 ‘적극적 기독교’ 교인들, 그리고 히틀러에 저항하면서 본회퍼를 중심으로 구성된 소수의 ‘고백교회’ 교인들로 이분화되었다. 히틀러는 다수 기독교인의 협조와 미디어를 통한 이미지 메이킹을 통해서 권력 욕망을 성취했다. 끔찍한 ‘인류에 대한 범죄’가 히틀러라는 한 개인에 의해서만 저질러진 것이라고 보면 안 되는 이유이다.
“기독교인들은 나를 사랑한다.” 도널드 트럼프의 말이다. 트럼프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조차 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는 시시때때로 신과 성서를 들먹이고, 교회 앞에서 성서를 손에 들고서 기자들이 사진을 찍게 하는 연기를 한다. 자신에게 표를 주었던 극우 기독교인들에게 자신이 성서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자신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이미지를 확인시키는 것이다. 다양한 미디어 장치가 없었다면 트럼프의 이러한 가식적 이미지 메이킹은 확산되지 못했을 것이다.
히틀러와 트럼프가 사용한 미디어와의 기생적 동맹은 매우 유사하다. 자신들에게 불리한 것을 통제하기 위해서 ‘거짓말하는 언론’이라는 개념을 수시로 차용한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언론을 장악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한다. 히틀러는 ‘국가 대중계몽선전부’를 만들어서 요셉 괴벨스를 장관으로 임명했다. 괴벨스는 이 부처를 통해서 신문, 잡지, 책, 공공 집회, 예술, 음악, 영화, 라디오 등을 통제하고 모든 미디어를 나치 정권의 권력 확장을 위한 도구로 만들었다. 트럼프도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을 통해 자신에게 불리한 언론을 불신하도록 선동하고, 유리한 것만을 부각시켰다.
권력 욕망에 찬 정치인과 종교인의 파괴적 연합: 포괄적차별금지법 제정 반대에 앞장선 한국의 보수 기독교인들은 여성 혐오, 난민 혐오, 성소수자 혐오, 타 종교 혐오, 빨갱이 혐오 등의 혐오정치를 기반으로 극우 보수 정치인들과 공동 전선에 선다. 이러한 기독교인들은 이명박 ‘장로’를 대통령으로 만들기에 힘을 모았고, 지금은 문 대통령을 ‘종북 빨갱이’라며 탄핵을 외쳐댄다. 히틀러는 유대인, 외국인, 성소수자, 공산주의자에 대한 혐오를 무기로 삼았다. 혐오의 대상을 ‘위협적 존재’로 부각시키는 전략은 매우 유사하다. 위협적 존재를 ‘공동의 적’으로 삼은 보수 기독교 지도자들은 히틀러에게 그리고 트럼프에게 지지를 모아준다. 지지세력을 결집하기 위해서 혐오 가치를 극대화하고, 그 혐오의 대상을 ‘공동의 적’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기독교의 신과 성서를 소환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A목사’로 상징되는 한국의 보수 기독교 역시 신과 성서의 이름으로 다양한 혐오를 먹고 산다. “중국이 기독교를 박해해 하나님이 화가 나서 전염병으로 중국을 심판한다” 또는 “차별금지법 때문에 하나님이 한국에 세균으로 벌을 내린다”라고 설교하는 목회자들이 도처에 있다. 이들은 A목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인류의 역사에서 야욕에 찬 정치인들은 언제나 기독교를 이용한다. 그리고 비판적 성찰이 부재한 반지성주의에 빠진 기독교인들은 그러한 정치인들과 동맹을 맺은 기독교 지도자의 선동에 넘어가서 이용당한다.
‘A목사’라는 이름은 한국 보수 기독교인들의 문제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한국 사회 전반의 뿌리 깊은 질병을 드러내는 표면적 예일 뿐이다. A목사를 ‘이단’이라고 규정하고, A목사와 함께했던 정치인들이나 정당은 선 긋기를 하고, ‘문제가 있는 개인’으로 돌린다. A목사가 소속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백석대신)는 2019년 8월 30일, A목사의 “면직 및 제명 공고”를 냈다. A목사의 신학적 견해와 사상이 정통 기독교에서 벗어나서 교단으로부터 면직하고 제명한다는 것이다. 코로나19 확산에 A목사의 교회가 시발점이 되자 국민의 힘의 전신인 ‘미래통합당’은 선 긋기를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A목사식의 기독교, 그와 동맹적 관계를 맺는 정치인들 그리고 미디어의 파괴적 삼각 동맹이 왜 등장하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원인을 보지 못하게 한다.
모든 개혁은 상호의존적: 도대체 한국 사회 전반에 어떠한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는가. 비판적 ‘물음 묻기’가 부재한 공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사회 구성원이 될 때, 비판적 사유를 작동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판적 사유의 부재, 물음 묻기를 억누르는 사회에서 사회 구성원의 사유 기능은 정지된다. 그들은 다만 ‘선동’될 뿐이다.
‘자유’라는 동전의 이면은 ‘책임’이다. 종교적 자유란 이름으로 공공세계에서 무책임하게 행동하며 사회적 해를 끼칠 때, 그 종교는 개인과 사회에 파괴적이다. 개인의 종교적ㆍ정치적 자유는 공동선을 해치거나 타인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최소한의 책임성이 수반될 때, 비로소 존중받을 수 있다. 기독교 사업가의 선동에 ‘아멘’을 부르짖는 대중들은 자신의 행위를 성찰하지 못한다. 이미 사유 기능을 마비시키는 종교적 마약을 흡입했기 때문이다.
교육ㆍ정치ㆍ종교ㆍ미디어 등 특정한 한 부문의 개혁은 사회 전체 개혁의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결코 충분조건이 아니다. 각 영역이 총체적으로 변화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변화가 가능하다. 각각의 권력 확장과 이득의 극대화를 위해 뭉친 파괴적 삼각 동맹을 끊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 동맹 관계가 지속될 때 종교는 마약이 되고 미신이 되며, 그 종교가 위치한 사회에 성숙한 민주정치와 미디어가 뿌리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개혁은 상호의존적’임을 기억하자.
2부 _ 타자의 얼굴에 물음 묻기: 당신은 그에게 어떤 사람인가
세 종류의 사람,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직업이 무엇이든, 어떠한 정황에서 살아가든 사람은 대부분 세 종류의 역할을 하며 살아간다. 매니퓰레이터, 매니저 그리고 리더다. 코로나19 사태가 불거지면서, 미디어에 많이 등장하기 시작한 두 단어가 있다. 바로 틀린 정보와 허위 정보다. 틀린 정보란 잘못된 정보다. 반면 허위 정보는 의도적으로 사실과 진실을 왜곡시킨 정보다. 이 둘은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그 의도와 결과는 매우 다르다.
매니퓰레이터, 권력에의 집착자: 9시에 시작하는 중요한 회의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내가 그 회의가 10시에 시작하는 줄 알고, 회의 시간을 묻는 A에게 10시라고 한다. 내가 준 틀린 정보 때문에 A는 회의를 놓치게 되어 불이익을 당하고 만다. 이런 경우 A에게 틀린 정보를 준 나는 미안해하며 사과한다. 그런데 만약 내가 A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고의로 10시라고 알려준다. 의도적으로 허위 정보를 줌으로써 동료 사이를 이간질하고, 공동체에서 왕따시키고, 불신감을 조장하고 급기야는 사회적 생명까지 파괴시킨다. 전형적인 매니퓰레이터의 모습이다. 매니퓰레이터는 이처럼 ‘반쪽 사실’을 가지고 ‘전체 사실’로 왜곡하고, 후에 진실과 사실이 드러나도 결코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과하는 법이 없다. 매니퓰레이터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권력에 대한 집착’과 ‘일그러진 인간성’이다. 개인뿐만이 아니다. 특정한 사회, 종교, 정치집단, 또는 미디어도 매니퓰레이터의 역할을 한다.
오바마가 대통령 후보로 캠페인을 벌일 때, 노골적으로 매니퓰레이터의 역할을 한 것은 <폭스 뉴스>와 티파티라는 정치집단이었다. 이들은 오바마를 ‘동물’그리고 ‘히틀러’로까지 비유했다. 오바마를 악마화하는 것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오바마가 이슬람교도라든가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기에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등의 허위 정보를 확산시켰다. 물론 이들이 오바마가 기독교인이며, 미국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매니퓰레이터의 특징은 진실과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왜곡한다는 것이다. 매니퓰레이터들은 다양한 관계들을 파괴하는 사회적 바이러스와 같다.
매니저, 현상 유지자: ‘매니저’는 누구인가. 매니저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현재 현상에 대하여 아무런 비판적 물음을 묻지 않는다. 매니저의 주요 기능은 현상 유지다. 물론 한 공동체, 집단 또는 사회에서 이러한 매니저 같은 역할은 필요하다. 현상을 유지해야 하는 차원이 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매니저의 역할만 하는 이들만 있다면 문제가 심각하다. 현실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기에 현상 유지만이 아닌 변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 사회에 매니퓰레이터나 매니저만 존재한다면 여러 면에서 퇴보하게 된다. 오늘날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비판적 성찰을 하지 않는 매니저뿐만이 아니라, 매니퓰레이터의 역할을 하는 개인과 집단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 시대에 이러한 매니퓰레이터들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것이 바로 리더가 필요한 이유다.
지도자, 보다 나은 세계를 위한 설득의 예술가: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리더’는 재개념화된 리더다. 흔히 생각하듯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하는 이가 아니다. 리더는 학력의 고하 또는 권력의 유무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리더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첫째, 권력의 중심부만이 아니라, 주변부에 있는 이들까지 동시적으로 본다. 아이들 세계에서조차도 나이, 성별, 가정 배경, 육체적 힘 등에 따라 권력 관계가 작동한다. 리더란 중심과 주변을 늘 함께 보면서 주변부까지 포용하는 사람이다. 둘째, 리더란 관계가 깨어지고 왜곡될 때, 사실과 진실을 토대로 그 관계를 올바르게 회복시키는 역할을 한다. 셋째, 리더의 가장 중요한 지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귀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그 누구도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정의에의 예민성이다. 넷째, 리더는 현재만이 아니라 늘 미래를 늘 기억하는 이다. 지금보다 나은 관계, 지금보다 나은 사회를 생각하면서 그 다가올 미래에 대한 기억을 실천하고자 한다. 다섯째, 진정한 리더는 새로운 목표를 정하고 주변 사람들이 그 목표를 추구하도록 ‘설득의 예술’을 실행하는 사람이다. 진정한 리더란 끊임없는 성찰, 자기 학습 그리고 타자들과 열린 대화를 하면서 리더로 만들어진다.
조작과 왜곡된 정보로 한 사람의 사회적 생명을 박탈하고, 관계가 깨지게 만드는 개인, 집단, 미디어, 정치인, 종교인 등이 증가하는 사회에서 희망은 사라진다. 한국 사회에 무엇보다도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은 진정한 리더의 역할을 하는 이들이다. 사회 곳곳에 진정한 리더들이 늘어갈 때, 매니퓰레이터가 들어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게 된다. 진정한 리더가 되는 연습을 하는 것은 다양한 종류의 관계들을 더욱 풍성하고, 의미 있게, 민주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우리의 과제다.
3부 _ 관행과 대안에 물음 묻기: 한국 사회에 필요한 불편한 배움
불편함을 거부하는 교육, 미래는 없다 배움은 ‘불편함’의 경험으로부터 시작: 매 학기 강의가 시작되는 첫날, 나는 학생들에게 ‘배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강의를 한다. 인문학적 배움은 여러 가지 정보를 습득하고 암기하거나, 또는 선생이 지닌 지식을 그대로 학생들이 전수받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 진정한 배움을 가능하게 하는 데 필요한 우선적 과정은 ‘불편함의 경험’이다. ‘비판적 사유’를 주요 교육목적으로 하는 인문학적 수업을 하면서 학생들의 마음이 즐겁고 편하기만 하다면, 선생이나 학생 모두 실패한 것이라고 나는 수업 시간마다 강조한다. 그래서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가면서, “닥터 강, 오늘 수업 중에 내 마음이 심히 불편했습니다”라고 내게 말하는 학생들이 종종 있다. 그 말은 나에게 ‘오늘 많이 배웠다’는 고마움을 표현하는 ‘선생-학생 사이의 암호’가 되곤 한다.
배움이란 새로운 정보의 습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배움이란 자신의 고유한 관점이 형성되고, 그러한 관점이 내가 타자를 보는 방법, 인생관, 세계관 등 내 삶의 방향성을 규정할 수 있는 가치관을 구성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문학 분야의 수업을 통해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즐겁고 마음 편한 경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에 드러나고 있는 현상들을 무비판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는 수업을 통해서는 새로운 배움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탈자연화와 뿌리 물음의 중요성: 비판적 사유를 동반하는 새로운 배움에 필요한 몇 가지 구성요소가 있다. 첫째, ‘탈자연화’의 과정이다. 변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제로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 과정이다. 둘째, 이러한 탈자연화가 가능하려면 ‘뿌리 물음’이 필요하다. ‘뿌리 물음’이란,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물음표를 붙이는 것이다. 이러한 뿌리 물음은 어떤 관습이나 현상이 애초에 왜 그렇게 되었는지, 라는 근원으로 돌아가서 생각하게 만드는 질문이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차별과 불공평이 많은 이의 삶을 파괴하고 깨뜨리고 있다. 따라서 지금 눈에 보이는 차별과 배제의 현실 세계는 어떻게 구성되었으며, 무엇이 문제인가, 그리고 어떻게 변화가 가능한가, 라는 근원적 ‘뿌리 물음’을 묻는 것은 인문학적 배움의 책임이고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