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세계사
표학렬 지음 | 인물과사상사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세계사
표학렬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21년 11월 / 344쪽 / 17,000원
종교와 정치
기독교와 콘스탄티누스
로마를 분할 통치하다: “그는 해가 정점을 지난 한낮에 태양의 바로 위쪽 하늘에 빛의 십자가가 걸려 있는 것을 분명하게 보았다. 그 십자가에는 ‘Hoc Vince(이것으로 정복하라)’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콘스탄티누스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본 이 환영은 세계의 역사를 바꾸었다. 이제 세계는 다신교의 시대를 마감하고 유일신교의 세상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로마는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고 지중해를 ‘로마의 호수’로 만들며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자마자 심각한 문제에 맞닥뜨려야 했다. 그것은 로마의 공화정이 거대한 영토와 인구를 다스리기에 비효율적인 정치 체제였다는 것이다. 오직 황제의 통치, 즉 왕정을 통해서만 거대한 영토와 인구를 통치할 수 있었기에 로마는 결국 제국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황제가 다스리는 로마 제국 역시 한계를 드러냈다. 한계는 특히 후계의 문제로 나타났고 황제가 죽을 따마다 혹은 폭군이 등장할 때마다 격렬한 내전을 유발했다. 후계 문제로 고심하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제국을 4개로 분할해, 아우구스투스 2명과 카이사르 2명이 제국을 분할 통치하게 했다(로마 황제를 아우구스투스라고 불렀으며, 그에 준하는 지배자를 카이사르라고 불렀다).
그러나 황제들은 서로 유일 지배자가 되기 위해 싸웠고, 로마는 더욱 격렬한 내전에 휩싸였다. 이 싸움은 대를 이어 계속되었는데, 이 중에서 두각을 드러낸 이는 콘스탄티누스였다. 그는 갈리아 지방(현재 서유럽)의 카이사르인 콘스탄티우스 1세와 헬레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헬레나는 현재 비티니아 지방(콘스탄티노플 인근)의 여관집 딸이었다. 그녀는 출신이 비천했기 때문에 얼마 후 남편에게 버림받았지만,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아들의 신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어릴 적 콘스탄티누스는 언제 죽을지 모를 정도로 불쌍한 신세였다. 아버지가 아우구스투스인 막시미아누스의 양녀 테오도로와 재혼해서 여러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장남으로서 그 지위는 불안했지만, 황제 사이에서 인질이 필요할 때는 항상 불려가서 죽음과 대면하며 살았다. 그토록 힘든 청년 시절을 보낼 때 에우세비우스라는 기독교 신학자를 만났고 이때부터 기독교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기존의 제우스 중심 다신교와 기독교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통해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나갔다.
밀비우스 다리 전투: 콘스탄티누스는 여러 황제와 때로는 전쟁을 하고 때로는 정략결혼을 통해 동맹을 맺으며 점차 자신의 세력을 넓혀갔다. 그의 가장 강력한 적수는 아우구스투스였던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였다. 막센티우스는 로마와 이탈리아 반도를 지배하면서 콘스탄티누스를 반역자라고 선포했다. 그러자 콘스탄티누스는 다른 황제와 동맹을 맺고 10만의 병력을 동원해 로마로 쳐들어갔다. 양측은 로마 동북쪽 12킬로미터 지점인 삭사 루브라라는 곳에서 맞붙었다. 전투 직전 콘스탄티누스는 그 유명한 하늘의 십자가 환영을 보았고, 하나님의 가호를 받아 막센티우스 군대를 밀비우스 다리까지 밀어붙였다. 좁은 다리로 몰린 막센티우스 군대는 밟혀 죽고 빠져 죽고 칼에 찔려 죽었고, 그중에는 막센티우스도 있었다.
이 전투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무패의 황제로서 거침없이 정적들을 제거하고 마침내 로마 제국을 다시 통일했다. 그러나 로마는 여전히 분열의 여지가 있었고 왕권도 불안정했다. 기독교에 경도된 콘스탄티누스는 이제 유일신교로 로마를 통일하고자 했다.
당시 기독교는 여러 종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분열의 주제는 여럿이었지만 그중 대표적인 것은 과연 예수가 인간이냐 신이냐는 것이었다. 아리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아리우스파는 예수는 하나님이 창조한 도구로 아버지 하나님에게 복종해야 하는 ‘인간’이라고 주장했다. 아리우스파와 그 반대자들의 갈등은 파문과 폭동으로 이어졌고 이는 기독교를 통해 제국을 통일하고자 하는 콘스탄티누스의 의도에 반하는 것이었다. 결국 325년 니케아에서 공의회를 열어 이 논쟁을 매듭을 짓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니케아 공의회다.
콘스탄티누스는 공의회를 철저하게 주도했다. 그는 아리우스를 파문하고 아리우스파 주교들을 벌했으며 그들의 주장들을 소각했다. 또한 이 무렵 『성경』에 들어갈 경전과 뺄 경전을 정리했는데 『성경』에 들어가지 못한 경전들을 외경이라고 한다. 외경이 존재한다는 것은 『성경』의 편찬에 콘스탄티누스의 정치적 입장이 가미되었음을 보여준다는 주장도 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적 행보에 대해 로마 다신교의 심장인 로마 시민들은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드러냈다. 이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가 아닌 새로운 수도가 필요했다. 그가 주목한 곳은 중동이었다. 로마와 이탈리아 반도는 정치 중심지일 뿐 경제 중심지는 아니었다. 경제는 그리스 시대부터 항상 페르시아 지역이 가장 발달해 있었다. 결국 콘스탄티누스는 가난하고 다신교를 믿는 유럽보다 풍요롭고 기독교를 믿는 중동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기로 했다. 그가 새로운 수도로 점찍은 곳은 비잔티움이라는 도시였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관문으로 경제적ㆍ군사적으로 천혜의 요충지였다. 마침내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노플로 이름을 바꾸어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가 되었고, 이제 로마 제국의 중심이자 기독교의 중심이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장려하고 다신교를 억압했다. 기존 신전들을 파괴한 자리에 수많은 성당들이 건설되었고, 이교신을 숭배하는 의식은 금지되었다. 그는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 것이 아니라 특정 종교를 강요해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가 아니라 정치적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여전히 종파 간 대립이 심했고 콘스탄티누스는 갈망하던 통일을 보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그가 죽은 후 로마의 분열은 가속화되었고, 결국 변두리로 전락한 서로마는 476년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했다. 이후 서유럽은 로마 교황이 주도하는 로마 가톨릭의 중세 시대로 접어들었고, 반면 새로운 로마의 중심인 동로마는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1,000년의 역사를 이어갔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로마의 역사를 계승했다며 동로마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그 역사를 오리엔트의 역사로 취급했다. 나라 이름도 로마가 아니라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오리엔탈식으로 불렀다. 이로써 로마의 역사는 1,000년을 삭제당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동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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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와 혁명
황태자와 앙투아네트가 결혼하다: 17세기 절대왕정 시대는 또한 왕위 계승 전쟁의 시대였다. 유럽의 왕위 계승권은 사위나 외손자에게도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 왕실 전체가 합스부르크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사실상 모든 유럽의 왕과 왕자가 유럽 국가의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왕이 죽을 때까지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가장 치열하게 대립한 나라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였다. 각각 서유럽과 중부 유럽을 대표하는 두 강대국은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개입해 유럽의 패권을 차지하려 했다. 하지만 오랜 전쟁으로 양국의 재정은 피폐해졌고 성과 없는 전쟁으로 왕의 권위도 실추되었다. 양국은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체제 구축을 갈망해 결국 결혼동맹이 성사되었는데, 프랑스의 황태자와 오스트리아의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가 결혼한 것이다.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16남매 중 15번째로 딸 중에 막내였다. 응석받이로 성장한 그녀는 아름답고 활달했지만 공부나 예의는 빵점이다. 테레지아는 막내딸이 평범하게 성장해서 좋은 남자의 아내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기 때문에 공부나 예의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15세의 막내딸이 덜컥 프랑스 황태자에게 시집가게 되자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녀는 끊임없이 편지를 쓰고 심지어 장남 요제프를 프랑스에 보내서까지 그녀를 돌보려 애썼다. “그 애는 가장 영광스러운 왕비가 되거나 가장 비극적인 왕비가 될 거야.”
그러나 자존심 강한 공주였던 앙투아네트는 어머니의 충고를 듣지 않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수많은 시종과 귀족들에게 둘러싸인 채 천방지축으로 생활했다. 남편이 루이 16세로 즉위하자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지만 그녀의 생활은 더욱 사치와 유흥에 빠졌다. 이 무렵 프랑스는 재정 악화로 서서히 쇠퇴해가고 있었다. 잦은 전쟁으로 국고가 비었고 베르사유 궁전 등 왕실의 재정 낭비도 심각했다. 일례로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매일 300여 명의 요리사가 1,000여 명분의 최고급 식사를 만들었다. 가혹한 세금에 시달리던 평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바야흐로 프랑스에는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하지만 평범한 국민들은 여전히 왕과 왕비를 하늘처럼 떠받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어려움을 하나님의 징벌이나 몇몇 탐욕스러운 귀족 탓이라고 생각했다. 국민들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왕과 왕비가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구원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래서는 세상이 변할 리 없다. 혁명가들은 국민들이 왕과 왕비에 대해 불타는 적개심을 갖기를 원했다. 혁명가들은 상상력을 발휘해 오스트리아 출신 왕비의 난잡한 밤 생활을 소재로 한 소설을 창작해 파리 시내에 뿌렸다. 이놈 저놈과 아무데서나 사랑을 나누고 향락을 위해 돈을 펑펑 쓰고, 멍청한 왕은 그것도 모르고 왕비에게 헤헤거리기만 하고……. 점점 분위기는 오스트리아 여자가 나라를 망쳐먹는다는 쪽으로 무르익어갔다.
그 무렵 결정적인 스캔들이 터졌다. 유명한 왕실 보석상이 지금 시가로 80억 원에 해당하는 엄청난 보석 목걸이를 만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왕비가 사치스럽다 해도 목걸이 하나에 그 돈을 지불할 수는 없었다. 그러자 사기꾼들이 보석상에 접근했다. 왕비에게 팔아주겠다고 하고 목걸이를 가로채서 달아난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은 왕비가 목걸이를 꿀꺽하고 시치미를 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문의 영향력이 진실을 가릴 정도로 커진 것이다.
루이 16세는 평민들의 조세 저항이 거세지자 삼부회(성직자, 귀족, 평민 대표로 구성된 신분제 의회)를 소집해 귀족이나 성직자가 적절히 고통 분담을 하는 대안을 생각해냈다. 하지만 삼부회는 평민들에게 일방적으로 세금을 부담시켰고 이에 평민 대표들이 반발해 국민의회를 구성하고 저항에 나섰다. 정부가 국민의회를 탄압하자 분노한 파리 시민들이 시위에 나섰다. 그리고 운명의 날인 1789년 7월 14일이 밝았다.
앙투아네트와 거짓 선동: 혁명가들은 왕의 군대가 곧 파리로 들어와 대규모 진압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전에 무기를 확보해 시민군을 조작해야만 했다. 그들은 바스티유 감옥에 무기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즉각 행동에 들어갔다. “그동안 시위를 벌이다 체포된 사람들이 바스티유에 있다. 그들은 오늘 아침 처형된다고 한다. 바스티유로 가자. 바스티유에 가서 동지들을 구출하자.” 성난 시민들이 바스티유로 몰려갔고 시민들의 손에 무기가 넘어갔다.
시민들이 무장하면서 혁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왕과 왕비는 파리 외곽의 작은 궁에 유폐되었다. 혁명가들은 왕비가 오스트리아의 군대를 불러와 시민들을 학살할 것이라며 선동했다. 왕과 왕비에 대한 시민들의 적개심에 앙투아네트는 탈출을 결심했다. 왕과 왕비는 자식들과 함께 마차를 타고 오스트리아로 탈출을 감행했지만 국경 근처에서 잡히고 말았다. 그러자 자국에도 혁명이 전파될 것을 우려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직접 개입했다. 전쟁이 일어나고 수많은 프랑스 청년들이 죽었다. 혁명가들은 혁명에는 유능했지만 전쟁에는 무능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유럽 귀족이라는 존재가 바로 장군과 장교를 의미했기에 귀족이 없으면 전쟁도 할 수 없었다.
국민들은 동요했다. 혁명으로 민생이 나아지기를 원했지만 죽는 사람만 늘어나고 경제는 더 나빠졌다. 왕과 왕비에 대한 여론이 동정으로 변해갔다. 혁명가 생쥐스트가 말했다. “루이 16세는 죽어야 합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 그가 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루이 16세가 처형당했고, 다음 차례는 앙투아네트였다. 그녀는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죄목은 모두 파리에서 유행한 소문들이었다(기소 내용은 오스트리아에 군대를 요청한 반역죄와 근친상간 등 난잡한 성생활이었다). 그녀는 강하게 부인했다. 사실 증거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죽어야 했다. 새벽 4시에 사형이 선고되었고, 정오에 집행되었다.
그녀는 당당하게 죽음에 임했다. 철없던 소녀 황태자비는 어느새 성숙하고 의연한 왕비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재판에서 자신을 변호했고, 사생활에 대해서는 동정적 여론을 끌어내기도 했다.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갈 때 그녀는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으며, 기요틴 앞에 설 때는 집행자를 배려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녀는 기요틴이 그녀의 목을 자를 때까지 두려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반혁명적 귀족들은 그녀가 왕비답게 죽었다고 찬양했다.
프랑스혁명은 거짓 선동으로 얼룩졌고 특히 그녀에 대해서 심각했다. 억울한 시련 속에 앙투아네트는 강하게 단련되었고 의연해졌다. 혹자는 “왕비가 필요할 때 왕비답지 못했고, 왕비가 필요 없을 때 왕비다웠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혁명의 시기, 거짓 선동은 양면성을 갖는다. 거짓으로 사람을 현혹시켜 목적을 달성하려는 측면과 현재의 정치적 본질을 국민적 눈높이에 맞춰 표현하려는 측면이 있다. 국민의 90퍼센트가 문맹인 시절 선동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동이 분명 혁명의 광기를 강화하고 반혁명을 야기하는 것도 사실이다. 선동이야말로 우리가 근대 혁명사를 공부할 때 진지하게 분석할 과제라는 것을 잘 보여준 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이다.
신해혁명과 한족 민족주의
캉유웨이의 변법자강운동: 19세기 서양에서 근대 민족주의가 들어왔다. 민족국가 건설은 근대화의 핵심 요소였다. 하지만 청나라는 민족주의 때문에 망했다. 민족국가가 정답이 아니라는 뜻이다. 1840년 아편전쟁은 마약 수출을 위해 영국이 일으킨 전쟁이다. 말도 안 되는 전쟁이지만 19세기는 극단적인 국가 이기주의 시대, 국익을 위해서는 마약을 팔고 그것을 방해하면 전쟁을 일으키는 시대였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청나라는 서서히 서양에 영토와 이권을 빼앗겼다.
서양의 압도적인 힘은 군사력에서 나왔다. 아편전쟁에서 그 힘을 경험한 청나라 한족 지식인들은 이홍장(1823~1901)을 중심으로 서양의 무기와 기계를 수입하자는 양무운동을 일으켰다. 하지만 청나라 지배족인 만주족은 한족이 군사력을 장악하면 장차 만주족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를 건설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여 양무운동을 방해하려 했다.
양무운동이 가능했던 것은 서태후(1835~1908) 덕이었다. 서태후는 함풍제의 후궁이었는데 그의 사랑을 받아 장남 재순을 낳았다. 서태후는 함풍제가 일찍 죽고 재순이 즉위해 동치제가 되자 섭정이 되었다. 단지 후궁이기 때문에 황후인 동태후와 공동 섭정이 되었다. 동태후는 만주족 왕조의 유지만을 중시했지만, 서태후는 근대적 개혁도 중시해 양무운동의 후원자가 되었다. 동태후와 만주족 귀족의 반대로 양무운동이 중단되면 서태후가 재개하는 일이 잦았고, 이 과정에서 양무운동이 주도한 정치세력, 소위 양무파는 서태후의 권력 기반이 되었다. 1874년 동치제가 후사 없이 죽자 서태후는 동치제의 조카뻘인 불과 3세의 광서제를 즉위시킴으로써 섭정의 권력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양무운동은 실패였다. 무기와 기계는 서양의 힘의 원천이 아니었다. 서양의 힘은 제도와 체제에서 나왔다. 그 체제를 수용한 것은 일본이었고, 결국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청나라가 패배하면서 30년 양무운동이 헛된 것에 지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