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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명연설: 사회 편

정인성 지음 | 답


세상을 바꾼 명연설: 사회 편



정인성 지음

답 / 2021년 10월 / 319쪽 / 16,000원





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 - #자유 #혁명 #시작



1775년 3월 23일, 미국 버지니아 리치먼드의 세인트 존 교회에서 제2차 버지니아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한 남자가 연단에 섰다. 영국의 폭정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그 남자는 힘찬 어조로 연설을 이어갔고, 청중들은 숨을 죽였다. 그리고 이윽고 연설이 절정으로 치닫고 연사는 손으로 가슴을 찌르는 시늉을 하며 외친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이 연설 원문 중 일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It is in vain, sir, to extenuate the matter. Gentlemen may cry, Peace, Peace-- but there is no peace. The war is actually begun! The next gale that sweeps from the north will bring to our ears the clash of resounding arms! Out brethren are already in the field! Why stand we here idle? What is it that gentlemen wish? What would they have? Is life so dear, or peace so sweet, as to be purchased at the price of chains and slavery? Forbid it, Almighty God! I know not what course others may take but as for me, 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

패트릭 헨리, 1736년 5월 29일생. 그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이민자 농부의 집안에서 태어나 미국 버지니아에서 자랐고, 지역의 또 다른 농장주의 딸 새라 셸턴과 결혼하여 농장주로 사회에 진출했다. 결혼선물로 300에이커의 땅과 6명의 흑인 노예를 선물로 받을 정도였으니 형편은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1757년 집이 불에 타 없어지고, 상점을 하나 오픈했지만 실패한다. 그래도 그 농지는 그대로 남았으니 농장을 일구며(물론, 노예들이 일구었겠지만) 법을 공부해 법률가가 된다.

그래도 법률가로서의 직업이 확실히 천성에 잘 맞았던 것 같다. 변호사로서 맡은 사건에서 승승장구하며 이름을 알렸는데, 특히 연설능력이 뛰어나 배심원 선동에 능했다. 이후 1763년 영국의 조세정책과 버지니아 식민들의 이해가 충돌한 ‘사제의 소송’에서 버지니아 시민의 편에서 영국 국왕 제임스 3세를 독재자로 규정하는 등 맹렬히 비판하며 버지니아 식민의 승리를 이끌어 일약 스타로 떠올랐고, 여세를 몰아 정계에 진출해 1765년 버지니아주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헨리의 정치 노선은 영국의 부조리에 맞선 투쟁이었다. 버지니아주 하원의원으로서의 첫 행보로 자신의 당선 직전 영국이 통과시킨 인지세법에 맞선 인지세법 결의안을 발의했다. 당시 영국은 미 대륙에서의 패권을 둘러싼 프랑스와의 7년 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아메리카 대륙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엄청난 재정손실을 보게 되면서 왕실 채무의 규모가 두 배로 늘었다. 영국은 급증한 채무와 군의 유지비를 충당하기 위해 무리하게 식민지에 세금을 부과하는데, 그 시도 중 하나가 미국에서 출판되는 거의 모든 인쇄물에 영국 정부의 인지를 받도록 하여 직접세를 걷도록 하는 것이 인지세법이었다.

헨리가 결의안을 발의하면서 연단에 올라 “카이사르에게는 브루투스가 있었고, 찰스 1세에게 크롬웰이 있었듯이, 조지 3세도…”라고 말했을 때쯤 의장을 포함한 의원들 사이에서 “반역자!”라 외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엄청난 야유와 방해 시도에도 불구하고 헨리는 연설을 끝까지 이어나갔고, 이후 “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반대 투쟁에 나섰다. 미국인 대표자가 없는 영국 의회에서 미국에 대한 세금을 부과할 권한이 없다는 선언이다. 이 선언은 오늘날 ‘조세법정주의’의 뿌리가 되며 실제로 이 문구 자체를 조세법정주의라 해석하기도 한다. 헨리가 이끄는 반대 투쟁은 미국 시민의 큰 호응을 얻었고, 영국 의회는 결국 인지세를 철회하기에 이른다.

이후 헨리는 애국파 세력을 결집해 투쟁을 이어갔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하나이자 독립선언문을 작성했으며 훗날 미국의 2번째 대통령이 되는 토마스 제퍼슨 등과 함께 영국의 수탈정책에 대응할 여러 조직을 만들어냈는데, 그중 하나가 앞에서 언급한 연설의 무대가 되는 버지니아 회의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헨리는 1775년 3월 23일 버지니아 회의에서 갈팡질팡하는 지도자들 사이에서 단상에 올라 미국인들에게 역사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함께 무장투쟁을 통해 자유를 쟁취하자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연설을 펼쳤는데, 이 연설에 감명 받은 지도자들은 각성하여 미국 시민들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하고, 헨리를 시민군 창설을 위한 위원회의 위원장에 임명하였다. 한편 시민군이 창설되어 훈련 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한 영국군은 결국 1775년 4월 19일 렉싱턴과 콘코드에서 시민군과 충돌하였고, 이 사건으로 미국혁명 전쟁이 시작된다.

헨리의 연설은 불안에 떠는 시민들이 자신들의 다름을 극복하고 ‘자유’라는 가치 아래 연대하여 영국군에 맞설 수 있도록 목적을 부여했다. 헨리가 외친 자유는 제국의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독립하여 시민들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자유인 자주권의 요청이었다. 이 추상적인 요청에 미국 시민들이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쌓여온 미국 시민들의 희생과 헨리가 보여준 승리의 경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의와 자유’가 무엇인지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정의롭지 못하고 자유롭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는 직관으로 알 수 있다. 영국은 통치 권력을 활용해 미국인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시민의 자유를 제한했다. 이에 미국인들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짓기로 결심했고, 함께 그것을 쟁취해냈다.

하지만 모든 혁명이 그러하듯, 승리의 과실이 모두에게 돌아간 것은 아니다. 미국 시민들은 혁명을 통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였지만, 모두에게 ‘자유’ 혹은 자주권이 주어지지는 않았다. 백인 남성을 제외하고는 ‘시민’으로 인정받지도 못했고, 남부의 주들을 중심으로 노예제는 계속 이어졌다. 이 때문에 미국의 혁명이 백인들만의 이권 투쟁이라고 하는 의견도 있지만, 이는 단기적 결과만을 놓고 평가했을 뿐 아니라 여성들과 흑인들의 참여를 평가절하한 것이라 동의하기 어렵다. 패트릭 헨리와 미국 시민들이 함께 일군 미국 혁명은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고 함께 민주주의 발전의 역사를 써 내려가는 과정의 중요한 챕터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민주주의의 발전은 한 사람이 열 발자국을 가는 것이 아니라,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한 걸음씩 전진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불완전한 인간들이 함께하는 만큼 그 결과도 불완전하고 더딜 수밖에 없다. 만병통치약이나 구원자라는 존재는 신화에만 존재할 뿐, 사회가 한 걸음 나아가기 위해서는 실제로 수많은 이들의 시간과 희생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그 수만 명이 한 발자국을 내딛기 위해서는 누군가 열 발자국을 먼저 내딛는 용기를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다. 미국 혁명의 과정에서도 열 발자국 먼저 앞서간 헨리와 같은 사람들, 이른바 ‘건국의 아버지들’이 있었기 때문에 다수가 따를 수 있었다.



Are Women Persons? - #여성 #사람 #참정권




1873년 미국 뉴욕지역 연방법원, 한 여자에 대한 3차 공판이 열리고 있었다. 이미 전 공판에서 유죄 선고가 확정되었고, 그간 피고에게 어떠한 발언권도 주어지지 않았던 터라, 판사는 피고 여성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냐고 묻는다. 덤덤한 표정으로 일어선 여자는 연설을 시작한다. 점점 힘을 더해가는 연설에 당황한 판사는 여러 차례 제지하지만, 여자는 끝까지 연설을 이어나가며 청중들에게 물었다. “여성은 사람입니까?” 이 연설 원문 중 일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Webster, Worcester, and Bouvier all define a citizen to be a person in the United States, entitled to vote and hold office. The only question left to be settled now is Are women persons? And I hardly believe any of our opponents will have the hardihood to say they are not. Being persons, then, women are citizens and no state has a right to make any law, or to enforce any old law, that shall abridge their privileges or immunities. Hence, every discrimination against women in the constitutions and laws of the several states is today null and void, precisely as is every one against Negroes.’

수전 B. 앤써니.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사나 여성 인권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이름이다. 미국뿐 아니라 국제 여성 인권과 참정권에 있어 큰 획을 그은 인물이고 여성 운동계의 대모라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살펴볼 연설은 그녀가 법정에서 최후진술로 발표한 것으로 타임지에서 뽑은 역대 10대 연설로 뽑힐 정도로 역사적 중요성이 있는 연설이다.

1820년 2월 15일, 7남매의 둘째로 태어난 그는 인권 문제에 있어 급진적인 성향을 띠던 퀘이커교도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녀의 집안에서 운영하는 뉴욕 로체스터의 농장에서는 인권 운동가들의 모임이 종종 열렸는데, 앤써니는 평생 친구가 되는 프레드릭 더글러스도 이곳에서 만났다. 한편 아버지가 보험업에 종사하게 되면서 농장의 운영을 맡게 된 앤써니는 모임을 주관하며 어린 나이에 본격적으로 활동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노예해방 전선과 여성운동 진영의 연대 활동에 합류한 앤써니는 17세가 되던 해에 노예해방을 촉구하는 서명을 모았고, 1856년 미국 반(反) 노예사회의 뉴욕 대표에 임명될 정도로 노예제 폐지에 앞장섰다. 당시 노예해방 진영과 여성 참정권 진영은 공민권(公民權) 확대라는 목표 아래 공동전선을 구축하고 연대했는데, 이들의 연대는 북부의 노예해방 여론을 고조시켰고, 공화당의 집권,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 남부의 연방 탈퇴 선언, 남북전쟁 등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앤써니와 여성 운동 진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북전쟁 이후 제정된 수정헌법에서, 여성은 인종을 불문하고,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였고, 이에 따라 여성운동 진영은 투쟁노선을 변경하게 되었다.

이후 앤써니가 이끄는 여성참정권협회는 1871년 대법원판결을 통해 여성의 참정권 제한이 위헌이라는 판단을 얻어내는 전략을 총회에서 의결했다. 보충 설명하면, 수정헌법 제14조 제1항에 시민으로서 권리를 취득하는 대상으로 명기된 ‘모든 사람(all persons)’에 여성이 포함되는지를 따지게 하여 여성 참정권의 헌법적 근거를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전략에 따라 앤써니는 1872년 뉴욕주 로체스터의 대통령 선거 투표장에 50여 명의 여성을 이끌고 투표를 시도했는데, 이 중 앤써니를 포함한 15명이 투표에 성공했다. 하지만 1872년 11월 18일, 앤써니는 불법적으로 투표권을 행사한 혐의로 체포되었고,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 사회는 술렁였다. 함께 투표한 혐의를 받은 14명과 함께 재판이 열릴 때까지 석방된 앤써니는 재판이 열리기 전까지 재판이 열릴 뉴욕주 먼로 카운티의 29개 마을을 돌며 연설을 통해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미국 시민이 투표를 하는 것이 범죄입니까?”라고 질문을 던진 그녀는 수정헌법 제14조가 모든 사람에게 시민의 권리를 명기하고 있으므로, 여성들이 더는 의회에 여성의 참정권을 보장하는 법을 통과시켜 달라고 청원할 것 없이, 오래도록 묵살 당해온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바로 행사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이후 그녀의 이러한 주장은 로체스터 일간지에 실렸고, 지역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편 앤써니의 연설이 배심원 판결에 영향을 미칠까 우려한 지방검찰은 사건을 주 법원이 아닌 연방법원으로 옮겼고, 재판은 먼로 카운티 옆에 위치한 온타리오 카운티에서 열리게 되었다. 이에 앤써니는 온타리오의 모든 마을을 돌며 연설을 이어나가며 맞섰다. 재판 전까지 발표한 연설이 50여 차례가 되었다고 하니 엄청난 열정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연방 재판은 보통법에 따라 피고인에 대한 증언을 못 하도록 하였는데, 제2차 공판에서는 양측 변호인들이 변론하고, 판사가 의견을 개진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런데 판사가 배심원들에게 앤써니에 대해 유죄판결을 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에도 충분히 논란이 될 만큼 직권을 남용한 행위였다. 그리고 마지막 3차 공판에서 판사는 앤써니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지시를 내렸고 앤써니는 앞에서 언급한 명연설로 답했다.

당황한 판사가 제지하였지만, 앤써니는 꿋꿋이 연설을 이어나갔고, 연설을 마친 후에도 여성이 참여하지 않는 배심원단이 무슨 정당성을 가지냐며 따져 물었다. 결국 앤써니는 불법적인 투표권 행사 혐의로 유죄를 인정받아 벌금 $100을 부과 받았는데, 그녀는 평생 이 돈을 내지 않았다. 어차피 항소를 통해 대법원으로 사건을 옮기는 것이 목표였기에 오히려 이러한 처벌이 달가웠을 것이다.

하지만 야심차게 준비한 앤써니의 법정투쟁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1875년 유사한 사례인 Minor v. Happersett에서 연방대법원이 여성을 시민으로 인정하더라도 모든 시민이 투표권을 갖는 것은 아니라고 판결한 것이다. 그래서 앤써니는 전략을 수정하여 개헌을 통한 참정권 확보에 나섰다. 1878년 1월, 앤써니는 열차에서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된 캘리포니아 공화당 상원의원 애론 사젠트에게 의뢰해 여성의 참정권을 보장하는 수정헌법안을 제출하였는데, 이 안은 최초 발의되었을 때는 부결되었고, 42년이 지난 1920년이 되어서야 수정헌법 제19조라는 이름으로 통과되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정작 앤써니는 1906년 3월 13일 84세의 나이에 심부전과 폐렴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수정헌법의 통과를 보지는 못했지만, 미국인들은 그녀를 기리는 의미에서 수정헌법 제19조를 앤써니 수정헌법이라 부른다.

수정헌법 제15조를 통해 흑인 남성의 참정권이 보장되었다고 해서 그들에게 평등한 지위가 부여된 것이 아니듯, 수정헌법 제19조의 통과가 여성의 지위를 남성의 그것과 동등하게 만들어주지는 않았다. 참정권의 보장은 사회진출을 보장하지 않았고, 사회진출이 허용된다고 하더라도 넘지 못할 유리천장이 늘 존재했다. 그럼에도 수많은 시간과 희생을 통해 미국 사회는 인간성을 파괴해온 과두정의 벽을 허물며 문명을 발전시켜나갔다. 그리고 앤써니가 사망한 지 100년째가 되는 2016년 미국 대선에는 힐러리 클린턴이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되며 미국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하기 직전까지 갔다.

‘여성은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은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배제되는 사람들과 이로 인해 상실되는 사회 전체의 인간성에 관한 질문이었다. 배제되는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모두 경험과 편견의 노예일 수 있다는 점부터 인지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을 인지하는 것에서부터 우리는 앤써니가 이야기한 과두정이 우리 안에 존재하지 않는지에 관한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함께 찾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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