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왕은 어떻게 죽었을까
정승호, 김수진 지음 | 인물과사상사
조선의 왕은 어떻게 죽었을까
정승호, 김수진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21년 5월 / 332쪽 / 17,000원
【제1대】 태조
신덕왕후 강씨와 두 아들의 죽음 태조 이성계는 조선 왕조를 창업한 왕으로, 1335년에 태어나 1408년 74세를 일기로 사망해 조선 27대 왕 중 영조(83세) 다음으로 장수했다. 재위 기간은 6년 2개월로 비교적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올라 짧은 기간 왕권을 차지했다.
태조는 무사로서 강인한 체질과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태조의 질병과 치료에 관련된 기록은 태조의 나이 59세가 되던 해인 1393년(태조 2)에 최초로 나온다. 태조의 질병과 치료에 관련된 기록에는 왕이 병이 나서 편치 못하므로 도평의사사에 명령해 피접해 있을 땅을 살펴보게 한 내용이 나온다. 『태조실록』에는 어떤 병이 생겼는지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나이도 있고 새 왕조를 개창하는 데 애를 많이 써서 몸이 쇄약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다음 기록은 태조가 63세인 1397년(태조 6)에 질병을 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시기를 살펴보면 1396년(태조 5)부터 1397년까지는 태조가 병이 날 만큼 많은 일이 있었다. 1396년에는 신덕왕후 강씨가 세상을 떠났다. 태조는 통곡하면서 슬퍼했다. 조정의 조회를 10일 동안 닫게 하고, 금주령까지 내렸다. 그리고 왕비가 세상을 떠났으니 재최복(1년복)을 입겠다고 한 사신 정총을 명나라 주원장이 살해하자, 태조는 정도전을 동북면 도선무순찰사로 삼고 이지란을 도병마사로 삼아 북벌을 준비했다. 이 시기 신덕왕후 강씨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북벌 준비로 정신적ㆍ육체적으로 피곤해져 병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그 뒤에도 태조는 몇 번의 진료를 받았지만, 『태조실록』은 그가 어떠한 질병을 앓고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그 질병이나 치료법을 기록하지 않아 병명을 추측하기 매우 어렵다. 다만 1398년(태조 7)기록에는 “한간이 수정포도를 구해 받치므로 왕이 기뻐 쌀 10석을 내려주었으며 매양 목마를 때 한두 개를 맛보니 병이 이로부터 회복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이 기록이 태조가 목마를 때 수정포도를 맛보고 병이 회복되었음을 말하고 있는데, 추측컨대 태조가 소갈증을 앓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추측해볼 수 있다. 『본초강목』에는 포도가 갈증을 제거하는 효능이 있어 소갈증에 효과가 있다고 되어 있다.
태조가 64세가 되던 이때는 아들 이방원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사 정도전과 경순공주의 남편이자 개국 1등 공신 이제가 피살되었고, 병이 나 누워 있는 자신을 겁박하고 어린 방석과 방번을 방에서 끌어내 죽였다. 방석은 17세였고, 방번은 18세였다. 태조는 자신이 종이호랑이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왕위에서 물러났다. 빼앗긴 왕위도 왕위지만 비명횡사한 어린 아이들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던 늦둥이들에 대한 늙은 아비의 슬픔으로 태조는 자리에 눕고 말았다. 아마 이때 정신적으로 무척 힘들었고 질병도 같이 찾아왔을 것이다.
중원의 황제가 되는 길태조가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의 질병을 살펴보면 1401년(태종 1) 기록에는 김완을 보내 평주(평양) 온천에 목욕하여 병에 차도가 있었다. 이때는 태조의 나이가 67세 되던 해로 태조가 자신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평주에서 온천욕을 시행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68세가 되는 1402년(태종 2)의 기록에는 의정부에서 상왕 태조가 나이가 많고 풍질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1408년(태종 8)에는 태조가 갑자기 풍질이 심해 죄수를 방면하고 전국에 사신을 보내 쾌유를 비는 제사를 지냈으나 회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해 5월 24일, 비가 거세게 오는 날 태조의 병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들은 아들 태종이 한걸음에 달려왔다. 청심환을 드렸지만, 태조는 삼키지 못하고 눈을 들어 하늘을 두 번 쳐다보고 세상을 떠났다. 74세의 파란만장한 삶이 끝난 것이다.
태조의 질병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그가 앓았던 정확한 병명이나 증상을 자세하게 수록해놓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과 기록을 근거로 태조가 사망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을 유추해볼 수 있다.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자 태조는 왕위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태조는 형제들을 죽이고 자신의 개국공신 동기들까지 죽인 이방원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이방원에 대한 태조의 진정한 분노는 어린 동생들과 매제(이제)를 죽였다는 데 있지 않았다. 이방원의 형(정종)의 왕위를 빼앗은 것도 아니었다. 태조의 분노는 자신의 마지막 과업을 무산시켰다는 데 있었다. 그것은 중원의 황제가 되는 것이었다.
정도전이 이방원에 의해 죽던 1398년 4월, 명나라 신하들이 황제인 주원장에게 조선 정벌을 청했다. 그러나 주원장은 이를 묵살했다. 조선 정벌은 다른 정벌과는 다른 것이었다. 동이족은 원래 군사에 능한 데다 명나라군은 만주의 혹독한 추위를 견뎌야 했다. 게다가 태조는 역전의 맹장이었다. 주원장의 나이 또한 이미 70세를 넘은 때였다. 그 직후 주원장은 병석에 누웠고, 그다음 달에 병세가 심해지더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주원장의 사망 후 주원장의 손자 주윤문(혜종)이 22세의 나이로 황위에 올랐지만, 1399년 7월 연주원장의 넷째 아들인 연왕 주체(영락제)가 조카 혜종의 타도를 선언하고 군사를 일으키면서 베이징 일대는 물론 남방까지 내전에 휩싸였다.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려는 조선으로서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이미 북벌 정책을 마친 정도전이 살아 있어서 조선군을 북상시켰다면, 태조의 꿈이 손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황위를 놓고 죽고 죽이는 내전을 벌이던 명나라로서는 다른 지역을 돌아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더구나 조선군은 여진ㆍ몽골족과 연합군이었다. 태조가 명나라를 공격했다면 그들은 빼앗긴 자신들의 땅을 찾기 위해 명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을 테고 명나라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1차 왕자의 난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싸우지 않고도 고구려의 영토를 차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도전의 죽음으로 천자국의 꿈을 꾼 태조는 좌절했고, 조선은 다시 사대주의 국가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알츠하이머병과 우울증을 앓다 이로 인한 태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태조는 처음에는 분노로 인한 화병으로 태종을 원망했다. 왕권을 어쩔 수 없이 물려주고 고향 함흥으로 가 있을 때 이방원이 보낸 사신을 잡아두기도 하고 혹은 죽이기도 해서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때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태조는 그 뒤에도 ‘조사의의 난’(1402년)에도 개입해 태종을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태종의 왕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분노는 사라지고 우울증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일부 역사학자와 『태조실록』의 기록에는 태조가 안변부사 조사의의 난에 개입한 것이 치매 때문에 정신이 나간듯하다고 한다. 고독함에서 오는 정신질환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태조의 증상을 보건대 그의 병명은 노환으로 인한 알츠하이머병과 우울증이다. 일반적으로 알츠하이머병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진행된다. 1단계는 기억력이 크게 감소하고, 이것이 근심과 우울증을 유발한다. 2단계는 심각한 수준의 기억 상실 증상이 나타난다. 3단계가 되면 의식 착란이 심각한 수준에 이른다. 또한 망각이나 환각 등 정신병 증상도 나타난다. 태조의 증상은 치매 2단계인 것으로 보인다.
그다음으로 의심되는 증상은 우울증이다. 태조는 신덕왕후 강씨가 세상을 떠나자 흥천사를 창건하고 절에 틀어박혀 그녀의 명복을 빌었다. 그 뒤에 한양으로 돌아온 태조는 덕수궁에 은거하며 누구도 만나는 것을 꺼렸다. 이런 상태를 짐작하건대 태조는 심한 우울증에 빠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식들 간의 죽고 죽이는 참혹한 현장을 지켜보고 자신이 병으로 누워 있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칼을 겨누는 자식을 지켜보았다면, 아마도 보통 사람이라면 화병으로 쓰러져 죽었을 것이다.
마침내 태조는 창덕궁 별전에서 생을 마감했다. 태조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는 9개의 묘 중 하나인 건원릉이다. 태조는 신덕왕후 강씨와 합장되기를 바랐으나 태종이 따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태종은 태조를 지금의 건원릉에 묻으며 고향인 함흥의 흙과 억새를 가져다 그 위에 심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직도 봉분에 잔디가 아닌 억새가 심어져 있다.
【제4대】 세종
육식을 좋아했던 대식가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이며, 1397년(태조 6)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도, 자는 원정, 군호는 충령대군이다. 태종이 부인 10명에게서 29명의 자녀를 둔 덕분인지 세종 역시 부인 6명에게서 22명의 자녀를 두었다. 일찍부터 병석에 누워 죽을 때까지 병마와 싸운 왕치고는 여색을 많이 밝힌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성리학적 기초를 닦은 성군으로 칭송받지만, 사실상 그는 질병 앞에서 연약한 보통 사람이었다. 특히, 질병 치료에서는 사대부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불교를 숭상하지 못하도록 한 조선의 원칙을 깨고 사찰에 가서 약사불에 비는 것은 물론이고, 도교의 기문둔갑술도 쓰고 점도 쳤으며 무당의 푸닥거리도 동원했다. 조선 과학기술의 역사에서 가장 눈부신 업적을 남긴 왕의 행적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세종은 음식 조절에도 실패한 의지력이 부족한 왕이었다. 세종은 육식을 좋아하는 대식가였으며, 태종이 살아서 대리청정을 하던 1422년(세종 4) 상반기까지만 건강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는 크고 작은 잔병이 많아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도 못했다. 특히, 29세가 되던 1425년(세종 7)부터는 생명이 위태로웠다.
세종은 소갈증과 그로 인한 합병증인 안질을 앓았으며, 많은 후궁과의 잦은 잠자리로 인해 임질을 앓았다. 또한 신경성 질환인 강직성 척추염과 중풍으로 고생했다. 세종은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었다. 세종의 질병과 관련해 『세종실록』에 100회에 걸쳐 나올 정도로 그는 평생 수많은 질병 때문에 고생했다. 『세종실록』에는 세종의 질병이 다른 왕들에 비해 구체적이며 자세하게 나와 있다. 다 큰 어른이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 못해 아버지 태종이 사망한 후 3년 상중에 고기를 먹었다는 기록은 세종이 과연 성리학을 추종하며 효를 다하는 자식이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닭, 꿩, 양고기를 처방하다세종은 평생 온갖 병으로 고생했다. 고통이 절절하게 전해지는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내가 젊어서부터 한쪽 다리가 치우치게 아파서 10여 년에 이르러 조금 나았는데, 또 등에 부종으로 아픈 적이 오래다. 아플 때를 당하면 마음대로 돌아눕지도 못해 그 고통을 참을 수가 없다. ……또 소갈증이 있어 열서너 해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역시 조금 나았다. 지난해 여름에 또 임질을 앓아 오래 정사를 보지 못하다가 가을 겨울에 이르러 조금 나았다. 지난 봄 강무한 뒤에는 왼쪽 눈이 아파 안막을 가리는 데 이르고, 오른쪽 눈도 이내 어두워서 한 걸음 사이에서도 사람이 있는 것만 알겠으나 누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겠으니, 지난봄에 강무한 것을 후회한다. 한 가지 병이 겨우 나으면 한 가지 병이 또 생기매 나의 쇠로함이 심하다.”
1439년(세종 21) 6월 21일 세종의 이 말에서 종기, 소갈, 임질, 안질 등 재위 내내 자신을 괴롭힌 병들을 개관할 수 있다. 한마디로 세종은 질병의 종합선물세트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종은 왜 이렇게 많은 병에 걸렸을까? 『세종실록』은 세종의 병은 비만과 그것에 따른 소갈증, 즉 당뇨병에서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운동을 하지 않고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만 한 탓에 비만했고, 그것이 당뇨병을 불렀다는 것이다. 나쁘게 말하면 자기 관리에 실패했던 것이다.
당시 어의들이 소갈을 없앨 목적으로 처방한 음식은 흰 수탉, 누런 암꿩, 양고기였다. 닭은 본래 삼계탕에 들어갈 정도로 속을 데우는 음식이고, 꿩은 신맛이 있는 음식으로 갈증을 없애는 효과가 있다. 양고기는 인체의 모든 곳에 양기를 북돋아준다. 특히, 시력과 청력, 폐의 호흡 능력을 키우는 데 효과가 있다. 한의학에서는 양고기에 멀리까지 볼 수 있는 양적 에너지가 많이 들어 있다고 본다. 사람의 시력을 좋게 하는 데는 양의 간으로 만든 양간환이 좋다고 『동의보감』에 나와 있을 정도다.
한의학은 본래 질환만을 치료하는 약재를 처방하는 게 아니라 환자의 몸에 맞는 약재를 처방한다. 질환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특정한 원인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자 몸의 내재적 균형을 회복시켜줄 수 있는 처방을 궁리한다. 그 궁리의 결과가 약이 아니라 음식으로 병을 다스리는 식치다. 소갈을 앓던 세종에게 닭ㆍ꿩ㆍ양 등의 고기를 처방한 것은 일종의 식이요법이었던 셈이다. 또 이런 처방으로 판단할 때 세종은 몸이 차고 냉했던 것 같다. 이 음식들이 모두 온기를 돋우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사실 세종은 소갈 말고도 풍질이나 풍습 같은 관절 질환으로 고생했고, 이것을 치료하기 위해 여러 번 온천을 찾았다. 이 질병은 한의학적으로 몸이 차고 냉한 사람이 걸리는 병이기도 하다.
안질과 임질로 고생하다세종을 평생 괴롭힌 병은 안질이다. 세종은 자신의 안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두 눈이 흐릿하고 깔깔하며 아파, 봄부터는 음침하고 어두운 곳은 지팡이가 아니고는 걷기에 어려웠다. 온천에서 목욕한 뒤에도 효험을 보지 못했다.”
1441년(세종 23) 4월 4일 세종은 자신의 안질이 10여 년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사관은 세종이 안질을 얻은 원인을 “당시에 왕이 모든 일에 부지런했고, 또한 글과 전적을 밤낮으로 놓지 않고 보기를 즐겨했으므로 마침내 안질을 얻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안질은 소갈증의 합병증임에도 너무 과한 숭배 차원에서 기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세종은 임질로도 고생했다. 임질은 오늘날에도 성인성 질환, 즉 성병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동의보감』에서 임질은 “심신의 기운이 하초에 몰려 오줌길이 꽉 막혀 까무러치거나 찔끔찔끔 그치지 않는 증상이다”라고 나온다. 사실 『동의보감』에 나오는 증상은 오늘날 성병이 진행되기 전 징조를 말하는 것이다. 세종은 18남 4녀를 둘 만큼 많은 성관계로 이질이나 피부병, 종기와 같은 성인성 질환을 앓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세종은 숨을 거두기 전인 1449년(세종 31) 12월에 “근자에는 왼쪽 다리마저 아파져서, 기거할 때면 반드시 사람이 곁부축해야 하고,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있어도 반드시 놀라고 두려워서 마음이 몹시 두근거린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세종이 어느새 언어 건삽증(혀가 굳어져 말을 못하는 현상)과 심허 증상을 보이고 있다는 증후다. 이 증상은 잠시 호전되었다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세종의 사망 원인은 젊어서부터 앓고 있는 당뇨, 종기, 중풍, 망막증 등 수많은 질병이 원인이었다. 세종은 결국 재위 31년 6개월 만인 1450년(세종 32) 2월에 영웅대군(세종의 8남)의 집에서 5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평생 병마와 싸우며 사대부 세상을 만들다가 세상과 작별한 것이다.
척추에 염증이 생기고 움직임이 둔해지다 세종은 그야말로 슬픈 육체를 가진 존재였다. 우선 세종을 가장 괴롭혔던 당뇨와 그에 따른 합병증을 살펴보자. 운동은 하지 않은 채 육식을 즐기고 후궁들과의 잦은 성관계가 당뇨를 동반했을 것이다. 당뇨병은 치료 가능한 질병이지만, 가만히 놔두면 사망에 이르게 된다.
당뇨병의 증상으로는 우선 갈증과 함께 식욕이 증가하고 더불어 체중이 감소한다. 이외에도 밤에 소변을 자주 보러 일어나거나 탄산음료나 차보다 냉수를 좋아한다. 결국 당뇨병은 혈당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서 발생하는데, 혈당 관리에는 식사, 운동, 약물 등이 중요하다. 이 중 식이요법이 가장 기본이고 중요하지만 가장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잘못된 식습관은 과식, 잦은 간식, 불규칙한 식사다. 이러한 세종은 잘못된 식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당뇨병이 심해질 경우 각종 심혈관 질환이 발생하고, 시력 저하나 고혈압, 극심한 피로를 느끼는 등 합병증이 발생해 인체의 약한 부분을 파고든다. 세종 역시 그러한 증상들이 숨을 거둘 때까지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