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당연하지 않다
데이비드 하비 지음 | 선순환
자본주의는 당연하지 않다
데이비드 하비 지음
선순환 / 2021년 10월 / 331쪽 / 18,000원
지구촌 곳곳이 불안하다 (Global Unrest)2019년 가을, 산티아고를 비롯해 베이루트, 바그다드, 테헤란, 파리, 키토, 홍콩, 인도, 알제리, 수단 등 세계 곳곳에서 정치적 투쟁이 대폭발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만들어놓은 현 세계에 고질적인 문제가 있다는 방증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은 민주주의 시스템의 실패와 민중들이 정치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또 다른 불만의 목소리는 현 경제모델의 실패입니다. 생활의 질을 합리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도록 공공서비스(건강관리, 교육, 주택 및 대중교통 등)를 제공해주면서, 동시에 적정 수입을 동반한 고용 보장, 부담 없는 가격으로 식탁 위에 올릴 수 있는 음식, 몸에 걸칠 수 있는 셔츠, 두 발에는 신발, 손에는 휴대폰, 집 차고에는 자동차를 보장해주리라 기대했던 경제모델이 실패했다는 것이죠.
희망 없는 미래칠레에서 벌어졌던 최근의 사건들은 문제의 본질뿐만 아니라, 이런 문제들을 정치적으로 다루는 전형적인 방법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줍니다. 칠레는 신자유주의를 선도했던 국가들 중 하나였습니다. 1973년, 피노체트 장군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적으로 선출된 사회주의자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를 제거하고, 일명 ‘시카고학파’라고 불리는 시카고대 출신 경제학자들을 영입해 신자유주의 경제모델을 도입했습니다. 이후 2019년 10월 초, 보수적인 기업인 출신의 피네라 대통령은 《파이낸셜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칠레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칠레는 ‘건전한 성장을 이루고 있는 오아시스이며, 탄탄한 경제가 뒷받침하고 있고, 경제 지표가 우수한 나라’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3주 후 칠레에 심각한 민중 소요가 들끓고 있다는 속보가 나옵니다. 애초의 문제는 지하철요금 인상이었습니다.
거리로 나온 학생들의 수는 2006년도 학생 시위에 맞먹었습니다. 당시 고급 레스토랑에서 여유롭게 식사를 하고 있던 피네라 대통령은 이 사태를 일으킨 무법자들을 반드시 막겠다고 장담했습니다. 이것은 곧 경찰에게 불만분자들을 강경 진압하라는 암묵적인 지시였습니다. 경찰은 그대로 따랐습니다. 이런 경찰에 맞서 시위에 합류하는 사람들은 더욱 많아졌고, 성당 세 곳과 지하철역이 불에 타고, 슈퍼마켓이 공격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후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었고 군대가 동원되었습니다. 그러자 수백만의 분노한 시민들이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에 대해 평화적인 방법으로 반기를 들었습니다.
피네라 대통령은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뭔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이후 기초연금 지급액과 사회복지 수당을 증액하고, 최저임금을 인상했습니다. 그리고 또 국가비상사태를 철회하고 군대를 철수시켰습니다. 이후 낡은 헌법에 대한 개헌 요구가 일었습니다. 기존의 신자유주의 경제모델을 보장해주는 헌법은 군부독재 시절에 채택된 것이었는데, 이 모델에 따라 연금, 건강, 교육 등의 부문이 민영화되었던 거죠. 결국 개헌의 필요성에 동의하고 2020년 4월에 국민투표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칠레에는 이렇게 불안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일찌감치 에콰도르에서도 있었습니다. IMF(국제통화기금)가 조세 개혁과 유가 보조금의 폐지 등을 요구하는 구조조정을 명령했고, 이로 인해 대규모 시위가 촉발되었습니다. 시위대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질 듯하자 정부는 수도인 키토를 민중들에 넘기고 과야킬로 피신을 합니다. 결국 레닌 모레노 대통령은 IMF 프로그램을 폐지하고 키토로 돌아가 협상을 합니다. 한편 지구 반대편에서는 레바논이 혼란에 빠졌습니다. 희망이 없는 미래에 좌절한 젊은 세대들이 계속해서 거리로 나와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했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일이 이라크의 바그다드에서도 벌어졌는데, 이 시위대는 바그다드에서 빈곤에 허덕이는 저소득층이면서도 수년간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사람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죠. 한편 프랑스에서는 ‘노란 조끼 시위’가 1년 넘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신자유주의그렇다면 이러한 시위들은 모두 무엇 때문에 발생한 것일까요? 각각의 사례들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들 시위의 공통된 맥락을 보자면, 현 경제 시스템이 대중들에게 보장했던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 또 정치 시스템이 비정상적으로 초부유층의 편에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는 것을 들 수 있겠습니다.
시위는 기본적인 경제 문제(대중교통비나 식비, 도시 공공서비스나 적정가의 주택 공급 부실과 같은)에서 촉발됩니다. 하지만 그 선에만 머무는 경우는 드뭅니다. 시위는 급속도로 증가하며 광범위한 문제들을 다루게 되죠.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관점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이러한 문제들은 신자유주의와 같은 특정한 자본축적 형태에서 비롯됩니다. 문제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서 구현되는 신자유주의라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에 편승해 우리는 여기까지 왔습니다만 이제 이 시점에서 멈춰 자본축적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합니다. 보다 더 사회적인 책임을 지고, 보다 더 공정한 형태인 이른바 ‘양심적인 자본주의’가 요구됩니다.
시위의 확산지난 30년에 걸쳐 우리는 다양한 저항운동을 목격했습니다. 이런 저항은 도심 지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도심 지역의 삶의 질이 저하되는 문제에 집중됐죠. 노동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규모 시위는 대부분 도심을 중심으로 벌어졌고, 그렇게 시작된 시위가 다양한 논리에 편승해 점차 확산되고, 다양한 계층과 다양한 사회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힘을 받으며 발전해가는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반자본주의 투쟁이나 예전의 무산계급 및 노동계급에만 국한된 투쟁과는 비교가 되죠.
불평등과 기후변화 대중들의 이러한 결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저는 끊임없이 생각해봤습니다. 오늘날 자본이 굴러가는 시스템에 결정적인 모순이 발생하는가? 그렇다면 그 결정적인 모순은 무엇일까? 한 가지 중대한 문제는 사회적 불평등입니다. 지난 30년에 걸쳐 거의 모든 나라에서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었고, 훨씬 평등한 사회를 쟁취하기 위해서 뭔가 움직여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중에게 더 나은 공공재, 더 나은 공공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기후변화입니다.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환경 파괴입니다. 기후변화는 전 세계가 공동 대응을 해야만 하는 지경에 와 있습니다. 공동 대응의 필요를 느끼는 사람들이 전 세계적으로 점점 더 많아지고 있죠. 사회적 불평등과 환경 파괴는 해결하기 힘들어 보이는 문제입니다. 한편 자본주의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자본이 불합리와 불평등을 양산할 뿐 아니라 야만적이며 심지어는 자멸의 길로 가고 있다고 보는 데에는 여러 가지 다른 이유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이와 같다면 자본은 또 다른 경제체제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자본의 속성마르크스는 다루지 않았지만, 이제는 중대한 문제가 되어버린 요인이 하나 더 있습니다. 자본은 항상 성장을 추구한다는 점이죠. 이윤 추구를 통해서 활기를 띠는 것이 자본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자본주의 경제는 모두가 초과이윤을 얻는 것입니다. 초과이윤이란 하루의 시작점에 갖고 있는 가치보다 하루의 마무리 시점에 쌓인 가치가 더 늘었다는 얘기이죠. 그리고 이렇게 하루의 마무리 시점에 생긴 잉여가치는 ‘경쟁의 강제법칙’에 따라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하는 데 사용됩니다. 자본주의에서 성장이란 복리로 불어나는 성장입니다. 그런데 세계 경제의 규모가 약 25년마다 두 배로 커지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이런 식의 복리성장은 이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리처드 프라이스가 1772년에 쓴 복리 이자에 관한 글을 인용했습니다. 프라이스는 예수가 태어난 날에 3% 복리 이자로 1페니를 투자할 경우 1772년이면 투자가치가 순금으로 지구 부피의 150배에 달하게 될 것이라고 계산했습니다. 반면 1페니를 단리로 투자할 경우에는 1772년이 되면 불과 7실링과 잔돈 몇 푼의 가치 밖에 안 될 것이라고 했고요. 여기서 마르크스는 장기간의 복리는 불가능하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자본의 관성에 따르면 아무런 제약 없이 무한정 자본축적이 이루어집니다. 마르크스가 세상을 읽어내던 시대에는 넘을 수 없는 한계는 없는 것처럼 무한한 자본축적을 향해 달려드는 복리성장이란 것이 가시적인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1970년 이후로 국제통화 공급 및 국제 신용통화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세계경제가 복리성장의 궤적을 밟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자본의 지배하에 돌아가는 세계시장에서 생산, 분배, 소비 및 가치의 현금화 등에 치명적인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모순자본주의 시스템에는 여러 모순들이 있습니다. 그중 몇 가지는 다른 모순들보다 훨씬 두드러지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계층적, 사회적 불평등과 환경의 붕괴는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모순들입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너무 커서 붕괴시킬 수 없고, 너무 괴물 같아서 생존할 수 없는’ 자본의 모순이 나타납니다. 사회적 불평등도 환경 파괴 문제도 이런 근본적인 모순을 다루지 않고는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자본은 거대한 괴물이 되어 점점 폭주하고 있기 때문에 살아남으려면 크고 작은 내전이나 갈등과 같은 지정학적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맞서 사회주의 및 반자본주의 운동은 자본의 어떤 면이 세계인들에게 유용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지, 그리고 자본의 어떤 면이 너무 크고 근원적이어서 붕괴시킬 수 없는지, 칼날 같은 타협의 길을 가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마르크스가 살던 시대에는 자본주의가 하루아침에 붕괴되더라도 전 세계 인구 대부분이 스스로 먹거리를 구하고 번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지역사회에서 생계 및 번식에 필요한 것들을 조달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자급자족이 가능한 시대였죠.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그렇게 생존할 수 있는 지역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의 과제는 현 사회에 잠재되어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잘 살펴서 그 대안이 될 수 있는, 보다 사회주의적인 시대로 평화롭게 전환할 수 있도록 모색하는 것입니다. 혁명은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라 기나긴 여정입니다.
사회주의는 진정한 자유를 추구한다 (Socialism and Freedom)최근 페루에서 강연을 했을 때 자유가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그곳의 학생들은 ‘사회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구속하는가?’ 같은 질문에 큰 관심을 보였죠. 미국을 위시한 세계 곳곳에서 우파는 자유라는 개념을 자신들의 것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을 ‘자유를 부정’하는 자들로 매도하는 데 자유라는 개념을 무기로 사용했습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서는 국가 통제가 우선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개인의 자유는 배제된다고 떠들었죠. 저는 학생들에게 사회주의 해방운동은 개인의 자유도 운동의 한 부분으로 붙들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사실 사회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주변부가 아닌 핵심 과제로 두고 싶어 한다고 봐도 좋습니다. 개인의 자유를 성취하는 것이야말로 사회주의 해방운동의 핵심 목표라고 저는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 각자의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한 충분한 기회와 가능성이 제공되는 사회를 더 함께 힘을 모아 만들어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자유의 양면성마르크스는 이 주제에 대해 몇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자유의 영역은 필요의 영역이 충족될 때 시작된다’는 것이죠. 애당초 먹을 것이 부족한 상황이라면, 건강관리를 비롯한 주택, 대중교통, 교육 등이 적절히 제공되지 않는 상황이라면, 자유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필요를 제공하는 것, 이러한 기본적인 인간의 요구를 충족하는 것, 그리하여 비로소 민중이 자유롭게 원하는 바를 펼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사회주의의 역할입니다. 우리는 우파가 자유의 개념을 독점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사회주의 스스로 자유의 개념을 되살려야 합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유가 양날의 검이라는 점도 지적했는데, 노동자의 입장에서 흥미로운 방법으로 자유를 바라보고 있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란 이중적인 의미에서 자유롭다고 말합니다. 노동자는 노동시장에서 자신이 원하는 이에게 노동력을 자유롭게 제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생산수단에서도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노동자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생산수단을 가진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넘겨야만 하죠.
노동자의 자유란 이렇게 양면성을 띠고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이 점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나타나는 자유의 핵심적인 모순이라고 봤죠. 마르크스는 『자본론』 중 노동시간을 다루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자본가는 자유롭게 노동자에게 “최소의 임금으로 맡은 일을 정확히 해내는 데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할애해주시는 분을 채용하고자 합니다. 이게 제가 요구하는 채용 조건입니다.”라고 말하고, 자본가는 시장사회에서 자유롭게 그렇게 합니다. 시장사회는 가격 경쟁 속에서 돌아가니까요.
한편 노동자도 자유롭게 말합니다. “나에게 하루에 14시간 일을 시킬 권리가 당신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바라는 일을 뭐든 다 시킬 권리는 없습니다. 그것이 특히 내 생명을 단축시키거나 건강과 행복을 해치는 일이라면 말이죠. 나는 정당한 임금에 정당한 시간만큼만 일을 하겠습니다.”
시장사회의 본질을 감안하면 자본가와 노동자가 각기 요구하는 조건은 모두 옳습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시장을 지배하는 교환의 법칙에 따라 둘 다 동등하게 옳다고 말하죠. 그러면서 동등한 권리 사이의 결정은 힘에 지배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힘의 관계에 따라 결과가 좌우됩니다. 이는 어느 정도 위압적이고 폭력적으로 바뀌는 경우도 있습니다. 실제로 일일 노동시간 및 임금, 노동환경 등이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투쟁을 통해 결정됩니다. 자본가가 교환의 법칙에 따라 노동력을 최대한 착취하려고 하는 것도 자유인 반면, 노동자가 이에 저항하는 것도 자유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이렇게 두 자유 간의 충돌 구도가 매일같이 형성됩니다.
이 주제에 대해 상세히 다룬 역작들 중에는 경제역사학자 칼 폴라니가 쓴 논문도 있습니다.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을 집필한 분이죠. 『거대한 전환』에서 폴라니는 좋은 의미의 자유와 나쁜 의미의 자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나쁜 의미의 자유로는 무제한으로 동료를 착취하려 하는 자유, 공동체에 상응하는 서비스를 제공하지도 않은 채 과도한 수익을 올리려 하는 자유, 과학기술 발명을 공익에 이용하지 못하도록 막으려 하는 자유, 인적 재해 및 자연재해를 비롯해 사적 이익을 취하기 위해 몰래 설계된 일을 돈벌이에 이용하려 하는 자유 등을 꼽았죠. 폴라니는 이러한 자유가 횡행하는 시장경제에서 아주 고귀한 자유들도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결사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 같은 것들 말이죠. 우리는 이러한 자유들만이라도 소중히 여겨야겠지만(물론 많은 이들이 소중히 여기고 있고, 심지어 저를 비롯한 마르크스 진영의 사람들조차도 그러고 있습니다만), 상당 부분 이러한 자유들은 악한 자유들에도 책임이 있는 동일한 경제체제의 부산물입니다.
현재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사고의 헤게모니와 기존 정치권력에 의해 나타나는 자유의 양상을 감안하면, 이런 이중성에 대한 폴라니의 답변은 이상한 해석들을 낳습니다. 폴라니는 이에 대해 ‘시장경제를 지나면, 즉 시장경제를 넘어서게 되면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자유의 시대가 시작될 수 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는 시장경제를 버린 뒤에야 진정한 자유가 시작된다는 말로, 시장경제를 선봉하는 현시대에 상당히 충격적인 발언이죠. 폴라니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