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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의 세계

다마키 도시아키 지음 | 미래타임즈


다이아몬드의 세계

다마키 도시아키 지음

미래타임즈 / 2021년 8월 / 232쪽 / 15,000원





제1장 인류와 다이아몬드의 만남 _ 고대부터 중세



이 세상에서 가장 비싸다?: 고대 로마의 풍자시인 유베날리스와 플루타르코스는 다이아몬드가 상당히 귀한 물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로마 시대에는 고귀한 사람들이 몸을 장식하기 위해 다이아몬드를 사용했다.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기보다는 다이아몬드가 상징하는 ‘무적’이라는 관념을 장식품으로 치환한 것이다. 이 상징성이 발전하여, 현실에서도 다이아몬드를 점차 중요한 용도로 쓰는 계기가 되었다. 다이아몬드를 로마로 수입할 때 중간 상인으로 활약한 것은 페르시아인과 아랍인이었다.

세계에서 유일한 산지였던 인도: 2000년 이상에 걸쳐 인도는 세계에서 유일한 다이아몬드 산지였다. 다이아몬드라는 광물이 아주 옛날부터 알려져 있었으나 상품으로 거래되기 시작한 것은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 틀림없다. 기원전 4세기 인도의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왕조 때부터 다이아몬드는 인도의 수출품이었다. 하지만 페르시아의 중간 상인들은 다이아몬드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다이아몬드를 중요한 보석으로 생각한 것은 아랍인뿐이었다. 인도에서 난 다이아몬드는 로마 제국뿐만 아니라 중국(한나라)에도 수송되었다. 하지만 그 양이 그다지 많았을 것 같지는 않다.

십자군의 영향: 십자군을 통해 사치품이 유럽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베네치아의 경쟁 상대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 제4차 십자군 원정(1202~1204) 이후, 베네치아 일대 무역 상인은 당시 보석 무역의 거점인 알렉산드리아에 통상 거점을 구축하였다. 당시 보석 수요의 증가에 가장 크게 공헌한 사람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였다. 신성 로마 제국은 십자군의 영향을 받아 무역량이 증가했고, 지역에서 금광과 은광도 발견되어 금과 은을 가지고 보석을 수입했는데 그중 하나가 다이아몬드였다. 그리고 다이아몬드를 절삭ㆍ연마해서 완성품으로 만드는 기술도 향상되었다. 이를 통해 다이아몬드는 서유럽에서 가장 수요가 큰 보석이 되었고, 사람들의 욕망을 채우게 되었다.

제2장 대항해시대와 다이아몬드



대항해 시대 - 다이아몬드에 눈뜬 유럽


금, 꿈을 좇은 대항해 시대: 유럽인들이 바다를 통해서 여러 지역으로 진출한 15세기에서 17세기 전반기까지를 ‘대항해 시대’라고 부른다. 대항해 시대가 시작된 이유는 아마도 아프리카의 금을 입수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유럽의 금 소비량이 급속하게 늘어나자 유럽은 금의 새로운 산출지를 서아프리카에서 찾아냈다, 하지만 유럽과 서아프리카의 교역에는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이슬람교도인 베르베르족이 사하라 종단 교역을 통해 금을 유럽으로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의 금을 입수하기 위해 바닷길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다이아몬드와 산호: 대항해 시대에 유럽인은 아시아와 신대륙으로 이주하거나 아시아와 거래했다. 유럽인이 인도에서 다이아몬드를 수입하면서 그 대가로 수출한 상품은 지중해산 산호였다. 산호는 특히 인도에서 수요가 커서 가격이 올라갔다. 17세기 이후 인도양에서 유럽인들의 무역이 증가했기 때문에 지중해 산호가 더욱 중요해졌다. 포르투갈은 초기부터 인도의 다이아몬드에 눈독을 들여서 오스만 제국의 레반트를 거쳐 유럽으로 수송했다. 중세에는 인도 다이아몬드의 대부분을 베네치아에서 절삭ㆍ연마한 뒤 지금의 벨기에에 있는 안트베르펜, 포르투갈의 리스본, 프랑스의 파리로 보냈다.

안트베르펜과 암스테르담-유대인과의 관계


유럽 최대의 다이아몬드 무역 도시의 탄생: 16세기 안트베르펜은 유럽 상업의 중심지이자 최대의 다이아몬드 무역 도시로 성장했다. 포르투갈이 새로운 항로를 개척한 결과 다이아몬드 거래 거점이었던 베네치아의 지위가 낮아지고 다이아몬드 시장이자 원석을 제품으로 마감할 수 있는 안트베르펜의 지위가 높아졌다. 16세기 초까지는 베네치아가 다이아몬드 원석을 공급하는 주요 지역이었지만, 16세기 말에는 리스본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안트베르펜은 인도의 산출품이 리스본을 거쳐 유럽으로 들어올 때의 유통 거점이 되었다. 그래서 안트베르펜에서는 다이아몬드의 거래가 활발했다.

암스테르담의 대두: 1540년대부터는 안트베르펜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가 시작되었다. 지금의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스페인과 독립전쟁을 치르던 1585년에 스페인군이 안트베르펜을 함락했고, 이를 계기로 암스테르담이 안트베르펜을 대신해서 융성하게 되었다. 이후 18세기가 되면 암스테르담이 다이아몬드 무역과 완성품 판매에서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네덜란드는 인도의 다이아몬드를 두고 포르투갈과 경쟁했으나, 1650년 이후부터는 포르투갈의 다이아몬드 구매량이 크게 감소해서 네덜란드가 우위에 서게 되었다. 이후 안트베르펜을 대신해서 암스테르담이 다이아몬드 무역의 중심으로 되었으며 안트베르펜은 절삭한 다이아몬드, 암스테르담은 미가공 다이아몬드를 주로 거래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의 지배-브라질의 다이아몬드


빛나는 돌을 발견하다: 근세까지의 다이아몬드 공급은 인도가 거의 독점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기간에 걸쳐 채굴한 탓에 인도의 다이아몬드는 차츰 고갈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인도에서 유럽 시장으로 공급되는 다이아몬드는 점차 줄어들었지만, 가격은 상승하지 않았다. 당시 유럽 사람들의 가처분소득은 여전히 낮았고 다이아몬드에 대한 수요가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1725년에 브라질 미나스제라이스 주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다. 1729년 포르투갈 왕실은 미나스제라이스 주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공표하고, 1730년에는 포르투갈 왕실이 브라질에서 다이아몬드가 묻힌 지역을 소유한다고 선언했다. 이후 브라질에서의 다이아몬드 산출은 계속해서 증가했다.

거의 유일한 수출국으로: 새로 발견된 브라질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다이아몬드를 채굴하려면 포르투갈 정부가 발급하는 면허가 필요했다. 브라질 다이아몬드 산출량은 1740~1772년이 최전성기였던 것으로 보이며 인도보다 더 많은 다이아몬드를 수출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18세기에 유럽이 브라질에서 수입하는 다이아몬드 량이 증가하면서 다이아몬드 가격은 1캐럿 당 100금프랑에서 30금프랑으로 70퍼센트 정도 떨어졌다. 1840년대가 되자 브라질의 다이아몬드 산출량이 20만 캐럿 정도에 이르렀다. 이 무렵부터 1870년대까지 브라질은 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다이아몬드 수출국이었다. 인도와 보르네오의 다이아몬드 산출량은 브라질의 1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다.

제3장 제국주의 시대



아프리카와 제국주의


아프리카는 아시아보다 먼저 유럽에 알려졌으며 비교적 일찍부터 유럽 사람들이 이주했다. 특히 영국이 이 지역을 노리고 식민지로 삼은 것은 이곳에 다이아몬드와 금이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의 마지막 30년 동안 영국은 호사족ㆍ페디족ㆍ줄루족과 벌인 전쟁에서 승리했다. 이후 영국이 패권을 확대해 가면서 아프리카의 부족민들은 예비 노동력으로 바뀌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후 1880년대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의 기간 동안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은 아프리카를 거의 전부 분할해서 식민지로 만들었다.

거의 유일한 수출국으로: 19세기에 유럽은 제국주의 시대로 접어들며 아프리카와 아시아 여러 나라를 정치적으로 지배해 갔다. 이것은 상인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활동했던 과거와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국가가 다이아몬드 채굴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해 상인이 아니라 국가가 다이아몬드 비즈니스의 중심이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는 당연히 영국 제국주의였고, 이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는 다이아몬드 비즈니스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킴벌리에서 발견: 브라질의 다이아몬드 산출량이 감소하던 19세기 중반에 남아프리카 킴벌리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다. 1867년, 한 소년이 오렌지강 제방 옆에 있는 농장에서 작고 투명한 돌을 두 개 발견했다. 소년은 그 돌을 아버지에게 건넸고, 소년의 아버지는 그것을 이웃 주민인 판니커르크에게 보여줬다. 판니커르크는 이 돌을 지질학자인 가이본 아더스톤에게 보냈고 얼마 후 무려 21.24캐럿짜리 다이아몬드라는 답을 들었다. 훗날, 이 다이아몬드는 유레카 다이아몬드라고 불리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남아프리카는 다이아몬드 산출의 중심지가 된다. 판니커르크는 양 500마리, 소 10마리, 말 1마리를 주고 보석을 손에 넣었다. 그는 그 보석을 11,200파운드에 팔았는데, 이 보석은 나중에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뛰어올랐다. 이제 킴벌리에 다이아몬드가 묻혀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1870년까지 남아프리카는 단지 농업 식민지에 불과했다. 당시 남아프리카에는 약 25만 명의 백인이 있었다고 하는데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했다. 특히 목축업이 중심이었고, 수출액의 70퍼센트 이상을 양털이 차지했다. 이런 산업 구조가 단숨에 변하게 된 것이다. 다이아몬드가 발견된 킴벌리에는 거액의 부가 창출되었고, 1870~1880년대에는 많은 사람이 이 지역으로 쇄도했다. 그 중에서도 영국에서 온 세실 로즈와 바니 바나토가 유명하다. 그들은 모두 다이아몬드 광산을 경영했고, 최종적으로 로즈가 경쟁에서 승리해 세계 최대 규모의 회사가 되었다. 그 회사가 지금도 세계 다이아몬드 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드비어스다.

1880년대가 되자 다이아몬드를 얻기 위해서는 더 깊게 땅을 파야 했고 채굴에 막대한 비용이 들게 되었다. 중요한 광산은 대개 거대하고 깊어서 땅을 팔 장비와 물을 퍼올릴 장치가 필요해 큰 비용이 들었다. 다이아몬드 관련 기업이 주식회사로 발전한 사례가 많은 것도 거액의 자금 조달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당시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난 제2차 산업혁명의 양태와 깊은 관계가 있었다. 제2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철강업과 화학공업 같은 중화학공업은 경공업인 면직공업보다 훨씬 많은 자본이 필요해 주식회사의 출현이 불가피했다. 나아가 제2차 산업혁명에는 과학적인 방식이 도입되었으며 다이아몬드 채굴도 경험에 바탕을 둔 생산 방식에서 과학적 생산 방식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다이아몬드 러시: 아프리카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사람들이 아프리카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1871년 5월에는 드바이스 형제가 소유하고 있던 농장에서 다이아몬드 원석이 발견되었다. 이와 함께 커다란 다이아몬드 광산들이 잇달아 발견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킴벌리로 몰려들었다. 1848년에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금이 발견되어 일어난 골드러시와 비슷한 소위 ‘다이아몬드 러시’였다.

1882년에는 다이아몬드 광산 지대인 킴벌리와 비컨스필드가 철도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남아프리카에서 최초로 도로를 비추는 전등이 설치되었다. 다이아몬드로 인해 남아프리카가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장래 다이아몬드 시장의 모습을 결정짓는 사건이 일어났다. 드비어스 형제가 자신들의 농장을 영국인 세실 로즈에게 겨우 6천 파운드, 오늘날 돈으로 환산하면 약 65만 달러 정도를 받고 팔아버린 것이다.

브라질의 여섯 배나 되는 산출량: 남아프리카 다이아몬드의 유입으로, 절삭된 다이아몬드 가격이 크게 하락했다. 그러자 다이아몬드의 가격 관리를 위해 산출과 판매에서 있어서 중앙집권화가 필요해졌다. 이는 18세기에 겪은 가격 하락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1730년대에는 브라질에서 미가공 다이아몬드 공급이 크게 늘어났지만, 유럽에서 다이아몬드 수요가 그다지 증가하지 않아 다이아몬드 가격이 예전의 4분의 1 수준까지 떨어졌었다.

1872년에 남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광산은 1861년 브라질 다이아몬드의 여섯 배나 되는 산출량을 기록했다. 1887년에는 남아프리카 다이아몬드의 연간 산출량이 300만~600만 캐럿에 달했다. 다이아몬드 시장은 이런 급격한 공급 확대를 흡수할 정도로 컸고, 가격은 안정되어 있었다. 1874년까지 미가공 다이아몬드의 평균 가격은 30~37금프랑으로 안정적이었다. 이 가격은 17세기의 평균 가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후 남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산출량은 급증해서 1870~1875년에는 연간 520만 캐럿을 넘어섰지만, 가격은 내려가지 않았다. 급격한 가격 하락은 그 후에 발생했다. 아마도 19세기 마지막 불황이 1873~1876년에 발생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실 로즈 - 다이아몬드 제국의 창립자


아프리카로 건너간 이유: 세실 로즈는 1853년 7월 5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홉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을 둔 영국 국교회 목사였다. 세실 로즈는 학교를 졸업한 후 폐가 좋지 않아 요양하기 위해 남아프리카 나탈주에 있는 형 허버트를 찾아갔다. 이때 로즈는 17세였다. 남아프리카의 기후가 그에게 잘 맞았는지 건강이 좋아졌다. 농장을 경영하던 형이 킴벌리의 다이아몬드 광산으로 옮겨간 뒤, 로즈는 면을 재배하고 판매해서 이익을 얻었다. 하지만 그도 곧 다이아몬드 사업으로 눈을 돌렸다.

1871년 10월에 로즈는 형이 있는 킴벌리로 이주해 형과 함께 채굴 사업을 했다. 1873년, 로즈는 파트너인 러드에게 다이아몬드 광산 경영을 맡기고 영국으로 귀국해서 옥스퍼드 대학교 오리엘 칼리지에 입학했다. 로즈의 인생철학은 영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며, 영국인이 지배하면 전 세계가 행복해진다는 것이었다. 이는 로즈 자신의 토지 매입과 영국의 영토 확장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로즈의 꿈-3C 정책: 로즈가 가졌던 가장 큰 꿈은 남아프리카에서 이집트까지 아프리카 전체를 지배하는 것이었다. 이런 비전 중 일부가 케이프타운에서 카이로, 더 나아가 캘커타까지 이어지는 철도망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케이프타운ㆍ카이로ㆍ캘커타의 영문 머리글자를 따서 3C 정책이라고 불렀다. 그는 대영제국의 확대야말로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로즈는 대영제국 건설에 크게 공헌했다. 분명히 로즈에게는 놀라운 창의력과 비전이 있었고 그의 수완과 열정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하지만 영국인들조차도 그가 식민지 사람들에게 행한 비인도적인 처사에는 미간을 찌푸렸다. 광대한 아프리카 대륙을 영국 지배하에 두려고 취한 행동에는 광포한 제국주의자의 면모가 있었다. 그의 이러한 내면은 다이아몬드 산업을 지배하기 위한 그의 행동에서도 엿볼 수 있다.

로즈는 다이아몬드를 판매하는 회사가 많으면 가격 경쟁으로 인해 이익이 감소할 것이므로 이런 상황을 피하려면 독점이 필요하고, 독점이 가능한 회사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점을 파악한 로즈는 파트너인 찰스 러드와 함께 여러 광산의 합병을 계획했다. 로즈와 러드는 드비어스 형제가 소유한 광산의 채굴권을 사들였다. 훗날 다이아몬드의 지배자 ‘드비어스’는 이렇게 시작됐다.

다이아몬드 산업의 성장 과정을 살펴보면 경기가 좋을 때와 나쁠 때가 있다. 로즈는 이를 피하기 다이아몬드의 산출과 유통을 동시에 장악하려고 했다. 1874년부터 1875년에 걸쳐 다이아몬드 산업은 불황을 맞았지만, 로즈와 러드는 굴하지 않고 계속 채굴권을 사들였다. 1888년 4월에는 다이아몬드 산출을 장악하기 위해 드비어스 연합 광산 회사를 설립했다. 결국 로즈는 남아프리카 광산 최대 소유자가 되어 다이아몬드 산업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되었다. 전 세계에 다이아몬드를 공급하는 광산 대부분을 손에 넣었기 때문에 로즈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자가 되었으며, 그는 그 부를 대영제국을 위해 사용했다. 이후 로즈는 젊은 나이에 케이프 식민지 의회 의원이 되었다.

남아프리카 정복: 1888년, 대영제국의 영토 확대를 꿈꾸던 로즈는 지금의 잠비아에 해당하는 마타벨렐란드와 마쇼날란드로 눈을 돌렸다. 이 두 지역은 나중에 ‘로디지아(로즈의 땅)’라는 이름으로 통합된다. 로즈는 네덜란드와 독일이 마타벨렐란드를 손에 넣을까 두려워했고, 이 지역에서 배타적 채굴권을 얻기 위해 자신의 정책을 영토 관리와 관련지었다. 그는 파트너였던 러드와 협력해서 남부 아프리카 지역의 무역을 목적으로 하는 국책회사인 영국 남아프리카회사(BSAC)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경찰대를 창설했고, 군대 깃발을 휘날리며 도로와 철도 및 전신 시설을 만들고 금융기관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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