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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매혹적인 아랍이라니

손원호 지음 | 부키


이토록 매혹적인 아랍이라니

손원호 지음

부키 / 2021년 8월 / 356쪽 / 18,000원



이집트



이집트 호텔에 한글 기념비가 있는 까닭


2018년 12월 아내와 딸을 데리고 이집트로 여행을 떠났다. 15년 만에 다시 찾은 이집트였다. 출국 전부터 아내는 피라미드를 본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여행 첫날, 우리의 첫 행선지는 역시 기자의 피라미드였다. 피라미드를 구경한 뒤 우리는 점심 식사를 위해 피라미드에서 700미터가량 떨어진 한 호텔로 향했다. 초록빛 잔디와 곳곳에 보이는 나무들, 높이 솟아오른 대추야자 나무가 조화를 이루며 멀리 보이는 푸른 하늘과 거대한 피라미드가 한 폭의 그림을 완성했다. 아내가 말했다. “그런데 정말 특이해. 정원과 분수만 봐도 꼭 유럽인들이 만들어 놓은 작품 같아. 이런 서구식 호텔에서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바라보고 즐길 수 있다니….”

호텔에 들어오면서 멀찌감치 로비 소파 옆에 작은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호기심에 확인해 보니 1863년부터 1879년까지 이집트를 통치했던 ‘이스마일 파샤 Ismail Pasha’의 동상이었다. 호텔 종업원에게 물어보니 이 호텔의 최초 건립자라고 했다. 순간 의구심이 들었다. 이집트는 1517년부터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전통적인 이슬람 체제를 유지했던 국가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서구식 호텔을, 그것도 이집트의 왕이 건립한 것일까?

이집트 땅을 밟은 나폴레옹: “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프랑스령의 외딴 섬 코르시카에서 태어나 프랑스 황제까지 등극했던 나폴레옹(1769~1821)의 명언이다. 불가능을 몰랐던 그는 1798년 7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했고, 상륙 3주 만에 이집트를 지키고 있던 오스만제국의 맘루크 군단을 물리치고 카이로에 입성했다. 당시 프랑스의 가장 큰 맞수는 영국이었다. 나폴레옹이 카이로 땅을 밟은 이유도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이집트를 차지하면 영국 식민 통치의 중심인 인도를 공략할 수 있다고 계산한 것이다. 하지만 영국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같은 해 8월, 카이로 하구의 아부르키만에서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가 프랑스군을 전멸시켰다. 결국 1799년 나폴레옹은 조용히 이집트를 탈출했고, 남겨진 프랑스군도 1801년 이집트에 항복하고 물러났다.

이후 이집트는 다시 오스만제국의 이슬람 세력권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4년이라는 짧은 점령 기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민중 혁명 사상이 이집트로 흘러들었다. 정부에 순종적이던 이집트 국민의 의식이 깨이기 시작했다. 민중들은 이집트 총독을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선택하자고 외쳤다. 1805년 5월, 이들은 총독 후르시드 아흐메드 파샤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다. 결국 오스만제국 정부가 이집트 민중의 요구를 받아들여, 후르시드가 이집트 총독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이집트 역사상 처음으로 민중이 선택한 사람이 이집트 총독으로 선택되었다. 그는 오스만제국이 이집트 보호를 위해 파견했던 알바니아인 장군, 무함마드 알리였다.

이집트의 서구화: 무함마드 알리는 나폴레옹이 이끈 프랑스군을 보고 느끼는 바가 많았다. 지도자로 올라선 알리는 이슬람에 갇혀 있던 이집트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각종 행정 제도와 행정 기구를 유럽식으로 개편했고 인재들을 유럽으로 보내 신문물을 배워 오도록 했다. 서구식 학교를 세우고 교과서 제작을 위해 전문 번역 기관을 설립했다. 그의 개방 정책은 일본의 메이지유신보다 거의 반세기나 빨랐다. 무함마드 알리가 집권한 1805년부터 서구를 모방한 이집트의 근대화가 시작됐다.

메나하우스 호텔 로비에 세워져 있는 동상, 이스마일 파샤는 무함마드 알리의 손자다. 이스마일 파샤는 1863년에 이집트 총독이 되었다. 그는 선대들처럼 친서구 정책을 추진했으나 사치와 허영이 지나쳤고 프랑스 것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그리고 1867년 파리 만국 박람회를 다녀온 후 카이로의 도로가 골목길이 많아 미로 같다며 건물들을 철거하고 파리의 거리처럼 만들었다. 특히 수에즈운하와 관련된 그의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이집트는 프랑스와 협력하여 수에즈운하를 건설 중이었다. 육지를 파서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물길을 만드는 획기적인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정작 그가 관심을 둔 것은 운하 개통 행사였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운하의 중앙에 자신의 이름을 따서 ‘이스마일리아’라는 신도시를 세우고 유럽식 도로, 호텔, 백화점, 식당 등을 채워 넣었다. 수에즈운하 개통식에 초대한 유럽 명사들을 위해서 궁전을 짓고 관광객을 위한 오락과 편의 시설에 천문학적인 비용을 쏟아 부었다.

1869년 드디어 수에즈운하가 개통되었다. 유럽인들이 더 자주 드나들면서 이집트는 유럽 여행객들 사이에서 따스한 겨울을 보낼 수 있는 이른바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이스마일 파샤는 유럽 관광객들을 위해 카이로와 피라미드 사이에 도로를 깔았다. 복잡한 카이로보다 평온하면서도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기자의 피라미드 지역을 선호하는 유럽인들이 늘어났다. 이러한 분위기에 맞춰 이스마일 파샤는 기자의 피라미드 바로 앞에 개인용 오두막을 하나 지었다. 사막 사냥을 즐기거나 고위급 손님을 모실 때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이 오두막을 그리 오래 즐기지 못했다. 이집트 근대화를 위해서 무분별하게 지출한 탓에 국가 재정이 파탄에 이른 것이다. 결국 이집트의 재정은 영국과 프랑스의 공동 관리 하에 들어갔다. 양국의 간섭 속에서 이스마일 파샤는 1879년에 퇴위했다.

그가 퇴위한 후 4년이 지난 1883년, 신혼여행으로 이집트를 찾은 영국인 부부, 프레더릭과 제시가 이스마일 파샤의 오두막을 사들여 2층짜리 저택으로 확장하고 고대 이집트 제1왕조의 창시자인 메네스 Menes의 이름을 따서 메나하우스 Mena House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나 2년 후 프레더릭이 갑자기 사망하자 제시는 1885년 영국인 부부, 휴와 에설 로크킹에게 메나하우스를 팔았다. 로크킹 부부는 영국인 건축가 헨리 파바르거를 고용해 메나하우스를 80개의 객실을 가진 고급 호텔로 변신시켰다. 영국 가구를 호텔에 채워 넣고, 예술가들을 위한 아틀리에, 도서관을 만들고 프랑스 요리사와 이탈리아 사진사를 고용하는 등 수준 높은 유럽풍 호텔을 완성했다.

메나하우스에서 울려 퍼진 대한 독립: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이 끝나갈 무렵인 1943년 11월, 미국, 영국, 중국 세 강대국 정상은 전후 질서를 논의하기 위해 모였다. 모임 장소는 당시 유럽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구가했던 중동의 관광 명소, 카이로였다. 그리고 카이로 회담의 본부가 바로 메나하우스 호텔이었다. 당시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이 약 100여 명을 이끌고 카이로를 찾았다.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60여 명, 중국의 국방 최고위원장 장제스는 30여 명과 함께 이집트 땅을 밟았다. 1943년 11월 23일 저녁, 장제스는 루스벨트가 묵고 있던 숙소로 찾아갔다. 장제스는 한국에 독립 권한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고, 루스벨트는 중국의 영토 확장 의도를 의심하면서도 한국의 독립에는 동의했다. 이어서 처칠도 동의하게 되어, 마침내 1943년 12월 1일, ‘한국 독립’ 조항이 카이로 선언에 포함되어 발표되었다. “미국, 영국, 중국은 한국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절한 절차(in due course)를 거쳐 한국을 자주독립케 할 것을 결의한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왕 히로히토는 라디오를 통해 무조건 항복을 발표했고, 한국인들은 마침내 광복을 맞이했다. 그해 12월, 미국, 소련, 영국 세 강대국의 외무장관이 모스크바에 모여 한국 독립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카이로 선언의 ‘적절한 절차 in due course’라는 문구를 빌미로 한국의 즉각적인 자주독립이 아닌 신탁 통치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후 한국은 미·소 군정 시대를 거쳐 남과 북이 분열하는 비극을 맞았다. 카이로 선언이 한국의 자주독립을 이뤄 주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카이로 땅에서 세 강대국이 모여 최초로 한국의 독립을 논하고 국제 사회에 이를 공개 선포한 것만으로도 큰 역사적 의의가 있지 않을까.

1953년 한반도에서 휴전 협정이 맺어진 바로 그해, 이집트는 기존의 친서구 왕정을 폐지하고 아랍 민족 중심의 이집트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리고 62년이 지난 2015년, 한국 광복 70주년과 한국-이집트 수교 20주년이 또다시 기분 좋게 일치했다. 10월 1일, 이집트 교육부 장관과 문화부 장관을 비롯한 카이로 선언 당사국인 미국, 영국, 중국의 이집트 주재 대사 등 고위 인사들이 메나하우스 호텔을 찾았다. 정원에 설치된 카이로 선언 기념비의 제막식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300여 명의 사람이 정원을 꽉 채웠고 이들은 모두 한 마음으로 카이로 선언을 통해 이루지 못한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염원했다. 역사가 흘러서 여기까지 왔다.

사우디아라비아



석유가 준 축복, 석유로 인한 저주


정말 물보다 석유가 더 쌀까?: 산유국에 살면 좋은 점이 하나 있다. 휘발유를 넣을 때 가격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휘발유 1리터당 평균 1500원이지만 사우디나 아랍에미리트와 같은 중동 산유국에서는 약 500원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럼 아랍 산유국의 기름값은 정말 물값보다 쌀까? 에비앙이나 페리에 같은 값비싼 수입 브랜드 물과 비교하면 기름값이 물값보다 싼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 값보다 중요한 건 수천 년간 건조한 사막에서 살아온 아랍인들의 마음속에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물’이라는 진리가 뿌리 깊게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1938년의 기적: 현재 석유 매장량이 가장 많은 지역은 중동으로, 전 세계 석유 매장량의 48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그럼 이 축복의 주인은 누가 되는 걸까? 당연히 석유가 묻힌 땅을 소유한 주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석유가 묻힌 땅의 주인들은 수천 년간 자신의 땅에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또 알고 나서도 채굴하는 방법을 몰라 그 축복의 수혜를 받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기술력을 앞세운 영국, 미국 등 서구의 석유 기업들이 땅속에 묻힌 석유를 끌어 올려 주겠다며 앞다투어 중동 땅으로 몰려왔다. 땅 주인들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만 있어도 서구 기업들이 대신 땅을 파 석유를 생산하여 판매한 금액의 반을 떼어서 주겠다는데, 나쁠 게 없지 않은가? 중동의 산유국들은 서구 기업들과 줄줄이 계약을 맺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동 유전 지대의 대부분을 영국과 미국 기업들이 선점하게 되었다. 특히 1960년대까지 세계 석유 업계는 ‘세븐 시스터스Seven Sisters’라고 불리는 일곱 개의 영미계 석유기업이 독점했다.

사우디도 같은 과정을 거쳤다. 1932년, 제1대 왕 압둘아지즈 빈 압둘라흐만 알사우드는 아라비아반도의 90퍼센트에 해당하는 거대한 지역을 통합하고 ‘사우디아라비아왕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활력 넘치는 사막의 전사 압둘아지즈는 1925년 이슬람 성지 메카와 메디나가 위치한 헤자즈 지역을 차지한 직후, 현대 국가 건설 작업에 착수했다. 새로운 정부 기관을 설립하고, 단일 통화인 리얄을 도입하는 동시에 기본적인 인프라 구축에 나섰다. 그러나 당시 사우디에는 ‘국가’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수많은 아랍 부족이 자신의 둥지를 지키기 위해 경계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사우디 지형의 90퍼센트를 차지하는 사막 지대에는 오스만제국도 통제하지 못했던 아랍 유목민 ‘베두인’ 집단이 살아가고 있었다. 일단 압둘아지즈 앞에 놓인 숙제는 부족민에게 ‘국가’의 개념을 주입시켜 하나로 결속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국민이 생활할 수 있도록 보조금을 주고 충성심을 높이는 방법을 생각해냈지만, 그러기에는 자금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압둘아지즈는 건국 초기에 영국과 미국에서 긴급 자금을 지원받아 나라를 유지했으나 거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해가 갈수록 부채는 늘어갔고 만성적인 재정 적자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생각지도 못한 기적이 일어났다. 1938년 3월, 미국 카속사(California-Arabian Standard Oil Company)가 한창 탐사 활동을 하던 사우디 동부의 담맘 7번공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견된 것이다. 카속은 미국 텍사코와 소칼의 합작 기업이자,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 기업인 아람코의 전신이다. 당시 영국의 보호령 아래 있던 이라크, 이란, 쿠웨이트 등에 진출하기 어려웠던 미국은 그나마 영국이 큰 관심을 두지 않던 사우디 땅에 진출했던 것인데 그야말로 ‘잭폿’이 터진 것이다. 이후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 다른 국가들이 뒤늦게 압둘아지즈 국왕에게 잘 보이려 애를 썼지만 이미 늦었다. 1939년, 사우디는 미국 카속사에 우선권을 주었고, 카속사는 113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지역을 추가로 확보했다. 압둘아지즈 국왕은 오일머니 덕분에 계획했던 국가 사업들을 차근차근 추진해 나갈 수 있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우디는 아랍 국가 중에서 대표적인 친미 국가인데, 이 둘의 관계는 1930년대 석유로 맺어진 인연에서 시작되었다.

1973년의 추억: 2020년 가을, 샤르자대학교에서 ‘아라비아반도 역사’ 수업을 들을 때였다. 수업 시간에 무함마드 무니스 교수는 1973년의 추억을 끄집어냈다. “1973년을 기억하나? 우리 아랍인들이 똘똘 뭉쳤던 시절이지. 20세기 초, 갑자기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들어와 옛 조상의 땅이라며 우겼고 1949년 팔레스타인 땅 위에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세워 버렸어. 수천 년간 그 땅에서 살아온 우리 아랍 민족들은 단합하여 수차례 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렀어. 그러나 이스라엘 뒤에는 항상 미국이 있어서 이길 수가 없었지. 특히 1967년에 발발한 전쟁의 결과는 아랍인들에게 참으로 치욕적이었어.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시나이반도, 시리아의 골란고원, 요르단강 서안을 점령해 버렸으니 말이야.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973년 4월,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가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이스라엘을 상대로 이집트 주도의 연합 공격을 구상했지. 그때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사우디의 3대 국왕 파이살이야. 나는 감히 그때 파이살의 결심을 ‘위대하다’고 표현하고 싶네.”

아랍인들에게 ‘1973년과 파이살 국왕’은 잊을 수 없는 역사적 키워드다. 당시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는 파이살 국왕에게 이스라엘을 상대로 시리아와 함께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며, 같은 아랍 민족 국가로서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이집트가 사우디에 요청한 것은 군사 지원이 아니었다. 전쟁은 이집트와 시리아가 할 테니, 사우디는 다른 아랍 산유국을 설득해서 친이스라엘 국가들에 대해 석유 공급량을 감축하거나 중단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을 총으로만 상대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 대신 석유를 무기로 사용하자는 발상이었다. 파이살 국왕 입장에서는 정치적, 경제적 파트너였던 미국을 상대로 석유를 무기화하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파이살 국왕은 오랜 고심 끝에 결국 사다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는 계획한 대로 시리아와 협력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일명 ‘10월 전쟁’이라고 불리는 제4차 중동전이 발발한 것이다. 며칠 후 사우디의 파이살 국왕은 계획했던 석유 무기화 전략을 실행에 옮겼다. 10월 16일에는 사우디를 주축으로 중동의 산유국들이 쿠웨이트에 모였고, 아랍 5개국(사우디, 이라크,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쿠웨이트)과 이란의 대표들은 매월 5퍼센트의 석유 감산을 결정했다. 단 아랍에 우호적인 국가들은 이 결정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조건을 두었다. 산업 발전을 위해 석유가 절실했던 유럽, 일본, 한국 등 세계의 수많은 국가가 너나 할 것 없이 ‘친아랍 성명’을 발표하며, 이스라엘이 1967년에 점령한 지역에서 철수할 것을 촉구했다. 아랍 국가들은 석유라는 정치적 무기를 이용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전 세계가 아랍의 손을 잡도록 유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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