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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10가지 감염병

조지무쇼 지음 | 사람과나무사이


세계사를 바꾼 10가지 감염병

조지무쇼 지음

사람과나무사이 / 2021년 8월 / 360쪽 / 17,500원



유럽 근대화의 인큐베이터 페스트



14세기 페스트의 최대 수혜자가 구텐베르크라고?


“유럽의 근대화는 페스트에서 시작되었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가장 명징하게 드러난 분야는 ‘출판’이었다. 페스트를 계기로 출판문화가 그저 확대된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폭발’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페스트는 어떻게 출판문화 발달로 이어졌을까? 전대미문의 재난을 겪으며 생명ㆍ안전과 직결되는 과학기술, 특히 의학 지식에 관한 대중의 관심과 욕구가 비약적으로 높아졌으며, 다양한 지식을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전파할 수 있는 매체를 향한 갈급함이 커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종이 매체인 책을 통해 지식을 얻어왔다. 본격적으로 책의 대량 생산이 이루어진 것은 독일인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활판 인쇄술을 이용해 성경을 간행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는 1455년 무렵의 일이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이용한 활판 인쇄로 책을 대량 생산하기 전 책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한 권 한 권 손으로 원본을 베껴 쓰는 필사본이나 목판 인쇄에 의해 제작된 책이 대부분이었다. 책을 한 권 필사하여 출간하는 일은 녹록하지 않았다. 엄청난 시간과 노동력이 투여되어야 해서 책 한 권을 필사하는 데 적게 잡아도 수십 일이 걸렸고, 많은 수의 전문 인력이 밤낮없이 작업에 매달려야 했다.

페스트가 휩쓸고 간 중세 말기인 14~15세기에 출판과 문화ㆍ예술 발달을 크게 촉진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 있었다.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중심으로 일어난 문예 부흥 운동 ‘르네상스’가 그것이다. 당시 르네상스의 기운에 힘입어 문학과 예술이 눈부시게 발전했고 그 연장선에서 출판도 놀라운 성장세를 이루었다.

구텐베르크가 역사에 등장하기 전, 유럽에서는 서적 필사를 비롯한 상공업의 여러 분야에서 인건비가 폭등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인건비가 가파르게 치솟자 출판업자들은 인간의 노동력을 최소화해 서적을 대량 생산하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때 절묘하게도 구텐베르크가 등장해 활판 인쇄에 의한 서적(성경)의 대량 생산을 실현함으로써 문제를 단번에 해결했다.

중세 유럽에서 성경을 비롯한 고전문학과 철학, 자연과학 등의 학술서는 대부분 라틴어로 집필되었고, 라틴어에 능통한 가톨릭교회 성직자 같은 특정 계층 사람들이 지식을 독점했다. 그러나 16세기 종교개혁과 더불어 활판 인쇄술이 발달하고 독일어, 영어 등 여러 언어로 성경이 출간, 보급되면서 가톨릭교회의 권위는 급속히 쇠퇴하고 자유롭게 학문을 연구하는 풍조가 번져나갔다.

게다가 14~15세기 유럽에서는 대규모 노잡이 군단 없이도 먼 거리 항해가 가능한 대형 범선과 상대적으로 숙련도가 낮은 병사도 쉽게 다룰 수 있는 총기를 비롯한 다양한 발명품이 등장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다”라는 말처럼, 뱃사람과 군인의 인건비 폭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구책의 일환으로 새로운 발명품이 대거 등장했고 시대가 바뀌면서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14~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획기적인 변화로 다음의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인건비 폭등에 따른 신기술 도입’이다. 둘째, ‘장인, 상인, 농민의 지위 향상’이다. 셋째, 신분이나 출신 가문 따위의 허울에 얽매이지 않고 열정적으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기술을 연마하는 새로운 ‘인재’가 등장한 일이다. 이 세 가지 중요한 변화가 모두 페스트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인류가 농경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페스트도 없었다?


인류와 페스트의 관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적게 잡아도 수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컨대 스웨덴에서 발견된 5,000여 년 전 신석기시대 인골에서 페스트균이 검출되었는데, 발굴 시기는 불과 몇 년 전인 2018년이다. 스웨덴 페스트균은 오늘날까지 발굴된 인류의 가장 오래된 페스트 감염 사례로 학계에 보고되었다.

페스트는 어떻게 사람에게 전파될까? 대개 벼룩을 매개로 쥐 등의 설치류 같은 작은 동물에서 사람에게로 전파되며, 감염자가 증가하면 사람 사이 접촉과 공기를 통해서도 감염된다. 인류가 최초로 페스트에 감염되기 시작한 데에는 농경과 더불어 시작된 집단생활의 영향이 컸다. 그로 인해 곡물을 주로 먹는 쥐와 접촉할 기회가 늘어나면서 인류의 페스트 감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추정한다. 전문가에 따르면, 사람 근처에 서식하는 쥐 가운데 10퍼센트 정도가 페스트에 감염되면 본격적으로 사람에게 감염되기 시작한다고 한다. 또 사람에게 페스트가 유행하기 전 쥐의 대량 폐사가 일어난다는 사실도 알려져 있다.

페스트의 종류 중 ‘가래톳페스트’가 있다. 사람의 목과 배 등 각 부위에 세균과 바이러스를 포착해 제거하는 림프샘이 있는데 여기에 페스트균이 침범하면서 증상이 나타난다. 일단 사람이 페스트균을 가진 벼룩에서 물리면 주변 림프샘이 붓고 겨드랑이 아래나 샅굴 부위(서혜부) 림프샘이 부어오르며 무지근한 통증이 나타난다. 증상이 악화하면 림프샘이 혹처럼 커지고 페스트균이 내장을 침범하면서 독소가 체내로 퍼져 나간다. 환자는 고열과 오한에 시달리고 의식이 몽롱해지면서 수의근이 마비되어 경직되고 심장에 타격을 입어 점차 쇠약해진다.

‘폐페스트’라 불리는 종류도 있다. 가래톳페스트가 악화하면서 균이 폐를 침범하거나 페스트균이 섞인 공기를 흡입해 발병한다. 폐페스트에 걸리면 기관지염과 폐렴을 일으켜 피가 섞인 가래를 토하거나 호흡 곤란을 겪는다. 폐페스트 치사율이 매우 높아서 발병 후 항생제 투여 등 적절한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반나절에서 사흘 안에 사망에 이른다. 가래톳페스트에 걸렸을 때 사람 간 직접 감염이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폐페스트는 감염자의 몸에서 밖으로 나온 기침이나 재채기 등에 섞인 침방울을 매개로 감염되거나 공기 중에 떠도는 균이 체내로 들어가 감염을 일으킬 수 있다.

패혈증이란 병원균이 혈액으로 들어가 온몸을 도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페스트가 중증화하면 ‘패혈성 페스트’로 악화할 수 있다. 몸 안의 혈액이 페스트균에 오염되면 피부에 반상출혈이 나타나고 온몸에 검푸른 반점이 생겨 이내 사망에 이른다. 페스트를 ‘흑사병’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온 병사들의 짐에 섞여 유럽에 들어온 곰쥐, 페스트 창궐의 도화선이 되다1096년에 시작된 제1차 십자군 원정은 페스트의 새로운 도화선이 되었다.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여러 나라의 기사단이 당시 이슬람교 국가인 셀주크 왕조의 지배를 받던 기독교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자 연이어 공략에 나섰다. 한데 그 무렵 예루살렘에서 전쟁을 치르다 돌아온 병사들의 짐과 옷가지에 인간과 살던 곰쥐와 페스트균이 섞여 들어와 서유럽에 또다시 페스트가 창궐하게 되었다.

11세기 말에 시작된 십자군 원정은 13세기까지 이어졌는데, 대규모 원정만 해도 일곱 차례나 강행되었다. 그 밖에 소규모 순례자 집단도 수시로 서유럽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성지 순례 길에 올랐다. 서유럽 기독교 국가들의 예루살렘 점령은 끝내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들의 입장에서 긍정적인 측면도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로 베네치아 공화국 상인들은 중동의 국가 원정과 물자 운송 중개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챙겼으며, 13~14세기에는 서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지중해 무역이 크게 발달했다.

그 무렵 농촌에서는 ‘삼포식농법’이 보급되어 농업 생산력이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삼포식농법이란 농지를 삼분해 봄에 씨앗을 뿌려 콩과 보리를 재배하고 남은 땅은 휴경지로 돌려 지력을 회복하게 하는 농법이다. 삼포식농법의 성공은 농업 생산량 향상과 인구 증가로 이어졌고, 농업에서 남아도는 일손은 속속 도시로 유입되었다. 페스트 유행으로 많은 시민과 어린아이가 사망했고 이 사건을 바탕으로 ‘피리 부는 사나이’ 이야기가 만들어졌다는 해석도 주목할 만하다.

몽골제국이 촉발한 ‘세계화’, 14세기 페스트 팬데믹의 결정적 트리거가 되다


13세기 아시아로 눈을 돌려보자. 당시 칭기즈칸이 세운 몽골제국은 동쪽 끝 몽골초원에서 시작해 급속히 세력과 영토를 확장하며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1297년,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는 중국 북부를 제압하고 국호를 원으로 정한 뒤 중국 전역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몽골인은 말을 타고 이동하며 활동하는 전형적인 유목민 집단이다. 그들은 자신의 특장점을 살려 중국에서 중앙아시아, 중동, 오늘날의 러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기마 릴레이로 연결하는 통상로를 완성해 동서 무역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상업이 활성화하고 거래 규모가 커지면 오가는 금화와 은화의 양이 늘어난다. 몽골제국이 ‘교초’라는 지폐를 본격적으로 보급하고 상업에 도입한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몽골제국의 통상망은 십자군 원정을 계기로 발달한 서유럽과 중동을 잇는 지중해 상인의 통상망과 하나로 이어졌고 이로써 세계 최초 글로벌 상권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14세기에 발생한 팬데믹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페스트가 창궐하던 시대에 유럽 각지에서 ‘유대인 박해’가 극심해진 까닭은?


페스트가 본격적으로 활개를 치자 땅을 파서 무덤을 만들고 시신을 매장하는 속도보다 사람들이 사망하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시신을 매장할 공간도 인력도 부족해지자 대충 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모아서 던져 넣는 식으로 수습했다.

중세 유럽의 의학은 2세기 로마제국 시대 이후 거의 발전이 없었다. 당시에는 ‘병원체’ 개념도 없었고 감염병에 효과적인 치료법이나 예방법도 존재하지 않았다. 대처법이라고 해봤자 현대인의 기준으로 볼 때 그야말로 한심한 수준이었다. 일테면 주변을 식초와 유황으로 소독하거나 환자의 옷가지나 소지품 따위를 소각하는 일이 고작이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심각해져 환자가 대량으로 발생하면 그 지역을 봉쇄하거나 사람 이동을 제한하거나 감염이 아직 퍼지지 않은 지역으로 피난길에 오르는 식이었다.

지중해 무역항에서는 12세기 무렵부터 ‘검역’ 제도가 존재했다. 검역이란 자기 나라에 해외에서 유행하는 질병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항구 등 주요 길목에서 입국자를 조사하거나 격리하는 조치를 말한다. 페스트가 한창 유행하던 시대에 베네치아에서는 1374년 이후 외국에서 들어오는 선박의 승조원을 40일간 격리하는 제도가 정착되었다. 격리 기간이 40일로 정해진 이유를 두고 다양한 설이 나왔다. 『구약성경』에서 신이 대홍수를 일으켜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로 피신한 기간이 40일이었다는 데서 따왔다는 설과 중세 연금술에서 변성에 40일이 걸렸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의학적 근거에 따라 격리 기간을 40일로 정한 건 아니었다. 격리 기간 40일에서 40을 뜻하는 이탈리아어Quarantia는 검역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Quarantine의 어원이 되었다.

페스트가 창궐하던 시대에 유럽 각지에서는 유대인 박해가 극심해졌다. 병원균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 외국인이나 이교도처럼 전통적인 공동체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은 질병과 재앙을 몰고 오는 장본인으로 낙인 찍혀 마녀사냥을 당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스위스와 독일 여러 지역에서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식의 유언비어가 퍼져 유대인 거주지 방화와 유대인 살해 등의 보복 범죄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 보다 못한 당시 교황 클레멘스 6세는 두 차례나 신자들을 향해 유대인 박해를 중단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건조한 봄날 바람을 타고 빠르게 번지는 산불처럼 놀라운 기세로 확산되던 유럽의 페스트 유행은 잔불만 남기고 큰불이 진화된 수준으로 가까스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는 14세기 말경의 일이다. 병원균은 독성이 너무 강해지면 숙주가 사망하므로 독성이 강한 균은 차츰 사라지고 사람과 공존할 수 있을 정도로 독성이 약한 균만 남는 양상을 보이는데, 페스트도 숙주와 공존하며 생존하기 위해 독성을 줄이는 방향으로 전략을 바꿨다고 볼 수 있다.

18세기 중반 이후 유럽에서 페스트 팬데믹이 거의 발생하지 않은 까닭은?


1660년대 네덜란드에서 이탈리아로 퍼져 나간 페스트로 인해 뜻밖의 부산물이 생겨났다. 그것은 바로 위대한 과학자 아이작 뉴턴과 관련된 일이다. 당시 잉글랜드의 수도 런던 근교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공부하던 뉴턴은 페스트 대유행을 피해 고향으로 돌아가 연구와 사색에 깊이 몰두했다. 뉴턴은 페스트가 기승을 부리는 동안 미적분, 만유인력의 법칙, 분석 광학 등 기초 이론을 완성할 수 있었다.

페스트 팬데믹이 한창이던 1666년, 런던은 대화재로 수많은 가옥이 소실되었다. 이를 계기로 목조 가옥이 벽돌 주택으로 개축되었고 짚으로 지붕을 만들던 관습이 사라졌다. 주택 형태가 개량되자 가옥에 서식하던 쥐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런던은 페스트가 창궐하기 어려운 바람직한 환경으로 탈바꿈했다.

18세기 중반 이후 유럽에서 페스트 팬데믹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는데 철저한 검역과 격리, 기후 변화, 페스트균의 변이로 약해진 독성 등의 이유와 함께 쥐의 대이동을 주요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1720년대 런던에서 대량의 시궁쥐가 서유럽으로 유입되며 그때까지 터줏대감 행세를 하던 곰쥐가 밀려나는 신세가 되었다.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밀어내며 페스트를 옮기는 곰쥐의 개체수가 급격히 줄어들게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 19세기 중반에 들어서서 근대적 위생개념과 기술이 보급되며 유럽 각지에서 상하수도가 정비되었고 일조권과 환기에 신경을 쓴 널찍한 도로를 갖춘 도시 계획이 추진되며 예전처럼 질병이 활개 치기 어려운 환경이 갖춰졌다.

세계대전의 향방을 두 번이나 바꾼 말라리아



제국주의의 확장 역사는 말라리아 등 감염병과의 투쟁 역사다?


말라리아는 열대지역에서 흔히 발병되는 질병 중 하나로 감염병의 대명사와도 같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왜 패배했을까? 당시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이 대패한 원인에 대해 이후 여러 가지 고개가 끄덕여지는 분석이 나왔다. 우선 일본은 미국의 상상을 초월하는 물량 공세를 따라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미군은 광범위하게 펼쳐진 전선에 보급이 끊이지 않도록 효과적으로 조달할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을 갖추었으나 일본군은 효과적인 조달은 차치하고 장병들이 현지에서 자력갱생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각종 열대 질병과 감염병에 만반의 대비 태세를 갖춘 미군과 달리 일본군의 준비는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8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된 후 1945년 종전에 이르기까지 일본군의 총사망자 수는 무려 230만 명에 달했다. 충격적이게도 그중 절반 정도가 직접적 전투로 인해서가 아닌 전쟁터에서 얻은 질병으로 사망하거나 식량 부족으로 굶어죽었다. 이 숫자는 일반 군인을 포함해 기술적 군무원, 의료 관계자 등을 모두 망라한 수치다. 육군 군의국 기록에 따르면,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등 남방 전선에서는 병사자 가운데 말라리아 환자가 15.9퍼센트로 가장 많았다. 말라리아는 모기에 물려 인체에 병원체가 들어와 감염되는 질병이다. 일 년 내내 모기가 기승을 부리는 열대지역에서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만성적으로 발생하는 감염병이기도 하다. 중국 전선에서도 일본 육군 전사자 중 말라리아 환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10퍼센트로, 14퍼센트인 결핵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많았다.

전쟁 막바지에 벌어진 과달카날 전투에서도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병사자가 나왔다. 1942년 즈음의 일이다. 당시 일본군 사망자 2만여 명 중 굶어죽은 사람 수와 질병으로 죽은 사람 수가 무려 1만 5,000여 명으로 집계되었다. 그리고 일본군이 동남아시아의 미얀마에서 인도 동부로 침공해 들어간 임팔 전투에서는 일본군 사망자 3만여 명 중 질병으로 사망한 수가 8,000명 이상이었다. 당시의 병사자 대다수가 말라리아 감염자였다. 또한 마리아나 제도, 사이판섬, 필리핀, 인도네시아, 뉴기니 등 남방 전선의 많은 지역에서 다수의 장병이 말라리아로 쓰러져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이국땅에서 눈을 감았다. 게다가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훈련을 마친 전투기 조종사가 하늘에서 싸워보지도 못한 채 병으로 숨진 사례도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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