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론의 역사
카렌 라드너 지음 | 더숲
바빌론의 역사
카렌 라드너 지음
더숲 / 2021년 8월 / 328쪽 / 18,000원
바빌론의 시대와 공간
인류 최초의 영구적 정착지는 기원전 1만 년경,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산록 구릉지에 세워졌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중동 지역을 감싸는 산맥들을 따라 페르시아만에서 홍해까지 이어지는데, 동쪽에서 서쪽으로 먼
저 자그로스산맥이 내달리고 토로스산맥이 뒤를 잇는다. 그리고 지중해와 나란히 산맥이 달리는데, 그중에서 레바논산맥이 가장 두드러진다. 바로 이 지역에서 최초의 정착인들은 보리, 밀, 완두콩, 렌틸콩 등 콩류를 경작하고 양, 염소, 소, 돼지를 길들여 가축으로 기르기 시작했다.
초기 정착지 중 일부는 니네베(오늘날의 모술), 아르빌(이르빌 또는 에르빌로도 불림), 알레포(아랍어로는 할라브) 같은 도시로 성장했는데, 이 도시들은 1만 2천 년의 거주 역사를 자랑하며, 꾸준히 인근 지역의 정치적ㆍ경제적 중심지 역할을 수행해 왔다. 이런 도시들과 비교해 볼 때 바빌론(아카드어로는 바빌림)은 상대적으로 뒤늦게 성장했으며, 약 4천여 년 전에 비로소 정치적으로 주목받는 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2천 년 후에는 명성이 쇠퇴하면서 때 이른 은퇴를 경험하기도 했다.
바빌론은 메소포타미아의 ‘세 강이 만나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즉 오늘날의 바그다드 지역으로, 유프라테스강, 티그리스강, 디얄라강이 만나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주변 지역을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데, 바그다드는 이러한 요충지에 세워진 정착지 중 가장 늦게 자리 잡은 도시이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만나면서 남쪽 페르시아만으로 흘러가는 지점은 이라크 남부에 위치한 광대한 범람원의 북부 지역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두 강은 많은 지류와 수로를 만나서 삼각주를 이루는데, 봄이 되면 자그로스산맥과 토로스산맥에서 눈과 얼음이 녹은 물이 평야에 이른다. 그리고 수로가 범람하면서 소중한 침전물이 함유된 진흙을 땅에 퇴적시킨다. 이는 천연비료 역할을 하여 곡류를 경작하고 대추야자를 재배하기 위한 최상의 환경을 조성한다.
반면 너무 많은 물이 흘러내리면 농작물을 쓸어 가고 경작지를 파괴해 버리기 때문에, 홍수를 관리하기 위해 기원전 5천년 초반부터 수로ㆍ둑ㆍ댐ㆍ제방 등이 건설되었다. 그런데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영구적인 대형 구조물 없이 전통적 급수시설을 건설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정교한 산수 능력을 발전시킬 수밖에 없었다. 수리에 관한 이들의 명성은 지금까지 이어지는데, 산술 능력은 공간에서 시간, 사물 및 사람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을 조직화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
한편 메소포타미아에서 경작하기에 좋은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지역의 사람이 힘을 모아야 했고, 이 때문에 이라크 남부에서는 ‘도시혁명’의 장면이 연출되었다. 이로써 사람들이 모여 사는 방식이 크게 변하여 촌락에서 도시로, 혈연사회에서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참고로 사회적 계층화, 기술의 전문화, 관료체제의 발달과 그에 따른 문자의 발명 등이 도시 생활을 특징짓는데, 도시의 주민들은 빗물에 의존해 농사짓는 주변의 작은 촌락 주민들과 점차 큰 문화적ㆍ사회적 격차를 보이게 된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평원으로 흘러들어 오기 전에 굽이치면서 바닥을 침식하는 고지대 지역과 아래쪽 범람원 사이의 접점에 ‘세 강이 만나는 지역’이 위치하는데, 고지대 지역에서는 빗물로도 농사를 지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농지에 물을 대기 위한 관개시설도 없었다. 그런데 이 지역은 가축을 방목하기에는 적합한 환경이었다. 기원전 9천 년경 최초로 길들인 가축이 바로 양과 염소인데, 처음에는 고기를 목적으로 사육하다가 나중에는 젖까지 얻을 수 있었다. 양과 염소의 털이 방직 섬유로서 가치를 가지게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로, 대략 기원전 6500년경이다. 세련된 직물의 생산은 장거리 무역에서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고대 이라크 경제에서 양털은 주요 상품이었다.
이제 세 번째 강에 대해 알아보자. 디얄라강은 자그로스산맥의 넓은 원류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인 것으로, 바그다드 지역에 이르러 범람원으로 흘러들어 가 티그리스강과 합류한다. 이란으로 가는 육로에 접근하기 위한 이상적인 통로인 디얄라강은 풍부한 금속광물 퇴적물을 함유하고 있으며, 아프가니스탄과 인도 같은 더 먼 지역으로의 무역을 위한 훌륭한 연결로가 된다. 먼 나라들은 인기 있는 암청색 청금석 그리고 혈적색 홍옥수 원석을 들여왔는데, 페르시아만을 통한 해상무역보다 육상무역이 선호되던 시기에는 항상 이 세 강 유역이 이상적인 지정학적 요충지로서 지역 간 무역의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바빌론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기원전 2천 년 초기가 바로 그러한 시기였다.
바그다드의 세 강 유역에서 페르시아만까지 펼쳐지는 범람원을 오늘날 우리는 ‘바빌로니아’라고 부르는데, 바빌로니아는 기원전 6세기 경 바빌론이 바빌론제국의 수도로서 이라크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로 명성을 날리던 무렵, 그리스어권 사람들이 만들어낸 명칭이다.
한편 이라크 남부 지역은 미국의 고고학자 로버트 매코믹 애덤스가 명명한 것처럼 ‘도시들의 중심’이었다. 많은 도시가 바빌론과 경쟁했고, 그중에는 바빌론보다 긴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도 많았다. 우루크ㆍ우르ㆍ키시ㆍ니푸르와 같은 도시들은 건축ㆍ문학ㆍ축제 및 공동체의 삶이라는 측면에서 풍부한 문화유산을 자랑했으며, 바빌론보다 퍽 오래 기록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도시들의 주민들은 이러한 사실을 자랑스러워했고, 그래서 그들은 이라크 남부 지역이라는 공통분모를 강조하는 명칭을 쓰지 않고 스스로를 ‘바빌론의 아들’, ‘우루크의 아들’, ‘니푸르의 아들’ 등으로 불렀다.
세 강 유역인 바빌로니아의 북부 지역과 여러 물길이 페르시아만의 습지로 합쳐지는 바빌로니아의 남부 지역을 구분하기 위해서 좀 더 조심스러운 명칭이 사용되어, 남부 지역은 주로 ‘해국’이라고 불렸고, 기원전 3천 년 중기 이후 북부 지역은 그곳에 자리 잡은 국가의 수도 및 언어의 명칭을 따라 ‘아카드의 땅’으로 불렸다. 이들의 언어인 아카드어는 셈어 계열로 바빌로니아어로 이어지며, 아시리아어와는 가까우면서도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한편 남부 지역은 그곳의 언어인 수메르어의 이름을 따서 ‘수메르의 땅’이라 불렸는데, 수메르어는 현존하는 또는 사어가 된 어떤 언어와도 연관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빌로니아에 가장 근접한 명칭은 두 지역을 함께 부르는 ‘수메르와 아카드의 땅’이다.
이 두 언어는 모두 쐐기문자로 기록되었는데, 젖은 점토판에 갈대철필로 새긴 문자의 모양이 쐐기 같다고 하여 그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기록문자의 발명은 도시혁명이 이루어 낸 가장 놀라운 성취이다. 참고로 쐐기문자는 본래 장부를 기록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서서히 음절기호와 어표를 포함한 문자체계로 발전하여 구어를 기록할 수 있게 되었고, 이후 3천 년간 중동 전역의 여러 언어권에서 문서 기록에 사용되었다. 기원전 3천 년대 중기의 바빌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지만, 이러한 쐐기문자 텍스트를 통해 약간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패권국의 수도로 떠오르다 - 함무라비의 바빌론
여기에서는 기원전 18세기 함무라비 왕 치세 하에 작은 왕국의 중심부에서 현대 이라크의 대부분을 아우르는 메소포타미아의 정치적 패권국의 수도로 부상하여 전성기를 누린 바빌론을 찾아간다. 기원전 2천 년대의 첫 세기 동안은 국가 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는 곧 크나큰 정치적 기회를 의미하여 많은 왕이 출현했다. 통치자들은 보통 ‘아모리인’의 후손을 자처했다. ‘서방인’을 의미하는 이 용어는 기원전 3천 년 대 후기 우르 왕국 재상들의 텍스트에서 처음 등장했는데, 이는 메소포타미아로 이주해 온 셈어를 사용하는 이민자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우르 왕국은 많은 아모리인을 용병으로 고용했고, 왕국이 멸망한 후 그들 중 일부는 왕조를 열었는데, 바빌론 왕가는 그중 하나였다. 당시 함무라비 왕이 스스로 ‘아모리인과 아카드인’의 통치자임을 천명했을 때에는 이를테면 군사엘리트 대 평민과 같이 사회적ㆍ정치적 구별을 의미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더 이상 민족언어상의 특정 집단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함무라비가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작은 영토를 물려받아 바빌론 왕위에 오를 무렵, 중동의 패권국은 중앙 시리아와 남서부 이란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는데, 얌하드 왕국의 수도는 고대도시 할라브였고, 엘람 왕국의 수도는 당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인 거대 도시 수사(이란 쿠제스탄주의 슈시)였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주변 지역은 수십 개의 공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신ㆍ라르사ㆍ우르ㆍ에쉬눈나 등 제법 규모가 큰 나라가 몇몇 있었고, 바빌론ㆍ마리 등 비교적 작은 나라들도 있었다. 이 작은 국가들은 얌하드와 엘람 양대 세력의 완충 역할을 했고, 국가들 사이의 동맹은 자주 바뀌었다.
한편 기원전 18세기에는 주요 무역로에 중대한 변화가 있어 변화와 기회의 시대였다. 그전까지는 페르시아만을 이용한 해상무역로가 중심을 이루었는데,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항구에서 바레인과 오만을 거쳐 인더스평원의 하라파 문명 도시들과 교역을 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이 도시들이 쇠퇴하면서 해상무역도 시들해졌고, 그 결과 이 도시들은 더 이상 장거리 무역의 거점이 되지 못했다.
아무튼 페르시아만을 거쳐 인도반도로 가는 해상무역로가 폐쇄되어도 동방과의 무역은 지속되어야 했다. 그래서 자그로스산맥의 낮은 산길을 통한 육상무역로가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이렇게 장거리 무역과 여로가 변화하면서 메소포타미아의 정치적 중심지는 항구들이 위치한 최남단에서 유프라테스강, 티그리스강, 디얄라강이 만나는 세 강 유역으로 서서히 옮겨 갔다. 현재 이 지역의 중심지는 중세 초기 이후 이라크에서 가장 큰 도시인 바그다드다. 하지만 바그다드보다 3천 년 앞서 바빌론이 있었으며, 함무라비가 왕위에 있던 기원전 18세기 바빌론은 메소포타미아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시대에 세 강 유역에 자리 잡은 바빌론의 지정학적 위치는 대단한 상업적ㆍ전략적 가치를 지녔으므로, 인접한 강력한 도시국가들은 바빌론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였다. 함무라비의 부친 신무발리트는 메소포타미아의 정치적 강자인 남쪽의 라르사 왕국으로부터 영토를 지키기 위해 분투했다. 그의 재위 기간과 43년간 통치한 그의 아들 함무라비의 재위 초기까지 가장 두각을 나타낸 국가는 에쉬눈나 왕국이었다. 티그리스강과 디얄라강의 합류 지점에 위치하고 동쪽의 강자 엘람 왕국과 동맹을 맺은 에쉬눈나는 육상무역로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가장 큰 수혜를 입었다. 반면에 바빌론 왕국은 단지 몇몇 도시를 포함한 반경 60킬로미터 정도의 지역에 불과했다. 하지만 함무라비는 기회가 찾아오자 에쉬눈나를 밀어내고 영토를 합병함으로써 메소포타미아 전 지역의 패권자로 떠올랐다.
함무라비는 많은 군소 국가를 합병하여 거대한 메소포타미아의 국가를 건설했는데, 이는 그의 먼 친척뻘인 삼시아두(샴시아다드 1세)의 위업을 이어받은 것이다. 함무라비가 바빌론의 왕위에 막 올랐을 무렵 삼사이두는 강력한 왕국을 건설했다. 참고로 삼시아두는 타고난 능력으로 기회를 잘 활용한 유능한 정치가이자 치밀한 군사 지휘관이었으나, 자식들을 잔인하고 강압적으로 양육하여 좋은 부모는 아니었다. 그러나 먼 친척뻘인 함무라비에게는 영감과 자극을 준 사람이었다.
함무라비의 선조들이 통치하던 시기에 바빌론 왕국은 남쪽의 카잘루와 북쪽의 에쉬눈나 사이에 끼인 약소국에 불과했다. 그런데 엘람 왕국의 군대가 에쉬눈나 연합국을 침략하여 정치적 지형에 큰 변화가 생기자, 함무라비는 야망을 위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엘람 왕에게 충성의 의무가 있었던 그는 엘람의 분봉왕(分封王)으로서 이 전쟁에 참여했다. 이는 마리의 왕 짐리림 역시 마찬가지였다.
엘람 왕국의 통치자가 지명한 에쉬눈나의 새로운 군주는 자신의 왕위를 지키지 못했고, 함무라비는 이 상황을 이용해 전략적 요충지인 에쉬눈나의 여러 국경 도시를 바빌론 왕국에 편입시키면서 자그로스산맥으로 이어지는 동방교역로를 확보했다. 엘람의 통치자는 즉각 군대를 보내 이러한 반역 행위를 응징하려 했다. 하지만 함무라비는 마리 왕 짐리림의 도움과 특히 신속히 보충 병력을 파견해 준 서쪽의 강대국 얌하드의 지원에 힘입어 이 공격을 막아 내 새로 확보한 영토를 지킬 수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얌하드에 대한 지지를 천명하는 한편 엘람과의 동맹을 확실히 끝냈다.
이후 함무라비는 새로운 상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메소포타미아에서 엘람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인 남쪽의 라르사 왕국을 합병하여 바빌론을 고대 수메르의 유산을 물려받은 강력한 국가로 부상시켰다. 고고학자 도미니크 샤르팽은 바빌론의 라르사 합병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를 통해 바빌론의 문화적 영향력이 이후 2천 년 동안 중동에서 지속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특히 라르사 궁정의 세련되고 교양 있는 인물들이 소박한 함무라비 궁정에 편입되면서, 바빌론의 정치ㆍ종교ㆍ문화ㆍ문학ㆍ예술 등 다방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이를 통해 ‘바빌론’ 문화가 새로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편 오늘날 함무라비 시대의 건축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쐐기문자 텍스트를 통해서 바빌론 시대의 생생하고 상세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자료는 함무라비법전이다. 이 법전은 함무라비가 새로이 건설한 왕국의 통합을 공고히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늘날 함무라비법전으로 불리는 유물은 아카드어로 기록된 쐐기문자 비문으로 큰 석비에 새겨져 있다. 석비에는 함무라비가 정의의 수호자 태양신 샤마시에게서 왕의 휘장을 받는 모습도 담겨 있다.
함무라비의 긴 비문에는 왕의 업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업적은 신들의 도움, 특히 바빌론의 수호신 마르두크의 도움으로 가능했다고 쓰여 있다. 텍스트 첫 줄의 기록에 따르면 가장 높은 두 신, 즉 신들의 주인 아누와 땅의 주인 엔릴이 함무라비를 통치자로 정하고, 바빌론과 마르두크의 위상을 끌어올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함무라비가 군사적으로 성공을 거두면서 수도 바빌론이 새 왕국 내에서 명성을 떨치자, 바빌론의 도시 신 역시 신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를 통해 지역 신에 불과하던 마르두크가 서서히 전 세계의 독보적인 지배 신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한편 텍스트의 첫 줄에서 함무라비는 모든 백성을 공평하게 대하는 ‘정의로운 왕’으로 소개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판결문 275개가 자세히 기록되었는데, 그중 일부는 왕이 직접 판결한 것이다. 이 판결문은 함무라비가 전 영토에 임명한 판관들에게 지침서 역할을 했으며 모든 백성이 활용할 수 있었다. 판결문을 보면 함무라비는 납세와 공공사업 노역으로 국가에 충성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특별히 관심을 기울였다. 예컨대 바빌론의 공무로 해외에 나간 군인이나 상인이 해외 체류 중 국내 재산을 잃을 경우, 귀국 시 처와 자식을 포함한 재산을 되찾을 수 있도록 보장했다.
또한 함무라비는 통합된 바빌론 사회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 각별히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는 결혼과 상속에 관한 복잡한 판결문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중에는 ‘수녀(나디툼)’에 관한 내용이 많은데, 이는 수녀의 독특한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 수녀는 신전에 부속된 수녀원에 살면서 신에게 헌신하는 자로서 살아 있는 가족뿐 아니라 특히 죽은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데 전념했다. 그래서 딸을 수녀로 보내는 것은 신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이자, 죽은 조상을 보살피는 일이었다. 참고로 수녀 대부분은 부유한 가문 출신이어서 신전의 경제적 지원에 의존하지 않았다. 아무튼 바빌론이 패권을 잡은 이후 왕국 전역의 귀족 가문에서는 딸을 바빌론의 마르두크에게 수녀로 보내는 것이 유행했다.
한편 함무라비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삼수일루나(37년), 아들인 아비에슈(28년), 손자인 암미디타나(37년), 증손자인 암미샤두카(아마도 19년), 고손자인 삼수디타나(아마도 26년)로 이어지는 긴 통치 기간과 비교적 순탄한 바빌론 왕위의 계승을 통해 볼 때 함무라비 왕조는 왕국의 중심으로서 순조롭게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이며, 이 왕들 중에서 적어도 1명은 이집트와 외교적 관계를 수립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