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은 어떻게 내 것이 되는가
박성일 지음 | 모아북스
배움은 어떻게 내 것이 되는가
박성일 지음
모아북스 / 2021년 4월 / 212쪽 / 16,000원
제1장 배움을 배우다
배움은 질문이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낯선 것과의 조우를 통해 이성이 시작된다”라고 했다. 여기서 낯섦은 새로운 것을 의미한다. 자신 주변의 익숙한 것들에 둘러싸여 있으면 새로운 생각은 일어나지 않는다. 일상에서 습관처럼 반복되는 말이나 행동 속에서는 새로움을 발견할 수가 없다. 익숙하지 않은 ‘낯섦’을 만나게 되면 바로 그 순간 우리의 생각은 새롭게 깨어날 수 있다. ‘낯섦’을 통해 생긴 새로운 생각은 우리에게 질문을 하게 하고, 그 질문의 해답을 찾는 과정에 배움이 있다.
배움이란 무엇인가?: ‘학문’의 사전적인 의미는 어떤 분야를 배우고 익힌다는 의미다. 학문을 한자로 보면 ‘배울 학(學)’과 ‘물을 문(問)’을 의미한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묻기를 배운다는 의미’다. 묻기를 배운다는 것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물어서 배운다는 뜻이다. 배움의 시작은 묻는 데서 시작되고, 배움의 과정에서 또 다른 물음으로 지속적으로 나아간다. 배움은 끝이 없는 질문의 연속인 것이다.
우리는 왜 질문하기를 어려워하는가?: 한국 대학생의 학습과정 분석 연구사례 보고서에서 언급된 질문이 사라진 교실의 한 장면이다.
교수님이 조용히 칠판에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질문요? 당연히 없죠. 학생들이 할 일은 그저 수업 시간 내내 칠판에 적힌 내용을 옮겨 적고 교수님 설명을 듣는 것뿐입니다. 고교 수업 방식과 다르지 않아요. 이곳이 대학 강의실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요. 초등학교 때부터 익숙한 방식이라서 그럴까요. - 한국교육개발보고서(2010)
위의 상황은 한국의 대학 강의실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한국일보에서 질문 없는 현주소를 알아보기 위해 전국 초ㆍ중ㆍ고 교사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진행했는데, 교사 91%는 ‘교육을 위해 활발한 질문이 중요하다’라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절반 이상의 교사가 학생들이 전반적으로 질문을 통한 수업 참여에 소극적이라고 답했다. 학생들의 질문이 교육 효과를 높인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실제 교실의 상황은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우리의 질문 문화를 보여주는 유명한 장면이 있다. 우리나라가 주최하던 G20 폐막 기자회견장에서 미국의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우리나라의 훌륭한 주최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마지막 질문의 기회를 한국 기자에게 주었다. 그런데 그 많은 한국 기자들 중에서 단 한 명도 질문을 하지 않았다. 몇 번의 기회를 추가로 주었으나 계속되는 침묵으로 인해 결국 중국 기자에게 질문이 넘어갔다. 질문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 장면이다.
우리나라 속담에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라는 말이 있다. 나서서 질문을 하기 보다는 가만히 듣고 있는 것이 좋다는 것을 은근히 담은 말이다. 모르는 것을 애써 아는 척하다가 무식이 탄로 날지 모르니 주의하라는 경고를 하는 셈이다. 이는 한국 사회 분위기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우리나라는 질문에 익숙한 문화가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사이에는 질문하면 손해 본다, 질문을 하면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팽배하다. 이러다 보니 질문을 꺼리게 되고, 질문하는 사람에게도 곱지 않는 시선을 보내게 된다.
교실 모습을 살펴보면, 흔히 질문은 ‘교사가 던지는 것’이다. 교육계에서는 이것을 발문이라고 하고, 교사의 발문을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모든 수업의 중심에 교사의 질문을 최우선으로 놓고 수업을 계획해 왔다. 교사들이 그동안 작성해왔던 수업안을 보더라도 교사의 발문과 학생의 답변이라는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그래서 교사가 어떻게 하면 좋은 발문을 던져 학생의 사고력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가 수업에서 핵심적인 내용 중의 하나였다. 교사의 발문을 위주로 한 수업 현장은 활발한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교사의 의도에 따라 미리 정해둔 방식으로 학생들이 정답을 찾도록 요구하는 획일적인 수업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으며 실상은 학생들이 자신의 질문보다는 교사의 질문에 정해진 정답만을 찾는 폐쇄적인 구조인 것이다.
이혁규의 『수업, 비평의 눈으로 읽다』에서 언급한 교사와 학생의 담화에 관한 연구에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교실에서의 상호작용은 ‘교사 발문 -> 학생 답변 -> 교사의 추가 발문’의 형태가 일반적이다. 즉, 교사가 먼저 발문을 하면 학생들이 응답을 하는 형태다. 이런 구조에서는 교사가 발문을 하지 않으면 학생들 중 아무도 말하지 않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의 질문을 기대할 수 있을까?
『정의란 무엇인가』 저자 마이클 샌덜의 ‘정의론’ 수업 장면을 보면 우리 교육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그의 강의는 질문식 수업으로 유명한데, 교수가 질문을 던지면 여기저기서 새로운 질문을 쏟아내는 학생들이 수업을 이끌어간다. 교수는 처음에는 질문을 유도하지만 나중에는 교수가 끼어들지 않아도 학생이 질문하고 학생이 답하면서 수업이 진행된다. 학생들이 능동성에 기반을 두고 서로 묻고 답하며 상호 토론하고 참여한다. 학생들이 지식의 피동적 수용자가 아니라 지식의 형성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마이클 샌덜의 수업은 질문 있는 교실을 잘 실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질문은 어떻게 배움이 되는가?: 21세기의 위대한 과학자 리처드 파인만이 쓴 『발견하는 즐거움』에 보면 파인만의 아버지가 질문을 어떻게 배움으로 연결했는지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파인만의 아버지는 주말에는 파인만을 데리고 산으로 산책을 자주 갔다. 그러고는 산책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버지는 일상의 모든 상황에서 파인만이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알아내게 했다. 가장 좋은 배움의 방법이 바로 파인만 스스로 알아내는 것이었다.
“너희 아버지는 아무것도 안 가르쳐주시는구나!” 친구들이 아인슈타인 이후 최고 과학자로 꼽히는 리처드 파인만을 놀렸습니다. 숲속에 있는 새를 가리키며 “저게 무슨 새인지 알아?”라고 묻는 질문에 “모르겠다”고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친구는 “저건 갈색목개똥지빠귀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새가 뭔지 아니? 저건 갈색목개똥지빠귀라고 하지. 포르투갈어로는…, 이탈리아어로는…, 중국어로는…, 일본어로는 …라고 한단다. 자, 이제 알고 싶은 언어로 저 새의 이름을 알았다. 그런데 이름을 다 알았다고 해도 너는 저 새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단다.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이 저 새를 뭐라고 부르는지만 알게 된 거지. 자, 이제 저 새를 살펴보자. 왜 항상 깃털을 쪼는 걸까?” 그리고 깃털을 왜 쪼는지 함께 관찰했다. 새가 깃털을 쪼는 것은 깃털 속에 숨은 벼룩을 잡느라고 그런다는 것을 스스로 찾게 했다. - 리처드 파인만의 『발견하는 즐거움』 중에서 -
위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새의 이름을 외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왜”라고 묻는 질문을 통해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또한 무엇이든지 강요나 억압이 아니라 사랑이 깃든 대화를 통해 스스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배우게 하는 것이다. 또한 배움의 과정에서 학생들의 탐구 본능을 장려하며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탐구 능력이란 학생들의 질문을 멈추지 않게 하는 것이다. 학생들의 호기심은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다. 호기심이 있는 곳에 관찰이 이루어지고 관찰이 질문으로 이루어진다. 교육기관에서는 학생들의 ‘왜’ 그리고 ‘어떻게’라는 질문으로 수업을 이끌도록 해야 한다. 질문을 해결하는 경험이 쌓이면 수업은 학생과 교사에게 매우 매력적인 배움의 과정이 될 수 있다.
모든 수업에서 교사는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말하는 학생보다는 교과서에 없는 것,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내용, 다른 사람과 다르게 보는 내용을 말하는 학생에게 항상 주목해야 한다. 이런 문화가 지속되면 자연스럽게 학생들은 어떤 사물을 그저 바라만 보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과 다르게 보게 하고,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하면 스스로 질문을 찾게 된다.
배움은 호기심이다
아인슈타인의 호기심과 성장: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특수 상대성 이론과 일반 상대성 이론을 제안한 이론물리학자다. 이런 아인슈타인도 학생 시절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주입식 교육을 매우 싫어해 라틴어 문법처럼 억지로 외우는 과목은 전혀 공부하지 않았다. 그는 수학과 과학에만 흥미를 느꼈다. 독일의 김나지움을 졸업하지 않고 부모를 따라 이탈리아로 간 그는 전기공학자가 되기 위해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연방공과대학에 지원했으나, 입학시험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수학과 물리학 성적은 뛰어났으나 다른 과목에서 낙제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누구보다도 호기심이 강했다. 이런 호기심은 위대한 질문으로 이어져 세기의 이론을 제안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아인슈타인이 “만약 1시간 동안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면, 나는 훌륭한 질문을 찾는 데 55분을 쓸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강한 호기심을 질문으로 이끌어 그것을 해결할 때까지 끝까지 몰두했다. 다음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 아인슈타인이 어렸을 때부터 얼마나 호기심이 강했는지 알려주는 구절이다.
만약에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1890년 토스카나의 시골을 간다면, 고등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사색에 잠긴 채 해변을 걸어가고 있는 한 10대 소년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프러시아에서 선생님들로부터 “넌 커서 도대체 뭐가 되겠니?”, “네 질문이 수업 분위기를 망친다” 등의 폭언을 듣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는 교실에서 배운 것들과는 전혀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 고민했다. 그가 바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다. 어린 시절 아인슈타인은 푸앵카레(프랑스의 철학자)의 『과학과 가설』이라는 책에 흠뻑 빠져 있었다. 『과학과 가설』에서는 전선을 지나는 전기와 공간을 가로지르는 빛의 놀라운 속도를 설명하고 있다. “만약 빛의 파동을 타고 여행할 수 있다면, 즉, 빛의 속도로 이동할 수 있다면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빛의 속도로 여행한다. 어린 아인슈타인의 머릿속에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이런 신비스러운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중에서 -
만약 빛의 속도로 움직일 수 있게 되면 평소의 우리 관념들이 이런저런 모순들에 부딪히게 된다. 어떤 동일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르게 인식될 수 있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런 생각은 자연 세계의 근본을 건드리는 질문이다. 아인슈타인의 이러한 질문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게 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제2장 배움을 키우다
배움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배움은 자기 성찰에서 온다: 자발적으로 배우고자 하는 의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통해 발생한다. 자기 성찰에 의한 배움은 기꺼이 자기 자신, 돈을 투자하며 배우고자 하는 열정을 보인다. 교사로서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필요에 의한 연수에는 사비를 들여서라도 연수를 받고 참여율과 교육의 효과 역시 높았다. 하지만 관심이 없거나 억지로 받아야 되는 연수에 참여하는 경우 집중도와 효과성이 미미함을 경험할 수 있었다. 자기 성찰에 의한 배움이 가장 강력한 배움으로 이끈다.
중국의 고사성어에는 자기 성찰의 중요함을 말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먼저 『맹자』에 나오는 이야기다. 맹자는 ‘반구저기’를 언급했다. 반구저기는 활을 쏘아서 과녁에 적중시키지 못했을 때는 자기를 이긴 사람을 원망하지 말고 적중하지 못한 원인을 자기한테서 찾는다는 뜻이다.
먼
저 자기의 활 쏘는 자세를 먼저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일에서 부족했을 경우 그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다는 의미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크고 작은 실패에 직면할 때 그 실패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가, 외부에서 찾는가의 차이는 대단히 크다. 이것은 삶의 자세와 관련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대체로 자기의 작은 실수도 그 원인을 바깥에서 찾으려고 한다. 여기서 바깥이란 남이기도 한다. 반구저기는 우리의 내부를 먼저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성찰이 없는 상태에서는 어떤 배움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의미다.
전통 활쏘기에서 강조하는 집궁 8원칙을 보면 ‘흉허복실’이 나온다. 가슴을 비우고 복부에 힘을 주라는 뜻이다. 뜻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흉허복실은 궁술에서 중요한 것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 등 기본적인 자세와 마음가짐이다. 기본을 잘 지키고 있는지 스스로 돌이켜 반성해야 한다는 뜻으로, 엄정한 자기반성의 자세를 말하고 있다.
장건익의 『철학의 발견』에 보면 ‘회광변조’를 언급하고 있다. 회광변조는 원래 불교 용어다. 문자적인 뜻은 방향을 바꾸어 비춘다는 뜻이다. 이것을 철학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밖에서 찾고 밖의 것에 의지하던 의식을 반대로 돌려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뜻이다. 자기 마음을 모른 채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해 앞을 향해 달려가지만 결국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은 고통과 불행이다. 원인은 자신에 대한 무지에 있다. 즉, 문제의 원인이 내 안에 있고 답도 내 안에 있는데 자꾸 밖으로 나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어떤 시도도 무의미하며 반드시 실패한다는 뜻이다. 반구저기, 흉허복실, 회광변조는 모두 문제의 원인을 엄정하게 자기 자신에게서 찾고 있다. 자신의 내부의 성찰이 없이 행하여지는 모든 행동은 결국 자신에게 무의미함으로 돌아온다. 결국 깨달음을 마음에서 구하지 않으면 어리석어지게 됨을 의미한다.
배움은 자율성에서 온다: “관습의 전제가 있는 곳은 인간의 발전을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물이 된다고 말한다.” 이는 『자유론』의 저자 존 스튜어트 밀이 한 말이다. 세계 역사를 보면 권위와 관습이 모든 문제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갖고 있으며, 관습을 따르는 것은 정의요, 올바른 것으로 통해왔다.
관습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율성을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이런 관습이 지배하는 사회의 결과는 어떻게 될까? 한때 중국의 항해술과 지도 능력은 세계 최고를 자랑했다. 대표적인 예가 중국 정화 함대다. 정화는 명나라의 해군 제독으로 중국의 해군력을 세계에 과시했다. 정화 함대의 규모는 병사와 선원 외에 의사 등의 전문 인력을 포함하여 2만 7,800여 명의 인원이 62척으로 이동했다. 선박의 크기 또한 오늘날의 유조선과 비슷한 규모였다고 한다. 정화 함대는 당시 콜롬버스나 바스코 다가마의 함대에 비하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엄청난 크기의 배를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은 정말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정화 함대의 원정은 유럽인보다 100여 년이나 앞서 동남아시아, 인도양, 아프리카, 이슬람까지 이른다. 하지만 중국은 홍의제에 의해서 중앙집권적으로 배 만드는 일을 중지하고 해금 정책을 취했다. 또한 그는 매우 보수적이고 유교적이어서 권위와 관습에 영향을 받아 형태를 중단하게 했다.
이때 이후로 중국의 뛰어난 항해술과 배를 만드는 기술력은 지속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쇠퇴하고 말았다. 결국 대항해 시대의 주인공은 대부분 콜롬버스, 바스코 다가마 등 유럽인이다. 정화 함대의 엄청난 규모와 그 기술이 지속적으로 발전했다면 아마 아메리카 대륙은 중국에 의해서 발견되었을 것이다. 중국과 반대로 유럽은 왜 정체되지 않고 진보할 수 있게 만들었는가?
유럽의 발전 원동력으로 핵심적인 요인은 바로 다양성이다. 유럽은 지리적 분할 상태에서는 서로 경쟁하는 수십, 또는 수백 개의 독립 소국으로 발전해왔다. 이런 경쟁 구도에서 서로 혁신하지 않으면 다른 국가에 지배당하거나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분열된 유럽의 국가들에서는 모든 국가의 사회적, 지적 다양성을 하나로 묶을 만한 강력한 중앙권력이 없었기 때문에 자유로운 탐구가 가능했고, 이것이 기술과 혁신의 발전을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