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바꾼 21인의 위험한 뇌
고나가야 마사아키 지음 | 사람과나무사이
세계사를 바꾼 21인의 위험한 뇌
고나가야 마사아키 지음
사람과나무사이 / 2021년 4월 / 316쪽 / 17,000원
Part 1_ 무서운 질병이 영웅과 군주의 뇌를 조종하여 세계사를 뒤흔들어 놓다
클레오파트라는 왜 ‘맹독성 코브라’를 자살 도구로 사용했을까 - 코브라 독ㆍ중증근무력증 고대 이집트 왕국 최후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과연 절세 미녀였을까?: 아름다운 외모를 무기로 치열하게 살았던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고통의 흔적 없이 아름다운 얼굴로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다. 그녀는 어떤 비책을 써서 죽음에 이르렀을까? 그리고 그녀의 죽음은 당대 로마제국과 이집트, 그리고 주변 국가들의 정세 및 역학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고대 이집트 왕국은 기원전 3,000년경부터 나일강 주변에서 번성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이집트 땅에 새로운 왕조가 세워졌다. 기원전 304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 중 한 명인 그리스계 마케도니아인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300여 년의 찬란한 영광을 뒤로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한 인물이 바로 클레오파트라 7세다.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어로 ‘아버지의 영광’이라는 뜻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공주에게는 흔한 이름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그녀가 살았던 당시 만들어진 동전에 부조가 남아 있어 실제 외모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한데 오늘날 잣대로 보자면 매부리코에 딱히 미인이라고 하기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아름다움에 관한 판단과 평가는 시대마다 다르다. 어쨌든 그녀가 당대 최고 영웅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매혹시킨 점으로 볼 때 단지 이목구비의 수려함을 뛰어넘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선물용 카펫으로 자기 몸을 말아 카이사르의 거처에 잠입하는 클레오파트라: 기원전 51년, 열일곱 살 클레오파트라는 왕조의 관습에 따라 당시 아홉 살이던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며 공동 통치자인 여왕의 자리에 올랐다. 고대 이집트 왕가에서는 근친혼이 흔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 부부 사이는 냉랭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른 형제들까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면서 집안 문제로 번져 시끌시끌해졌다. 그 와중에 클레오파트라는 고립무원의 신세가 되었다.
그 무렵 로마에서 카이사르가 숙적 폼페이우스를 축출하고 이집트로 와서 수도 알렉산드리아의 왕궁을 거처로 정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를 자기편으로 만들고자 애정 공세를 펼치며 승부수를 던졌다. 그는 이집트 왕인 남동생의 호위병에게 들키지 않도록 선물용 카펫으로 자기 몸을 둘둘 감아 카이사르의 거처에 몰래 잠입했다. 카이사르는 독특한 매력을 지닌 미녀 클레오파트라에게 푹 빠졌고 왕권을 둘러싼 부부 싸움에 개입하여 그녀에게 군사적ㆍ정치적으로 힘을 실어주었다. 이후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는 달콤한 동거 생활을 시작했고 두 사람 사이에 아들 카이사리온이 태어났다.
그로부터 얼마 후인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원로원에서 공화파인 브루투스 일당에 의해 암살당하고 만다. 클레오파트라는 황망히 이집트로 돌아와야만 했다. 우여곡절 끝에 암살자들을 처리하고 패권을 잡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에 입성했다. 야심가였던 클레오파트라는 새로운 로마 총사령관을 이집트 왕국의 공동 통치자로 만들어 다시 달콤한 밀월을 시작했고 세 아이를 얻었다. 두 사람은 향락에 빠진 생활을 즐기는 한편 로마와 거리를 두고 독립을 꿈꾸기 시작했다. 위기감을 느낀 로마는 카이사르의 의붓아들인 옥타비아누스를 사령관으로 삼아 토벌군을 파견했다.
옥타비아누스마저 클레오파트라의 유혹에 넘어갔다면 세계사의 물줄기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기원전 31년 그리스의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함대는 옥타비아누스의 로마 해군에 대패하고 말았다. 최후의 결전에서 패배한 안토니우스는 단검으로 자신을 찔러 클레오파트라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한때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매료시켜 사랑의 포로로 만들었던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와 평화 교섭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만약 클레오파트라가 옥타비아누스의 마음마저 사로잡았다면 이후 역사의 물줄기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각오한 클레오파트라는 다양한 독약의 효능을 시험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떤 독이 고통 없이 그리고 아름다운 얼굴을 유지한 채 생을 마감하게 해줄 수 있을지 사형수나 노예를 대상으로 인체 실험을 거듭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이 세운 영묘 안에 틀어박혔고 그 주위를 로마군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어느 날 탐스러운 무화과를 가득 담은 광주리가 밖에서 들어왔다. 광주리를 받아든 클레오파트라는 안에서 독사를 꺼내 자기 가슴을 물게 했다. 로마군이 부랴부랴 영묘에 들어왔을 때 클레오파트라는 마치 잠든 듯한 표정으로 황금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그렇게 파란만장한 서른아홉 해를 살다가 갔다.
클레오파트라가 자살 도구로 ‘맹독성 코브라’를 선택한 이유: 뱀독은 뱀에 물린 동물의 출혈이 멈추지 않게 하는 ‘출혈독’과 신경이 내린 지령이 근육에 전달되지 않게 하는 ‘신경독’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살모사와 방울뱀과 같은 맹독성 뱀이 지닌 독은 출혈독이다. 반면 얼핏 보면 잠자는 듯 편안한 죽음을 맞게 해주는 독은 신경독으로, 주로 코브라나 바다뱀의 독이다.
뇌와 척수에서 나온 신경은 근육과 만나는 곳에서 아세틸콜린이라는 물질을 분비하여 근육에 지령을 전달한다. 신경종말에서 나온 아세틸콜린이 근육 표면에 있는 수용체, 즉 전기 코드에 비유하자면 플러그의 소켓에 해당하는 콘센트 부분에 연결되면 근육이 반응해 수축한다. 이 소켓을 신경접합부라고 부르는데, 코브라와 같은 신경독은 콘센트 부분을 차단하여 아세틸콜린이 올바른 지령을 전달하지 못하게 한다. 코브라에 물린 사람이 꿈꾸는 듯 몽롱한 표정을 짓다가 손발이 마비되고 호흡 곤란을 겪다가 사망하게 되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 실제로 코브라에 물렸다가 가까스로 살아난 사람들은 속이 울렁거리고 극심한 통증과 호흡 곤란으로 고통스러운데, 근육이 마비되어 어떤 표정도 지을 수 없고, 말도 할 수 없고, 몸부림칠 수도 없어 죽을 만큼 괴롭고 답답했다고 한다.
사람이 코브라에 물리면 즉시 눈꺼풀 등의 얼굴 근육에 이상이 생겨 몽롱하게 졸린 듯한 표정을 짓게 된다. 클레오파트라의 시신을 본 사람들이 그가 편안하게 잠자듯 저세상으로 갔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방울뱀 등의 독에는 마약과 같은 작용을 하는 오피오이디 펩타이드 성분이 들어 있다고 하니 어쩌면 클레오파트라의 몸속으로 코브라의 독이 들어갈 때 고통을 덜 느끼게 해주는 물질이 함께 흘러들어갔을 수도 있다.
우리 몸의 모든 움직임을 먹잇감으로 삼는 중증 근무력증: 뱀독이 아니라 질병으로 아세틸콜린 수용체가 망가지는 질환이 있는데, 바로 중증근무력증이다. ‘자, 근육을 움직여’라고 아무리 뇌에서 지령을 내려도 그 명령이 근육에 전달되지 않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마비 증상이 나타난다. 우리 몸의 모든 움직임은 중증근무력증의 먹잇감이 된다. 우리가 걷거나 손발을 움직이는 기본적인 동작뿐 아니라 눈동자를 움직이거나 눈꺼풀을 깜빡이거나 말하거나 호흡하는 움직임도 모두 근육을 움직여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응이 늦어지면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중증근무력증은 자가면역 질환으로 자신의 아세틸콜린 수용체를 공격해 파괴한다. 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선 신경 말단에서 방출되는 아세틸콜린 작용을 강화해주는 항콜린에스테라제라는 약물을 투여해야 한다. 또는 스테로이드 약물 등으로 면역 기능을 억제하거나 혈장 교환 시술로 혈중 이상 항체를 제거하기도 하고. 자가면역 질환과 연관이 깊은 흉선을 외과적으로 제거하는 수술을 하기도 한다.
Part 2_ 강대국 리더들이 결정적 오판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놓게 한 치명적 뇌 질환
미국의 유일한 ‘4선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최악의 대통령으로 만든 질병 - 고혈압성 뇌출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오늘날의 ‘혈압약’이 있었다면 세계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만약 오늘날 사람들이 흔히 복용하는 ‘혈압약’이 있었고 그 약을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투여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동서 진영의 대립이 격화하던 냉전 시대에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에게 고분고분 순응하는 모습을 보인 루스벨트는 미국인들 사이에서 ‘사상 최악의 대통령’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불리며 손가락질당하고 있었다. 만약 혈압약으로 그의 고혈압이 완치되지는 못하더라도 적절히 제어되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 질서를 결정지은 얄타회담 내용이 획기적으로 달라졌을 테고 동서 유럽을 나눈 철의 장막과 현재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민감한 현안인 쿠릴 영토 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다. 고혈압이라는 질병은 도대체 20세기 국제 정세와 이후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친 걸까?
‘일본 해군의 하와이 진주만 공격이 루스벨트 대통령이 일본을 도발하고자 부린 술책이었다’라는 주장은 과연 사실일까?: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1882년 뉴욕 주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이 정치인이 되겠다는 뜻을 품었고, 제1차 세계대전 중 해군에 입대했다. 전쟁이 끝난 뒤 루스벨트는 소아마비를 앓았고 이후 하반신이 마비되는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고 꾸준히 요양하며 재활에 힘쓴 덕분에 활동을 재개할 수 있게 되었다. 1928년 그는 뉴욕 주지사에 당선되었다. 물론 그때도 그는 주로 휠체어에 앉아서 생활해야 했다.
1929년 10월, 월가의 주가가 폭락하며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1932년 루스벨트는 뉴딜 정책을 구체적인 공약으로 내세워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1939년 9월, 나치스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유럽에서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루스벨트 정권은 초기에는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으나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1941년 12월 7일 마침내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의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한편에서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일본을 공격하고자 일부러 술책을 부렸다는 주장도 있으나 진위는 알 수 없다.
정치인 중에 루스벨트 대통령처럼 유독 뇌혈관 장애를 일으킬 확률이 높은 ‘A형 성격’이 많은 까닭: “진주만을 기억하라!”고 외치며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에서 참전을 강력히 주장했고 마침내 추축국을 향해 단호하고 선전 포고했다. 그런데도 그는 영국의 처칠 총리와 소련의 스탈린 서기장과 비교하면 제2차 세계대전 중 활약상이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왜 그럴까? 1943년 연합국 수뇌들이 모두 모인 카이로회담과 테헤란회담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눈에 띄게 수척해 보였다. ‘감기가 떨어지지 않아서’라는 변명으로 둘러댔으나 이후 ‘미국 대통령 건강 이상설’이 나돌았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잠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A형 성격’이다. 여기서 A형 성격이란 혈액형이 아니라 1950년대 미국에서 생명보험회사가 성격과 심장혈관 질환과의 관계를 조사해 만든 성격 분류법의 한 유형이다. 이에 따르면 심근경색과 협심증 등은 향상심이 강하고, 성격이 급하고, 공격성이 강한 사람에게 발병하는 사례가 많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런 사람은 뇌혈관 질환을 일으킬 확률이 높았는데 전문가들은 이를 ‘A형 성격’으로 분류했다.
이와 반대로 한 자리에 진득하게 앉아 일하며 인생을 즐기고, 승패에 집착하지 않고 스트레스를 그다지 느끼지 않는 유형은 B형 성격에 속한다. B형 성격은 뇌와 심장혈관 질환 발병 확률이 상대적으로 낮다. 걱정을 달고 사는 새가슴인 사람은 C형으로, 암에 걸리기 쉽다는 주장도 있다. 흥미롭게도 루스벨트 대통령은 물론이고 정치인 중에 유독 A형 성격이 많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두꺼운 잎담배를 매일 스무 개비가량 말아 피우는 골초로 동맥경화 증상을 보였을 확률이 높다. 진주만 공습 무렵 그의 혈압은 188/105mmHg로 기록되어 있다. 그때 이미 중증 고혈압 환자였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는 수준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갈수록 기력이 쇠약해진 모습을 보였다. 1944년은 차기 대통령 선거가 임박한 제3기 마지막 해였다. “대통령은 아침부터 무척 피로해 보였다. 대화 중 그는 수시로 졸았고, 가끔 서명 도중 잠시 의식을 잃기도 해서 괴발개발 휘갈겨 쓴 서명이 남아 있다.” 이는 당시 대통령을 보좌하며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의 목격담이다.
루스벨트 시대의 의사들은 왜 고혈압의 위험성을 간과하고 우습게 여겼을까?: 1944년 3월 무렵 루스벨트 대통령의 체력은 한계에 도달했다. 그는 숨이 가빠졌고 청색증 증상까지 나타난 워싱턴 교외 해군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입원 당시 측정한 혈압은 186/107mmHg 고혈압에 울혈성 심부전, 기관지염 진단이 내려져 즉시 치료에 들어갔다. 주치의는 기관지염 예후가 나빠진다며 담배를 줄이도록 요청했고, 루스벨트는 하루 스무 개비에서 열 개비로 줄였다. 그때만 해도 요즘만큼 담배의 해악이 알려지지 않아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는 인식이 부족했다. 당시에는 제대로 된 혈압약이 아직 개발되지 않았던 터라 고혈압에 대한 병원과 의사들의 대응책이라고는 심리적 안정을 찾도록 하는 일과 신경안정제밖에 없었다.
대통령이 와병 중임에도 차기 정권을 결정하는 선거전이 치러졌다.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루스벨트가 재선에 성공한다고 해도 임기 중 다시 쓰러질 가능성이 크다고 여긴 민주당은 부통령 후보를 매우 신중히 고려해야 했다. 부통령 후보로 가장 유력한 사람은 현직 부통령 헨리 월리스였다. 그는 확실한 업적과 높은 인지도에 더해 루스벨트 대통령의 신임까지 얻고 있었다. 루스벨트도 윌리스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윌리스에 대한 강력한 반대 여론이 일어났다. “월리스 부통령은 소비에트 연방과 중국 공산당에 우호적인 급진 좌파다.” 영부인 엘리너 여사도 윌리스 반대론에 힘을 실었다. 결국 미주리주 상원의원인 해리 트루먼이 부통령 후보로 결정되었다.
1944년 8월 루스벨트 대통령은 요양을 마치고 업무에 복귀했으나 연설 도중 협심증 증상을 보이기도 했다. 손이 벌벌 떨렸고 정상적인 대화도 힘들었다.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운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육체적으로는 이미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가을에는 혈압이 260/150mmHg로 올라갔다. 이듬해인 1945년 1월 20일에 제4기 대통령 취임식이 있었는데 이때도 협심증으로 가슴 통증을 호소했다. 부쩍 야윈 대통령의 모습은 청중에게 충격과 불안을 안겨주었다.
얄타회담 이후 루스벨트가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평가받은 이유: 취임식 직후인 1945년 1월 하순 루스벨트 대통령은 전후 처리를 놓고 스탈린, 처칠과의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소련 크림반도의 얄타로 향했다. 대통령 일행은 순양함과 수송기를 갈아타고 소련 땅에 입성했다. 그 무렵 소련은 한겨울 한파가 몰아치는 계절이라 늙고 병든 루스벨트에게는 고난의 행군이나 다름없었다. 일부에서는 사악한 스탈린이 일부러 그 시기에 얄타를 회담 장소로 고집했다는 주장도 있다.
2월 4일부터 일주일 동안 열린 얄타회담에서 몇 가지 중요한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대부분 소련에 유리한 방향으로 결정되었다. 이를테면 독일이 항복한 후 2~3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하고, 동유럽은 소련이 지배하며, 소련과 일본이 맺은 중립 조약을 파기하고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소련에 병합하는 등의 결정이었다. 서방측 총수격인 루스벨트 대통령이 건강 문제로 회의에 집중하지 못하는 바람에 미국과 영국이 소련에 밀리는 결과가 빚어졌다. 처칠의 주치의였던 찰스 윌슨 모란경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기력이 쇠할 대로 쇠해 입을 헤 벌린 채 앉아 있었다. 돌아가는 정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중략) 그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앉아 있기만 할 뿐 토론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그가 과연 이 중요한 자리에서 앉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중략) 뇌동맥경화의 다양한 증상을 보였고, 앞으로 살날이 몇 개월이나 남았을까 싶은 인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