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라틴어 격언집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 지음 | 노마드
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라틴어 격언집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 지음
노마드 / 2021년 5월 / 352쪽 / 19,800원
나를 부끄럽게 하는 것들_ 시기심과 우둔함
가까울수록 시기심도 크다Cognatio movet Invidiam 우리는 잘 모르는 사람의 행운에는 거의 시기심을 느끼지 않는다. 같은 학교나 대학 또는 같은 부대에 속한, 우리에게 좀 더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질투한다. 우리와 친숙한 관계를 맺은 사람, 같은 사업을 하며 함께 어울리는 사람, 같은 사업을 하며 함께 어울리는 사람, 우리와 비슷한 부류에 속한 사람이 큰 성공을 거두면 심기가 불편하다. 하지만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사람이 성공을 거두면 이런 증오의 감정, 울화통까지 치밀지는 않는다. 이런 감정은 건강을 해치고 심한 경우 사람을 우울감에 빠져들게 하거나 심지어는 미치게 만든다.
크리소스토무스는 이렇게 말한다. “옷좀나방에 옷이 좀먹듯 꼭 그렇게 사람은 질투심에 휩싸이네. … 질투란 녀석은 훌륭한 덕성을 슬쩍 맛만 보아도 배가 터질 것 같다며 넌더리를 낸다네.” 조너선 스위프트도 비슷한 생각을 표현했다. “오, 운명의 여신이여. 내 적에게는 얼마든지 선물을 보내도 좋소. 하지만 친구에게 보내는 건 못 견디겠소. 견디기는커녕 질투심에 못 이겨 폭발하고 말 거요.”
저마다 자기 일에 관심 갖는 게 인지상정Suam quisque homo rem meminit로마의 희극작가 플라우투스의 말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 자신의 이익에 무척 민감한다. 따라서 그들이 당신에게 성실히 봉사하기를 바란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의 이익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을 그대 평생의 철칙으로 삼아야 하느니,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남이 해 주도록 떠넘기지 마라.” 이와 비슷하게 영국 사람들은 “자기 일을 스스로 챙기는 사람을 친구들도 좋아한다”고 말한다.
곡물 밭에 둥지를 튼 종달새는 농부가 곡물 수확에 이웃과 친구의 도움을 빌릴 것이라는 소식을 들을 때만 해도 둥지 옮기는 일을 서둘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날 밭주인이 아들들과 함께 밭을 향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새끼들이 전하자 종달새는 곡물 수확이 진짜로 시작될 것이니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고 말했다. 베네치아의 어느 귀족이 코시모 데 메디치를 찾아가 어떻게 하면 재산을 늘릴 수 있는지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은 규칙을 건네주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말 것.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 것. 사소한 일도 소홀히 하지 말 것.”
재앙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사람들을 더 큰 위험에 빠뜨린다Multos in summa Pericula misit, Venturi Timor ipse Mali 사람들은 자신을 위협하고 있는 재난을 두려워한 나머지 생각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판단력을 완전히 상실한다. 그래서 평온한 마음 상태였더라면 불행을 피할 수단을 충분히 찾아 활용했을 터이지만 이를 보지도 이용하지도 못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옆에서 보는 사람들 눈에는 그들이 무언가 은밀한 충동에 사로잡혀 있거나 아니면 무언가에 홀린 듯 보인다.
새가 뱀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뱀으로부터 벗어날 힘을 잃는 것은 순전히 두려움 때문이다. 새는 그 끔찍스러운 상대로부터 얼굴을 돌릴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뱀을 향해 더 가까이 다가가 결국 정신을 놓고 맥이 완전히 빠진 채 뱀의 턱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두려움이 없을수록 그만큼 위험도 덜하다”는 또 다른 속담도 있다. 반대로 에스파냐에서 “두려움이 없다 보면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속담이 있지만, 여기에서 ‘두려움’은 단순히 ‘조심’이나 ‘주의’를 의미한다.
잘난 척도 정도껏!_ 허세와 위선
악어의 눈물Crocodili lachrymae‘악어의 눈물’은 거짓 눈물 또는 위선적인 행동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악어는 입안에 수분을 보충하여 먹이를 쉽게 삼키기 위해 먹잇감을 잡아먹을 때 눈물을 흘리는데, 언뜻 보면 잡아먹히는 동물이 불쌍해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이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얼굴 신경 마비의 후유증으로 음식을 먹을 때 침샘과 눈물샘의 신경이 함께 자극되어 눈물을 흘리는 증상을 ‘악어 눈물 증후군’이라고 하는데, 악어가 먹이를 먹을 때 눈물을 흘린다는 것에 빗대어 이와 같은 이름이 붙었다.
찰스 다윈은 『인간 및 동물의 감정표현』에서 암코끼리에게서 새끼 코끼리를 떼어 데려가면 슬퍼서 눈물을 흘린다고 적고 있다. 실제로 코끼리는 인간에게 붙잡혀 고통을 당하면 슬픔을 느끼고 울면서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의 눈물은 몇 가지 상황에서 나온다. 상처를 받아 고통을 느낄 때와 슬플 때뿐만 아니라 기쁠 때도 눈물을 흘린다.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는 『정념론』에서 눈물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체의 모든 부위에서 다량의 증기가 발생하는데, 그중 눈의 시신경이 굵기 때문에 눈에서 가장 많이 증기가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피부로 흘러나오면 땀이고, 눈으로부터 흘러나오면 눈물이라는 것이다. 즉, ‘증기의 배출’이 눈물이라는 것이다.
귀게스의 반지Gygis annulus 이 말은 의롭지 못한 사람이 정의로운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나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마치 마법의 바람이 가져다주듯 모두 얻는 사람을 가리킨다. 로마 시대의 단편 작가로 그리스 문학에 능통했던 루키아노스는 『진실한 이야기』에서 이 말을 언급했다. 어떤 이가 귀게스의 반지와 같은 반지들을 소망했는데, 그 하나로는 부자가 되고, 다른 하나로는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얻고, 또 다른 하나로는 상상하는 곳 어디로든지 갈 수 있는 반지였다는 것이다.
이 격언은 플라톤이 『국가』 제2권에서 전하는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리디아 왕국의 창시자인 귀게스는 원래는 그곳을 다스리는 황의 목동이었다. 어느 날 무서운 폭풍이 몰아치고 맹렬한 폭우가 쏟아지고 번개가 치면서 지진이 일어났다. 귀게스가 양 떼를 돌보고 있던 곳의 대지도 크게 갈라졌다. 다른 목동들은 겁에 질려 모두 달아났고, 홀로 남은 귀게스는 벌어진 대지의 입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신기한 것이 많이 있었다. 그 가운데 속이 빈 거대한 청동 말이 있었는데, 뒤꽁무니 쪽의 커다란 입구가 열려 있었다. 들여다보니 보통 사람보다 덩치가 훨씬 큰 사내의 시체가 말의 복부에 안치되어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으며 부장품도 없었지만, 손가락에 반지 하나를 끼고 있었다. 귀게스는 그 반지를 빼서 그곳을 빠져나왔다.
며칠 후 왕의 가축들을 돌볼 사람을 뽑는 자리에 참석하게 된 귀게스는 무심코 끼고 있던 반지의 흠집 난 곳을 안쪽으로 돌렸는데, 주변사람들은 마치 그가 자리에 없는 듯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렇게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그는 깜짝 놀랐다. 그가 다시 반지를 바깥쪽으로 돌리자 그때는 다른 목동들이 그를 볼 수 있었다. 귀게스는 조심스럽게 몇 번을 시험해 본 뒤 그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목동들을 꾀어 자신을 왕의 시종으로 뽑도록 만든 귀게스는 왕궁으로 들어갔다. 그 후 ‘보이지 않게 하는 힘’을 갖게 된 귀게스는 왕의 아내를 유혹했고 결국 왕을 살해하고 왕의 아내와 결혼해 자기가 왕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반지 덕분이었다.
플라톤은 이 이야기를 『국가』 제 10권에서 다시 한 번 서술했고, 키케로는 『의무론』 제3권에 이 이야기를 실었다. 헤로도토스는 『역사』 제1권에 귀게스의 이야기를 수정해서 실으면서 반지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오래된 옛날 미신을 믿는 사람들은 반지에 여러 가지 능력이 들어 있다고 믿었다. 야수를 피하기 위해, 추문을 피하기 위해, 또는 액운을 피하거나 행운이 찾아오길 바라며 반지를 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대표적인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부』에서 디카이오폴리스라는 농부는 아첨꾼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에우다모스에게서 1드라크마를 주고 산 반지를 끼고 있으니까.” 그리고 다시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저 아첨꾼의 공격을 당해 내는 데 전혀 효험이 없다.”
침묵이 수치다Turpe silere 카케로의 말이다. 만일 동료 시민이나 자신과 연관된 사람들에게 득이 될 만한 것을 가르칠 능력이 스스로에게 있음을 아는데도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수치스러운 일이거나 죄를 짓는 일일 수도 있다. 알렉산더 포프는 『비평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허세를 부리며 조언을 아끼는 자가 되지 마라. 가장 나쁜 탐욕은 지식에 대한 탐욕이거늘.”
또한 이 격언은 어떤 예술이나 직업에 몸담아 영예를 얻은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자신보다 그런 영애를 누릴 자격이 덜하다고 느꼈을 때 나올 법한 말이기도 하다. ‘지금부터 분발하자. 그래서 나의 모습이 무능력 탓이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자제해 온 탓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자. 더 이상 침묵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이 격언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아테네에 올빼미를 보내는 격Ululas Athenas portas‘부엉이를 아테네로 보내다’라는 말은, 어떤 물건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고장에 그 물건을 팔려고 가져가는 어리석은 상인에게 잘 어울린다. 예를 들면 “밀을 이집트로 가져간다”거나 “바다로 물 나르는 일”을 가리킨다. 영국의 속담 “뉴캐슬로 석탄 나르기”와 에스파냐의 속담 “양봉업자에게 꿀 팔기”나 “에스키모족에게 얼음을 파는 일”도 마찬가지 뜻이다. 또한 “(당대 최고의 부자 국왕으로 알려진) 크로이소스의 재산에 동전 한닢 얹는 꼴”이기도 하다.
이 격언은 이미 파다하게 퍼진 이야기를 마치 새로운 소식인 양 말하는 사람이나 어떤 기술에 정통한 사람 앞에서 그 기술을 가르치려 드는 사람에게도 쓸 수 있다. 부자에게는 선물을 보내면서 정작 그런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를 친구나 친척은 모른 체하는 사람도 이 격언이 주는 꾸지람을 들을 만하다.
이 은유를 정신적인 영역으로 옮겨 보자. 자신보다 더 현명한 사람을 가르치려 들거나, 시인에게 시를 보낸다거나, 탁월한 원로원 의원에게 정견을 펼치려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키케로는 로마의 집정관을 지낸 정치인 토르콰투스에게 “내가 이것(정치 문제)를 당신에게 말한다면 다시 한 번 부엉이를 아테네로 가져가는 꼴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격언은 부엉이가 아티카 지방에 많이 서식하고, 아마도 그 지역을 대표하는 것이기에 생겨났을 것이다. 부엉이는 아티카 지방에서도 금광이 있는 라우리온에 주로 서식한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라우리온의 부엉이’라고도 했다.
아테네 사람들은 예로부터 이 새를 매우 좋아했다. 부엉이는 다른 새들과 달리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알아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어 아테나 여신에게 바쳐졌는데, “부엉이가 날아간다.”는 격언은 길조를 뜻했다. 아테네 시민은 자신들이 잘못된 결정을 내려도 결국 아테나 여신이 좋은 결과를 얻도록 도와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희극 시인 아리스토파네스는 『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도대체 어떤 자가 부엉이를 아테네로 가져간단 말입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주석가들에 따르면, 아테네에 부엉이가 많이 살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아테네의 금화와 은화에 모두 ‘지혜의 여신’ 아테나와 그녀의 상징인 부엉이가 새겨져 있기 때문에 이 말이 나왔다고 한다. 이 주화는 테트라드라크몬이라 하는데, 말 그대로 4(Tetra)드라크마짜리다.
어떤 사람들은 아테네에서 사용되던 트리오볼루스라는 동전을 이유로 삼았다. 1/2드라크마(1드라크마=6볼루스)의 값어치를 가진 트리오볼루스의 한쪽 면에는 아테나가, 반대쪽 면에는 부엉이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아테네 곳곳에 부엉이가 많기 때문에 아테네로 부엉이를 가져가는 일은 쓸데없는 짓이 아닌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뤼산드로스>편에도 이 격언이 언급되고 있다. 어떤 노예가 집 안에 든 도둑에게 “지붕 밑에 부엉이들이 잠자고 있다”고 귀뜸을 해 주었고, 도둑은 그 말을 듣고 부엉이가 새겨진 동전들이 지붕 밑에 숨겨져 있음을 금방 알아챘다고 한다.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당신에게_ 사랑과 우정
불행도 함께 겪을 벗이 있으면 위안이 된다Dulc est miseris socios habuisse doloris 로마의 철학자 루크레티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해안에서 폭풍우로 난파될 위기에 처한 배를 바라보거나 성채 창문 너머로 전투를 구경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오랜 사투 끝에 결국 바다 한가운데서 목숨을 잃을 불행한 자들의 고통을 기뻐하거나 전쟁 중에 죽거나 다칠 사람들의 운명에 즐거워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너무도 많은 인간이 처해 있는 위험으로부터 자신이 비켜서 있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이다. 따라서 곤경에 처한 우리가 그것을 함께 겪을 벗이 있다는 데서 경험하는 위안은, 다시 말해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통과 유사한 고통을 겪고 있는 타인을 발견함으로써 얻는 위안은 고통을 겪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타인에 비해 유독 자신에게만 더 큰 불행이 닥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오는 안도감이다.”
어려움과 불행한 일이 있을 때마다 그 형태를 불문하고 큰 고통이 뒤따른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유독 더 큰 불행이 닥친다. 전염병이든 화재든 홍수든 모든 이들이 함께 겪는 재난 상황에서 반드시 평균 이상의 불행을 겪는 이들이 생긴다. 이럴 때 함께할 벗이 있다면, 커다란 위안을 얻지 않을까.
그러나 처형당하는 사람을 구경하려고 기를 쓰고 몰려드는 사람들의 감정은 설명할 것인가?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비참한 광경이라 할 만한 상황을 지켜보려는 자발적인 구경꾼이다. 더구나 거기에는 공포스러운 상황이 수반되기도 하며 죄인에게는 죽음을 통해서만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잔인한 고문이 자행되기도 한다. 이러한 성향을 단순한 호기심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단지 인간의 힘이나 용기가 이런 극한의 불행을 어떻게 견뎌 내는지 지켜보고 싶다는 욕망 탓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여리고 섬세한 심성 탓에 그러한 광경에 어울리지 않을 듯한 여성은 이런 처형 장면을 구경하러 가는 사람 중에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과연 그럴까?
몬터큐 부인은 『서간집』 제4권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성 대부분이 집안 살림은 모두 내팽개치고,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분별력까지 잃게 하는 대중적 구경거리와 오락에 앞 다투어 달려드는 사태를 오래전부터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페러스 경에 대한 선고 현장을 지켜보기 위해 많은 여성이 상원 의사당에 몰려들었다는 최근의 소식은 나를 특히나 화나게 했다. 페러스 경은 살인 사건을 저질러 조상과 가문의 이름을 더럽힌 죄로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여성들은 이 범죄자에게 가혹하고 치욕스러운 사형이 선고되는 모습을 보기 위해 그 자리에 몰려든 것이었다. 이 사건에는 인간 본성과 시민적 기품에 철저히 먹칠을 하는 무언가가 존재했다. 하지만 여성들에게 그것은 구경거리에 불과했다. 여성들은 배려심과 우아함으로 철저히 위장했지만, 온갖 장신구로 치장을 한 채 그곳에 가서 참으로 끔찍스러운 상황에 처한 한 동료 인간이 이승과 서글피 작별하며 다음 생에 대한 두려움으로 떠는 모습을 웃으며 즐겼다.”
간결하고 분명하게_ 순리와 원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