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혼란의 시대
아미타브 고시 지음 | 에코리브르
대혼란의 시대
아미타브 고시 지음
에코리브르 / 2021년 4월 / 256쪽 / 15,000원
문학내 조상들은 생태 난민이었다. 지금의 방글라데시 출신인 그들이 살던 마을은 그 지역에서 가장 장대한 수로 가운데 하나인 파드마강의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아버지가 들려주신 바에 따르면 사연인즉슨 이랬다. 1850년대 중반의 어느 날, 그 거대한 강이 느닷없이 진로를 바꾸면서 마을을 집어삼켰다. 거주민 가운데 일부만이 가까스로 높은 지대로 피신할 수 있었다. 우리 조상들이 제가 살던 보금자리를 떠나게 만든 게 바로 이 재앙이었다. 그 여파로 그들은 서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이주 물결은 그들이 다시 비하르주의 갠지스강 강둑에 정착한 1856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쳤다.
내가 가족사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우리가 증기선을 타고 파드마강을 따라 여행할 때였다. 당시 어린아이였던 나는 소용돌이치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거대한 폭풍우를 떠올렸다. 그리고 아녀자와 아이들이 미친 듯이 달려드는 물을 피해 도망치는 장면을 그려보았다. 또한 나의 조상들이 튀어나온 바위에 앉아서 방금 전까지 살았던 마을이 물에 잠기는 광경을 망연히 바라보는 모습을 상상했다. 오늘까지도 내 삶에 영향을 끼친 환경에 대해 생각할 때면, 나는 언제나 우리 조상들을 삶터에서 내몰고 일련의 여정에 나서도록 이끈 자연의 힘을 떠올린다. 나의 과거를 돌아보면 그 강은 마치 “어디에 있든 너는 나를 인식하는가?”라고 묻는 양 나와 눈을 맞추고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것 같다.
인식(recognition)은 모름에서 앎으로의 전환이다. 따라서 인식한다는 것은 처음 알게 된다는 것과는 다르다. 게다가 말의 주고받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즉 대체로 우리는 말없이 인식한다. 또한 인식한다는 것은 결코 무엇이 눈에 보이는지 이해하는 게 아니다. 이해는 인식의 순간에 아무 역할도 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인식이라는 단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과거의 무언가, 즉 모름에서 앎으로의 전환을 가능케 하는 과거의 의식을 상기시키는 그 단어의 첫 번째 음절(re)이다.
요컨대 우리 앞에서 과거의 의식이 번쩍 살아나며 우리가 바라보는 것을 이해하는 데 즉각적 변화를 일으키는 순간, 바로 그때가 인식의 순간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식의 점화가 저절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따라서 인식을 통한 앎은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할 때와는 다른 종류의 앎이다. 그것은 오히려 마음속에 깔린 잠재성을 새롭게 알아차리는 데서 비롯된다. 나는 이것이 강물이 불어나서 마을을 집어삼킨 날 우리 조상들이 경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제 삶을 형성해주었으나 마치 매일 호흡하는 공기처럼 더없이 당연하게 여겨온 존재를 새삼스레 인식하게 되었다.
물론 공기 역시 느닷없이 지극히 폭력적으로 살아 움직일 수 있다. 1986년 카메룬의 사례가 그러하다. 니오스 호수에서 갑자기 분출한 대량의 이산화탄소가 인근 마을을 뒤덮어 주민 1,700명과 막대한 수의 동물을 죽음으로 내몬 사건이다. 하지만 더 흔하게 공기는 은근슬쩍 제 존재를 과시한다. 뉴델리와 베이징(둘 다 대기 오염이 심각한 대도시의 예)의 거주민들은 익히 알고 있다시피, 폐와 부비강의 염증은 다시 한 번 안과 밖이, 사용하는 것(using)과 사용되는 것(being used)이 별 차이가 없음을 보여준다. 이 역시 인식의 순간으로, 우리는 그러한 인식을 통해 분명하게 깨닫는다. 우리 발밑으로나 내벽에 내장된 전선을 타고 흘러서 자동차를 굴러가게 만들고 방의 조명을 밝혀주는 에너지가 우리로서는 알 길 없는 저만의 목적을 지닌 채 모든 것을 아우르는 존재임을 말이다. 내가 비인간 존재들 역시 그와 대단히 유사하다는 걸 인식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다. 나를 둘러싼 환경이 내게 강제한 인식의 순간을 거치면서 말이다. 나는 마침 벵골만 삼각주의 드넓은 맹그로브 숲인 순다르반스에 관한 글을 쓰고 있었다. 벵골만 삼각주에서는 물과 토사의 흐름이 어찌나 활발한지 보통 오랜 기간에 걸쳐 전개되는 지질학적 과정이 마치 주나 달 단위로 달라지는 듯 보인다. 그렇게 되면 하룻밤 사이에 일대의 강둑이 사라지면서 가옥을 집어삼키고 사람들 목숨을 앗아간다. 하지만 다른 곳에는 얕은 모래톱이 솟아오르고 몇 주 내로 해안이 몇 미터가량 넓어지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대개 주기를 띤다. 그러나 우리는 21세기가 시작되는 처음 몇 년 동안에조차 해안 지대가 점차 줄어드는 현상, 전에 경작지이던 땅에 바닷물이 들이닥치는 현상 따위를 통해 서서히 늘어가는 비가역적인 변화의 조짐을 엿볼 수 있었다. 이는 더없이 역동적인 풍경이라서 바로 그 풍경의 변화 가능성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식의 순간을 낳는다. 나는 당시 이런 순간 가운데 몇 가지를 포착해 기록해두었다. 2002년 5월에 적어놓은 다음 글귀가 그중 한 가지 예다. “나는 확실하게 믿는다. 이곳 땅이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살아 있다는 것을, 그것이 오직, 혹은 심지어 우연히, 인간 역사가 펼쳐지는 무대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또 다른 날의 기록은 이랬다. “이곳에서는 심지어 어린아이조차 할머니에게 들은 말을 다음과 같이 읊조릴 것이다. ‘당시에 강은 여기 있지 않았고, 마을도 지금 있는 데가 아닌 장소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뜻밖의 만남을 인식의 예로 언급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우리 가족의 조상들이 살던 마을을 돌아보러 갔던 어릴 적 경험, 다카에서 집 뒤쪽의 작은 방죽이 갑자기 호수로 변해 우리 집을 덮치게 만든 사이클론에 대한 기억, 혹은 힘차게 흐르는 강의 가장자리에서 나고 자란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 벵골의 풍경이 그 지역 예술가와 작가 그리고 영화 제작자에게 끼친 영향 등을 통해 내가 목격하고 있는 것에 대한 과거 인식이 내 속에 이미 각인되어 있지 않았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각을 창작자로서 삶의 매개, 즉 소설로 번역해내는 문제와 관련해 나는 나 스스로가 이전 작품에서 마주한 도전과는 전혀 다른 유의 도전에 직면했음을 발견했다. 그때 당시 맞닥뜨린 도전은 내가 과거에 쓴 책 『굶주린 조수』에만 해당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지금, 즉 점점 더 심화하는 지구 온난화의 영향이 순다르반스 같은 저지대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기 시작한 시대에, 내게는 그 문제들이 훨씬 더 큰 함의를 지니게 된 것 같다.
나는 기후변화가 오늘날의 작가들에게 제기하는 도전은, 비록 어느 면에서 특수하다고도 볼 수 있지만, 좀 더 유구하고 좀 더 광범위한 어떤 것이 초래한 결과임을 깨달았다. 또한 그 도전이 궁극적으로는 대기 중에 쌓여가는 탄소가 지구의 운명을 새로 쓰고 있는 바로 그 시대에, 이야기 창작에 영향을 미친 문학 형식과 관습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아차렸다.
기후변화가 심지어 공적 영역에보다 문학 소설 세계에 훨씬 더 옅은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사실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저 〈런던 리뷰 오브 북스〉, 〈로스앤젤레스 리뷰 오브 북스〉, 〈리터러리 저널〉 등 높이 평가받는 문학 저널과 북 리뷰를 몇 쪽만 대충 훑어보는 것으로도 족하다. 이들 출판물에서 기후변화 주제를 다룰 때면 그것은 거의 언제나 논픽션과 관련이 있다. 장편소설이나 단편소설은 이 영역에서 도통 찾아보기 어렵다. 실제로 기후변화를 다루는 소설은 거의 그 정의상 순수 문학 저널이 관심 있게 다루는 그런 유의 소설이 아니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어떤 장편소설이나 단편소설이 그 주제를 언급하기만 해도 그 작품은 흔히 공상과학 소설 장르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문학 창작 영역에서 기후변화는 마치 외계인이나 행성 간 여행 비슷한 어떤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듯하다.
이 특이한 피드백 순환 고리에는 혼란스러운 뭔가가 있다. 삶을 변화시킬 가능성이 있는 위험에 눈감은 진지함의 개념이란 상상하기 어렵다. 그리고 어떤 주제의 시급성이 그것을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기준이라면, 기후변화가 실제로 지구 미래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고려하는 것은 전 세계의 작가들이 깊이 고민해볼 주요 관심사여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와 거리가 멀다. 왜 그럴까?
온난화 추세가 너무 거세어서 기존의 내레이션이라는 익숙한 배를 타고서는 항해를 할 수 없기 때문일까? 그러나 이제 우리는 엄연히 거센 지구 온난화 추세가 ‘새 기준’으로 자리 잡은 시대에 접어들었다. 만약 특정 문학 형식이 이러한 추세를 반영할 수 없다면, 그것들은 실패하게 될 테고, 그 실패는 기후 위기의 핵심을 이루는 좀 더 광범위한 창작적ㆍ문학적 실패의 한 축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 문제가 정보 부족에서 비롯된 게 아님은 확실하다. 오늘날 기후 시스템이 혼란을 겪고 있음을 모르는 작가는 거의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소설가가 기후변화에 관한 글을 집필하기로 결정할 때, 그것은 소설 밖에서 이루어지는 일임이 분명하다. 거기에 들어맞는 사례가 아룬다티 로이의 작업이다. 그녀는 우리 시대의 가장 걸출한 산문 작가 중 한 사람일 뿐 아니라 기후변화 문제에 정통하고 그에 대한 열정도 남다르다. 하지만 그녀가 이 주제와 관련해 쓴 글은 모조리 다양한 형태의 비문학이다.
좀 더 분명한 예는 역사 소설 『더 웨이크』의 저자 폴 킹스노스다. 그는 자신의 생애 몇 년을 기후변화 운동에 헌신했고, 그런 다음 “우리의 문명이 스스로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를 믿지 않는 작가ㆍ예술가ㆍ사상가 네트워크”인 영향력 있는 ‘다크 마운틴 프로젝트’를 창립했다. 그런데 그는 저항 운동에 관해 강력한 비문학 저술을 집필했지만, 아직까지 기후변화를 전면에 내세운 소설은 출간하지 못하고 있다. 오랫동안 기후변화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온 나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내가 쓴 소설에는 그 주제가 오직 간접적으로만 모습을 드러낸다. 이처럼 나의 개인적 관심사와 내가 출간한 작품 내용 간의 괴리에 대해 곰곰이 따져본 나는 그 간극이 개인적 선호의 결과가 아니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것은 오늘날 순수 소설로 간주되는 것이 기후변화에 대해 드러내는 독특한 형태의 저항 탓이다.
디페시 차크라바르티는 자신의 에세이 〈역사의 기후〉에서, 사가들은 인류세(Anthropocene)라 불리는 이 시대, 즉 “인간이 지질학적 행위체가 됨으로써 지구의 가장 기본적인 물리 과정을 변화시키고 있는 시대”에 그들이 지닌 근원적 가정과 절차를 상당수 수정해야 할 거라고 주장한다. 나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인류세가 예술과 인문학뿐 아니라, 우리의 상식적 이해와 그를 넘어선 오늘날의 문화 전반에도 도전을 제기한다고 덧붙이려 한다. 물론 이 도전이 일면 우리가 기후변화를 이해하도록 돕는 창문 역할을 하는 기술적 언어의 복잡성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도전이 예술과 인문학을 안내하는 관례와 가정에서 기인하기도 한다는 사실 역시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규명하는 일이 우리의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마도 오늘날의 문화가 왜 기후변화에 대해 다루는 일을 그토록 어려워하는지 이해하는 데서 핵심 열쇠일 것이다. 실제로 이는 가장 넓은 의미의 문화와 맞서는 데서 가장 중요한 문제다. 분명하게 말하건대 기후 위기는 문화의 위기이고, 따라서 상상력의 위기이기도 하다. 문화는 욕망 - 자동차나 기기에 대한 욕망, 그리고 어떤 유의 정원과 주택에 대한 욕망 - 을 창출하는데, 바로 그 욕망이 탄소 경제를 이끌어가는 주된 추동력이다. 우리가 속도 빠른 컨버터블 자동차에 흥분하는 것은 금속이나 크롬 도금을 좋아하기 때문도, 자동차공학에 대한 추상적 이해 때문도 아니다. 대신 그 자동차가 원시적 풍경 속에 길게 뻗은 도로 이미지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자유에 대해, 그리고 우리의 머리를 가르는 바람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수평선을 향해 돌진하는 피터 폰다와 제임스 딘을 머릿속에 그린다. 그리고 아부다비나 캘리포니아주 남부 혹은 그와 비슷한 환경에서 사람들이 푸른 잔디밭에 담수화한 바닷물을 마구 뿌려대는 광경을 볼 때, 우리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이 산파역을 맡았을 갈망의 표현을 보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갈망이 만들어낸 인공물과 상품은 어느 면에서 그 욕망을 낳은 문화적 기반의 표현물이기도 하고 그 은폐 장치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화는 물론 그간 세상을 주조해온 더 넓은 제국주의 및 자본주의 역사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안다 해도 여전히 그 토대가 다양한 양식의 문화 활동 - 시, 미술, 건축, 영화, 산문 소설 등 - 과 상호 작용하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거의 알 길이 없다. 전 역사에 걸쳐 이러한 여러 문호 영역은 전쟁, 생태계 재난,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위기에 반응해왔다. 그런데 기후변화는 어째서 그러한 관례와 그토록 특이하다 할 만치 불화하는가?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의 작가와 예술가들이 직면한 문제는 탄소 경제의 정치 문제에 그치는 게 아니다. 그 상당수는 좀 더 넓은 문화의 은폐에 연루되도록 만드는 우리의 관례나 방식과도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보자. 만약 오늘날의 건축 추세가 심지어 탄소 배출량이 급증하는 시기임에도 유리와 금속으로 장식한 으리으리한 고층 빌딩을 선호한다면, 우리는 응당 이런 태도에 의해 충족되는 욕구 유형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만약 소설가인 내가 등장인물을 묘사하는 요소로서 상표명을 사용하기로 결정한다면, 나는 스스로에게 이것이 나를 어느 정도로까지 시장의 조작에 가담하도록 만드는지 물어야 하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나는 다음과 같이 질문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후변화라는 주제는 순수 소설 영역으로부터 배척당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또한 이것이 광의의 문화와 그 회피 형태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는 무엇인가?
해수면 상승으로 순다르반스의 맹그로브 숲이 물에 잠기고, 콜카타ㆍ뉴욕 같은 도시가 거주 불능 장소로 전락하는 등 몰라보게 바뀐 세상에서 책을 읽는 독자나 박물관을 찾는 관람객이 우리 시대의 예술과 문학에 기댈 때, 그들은 맨 먼저 그리고 가장 시급하게 제가 물려받게 될 세상이 달라지리라고 말해주는 조짐과 흔적을 찾지 않을까? 그런데 만약 그런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들로서는 우리 시대가 대다수 예술 및 문학 형식의 은폐 양식에 의존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가 처한 곤경의 실상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막는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그들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스스로의 자기 인식을 더없이 자랑스러워하는 우리 시대는 ‘대혼란’의 시대로 알려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
역사인류세와 오늘날의 기후 위기를 기술하는 데 자본주의가 내러티브를 전개하는 중심축이 되는 경우는 너무나 흔하다. 이에 대해 시비할 생각은 없다. 내가 보기에 나오미 클라인을 비롯한 이들은 올바르게도 자본주의가 기후변화를 추동하는 주요인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내러티브가 흔히 그만큼이나 중요한 인류세의 또 한 가지 측면을 간과하곤 한다고 믿는다. 바로 제국과 제국주의다. 자본주의와 제국은 분명 단일한 실재의 양면이긴 하지만, 둘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으며 과거에도 단순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지구 온난화와 관련해 자본과 제국의 명령이 더러 상반된 방향에서 압박을 가함으로써 이따금 직관에 반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제국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기후 위기를 바라보면, 아시아 대륙이 지구 온난화의 모든 측면 - 온난화의 원인, 그것의 철학적ㆍ역사적 함의 - 에, 그리고 전 세계가 그에 대해 반응할 가능성에 결정적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지니는 함의는 지금껏 거의 무시되다시피 했다. 이는 아마도 인류세, 그리고 일반적으로 기후 문제를 둘러싼 담론이 유럽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것이 바로 아시아가 기후 위기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다는 주장을 좀 더 들여다보아야 하는 이유다.
아시아가 지구 온난화에서 중심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그곳에 거주하는 인구수 때문이다. 기후변화의 잠재적 피해자 대다수는 아시아에 있다. 그렇다 보니 지구 온난화가 인간에게 미치는 파급력이 크게 증폭되고 있다. 가령 벵골 삼각주를 예로 들어보자. 벵골 삼각주는 세계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 가운데 하나다. 벵골의 범람원은 예컨대 태평양의 섬나라 투발루처럼 그렇게 빠르게, 그렇게 완전하게 물에 잠길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투발루 인구는 채 1만 명이 되지 않는 데 비해 방글라데시에서는 단 한 개 섬 - 볼라섬 - 의 일부가 범람했을 때 50만여 명이 전치(轉置)를 겪은 일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