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화륜선 타고온 포크, 대동여지도 들고 조선을 기록하다

조지 클레이튼 포크 지음 | 알파미디어


화륜선 타고 온 포크, 대동여지도를 들고 조선을 기록하다

사무엘 홀리 엮음

알파미디어 / 2021년 2월 / 450쪽 / 19,000원



편자 서문


1884년 11월 1일 미국 해군소속 조지 포크 소위는 조선의 수도 한양을 출발하여 조선의 남쪽 지역을 관통하는 900마일의 고된 여행을 시작했고, 길 위에서 보낸 44일 동안 경험하고 관찰한 내용을 2권의 노트 380페이지에 걸쳐 자세하게 기록했다. 이 여행기는 버클리 대학의 반크로프트 도서관에 조지 클레이튼 포크 관련 수집품 중 일부로 소장되어 있는데, 이 여행기는 포크가 나타나기 이전까지의 그 어떤 서양인도 경험한 적이 없었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는 다시는 할 수 없는 유일한 기록이다.

포크는 조선 왕조의 고위 관리나 정부 관리가 하는 방식대로 가마를 타고 기나긴 여정을 소화해 냈다. 여행 중에 포크는 새로운 발견과 놀라운 광경을 보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여행의 순간에서 느꼈던 감정까지도 현장에서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기록했다. 또한 이 여행기는 서양인의 눈에 비친 1880년대의 조선을 깊은 통찰력으로 묘사한 독특한 기록물이다. 당시 포크는 한국어를 할 수 있는 극소수의 인물 중 한 명이었고, 조선의 문물에 가장 박식한 서양인으로서 조선인들과 직접 교류할 수 있었다. 포크는 묘사력이 뛰어난 글 솜씨로 여행했던 지역의 모습을 자세하고 생생하게 그려냈다.

조지 클레이튼 포크는 1856년 10월 30일 펜실베이니아의 메리에타에서 태어났다. 그는 1876년 메릴랜드 아나폴리스에 위치한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태평양과 아시아에 주둔하는 미국의 해군 전력인 아시아 분함대에 복무하기 위해, 선체가 쇠로 만들어진 증기선인 앨러트호(Uss. Alert)의 선원으로 합류한다. 그는 총 6년의 기간을 함대에서 근무했다. 근무하던 배가 일본 항구에 자주 드나드는 동안 그는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면서 학구적인 자세와 열성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1883년 서구를 향한 첫 번째 조선 사절단이 미국에 도착했을 때 통역 역할을 할 수 있던 사람은 미국 정부 내에서 포크가 유일했다. 그는 뉴욕, 보스턴, 워싱턴 D.C.를 순회하는 사절단과 함께 동행하는 임무를 부여받았고, 여행이 끝날 무렵, 포크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은 정사 민영익은 포크가 조선의 사절단과 동행하여 귀국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미국 해군과 국무부는 해군 무관이라는 직책을 새로 만들고 그 자리에 포크를 임명하여 아직 해군 편제가 없는 조선으로 파견했다.

11월 19일 그는 민영익과 사절단의 서열 3위인 서광범, 수행원 변수와 함께 트렌턴 호(Uss. Trenton)를 타고 뉴욕을 떠났다. 배는 유럽과 수에즈 운하를 거쳐 조선으로 향했다. 트렌턴 호는 1884년 5월 31일 제물포에 정박한다. 그리고 다음 날 포크는 해군 무관의 임무를 맡기 위해 서울로 출발했다. 그는 국무부와 해군으로부터 조선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가능한 한 최고의 관계를 유지”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포크는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임무에 착수했다. 날마다 조선인과 대화하면서 언어 능력을 키웠고 중요 관리와 유대관계를 맺었다. 정부와 문화, 주민에 대해, 또 중국, 일본, 영국, 러시아 사이에 놓인 위태로운 지정학적 위치에 대해 공부했다. 실제 한국어 실력이 늘면서 포크는 곧 그의 상관이자 첫 번째 조선 주재 미국 공사인 루시우스 푸트보다 한국을 더 잘 이해했다.

조선에 관한 보다 나은 정보를 모으기 위해, 포크는 조선을 여행할 일련의 계획을 세운다. 처음에 그는 3번의 여행을 할 생각이었다. 첫 번째는 경기도 중심부, 두 번째는 조선의 남반부를 가로지르는 계획, 마지막 세 번째는 북부 지방을 가로지르는 계획이었다. 그는 처음 두 번의 여정은 마무리했다. 하지만 세 번째는 떠나지 못했다. 1885년 1월, 그는 푸트 대사의 이임으로 대리공사로 임명된다. 일시적인 조치였지만 2년 가까이 지속되는데, 이 2년이 포크에게는 고난의 시기가 되었던 것 같다.

그는 서기 한 명도 두지 못한 채 미국을 대표해야 했을 만큼 본국에서 전혀 도움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도 조선인들은 서울의 다른 어떤 국가의 외교관보다 그에게 더 많은 도움과 조언을 구했다. 나라를 어떻게 근대화시킬지, 그리고 중국, 일본, 서구와 같은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경쟁 속에서 나라의 독립을 어떻게 지켜낼지에 관한 문제들이었다. 포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능한 도움을 모두 제공했다. 이렇게 돕는 과정에서 그는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는 직설적인 발언으로 베이징(청나라)과 불화를 일으키게 되는데, 이 문제는 결국 미 국무부가 그를 소환하는 원인이 되고 만다. 미중 관계를 완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1887년 6월 조선을 떠났고, 6년 뒤 일본에서 36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조지 클레이튼 포크의 1884년 조선 여행 일기


여행 일행은 다음과 같다. 조지 C. 포크[복구(福久)], 미 해군 소위 / 전양묵, 양반 / 정수일, 포크의 수행원 / 가마꾼 12명 / 말몰이 소년 2명(12월 5일 공주에서 한 명이 합류하여 3명이 된다) / 하인 1명 / 총계: 사람 18명, 말2마리, 보교 3대, 트렁크 5개, 손가방 3개, 사진기, 총기 상자, 돈 바구니

1884년 11월 1일 한양을 떠나 삼남대로 남행길을 시작하다


오전 8시 58분에 집을 나섰다. 날씨는 맑고 깨끗했다. 9시 58분에 밥전거리에 도착했다. 단천 부사, 두 문의 파운드 포, 기타 행렬의 바로 뒤편에서 우리 일행이 그 뒤를 따랐다. 10시 5분에 출발했다. 동작진 나루의 북쪽 강둑에서 북북서 방향으로 1/6마일 위치다. 모래사장이 2마일 넓이로 펼쳐졌다.

10시 33분 동작진 강둑에 도착해서 10시 40분에 나루를 건넜다. 우리는 계곡의 서쪽을 따라 관악으로 향했다. 11시 9분에 승방돌이라는 50여 채의 집이 모여 있는 바위투성이 지역의 맨 끝에 도착했다. 여기서 다시 부사의 행렬을 보았다. 그를 따르는 자들은 푸른 구슬이 달린 줄과 온갖 종류의 끈으로 장식된 붉은 색 옷을 입고 있었고, 허리에는 방울을 그리고 등 뒤로 푸른색 곤봉을 차고 있었다. 그 뒤로 부사와 두 명의 장수, 그리고 몇몇 하인들이 따라왔다. 그 다음에는 청동으로 장식된 외투를 입고 커다란 공작 깃털을 꽂은 작은 모자를 쓴 두 명의 동행이 말에 탄 채 뒤를 따랐고, 나머지 부하들은 발로 뛰며 주변에서 이들을 따라갔다. 승방돌은 서울에서 20리, 과천에서 10리 떨어진 곳이다.

11시 17분에 출발했다. 동쪽으로 향했다가 다음은 남쪽으로 그리고 남동남 방향으로 틀었다. 11시 48분 평지의 가장자리에 도달했고, 12시 29분에 우리는 과천의 끝자락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300여 채에 가까운 집이 있었다. 과천은 사람들로 가득한 분주한 곳이다. 고을 북쪽 끝에 아주 예쁜 단풍나무 숲이 있고 커다란 주막과 쇠고기, 면직물이 많았다. 내가 본 가장 크고 바쁜 도시 중 하나였다.

12시 58분, 15분쯤 되돌아가 낮은 산등성이를 넘어 관악 계곡으로 갔다. 그리고 그때부터 다른 계곡으로 돌아 내려갔다. 읍내 위쪽의 과천 계곡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통나무 위로 타작하는 모습을 보았다. 1시 25분 갈뫼(갈산)에서 쉬었다. 이 근처, 뒤편과 서쪽으로 많은 마을이 있다. 그리고 평지 전체는 사람들로 잘 채워져 있다. 2시 10분에 우리는 수원에서 20리 거리인 사근 내에 도착했다. 여기서 북쪽으로 근접해 있는 길은 안양장을 거쳐 큰 도로 쪽으로 나 있다. 안양장은 내가 지닌 지도(대동여지도) 상에 거의 정확하게 표기되어 있는 것 같다.

3시 48분에 출발, 반 마일을 더 가면 낮은 지대를 따라 수원의 배수구역을 지나가게 된다. 4시 20분 들판에는 벼가 쌓여 있고, 타작을 하고, 돗자리를 짜고, 묶어서 나르느라 사람들이 바쁘다. 5시 25분 수원의 영문(營門)을 마주보며 나는 그 문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길가의 숙박업소들은 더럽고 추울지라도 편안하고 조용할 것 같은 느낌이다. 오후 5시 29분, 수원남문(장안문) 밖에서 휴식을 취했다. 여기서부터는 길이 넓고 깨끗하다. 우리는 달빛을 받으며 다소 울퉁불퉁한 길을 속도를 높여 갔다. 그리고 6시 20분에 태황교에 도착했다.

낮 동안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본 것은 농사짓는 모습이었다. 비탈진 논둑에서 벼 베기를 하고, 소들이 이것을 집으로 날랐다. 시내에는 집 안까지 벼가 쌓였고 수확 후의 뒷정리가 진행되고 있다. 도로 곳곳은 나뭇가지와 잎으로 막혀 치워야 할 공간들이 즐비했으며, 타작도 원시적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곡물에는 얼마나 많은 먼지가 쌓여 있던지, 말과 소는 짚으로 만든 가마니를 덮고 있었다.

어디에나 많은 음식이 있다. 무명천, 채소, 장독 등 많은 물건들을 짊어지고 북쪽으로 가는 행렬이 이어진다. 조선에는 말이 많은데도, 소나 말보다 더 많은 남자들(보부상)이 이것을 나르고 있다. 서울 근교의 뚝섬을 건널 때 절이 하나 있었는데, 그 절의 화장실이 얼마나 깊던지, 용변을 본 후 이것들이 바닥까지 도달하려면 1년이 걸린다고 말할 정도이다. 첫날 나는 무척 피곤했고 잠을 매우 잘 잤다.

11월 4일 공주 사람들, 화륜선으로 온 사람을 횃불 들고 맞이하다


아침 8시 17분에 출발했다. 주막은 크고 비교적 깨끗했다. 주변에 거위들이 있다. 9시 8분에 휴식을 취했다. 우리는 이 지점까지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런 다음 구릉 지역으로 들어왔다. 바위가 몹시 드물었고 노랗고 거친 모래 언덕의 아래쪽으로 화강암 바위가 가끔 눈에 띄는 정도였다. 이곳은 남쪽으로 작은 계곡이 흘렀다. 구릉이 많고 주변은 거의 산악 지역이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길 위에 있었는데, 대개 남쪽으로 향했다. 짐꾼들이 동물과 쌀, 담뱃대 그리고 무언가가 든 상자(아마도 담배?)를 운반했다. 9시 50분에 김제역마을에 이르렀고 9시 56분에 남쪽 끝에서 휴식을 취했다.

5시 39분 금강에 도착했다. 우리는 커다랗고 편평한 배를 타고 물을 건넜다. 그런 다음 우리는 산성(공주 공산성)의 북문을 향해 모래사장을 서서히 헤쳐 갔다. 북문 바깥에는 오두막이 몇 채 있었다. 이 무렵은 날이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북문 안쪽에 멈춰 서서 횃불을 구하려는 소동이 있었지만 곧 출발했다. 우리는 왼편으로 가파른 돌길을 올라 정상에 도착했다. 성의 남문을 지나자 경사가 심하고 험한 내리막길을 내려가 좋은 길을 지나 왼편으로 가서 시내로 들어섰다.

거리에는 커다란 새 집이 많았다. 거리에서 우리는 수많은 횃불을 든 시끄러운 한 떼의 무리와 갑자기 마주쳤다. 그러고 나서부터는 양인(洋人)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로 거리가 가득 찼다.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충청) 감영의 오른편에 있는 객실로 들어갔다. 확실히 깨끗하고 질서정연한, 지금껏 내가 본 것 중 가장 훌륭한 관아였다. 방에는 깔끔한 돗자리가 바닥에 깔렸고 병풍을 드리웠다. 그 외에는 소나무 촛대가 가구의 전부였다. 영문에 오후 6시 35분이 되어 도착했다.

나는 오늘 어느 집 앞에서 원뿔 모양으로 짚을 얽은 모자를 쓴 사람이 밥그릇을 뒤적이며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듣고 재미있었다. “여기 화륜선으로 온 사람이 있다!” 나는 광정역에서 하인을 시켜 민 참판의 편지를 감사에게 보냈다. 그는 나를 만나기 위해 돌아왔는데 길을 5마일이나 벗어났다. 나는 무척 피곤하고 외롭다. 이 괴상하고 가련한 이교도들 사이에서 느끼는 완전한 무력감으로 내게 때때로 찾아오는 이 이상한 감정을 그들에게 잘 표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두렵지 않았다(아마도 안성을 제외하고). 하지만 지금까지 어떤 단 한 명의 외국인도 이렇게 이교도들 사이에 스스로를 내던진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모든 세계를 통틀어 사람은 사람이고 이곳에서 느끼는 나의 무력감이 곧 내 안전판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비장이 전양묵을 불러 내가 무엇을 먹는지 등을 물었다. 그리고 내가 앞서 보냈던 편지에 대한 감사의 답장을 가져왔다. 그는 아직 내게 음식을 가져오지 않은 아전이 몹시 잘못됐다고 말했다. 그는 감사에게 보낸 민영익의 편지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원하면 돈을 주라고 감사에게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비장은 이곳에 돈이 없다고 말했다. 돈을 요구하거나 관련된 말을 하는 것은 전양묵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 일은 내가 직접 해결할 것이다. 아주 늦게, 9시 20분이 되어서야 식사가 왔다.

11월 10일 사수강(만경강)을 건너 전주에 들어서서 전라감영을 방문하다


9시 23분에 길을 나섰고, 사수강에 9시 44분에 도착했다. 물살이 거셌고 가장 깊은 곳이 4피트였다. 우리는 남쪽 둑에서 출발했다. 길은 대체로 남쪽이었다. 평야에는 방앗간과 많은 마을이 있었다. 이곳에서부터 동쪽과 북쪽으로 개간되지 않은 거대한 평지가 펼쳐졌다. 10시 45분. 우리 앞으로 전주로 들어가는 입구가 펼쳐졌다. 11시 8분에 우리는 전주 방향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급류에 이르렀다. 아마도 사수강의 본류일 것이다. 가리내 마을 주막을 지났다. 남쪽, 동쪽, 서쪽 근처는 산이었고 눈이 덮여 황량하고 헐벗어 보였다. 가장 높은 봉우리는 대략 3,000~3,500피트 정도였다. 지난 15분 동안 나는 치장이 잘 된 돌들(선정비)을 꽤 많이 봤고, 철제 명판(철제 선정비)은 더 많이 봤다. 산비탈에는 약간의 소나무가 자랐다. 나무로 지어진 집 또한 더 많이 보였다.

11시 50분에 우리는 멋진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숲(전주 숲정이)에 도착한 다음 추슬한 마을을 지나갔다. 이곳 너머에는 자갈이 많고 거의 경작이 되지 않은 평지가 있었다. 몇 개의 누각이 있었고 오래된 비석이 많았다. 전주의 성곽은 왼쪽으로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진흙투성이의 길고 좁은 거리에 들어섰다. 길은 대부분 초라한 헛간이 늘어선 거리를 얼마 지나지 않아 동쪽으로 휘어지더니 12시 10분에 전주의 남문으로 이어졌다. 이 도시는 성벽 안에 2,000여 채의 집이 있었다. 고을 전체는 7,000~8,000여 채에 달했다. 거리는 비좁았고 정리가 안 되어 있었다.

집들은 끔찍해 보였고 상점은 드물고 초라했다. 우리는 구불구불한 길을 가다가 동쪽 끝의 커다랗고 추레한 방이 있는 허름한 관아로 꺾어져 들어갔다. 시끌벅적하고 저질스런 무리가 자신들이 감영에서 왔다면서 내 방으로 들어오겠다고 우겼다. 많은 혼란이 있었고 나는 몹시 짜증이 났다. 전라감사를 방문할 준비를 마쳤을 때 집사가 전갈을 가져왔다. 감사가 안방으로 들어가서 나중에 감영으로 나설 때 내게 알려주겠다는 것이었다. 일종의 판관 대리 같은 이가 불렀다. 네, 아니오를 말하는 데 전혀 주저할 것 같지 않은 냉정한 표정의 조사관 같아 보였다. 그의 임무는 나에 대해 무언가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편안한 상황을 만들어 주고 싶었지만 그의 표정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왕과 참판 따위에 관한 이야기를 해서 그에게 겁을 줬다. 그것은 대단한 효과를 발휘했다.

그 이후 나는 묵과 함께 가마를 타고 감사를 만나러 갔다. 관아의 두 군데 입구 주변에 본래의 의장을 갖춘 수백 명의 군졸들이 있었다. 첫 번째 문 안쪽에 내 가마가 내려졌다. 묵과 나는 위압적인 안쪽 문을 향해 돌이 깔린 진입 도로를 걸어 올라갔다. 길나장이들이 양쪽으로 줄을 섰다. 대문이 한가운데 열어 젖혀졌다. 내 앞에 거대한 관아가 있었다. 매끈한 기와를 올린 높은 지붕과 기둥은 높고 당당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본관에는 화려하게 옷을 입은 하급 관리들이 거대한 무리를 이뤄 서 있었다. 전체적으로 놀라운 풍광을 만들었다. 동양의 오만스러움과 전제 권력의 느낌이 강하게 풍기는 장면이었다. 그런데도 깊은 산속 종족의 분위기가 섞여 있었다. 나는 맨 위 계단에서 모자를 벗고 화려한 예복을 치렁치렁 걸친 회색 수염의 나이 든 관리에게서 정중한 환영 인사를 받았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