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어떻게 과학을 이용했는가
김유항, 황진명 지음 | 사과나무
전쟁은 어떻게 과학을 이용했는가
김유항, 황진명 지음
사과나무 / 2021년 1월 / 368쪽 / 18,500원
제1장 과학이 바꾼 전쟁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페니실린 - 플로리와 페니실린 정제항생제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작은 상처도 치명적일 수 있었다. 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이 최초로 페니실린을 발견하고 1939년 옥스퍼드 대학의 플로리 팀이 페니실린 정제에 성공함으로써 마침내 항생제 시대가 열려 치료의학의 큰 발전을 가져온다.
플레밍은 미생물의 일종인 푸른곰팡이에서 만들어지는 페니실린이 박테리아를 죽이는 기능이 있다는 것을 우연히 발견한다. 그러나 이후 실험에서 플레밍은 곰팡이의 분비물이 박테리아들에 대항하여 활동하지만, 페니실린의 성분을 알 수 없고 불안정하며 또한 항균 활동이 단명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1935년 페니실린에 대한 연구를 중단한다. 그러나 1929년 영국 학술지에 실린 그의 실험병리학 논문은 1938년 플로리와 함께 일하던 생화학자 에른스트 체인의 관심을 끌었다.
호주의 병리학자 하워드 플로리, 영국 생화학자 에른스트 체인과 옥스퍼드 대학의 병리학과의 동료들은 페니실린이 박테리아와 싸우는데 가장 효과적이라고 결론 내리고, 1939년 페니실린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39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연구를 지속하기 힘들었다. 한편 1940년, 플로리의 연구팀에 생화학자 노만 조지 히틀리가 합류하여 페니실린 시료의 활성도를 측정하는 새로운 기법을 고안해내고, 배양액에서 페니실린을 효율적으로 정제하는 역추출 방법을 개발한다.
플로리 팀은 1940년 5월 치명적인 연쇄상구균에 감염된 쥐에 페니실린을 주사했다. 감염된 쥐들 중 페니실린을 주사한 쥐는 모두 회복되었으나 주사하지 않은 쥐는 전부 죽었다. 이와 같은 중요한 실험 결과를 얻자 플로리는 효율적인 감염치료는 영국의 전쟁수행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며, 따라서 대량생산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플로리는 임상실험을 한 만한 충분한 양의 페니실린이 준비되자 사람을 대상으로 임상실험에 들어간다. 1941년 2월 장미 가시에 찔려 입 근처에 상처를 입게 된 43세의 경찰관이 최초로 옥스퍼드-페니실린의 수혜자가 되었다. 서정적 시인의 대명사,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장미 가시에 찔려 사망했다고 하던가? 바로 이 경찰관도 눈, 얼굴, 그리고 폐에 엄청난 농양이 생겨 목숨을 위협하는 패혈증에 걸렸다. 그에게 페니실린을 정기적으로 나흘 동안 주사하자 상당한 호전을 보였으나 완치되기 전 페니실린이 다 떨어져 2주일 후 경찰관은 죽고 말았다. 그래도 임상실험에서 다른 환자들로부터는 좀 더 좋은 결과를 얻자, 플로리는 페니실린이 보여준 가능성과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었고, 치료에 충분할 정도의 양을 공급하려면 페니실린의 대량생산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제2차 세계대전과 페니실린의 대량생산: 플로리는 영국에서는 모든 화학 공장이 전쟁물자 생산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페니실린의 대규모 생산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1941년 여름, 페니실린을 미국의 제약회사에서 대규모로 생산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미국으로 간다. 그들은 가장 유명한 균류학자이며 페니실륨 곰팡이의 권위자인 농업국의 로버트 톰을 소개받고 되고, 일리노이 주 피오리아에 위치한 북부지역연구실(NRRL)의 발효과와 연결되었다. NRRL은 나중에 페니실린의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가지 혁신에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써 프로젝트 성공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1941년 12월 7일 일본 제국의 진주만 공격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미국 정부는 페니실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전의 전쟁에서 군인들은 상처 자체보다 상처 부위의 감염으로 사망할 가능성이 더 높았기 때문에 미국 정보는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페니실린 생산을 우선순위로 정했다.
그러나 페니실린의 대량생산은 너무도 어렵고 벅찬 과제였다. 1942년, 첫 번째로 연쇄상 구균에 의한 패혈증에 감염된 환자를 머크에서 만든 US-페니실린으로 치료하였는데, 전체 공급량의 1/2을 이 환자만을 위해서 써야했다. 1942년 6월에 미국이 보유한 총 페니실린은 단지 10명의 환자를 치료하기에 충분한 정도에 불과한 양이었다. 1943년 7월 전시생산국은 유럽에서 싸우는 연합군용으로 페니실린 대량생산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많은 화학회사와 제약회사들이 여기에 참여한다. 생산 규모가 커질수록 머크, 화이자, 스큅 등 제약회사의 과학자들과 엔지니어들은 새로운 기술적 도전에 직면했다.
그러던 중 페니실린을 진공상태에서 냉동건조 하는 것이 가장 안정되고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마침내 1944년 3월 1일 화이자가 페니실린을 대규모로 생산하는 최초의 상업 플랜트를 열었다. 전시생산국으로부터 제약회사들에게 주어진 목표는 예정된 유럽 상륙작전 개시일에 맞춰 적절한 페니실린 보급량을 생산해내는 것이었다.
한편, 군대와 민간 부분에서는 임상실험을 통해 페니실린이 연쇄상구균, 포도상구균, 임질균 감염을 포함한 광범위한 감염병 치료에 매우 효과적임을 밝혀냈다. 미군은 외과수술이나 상처 감염의 치료나 매독 치료에 페니실린의 효과를 인정했고, 1944년까지의 영국과 미국 군인의 1차 치료에 페니실린이 사용되었다. 다행스럽게도 1944년 초부터 페니실린 생산량이 극적으로 증가해 점차 이 기적의 약을 민간인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하게 생산되었다. 생산기술도 1만 갤런 탱크에서 80~90%의 수득률을 낼 정도로 규모와 정밀도에서 혁신적으로 발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동안 페니실린은 폐렴, 패혈증에 의한 사망이나, 부상에 따른 사지 절단을 현격하게 줄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여 연합군 병사의 12~15%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이끈 과학기술적인 요인으로 원자탄, 레이더, 합성고무, 그리고 페니실린의 개발을 손꼽는다. 페니실린은 매독, 임질, 결핵, 괴저, 폐렴, 디프테리아, 성홍열과 같은 무서운 질병을 정복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효과적인 생명을 구하는 약이 되었으며, 1942년 처음 사용되면서부터 지금까지 최소 2억 명의 생명을 구한 것으로 추정된다. 1945년, 플레밍, 플로리와 체인 세 사람은 노벨생리의학상을 공동수상했다.
제2장 우연과 필연의 과학
로마제국을 세운 엔지니어링의 역할 - 토목공학, 재료공학 및 공병기술 로마는 BC 8세기경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해 점점 번창해 BC 3세기에 에트루리아의 도시들을 합병했다. 전형적인 로마 기술로 묘사되는 많은 것들이 실제로는 에트루리아 문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다리뿐만 아니라 로마의 전형적인 석조 아치와 하수도가 그 사례이다. 또한 에트루리아는 그리스어를 기원으로 하는 에트루리아 알파벳을 로마에 전달함으로써 그리스 문화를 소개했다. 한편 BC 146년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로마 공화국에 정복된 후, 그리스의 문명(기술, 전투, 종교, 철학, 문학, 예술, 의술, 수학 및 건축 등)이 로마가 거대 제국을 설립하는데 밑거름이 된다.
로마의 공화정이 막을 내리고 BC 27년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제국을 세운 지 대략 150년이 지난 AD 117년,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에 이르면 로마제국의 판도가 절정에 이른다. 로마제국은 지중해 동부의 헬레니즘 문화권과 이집트, 유대, 서부의 옛 카르타고, 히스파니아, 갈리아 등의 기존 영토에 이어 브리타니아와 라인 강 서쪽의 게르마니아, 그리스 북쪽의 다키아까지 최대로 영토를 넓혀 제국의 면적이 500만㎢에 달했다.
로마의 역사는 로물로스가 BC 753년 건국하여 AD 476년에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기까지 천 년 이상(동로마까지 고려하면 2000년 이상) 지속되면서 오늘날 문명의 정치체제, 법률제도, 군사체제, 언어, 예술, 문학, 건축, 과학과 기술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로마인들은 다른 나라에서 들여온 아이디어나 발명, 기술 등을 자신들의 아이디어로 재창조하여 눈부신 결과를 만들어냈으며, 특히 토목공학과 군사공학에서 천재적이라고 할 만한 상당히 발달된 엔지니어링 업적을 남겼다.
로마 군대는 인류 역사상 가장 효과적인 전투력을 갖춘 군대로 널리 평가되고 있으며,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 군사전술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로마군은 공병학과 전투공학을 핵심 전략적 역량으로 가장 먼저 격상시켰다. 오늘날까지도 샌드허스트 영국 육군사관학교에서 로마군의 전술, 훈련, 규율, 조직, 혁신을 배울 정도로 막강한 로마군은 또한 환상적인 건설자였으며, 야전에 요새를 세우고 전장 환경에서 거의 전례가 없는 통제력을 발휘했다. 특히 도시계획, 로만시멘트와 콘크리트, 아치, 콜로세움, 바닥 중앙난방, 수로, 하수도, 공중화장실, 공중목욕탕, 도로, 쿠리어 서비스, 군의학, 공성무기, 로마군 무기 및 전술 등은 거대한 로마제국 형성에 기여한 혁신적인 기술들이라 할 수 있다.
고대 로마는 이미 BC 312년에 로마에서 카푸아(지금 이태리 남동부의 브린디시)에 이르는 세계 최초의 돌로 포장된 도로를 건설하여 장장 200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도 일부가 사용되고 있다. 수로와 함께 고대 토목기술의 최대 유산으로 꼽히는 8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간선도로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처럼, 로마가 군사, 행정, 교역, 문화교류의 세계적 중심지가 되는 역할을 했다. 당대 어느 나라보다 뛰어난 로마의 토목공학과 건축, 무기 등을 살펴보자.
격자형 도시계획: 격자형 도시계획은 로마제국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그리스에서 빌려온 것을 로마제국의 필요에 따라 발전시킨 결과물이다. 로마인들의 도시계획은 중심화라고 해서 똑같은 면적으로 땅을 나누는 토지 측량 방법을 적용했다. 기본 개념은 주어진 땅을 블록으로 균등하게 나누고, 모든 도로를 남북 방향으로 축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두 간선 도로인 카르도와 데쿠마누스는 격자 한가운데에서 90도 각도로 교차한다. 오늘날 역사적인 격자 계획도시의 가장 좋은 예로는 이탈리아 파두아와 피렌체, 카탈로니아 바르셀로나가 있다.
도로와 간선도로: 고대 로마시대에 건설된 도로망은 수도교와 함께 고도 로마 토목기술의 최대 유산으로 꼽힌다. BC 312년 감찰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케쿠스에 의해 시작된 아피아 도로는 로마에서부터 162마일 떨어진 이탈리아 남동부의 브린디시를 연결하는 세계 최초의 포장도로이며 가장 잘 정비된 로마 도로로 유명하다. 고대 지중해 세계의 뛰어난 교통망인 로마 가도는 영국에서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까지, 다뉴브 강에서 스페인과 북아프리카까지 뻗어 있다.
로마인들은 모두 5만 마일(8만 킬로미터)의 단단히 잘 포장된 고속도로를 주로 군사적 이유로 건설했으며 가능한 한 직선도로를 만들었는데, 군대와 관공서, 특별 출입증 소지자만 이용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차로 영국과 유럽의 도로를 주행할 때, 만일 직선도로가 1마일 이상 나오면 “이 길은 반드시 로마 도로일 것이다”라고 말하곤 한다. 로마의 최전성기에는 로마로부터 29개의 주요 군용 고속도로가 연결되었으며, 로마 제국 후기엔 113개 주 357개의 주요 도시가 서로 연결되었다. 총 40만 킬로미터 이상의 도로가 건설되었으며, 그 중 8만 킬로미터가 넘는 도로가 돌로 포장되어 있다. 도로 이외에도 기원전 고대 로마가 세운 건축물이나 사회공공시설인 판테온, 하수도, 수로, 목욕탕 등은 그 스케일도 대단하지만 2000년의 세월을 견디는 재료와 기술의 혁신이 실로 경이롭다.
공성 무기와 거북대형: 로마인들은 수 세기 동안 전쟁터에서 그들에게 우위를 점하게 하고 광대한 영토를 정복할 수 있도록 한 가공할 만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공성전에서 방어 및 공격적 역할을 모두 수행하는 발리스타와 오나거 같은 포병 무기는 로마의 무기 중에서 가장 끔찍하고 기술적으로 진보된 무기로 고대판 미사일이라 할 수 있다.
▲발리스타(그리스어 ballistra: 석궁) - 직사각형 목제 틀에 동물의 힘줄, 말총, 내장 등으로 만든 시위를 걸고 그 장력을 이용해 돌, 탄알, 화살, 창 등을 날리도록 만든 장치이다. 로마 기술자들은 다수의 금속 부품을 추가하여 디자인을 개선함으로써 더 가볍고 조립하기 쉬운 발리스타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힘을 약 25% 증가시킴으로써 정확성을 향상시켰다. 큰 것은 22kg 무게의 돌을 270~370m까지 날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으며 작은 것은 캐터펄트(catapult), 큰 것은 발리스타라 했다.
▲오나거(Onager) - 오나거는 고대 로마에서 사용한 투석 공성무기의 일종이다. 발사할 때 반동하는 모습이 꼭 당나귀가 뒷발을 차는 동작과 닮았다 하여 오나거(Onager: ‘당나귀’라는 뜻)라는 이름이 붙었다. 지렛대 원리를 이용해 돌, 창, 화살 등을 투척했고, 황소의 힘줄이나 머리카락을 꼬아 만든 밧줄로 투척에 필요한 탄성을 얻었다.
▲ 거북대형(귀갑대형, testudo) - 로마 군대는 가장 군기가 잘 잡힌 병사들과 뛰어난 지휘 체제와 전술로 유명한데, 전쟁에서 거북대형은 로마 군단이 흔히 사용하는 방패벽의 일종으로, 주로 포위공격 동안 사용된 진형이다. 전방과 측면의 병사들은 방패를 서로 맞물리게 끼우고 뒷줄의 병사들은 머리 위에 방패를 얹어 병사들 머리 위에 거북이 껍질 같은 보호판을 형성했다. 거북대형은 매우 강하고 빽빽이 밀집된 진형으로 머리 위 보호판 위로 병사들이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2014년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에서 폭동진압 경찰들이 로마군의 귀갑대형 전술을 사용하기도 했다.
제3장 핵과 전쟁
치열한 원자폭탄 제조 경쟁 - 미국과 독일의 경쟁 닐스 보어와 존 아치볼트 휠러는 1939년 2월 7일, 콜롬비아 대학에서 열린 미국 물리학회에서 모든 우라늄이 핵분열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가설을 내놓았다. 즉, 우라늄의 세 동위원소 중 핵분열이 실제로 가능한 것은 우라늄의 0.7%밖에 안 되는 U-235뿐이라는 것이다. 자연계에서 세 개의 동위원소 혼합물로 존재하는 우라늄의 99.3%는 U-238로 무척 안정되어 있으며 또 다른 동위원소 U-234는 자연에서 단지 0.006%라는 극히 미량으로 존재한다. 보어는 오직 순수한 U-235로부터만 연쇄반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느린 중성자로 때릴 것을 제안했고 엔리코 페르미는 흑연이 감속재로서 사용될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보통 방출되는 중성자는 초당 1만 마일로 무척 빠른데 이렇게 빠른중성자는 쉽게 U-238에 의해 포획되어 핵분열이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빠른중성자를 감속재인 흑연이나 중수와 충돌시키면 에너지를 잃게 되고 속도가 초당 1마일 정도를 넘지 않게 감속되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핵분열에 대한 연구가 미국에 오다: 1939년 9월 1일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는데, 덴마크의 닐스 보어는 그전에 이미 핵분열에 관한 모든 자료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때만 해도 과학의 중심지는 유럽으로, 특히 독일은 막스 플랑크,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막스 보른 등 쟁쟁한 과학자들이 포진하고 있는 이론물리의 메카였다.
반면 러더퍼드, 채드윅, 톰슨 등이 있는 영국은 실험물리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었다. 불확정성의 원리로 유명한 하이젠베르크는 1926~1927년 코펜하겐에서 보어의 보조연구원이자 강사로 일했는데 이때 양자역학의 기반이 되는 불확정성 원리를 발견했다. 또한 보른의 도움으로 행렬역학을 도입하여 20세기 초 양자역학의 발달에 지대한 공헌을 한 공로로 1932년 31살의 나이에 노벨상을 수상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많은 과학자들이 나치 독일을 피하여 미국으로 이민가고 그때부터 개인의 천재성에 의존하는 연구가 아니라 여러 과학자들이 함께 연구하는 공동연구가 빛을 발하게 된다. 특히 E. O. 로렌스는 미국의 버클리 방사선 연구실에서 독창성을 발휘하여 1930년에 입자가속기 사이클로트론을 만들었다. 그 뒤를 이어 반 데 그라프가 1931년에 정전 발전기를 만드는 등 핵물리와 고에너지 물리 연구에 필요한 장비를 만들어내는 첨단 연구로 앞장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