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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이낙연

김종수 지음 | 모아북스


이제는 이낙연

김종수 지음

모아북스 / 2020년 12월 / 242쪽 / 15,000원



끝이 아닌 시작




기자 20년 정치 20년, 다르고도 같은 길


국회의원 출마 제의를 뿌리친 세 가지 이유: 1989년, 기자로 10년을 살아온 이낙연은 인생의 갈림길에 섰다. 그해 이낙연은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으로 내정되었는데, 그가 밀착 취재해왔던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가 비서관을 보내 정치를 권유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이낙연은 3가지 이유를 들어 그 제안을 뿌리쳤는데,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당시에 폈던 3불가론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총재 비서관이 찾아와 나더러 보궐선거에 나섰으면 하더군요. 편한 사이여서 물었어요. “DJ 뜻이요? 형님 뜻이요?” 형님 뜻이라고 해두자 하기에, 형님 뜻이라니 자유롭게 말한다면서 3가지 이유를 들어 사양했습니다. 첫째, 형편이 어려워 유학을 못 갔는데, 회사에서 돈 대주며 가라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 둘째, 정치부 기자 10년 하다 보니 붓에 한창 물이 올랐는데, 지금 꺾기는 아깝다. 셋째, DJ에게 당신 뜻에 맞는 국회의원 한 명 늘어나는 것보다 당신 좋아하는 기자 한 명 더 있는 것이 나을 수 있다. 내가 아버지 다음으로 DJ를 좋아한다. 이대로 DJ에게 전해달라고 하면서, 그래도 국회의원 하라고 하면 그때는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말이 맞겠다고 해서 기자로 남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법학을 전공한 이낙연은 어쩌다 기자가 되었을까? 전남 영광 법성면의 초등학교에 다니던 이낙연은 6학년 때 은사(박태중 선생님)를 만나 우물 안을 벗어날 수 있었다. 대처로 나와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닌 그는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여 집안과 고향의 촉망을 한몸에 받았지만, 지독한 가난과 부조리한 시대는 그가 순탄한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가 대학에 입학한 1970년에는 각 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이 있었고, 이듬해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그는 수업을 빼먹고서라도 신민당 대통령 후보인 김대중의 연설을 들으러 다니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고 한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90만 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한편 그에 앞서 5, 6대 대통령을 연임한 박정희는 1969년 이른바 ‘3선 개헌’을 밀어붙여 7대 대통령 출마의 길을 터놓았었다.

권력 연장에는 성공했지만 공포에 질린 박정희는 형식이나마 가느다랗게 붙어 있던 민주주의의 숨통을 끊어버리기로 작정했다. 그해 10월에 서울 전역에 위수령을 발동하여 대학가의 시위를 원천봉쇄하고, 12월에는 비상사태를 선포하여 사실상 헌정을 정지시켰다. 또 1972년 10월, 유신 쿠데타로 헌정을 폐기한 박정희는 김대중의 예언 그대로 종신총통시대를 열었다. 청년학생들과 민주 시민들이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이런 가운데 이낙연은 끼니를 거를 정도로 일상이 된 궁핍을 껴안고 학업을 이어가야 했다. 4학년 무렵에는 만성이 된 영양실조로 뼈만 앙상한 모습이 “시신 같았다”고 했다.

졸업을 앞두고 징집영장을 받은 이낙연은 망설임 없이 입대했다. 우선 끼니가 걱정인 그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낙연은 군대에 가서야 비로소 배곯지 않고 제대로 먹을 수 있게 되었고, 균형 잡힌 섭생으로 영양실조도 사라지고 건장한 몸이 되었다. 이후 군 생활 3년, 건강한 몸으로 제대했지만 그의 앞에 놓인 현실은 여전히 막막했다. 그런 그에게 막역한 친구가 다달이 월급의 반을 떼어주며 사법고시 공부에 매진할 것을 격려했다. 그렇게 예닐곱 달 지나다보니 그도 못할 노릇이었다. 친구에게 염치가 없기도 했거니와 여섯이나 되는 동생들을 모른 체할 수도 없어서 공부도 오래된 꿈도 접었다. 이후 첫 직장으로 투자신탁회사에 취직한 이낙연은 연봉은 꽤 받았지만, 뭔가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시달렸다. 그래서 그는 1979년 10월, 스물여덟 살에 〈동아일보〉기자가 되었다.

“평생을 따라다닌, 살아남은 자의 부채감”: 기자 이낙연이 처음 취재를 맡은 출입처는 총리실을 비롯하여 통일부와 문화공보부를 포함한 중앙청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가 기자가 된 그달 26일 밤에 10ㆍ26이 터졌다. 그리고 그해 12월 12일, 전두환이 주도하는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가 군사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탈취했고, 그들은 군사반란을 “구국의 결단”으로 포장하기 위해 맨 먼저 언론 장악부터 나섰다. 이른바 ‘언론 통폐합’ 작업을 하여 비판적인 언론인 1천여 명의 펜을 빼앗고 언론을 한손에 틀어쥐었다. 언론인 강제 해직은 입사 3년차부터 이루어져 이낙연은 2년차여서 해직의 칼날이 비켜갔지만 “살아남은 자의 부채감 같은 것이 평생 따라다녔다”고 했다. 이후 그는 기자로서 치열하게 일하며 분투했지만 신군부의 통제를 벗어날 수 없는 한계 때문에 줄곧 부끄러움을 십자가로 지고 살았다.

김대중 전담 기자 이낙연: 정치부 기자 이낙연이 정치 현장을 넘어 그가 대학생 때부터 존경해온 정치인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에 따라 그해 12월에 대통령 선거가 국민투표로 치러지게 되었고, 마침 회사에서는 이낙연에게 그때부터 김대중 후보의 전담 취재를 맡겼다. 이에 그는 매일 김대중 후보의 동교동 자택으로 출근했다. 당시〈중앙일보〉에서는 현재 ‘고도원의 아침편지’로 유명한 고도원 기자가 전담으로 왔다.

이 무렵에는 신문마다 ‘정치 가십’ 난이 있어 한 줄 정치 논평을 실었는데, 그야말로 촌철살인이어서 인기도 높고 파급력도 컸다. 그런데 고도원의 회고에 따르면, 고도원은 그 한 줄 논평을 쓰느라 하루 종일 끙끙댈 때가 숱했는데, 이낙연은 어찌 그리 금세 쓰는지 신통하기도 하고 부럽다고 했다. 이낙연의 논평이 빛을 발한 것은 팩트, 즉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인데, 팩트는 현장에서 나온다. 기사 작성에서 팩트를 거의 신앙으로 여긴 이낙연은 그래서 누구보다 현장을 중시했다.

기자로서 팩트와 현장에 바친 청춘: 이렇게 이낙연은 20여 년을 기자로서 치열하게 살며 팩트와 현장에 청춘을 바쳤다. 그는 기고문 ‘나와 동아일보’에서 우연히〈동아일보〉기자 모집 공고를 보고 응시하여 기자가 되었지만 그것은 행운이었다고 했다. 그 행운을 잡아 기자로 일하면서 4가지를 배웠는데, 그때 배운 것들이 그를 남다른 정치인으로 키웠지 싶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진실을 알기는 몹시 어렵다. 그는 ‘전두환 정부의 금융실명제 연기’ 같은 굵직한 특종을 곧잘 했지만, 공천 탈락 예상자를 잘못 보도하여 해당 정치인에게는 상처를, 유권자에게는 혼란을 주는 등 오보를 내는 일도 적지 않았는데, 그는 특종보다는 오보에서 더 깊은 교훈을 받고 진실을 신중하게 대하는 것이 몸에 배었다. 둘째, 어떤 경우에도 공정해야 한다. 어느 날, 이낙연의 기사에 불만을 품은 한 국회의원이 의사당 안에서 다짜고짜 그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그는 그 폭행을 문제 삼아 알리는 대신 그저 동료 기자에게 조용히 부탁했다. “앞으로 그 의원 기사는 자네가 좀 써주게. 나는 도무지 공정할 자신이 없네.” 그는 공정을 자기 브랜드로 삼고 싶어 했고, 그것을 철칙으로 삼았다.

셋째, 말과 글은 쉬워야 하며, 그러러면 명료해야 한다. 그는 당시 김중배 편집국장에게 ‘술이부작(述而不作)’을 배웠다고 했다. 공자의 말로, 원 뜻은 “성현의 말씀을 서술할 뿐 자기주장을 보태서 짓지 말라”는 것인데, 그는 “꾸미지 말고 있는 그대로 쓰라”는 뜻으로 새겼다. 그래서 지금도 그의 말이나 글은 꾸밈없이 진솔하여 굳이 머리로 이해하려 들지 않아도 곧 가슴으로 스며든다. 넷째,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한다. 그는 “인생과 자연의 비밀은 너무 많고, 세상의 변화는 너무 빠르기 때문에 지금도 일주일에 하루는 책을 읽으려고 노력한다.”라고 말한다. 앞서 말한 촌철살인의 논평도 그의 부단한 공부의 힘이 작용한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도쿄 특파원으로 ‘일본통’이 된 이낙연 기자: 1989년, 이낙연은〈동아일보〉도쿄 특파원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카투사에서 군 복무를 하며 영어를 접해서 영어는 웬만큼 했지만, 일본어는 걸음마 수준이어서 당장 일본어 공부부터 시작했다. 6개월쯤 지나자 일상 대화를 할 수 있게 되고 소설 정도는 별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해 말, 도쿄에 부임해서는 일본어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늘었다. 그가 일본어뿐 아니라 문화도 세세하게 파고들어 공부한 덕분이었고, 이낙연의 이런 노력은 당연히 기사에서도 빛을 발했다. 한편 <아사히신문〉의 기자들은 이낙연을 예의 바르고 성실한 인물로 높이 평가했는데, 이는 이낙연이 현지인들과 하나로 녹아들려고 부단하게 노력한 덕분이었다.

3년 5개월, 도쿄 특파원을 지내는 동안 기자로서는 물론 자연인으로서도 이낙연의 식견과 안목은 크게 넓어지고 깊이 익었다. 그리고 1993년 4월, 이낙연은 특파원 생활을 마치고 서울 본사로 돌아왔다. 일본에서 돌아온 이낙연은 편집국 기획특집부를 거쳐 정치부와 국제부에서 차장으로 일했다. 이후 논설위원을 거쳐 국제부 부장을 끝으로 2000년 2월 퇴직했다. 1979년 10월에 입사한 지 20년 4개월 만이다. 그 사이 정치 일선에 복귀한 김대중은 1997년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대통령이 된 김대중은 2000년 총선이 다가오자 다시 이낙연에게 동행을 청했다. 이낙연은 ‘다시 부르면 응하겠다’는 약속을 지켜 청춘을 고스란히 바친 언론을 떠나 정치에 발을 들였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국회의원 이낙연, 5선 대변인의 사연: 2000년 4월 16대 총선, 고향인 전남 함평ㆍ영광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한 이낙연은 중요한 순간마다 당 대변인을 맡아 기자 시절에 닦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또 이낙연은 2000년에서 2016년까지 내리 4선 국회의원을 지내는 동안 200여 건(연평균 13건)의 제ㆍ개정 법률안을 대표 발의하는 뚝심을 보였고, 현장 중심의 상임위원회 활동으로 현실과 동떨어진 또는 현실에 뒤처진 많은 제도를 바로잡았다. 한편 국회 이낙연의원실에서 해마다 국정감사를 앞두고 내놓은 현장 르포는 폭로성 내용이 아니라서 국정감사 당시에는 대중의 이목을 크게 끌지 못했지만, 결국 탁월한 문제의식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으로 화제를 모았다. 이런 남다른 의정활동 덕분에 그는 NGO 모니터단이 선정하는 국정감사 우수의원으로 10차례 선정됐으며, 국회 농식품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한 2009년에는 최우수위원장 상까지 받았다.

“사람이 그러면 못쓴다… 길게 봐라”: 이런 이낙연에게도 커다란 정치적 고비가 있었다. 노무현은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서 당선인의 대변인이던 이낙연에게 청와대로 함께 들어갈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낙연은 당에 남아 할 일이 많다며 완곡하게 거절했다. 당시 민주당은 대선에서 승리했지만, 대선 과정에서 ‘후보 교체’를 두고 크게 갈등을 빚은 신주류와 구주류 간의 앙금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을뿐더러 매사에 신중한 이낙연은 섣불리 운신할 수 없는 처지였다.

2003년, 결국 민주당은 당내 앙금을 씻어내지 못하고 분당의 길로 가고 말았다. 대통령을 옹위한 신주류가 탈당하여 신당(열린우리당)을 창당한 것이다. 대통령은 이낙연에게 여러 번 사람을 보내 신당 합류를 권했다. 이낙연은 고심의 나날을 보냈고, 명분과 의리 사이에서 갈등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한마디를 듣고 그는 접었다. 민주당에 남기로 한 것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2003년 민주당 분당 직후 어느 날 아침이었다. 어머니께 전화가 걸려왔다. ‘나다. 신당 가지 마라 잉!’ 어머니는 그 말씀만 하시고 전화를 끊었다. 나중에 어머니를 뵙고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여쭈어봤다. 어머니 대답은 역시 짧았다. ‘사람이 그러면 못쓴다.’ 어머니는 2006년 5ㆍ31 지방선거 직후에도 내게 전화를 주셨다. 지방선거는 내게 결과가 좋지 않아서(이낙연은 당시 민주당 원내대표로 지방선거를 진두지휘했지만 소수정당의 한계를 절감했다) 이런저런 번민에 빠져 있었다. 그것을 알아채셨을까? 어머니는 저번 이래 처음으로 내게 다시 전화를 걸어 한마디만 하셨다. ‘길게 봐라.’ 그걸로 끝이었다.”

자기 목에 방울을 다는 이상한 국회의원: 17대 총선에서 재선 의원이 된 이낙연은 국정감사가 끝난 직후에, 동료 국회의원들이나 국정감사 피감기관들이 싫어할 만한, 그러나 국민들은 환호할 만한 “상시 국정감사가 필요하다.”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이 제안에 귀를 기울이는 의원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 제안은 나중에 다시 이낙연의 분투로 일부나마 결실을 보게 된다. 이낙연은 이처럼 상시 국감을 시작으로 국회 업무 현장의 문화와 분위기를 실질적으로 바꾸어 나갔다. 이런 열정적인 의정활동을 인정받아서인지 그는 2012년 19대 총선에서 어렵잖게 4선 의원이 되었다.

현장에서 시작해 현장에서 끝을 보는 정치: 4선 의원 이낙연은 2014년 지방선거에 나서기 위해 임기 절반을 남겨두고 의원직을 사퇴했고, 새정치민주연합 전라남도지사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이로써 그는 입법가로서의 오랜 이력에 행정가로서의 경력을 추가하며 새로운 리더십을 경험했다. 여기서도 그의 현장 중시 철학은 어김없이 빛을 발했다. 참고로 이낙연은 애주가로 알려졌는데, 쌀 소비를 촉진하는 뜻에서 막걸리만 마시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의 절절한 막걸리 애호는, 그가 말만 앞세우는 정치인이 아니라 늘 그 자리에 맞게 몸으로 실천하는 언행일치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또 이낙연은 궁핍하게 자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잊지 않고 늘 낮은 자세로 소외되고 낮은 데를 먼저 살피는 따듯한 행정을 폈다. 산간도서벽지 어르신들이 나들이하게 편하도록 실시한 ‘100원 택시’나 어려운 환경에서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개천에서 용 나게 하는 사업’ 또는 ‘주거환경 취약계층 행복둥지 사업’이나 ‘서민 빚 100억 탕감 프로젝트’ 같은 것들이 다 따듯한 행정의 표본이다.

이후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박근혜 탄핵소추안을 인용함으로써 조기 대선이 치러지게 되었다. 그리고 5월 9일 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제19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이후 내각 인선에서부터 모든 것이 숨 가쁘게 돌아갔다. 한편 문재인 후보 당선이 확정된 10일 아침에 이낙연은 “상경하여 대기하시는 것이 좋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는 미리 교감된 사안으로 대선 열흘 전쯤에 임종석 실장을 통해 만약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총리로 지명 될 테니 준비하라는 얘기를 전달받은 터였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감성이 몸에 밴 사람: 이낙연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감성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관심과 시선은 늘 사회적 약자, 고통을 겪는 사람들, 낮은 곳, 그늘진 곳에 가 있었다. 그는 기자일 때도 그랬고 정치인으로서는 더욱 그랬다. 이낙연은 새로운 정치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국정을 총괄하는 총리로 재직할 때 새로운 면목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전례 없이 국민의 사랑을 받는 총리가 되었다. 그러면 그 새로움이란 뭘까? 정치는 언어로 하는 것인데,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대결의 언어, 적대의 언어, 비난의 언어, 변명의 언어, 비속의 언어를 쓰지 않았다. 누가 어떤 억지를 쓰든, 가짜뉴스로 싸움을 걸어오든 그는 결코 맞서지 않고도 상대방이 스스로 깨닫거나 머쓱해지도록 만들었다. 상대방이 적대하는 말로 대들면 그는 거기에 반박하여 싸우는 대신 우리는 적이 아니라 친구라는 것을 깨쳐주어 상대방이 스스로 부끄러워하도록 했다. 이로써 이낙연의 정치 20년은 우리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주면서 우리 정치에 희망을 주었다.



끌려갈 것인가, 이끌 것인가




모전자전, 심지가 굳은 사람


위기 때 더욱 빛을 발한 근기의 리더십: 이낙연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덕목으로 ‘심지’를 드는데, 그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누구를 바라볼 때 그가 비록 세련되지 못해도, 많이 알지 못해도 어떤 굳은 마음이 있는 사람이 존경스러워요. 그래서 축사를 하거나 책에 서문 또는 추천사를 써줄 때 종종 ‘심지가 굳은 사람’이라는 찬사를 합니다. 아무한테나 인사치레로 퍼주는 찬사가 아니라 어쩌다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꺼내는 인색한 찬사이니 나로서는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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