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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택트 인권 상영관

최하진, 박인숙 지음 | 예미


언택트 인권 상영관

최하진, 박인숙 지음

예미 / 2020년 12월 / 228쪽 / 15,000원



PART1 법은 삶을 바꾼다



아이는 무엇으로 사는가: 〈칠드런 액트〉


우리의 삶은 죽음이라는 저 바다로 흘러드는 강과 같다. -호르헤 만리케



“인간의 마음 안에는 사랑이 있고, 인간은 자신의 내일을 알 수 없으며, 인간은 사랑으로 산다.” 톨스토이는 그의 저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이 내일을 알 수 없듯 만남 또한 예측할 수 없는데요. 우리는 매일 숱한 선택과 결정을 하고 어떤 사람들을 만나지만, 내 삶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지를 따져 가며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최승자 시인의 <여자들과 사내들>이라는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사랑은 언제나/벼락처럼 왔다가/정전처럼 끊겨지고/갑작스런 배고픔으로/찾아오는 이별.” 벼락처럼 왔다가 정전처럼 끊기는 어떤 찰나의 만남,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만남 같은 것들이 있는데요. 영화 <칠드런 액트>는 법정이라는 무대를 빌려서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는 것의 의미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영국의 아동법이 종교를 이유로 치료를 거부하는 미성년자의 생명권에 관하여 어떤 판결을 내리는지를 대한 다루고 있기도 합니다. 영국 출신 작가 이언 매큐언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는데요.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법과 사람 사이: 존경받는 가정법원 판사인 피오나(엠마 톰슨)는 완벽한 재판을 추구하기에 집에 돌아와도 재판에만 몰두합니다. 그녀는 사회적으로 성공했고 인문학 교수인 남편 잭(스탠리 투치)과도 큰 갈등 없이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잭은 그녀의 무심함을 탓하며 다른 여자와 외도를 하겠다고 폭탄선언을 하지요. 그렇게 모든 것이 완벽했던 피오나의 삶에도 위기가 찾아옵니다.

피오나는 집에서나 법정에서나 그저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한 것뿐인데, 이런 남편의 태도에 분노를 느끼기도 하죠. 그런 와중에 소년 애덤(핀 화이트헤드)의 재판을 맡게 되는데요. 백혈병에 걸린 아이는 3일 안에 수혈을 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운데도 종교적인 이유로 치료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만 18세가 되지 않은 미성년자의 경우 아동법에 의해서 치료 결정이 내려집니다. 영화 <칠드런 액트>는 1989년에 제정된 영국의 아동법과 관련이 있습니다. 법정이 미성년자(아동)와 관련한 사건을 판결할 때 최우선적으로 ‘아동의 복리’를 고려해야 함을 명시하고 있는데요. 이 작품 속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수혈을 거부한 애덤은 만 18세가 되려면 3개월이 부족하기 때문에 법원의 판결에 따라 부모님이나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현실에서는 판사가 직접 현장으로 찾아가는 일이 흔치 않다고 하는데요. 판사 피오나가 애덤의 병실을 찾았을 때, 소년은 너무나 감격하고 놀라워합니다. 이런 일이 자기에게 일어나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이지요. 순교자처럼 환상적으로 죽음을 선택하고 맞이하려던 애덤은 피오나로부터 뜻밖의 얘기를 듣게 되죠. 그것은 죽음에 관한 현실입니다. 만일 치료를 거부하다가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 살게 된다면, 그것이 주변에 미칠 영향과 삶의 모습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때 애덤은 살짝 흔들립니다. 자신이 상상했던 죽음과 달리 식물인간이 되거나 몸의 어딘가 무너져서 망가진 몸으로 평생 살아가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거든요.

그러다가 애덤은 피오나 앞에서 기타를 듭니다. 기타를 배운 지 4주가 되었다며 한 곡을 연주하는데요. 아일랜드 민요로,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유명한 시를 노랫말로 붙인 <버드나무 정원 아래서>입니다. 피오나가 반주에 맞춰 나지막이 노래를 부르자, 소년의 눈빛이 쨍 하고 빛납니다. 애덤에게 그 순간은 낯선, 너무나 강렬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소년의 삶은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르게 펼쳐질 것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녀는 나에게 말을 했지요. / 사랑한다는 것은 / 나무에서 잎이 자라나는 것처럼 / 쉬운 일이에요.하지만 나는 어렸고 어리석었기 때문에 / 그녀의 말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이츠의 시를 노래로 부르는 피오나의 모습과 감격적으로 기타 반주를 하는 애덤의 모습은 나비가 고치를 벗고 나오듯 한 소년이 어른으로 가는 길목처럼 보였습니다. 경이롭고 눈부신 듯 바라보는 순간, 피오나는 이제 그만 가야겠다고 일어섭니다. 피오나는 판사로서의 소임을 다하려 애덤을 찾았지만, 애덤은 그만 판사가 아닌 한 인간 피오나를 보고 말았습니다. 차갑고 무덤덤한, 어찌 보면 건조한 법전과도 같은 삶을 살고 있던 피오나이지만 왠지 애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 만남을 우연을 가장한 인연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운명이라고 해야 할지, 그날, 마치 손님처럼 애덤의 마음속으로 피오나가 들어왔습니다.

저한테 왜 그랬어요 - 애덤의 이야기: 애덤은 종교적 신념을 버리고 수혈을 받아 살아난 후, 이제 새로운 삶을 꿈꿉니다. 그의 몸과 마음은 온통 피오나로 향하고 있습니다. 피오나는 그에게 시와 음악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애덤은 종교를 덜어 낸 자리에 피오나를 들여놓고, 시를 쓰고 공연을 하고 연극까지 합니다. 그리고 피오나를 찾아가는데요. 어쩌면 그녀에게 자신의 달라진 삶을 보여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나아가 그 새롭고 신선한 삶을 공유하고 싶었을 테지요.

하지만 애덤이 찾아가자 피오나는 판사의 모습으로 그를 맞이합니다. 그날 병실에서의 만남으로 애덤은 완전히 변했지만, 피오나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이지요. 어쩌면 피오나가 애덤에게 보여 준 호의는 판결에 앞선 보다 적극적인 참견의 수준일 수도 있고, 자신과 남편에게 닥친 복잡한 감정 때문에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을 숙고하려는 자신에 대한 의심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피오나가 애덤의 반주에 맞춰서 노래를 부른 것은 선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애덤에게 치명적인 호의가 되어 버립니다.

피오나와 애덤은 영화 속에서 단 네 번 만나게 되는데요. 가장 주목할 것은 첫 번째와 네 번째의 만남이죠. 첫 번째는 병원으로 피오나가 찾아간 것이고, 네 번째 만남도 병원에서 이루어집니다. 첫 만남에서 피오나의 선의는 소년을 감동시키고, 죽음에서 아이를 구해 냅니다. 그러나 애덤이 출장에까지 쫓아와 함께 살고 싶다고 호소할 때 피오나는 마음의 문을 단단히 닫습니다. 애덤은 그저 피오나 곁에 있고 싶었을 테지만 피오나는 법정에서 법을 마주하듯 냉정하게 애덤을 밀어냅니다. 낙담한 소년은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삶을 피오나와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죠.

피오나는 자신이 피아노 연주를 맡게 된 공연을 앞두고 한 장의 메시지를 받습니다. 그리고 공연을 채 마치기도 전에 무대를 박차고 나가서 병원으로 달려갑니다. 거기에 애덤이 누워 있었습니다. 피오나에게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애덤은 그만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백혈병 환자였던 그는 계속 수혈을 해야만 하고 언젠가는 죽음이 다가올 것이란 걸 알았겠지요.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피오나와 함께하고 싶었을테고요. 하지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미완의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만 18세가 넘은 어느 날 스스로 삶을 결정합니다. 피오나에게는 “저한테 왜 그랬어요…”라는 말을 남긴 채 말이지요.

처음 애덤을 살린 것은 아동법에 따른 판결이었지만, 애덤의 눈을 감게 한 것도 성년이 되면 스스로의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법이었습니다. 삶의 좌절을 경험한 청년이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실은 법으로 포장돼 있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뜻하지 않게도 피오나였지요. 그렇다면 애초에 피오나가 애덤을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고 설득하려고 했던 그 결정은 잘못된 것이었을까요?

선택과 결정 - 피오나 이야기: 피오나는 늘 어떤 선택을 하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람입니다. 처음 샴쌍둥이의 판결을 할 때도 그녀는 한 아이를 살리기 위하여 한 아이를 포기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녀의 판결에 따라 누군가는 살아남고 누군가는 생명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 모든 결정의 결과까지 책임질 수는 없지만, 판사로서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체실 비치에서』, 『속죄』로 유명한 영국의 작가 이언 매큐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맨부커상을 수상한 작품인데요. 종교적 이유로 수혈을 거부하는 부모와 아이의 사건을 통해 바라보는 아동법이 표피의 주제라면, 그 안에 담긴 내밀한 고민은 한 사람이 내린 결정이 타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영국에서는 병원에서 자신의 치료를 거부하는 것을 개인의 기본권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인 의사에 반해서 의사가 강제로 환자를 치료하는 행위는 형법상 상해죄에 해당합니다. 마침 영화 속의 소년은 자기결정권이 생기는 18세 생일까지 꼭 3개월을 남겨 두고 있었고, 3일 내로 수혈을 받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지요. 피오나는 판결에 앞서 소년이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이 그를 위한 길인지 파악하기 위해 직접 병원을 찾아간 것입니다.

작가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판사는 최선이 아니라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모가 의견일치를 보지 못할 때 법정은 마지못해 ‘사법부의 합리적 부모’ 역할을 맡아야 한다. 가사부의 판결문에는 무수한 개인의 드라마와 복잡한 도덕의 문제가 담겨 있다.”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 피오나가 책임을 져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피오나에게 그 일이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겠지요. 애덤이 치료를 받는 것도 피오나 때문이고, 또한 치료를 거부한 것도 어쩌면 피오나의 삶에 다가갈 수 없다는 좌절감 때문이었으니까요. 애덤은 법적으로 자신의 치료를 결정할 수 있게 된 때에, 스스로의 판단과 선택으로 세상과 작별합니다. 그렇게 마치 벼락처럼 피오나에게로 다가왔던 소년 애덤은 어느 날 정전처럼 뚝 끊겨 버렸습니다. 인생은 매 순간 선택의 연속이고, 그것이 늘 옳았는지 당시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지나고 나서 ‘아, 그때 그 선택이 최선이었을까’ 하고 되새겨 보는 것이지요. 그리고 살다 보면 세월이 덧없는 바람처럼 지나가 버린 후에야 깨닫게 되는 인연도 있겠지요.

영화 속 법 이야기: 아동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우리나라의 경우: 의료행위 거부에 대한 대한민국의 사례를 한번 살펴볼까요? 애덤의 경우와 가장 큰 차이점은 아동의 연령입니다. 아동은 신생아, 3세, 4세로 의사표현을 할 수 없는 연령이었는데, 부모의 종교적 신념과 경제적 이유로 아동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의료행위를 거부한 사례들입니다.

2010년 서울의 한 병원이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수술이 필요한 신생아 아동에 대해 수술을 하더라도 수혈은 할 수 없다는 부모를 상대로 ‘진료업무 방해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였습니다. 법원은 병원의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고 이와 같이 결정했습니다. “의사능력이 없는 자녀에 대한 진료행위가 긴급하고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상황에서 친권자가 존재하지 아니하거나 친권자가 친권을 남용하여 그러한 진료행위를 거부하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의료인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자료에 기초하여 의사능력이 없는 자녀의 진료행위에 대한 의사를 추정하여 제한적이고 필수적인 범위에 한하여 필요한 진료행위를 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서울동부지법 2010.10. 21., 자, 2010카합 2341 결정]

그러나 신생아 아동의 부모는 무수혈 수술을 받겠다며 다른 병원으로 옮겨, 법원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 아동은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다음은 2020년의 사례입니다. 4세 아동이 뇌병증으로 인한 폐렴으로 기관절개 수술이 필요한데 아동의 아버지가 경제적인 이유로 수술을 거부하였습니다. 병원은 자체 윤리위원회를 열어 ‘친권남용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뒤 아동의 아버지를 상대로 ‘진료업무 방해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가정법원에 재판을 청구해야 한다’는 결정을 하면서 진료업무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병원은 포기하지 않고 항고했습니다. 이후 서울고등법원에서 아동의 아버지가 병원이 행하는 일체 치료행위를 방해해서는 안 되며 기관절개 수술 전 퇴원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친권자가 합리적 이유 없이 친권을 남용해 거부한다면 그 거부에도 불구하고 생명권 존중 차원에서 필수적인 의료행위는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가처분 인용 결정이 내려진 후 아동은 6일 만에 기관절개 수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사례의 경우, 결정의 효력이 당사자인 부모와 병원에만 한정된다는 것을 악용하여 부모가 아동을 다른 병원으로 옮기는 것까지 예상하지 못해 안타깝게도 아동의 생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 사례에서는 부모의 진료행위 방해를 금지하는 것뿐 아니라 퇴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하여 아동의 생명을 지킬 수 있었지요. 이러한 사례들에서 볼 수 있듯이, 의사능력이 없는 아동의 경우 부모의 동의가 없더라도 치료할 수 있도록 하는 법률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합니다.

법원의 판결 혹은 결정 후: 영화에서 판사의 결정에 따라 생명을 선택한 애덤은 이후 혼란을 겪습니다. 판사에서 전화하여 음성메시지를 남기고, 자신이 쓴 글을 전하고, 직접 찾아가 자신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전하기도 합니다. 판사는 개인과 국가에 관한 사안에 대하여 중립적 위치에서 판결 혹은 결정을 해야 하기에, 업무와 관련된 개인과 접촉하는 것을 최대한 피하려고 합니다. 판사는 자신이 내린 결정의 당사자가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것을 꺼리며, 피오나 역시 같은 반응을 보입니다.

종교로 인해 생명까지 포기하려 했던 애덤이 그 종교적 신념을 버리고 법원의 결정에 따라 수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후의 상황에 대해, 법원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법원이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없었을 것입니다. 법원은 애덤의 인생에 깊은 관여를 하여 삶의 뿌리를 흔들어 놓았지만, 법원이 하려던 것은 애덤이 생명을 포기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기에, 애덤이 치료를 받고 건강해진 다음 법원의 임무는 끝이 난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미성년자였다가 갓 미성년자를 벗어난 애덤에게 법원의 결정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애덤은 판사를 통하여 다시 삶을 보게 되었고, 판사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 연결되고 싶어 합니다.

아동을 위한 결정과 판결을 하는 판사는 일반적인 사건을 다루는 판사와 다른 생각과 접근이 필요합니다. 법적으로 의무가 있든 없든, 아동의 특성을 이해하고 아동이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였을 때에는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애덤이 찾아왔을 때 피오나는 애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았어야 합니다. 판사 본인이 할 수 없다면 기관을 연계하여 애덤의 필요를 파악하도록 해야 합니다. 법원의 결정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애덤이 판사를 찾아와서 혼란스러운 상황을 전할 때 판사가 해야 할 조치는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피오나는 애덤의 방문을 개인적인 일로만 생각하여 두려움을 느끼고 밀어냅니다. 그것은 아동에 대한 중요한 결정을 하는 판사가 경계해야 하는 태도입니다.

아동의 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점은 아동의 이익입니다. 하지만 성인의 입장에서 내리는, 아동의 이익을 위해 결정이 아동의 심리적 충격까지 막아 주지는 못합니다. 특히, 애덤과 같이 18세에 다다르는 데 몇 달이 남지 않은 성인에 가까운 아동의 경우에, 본인의 결정에 대해서 법원이 개입하였을 때에는 그 혼란의 정도를 예상하여 대처해야 합니다. ‘아동의 최선의 이익’이라는 것은 사안의 결론을 내는 것에서만 고려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결론으로 인해서 일어날 일까지 예상하여 충분한 대비가 필요합니다. 가장 좋은 방안은 복지와 연계하여 아동이 심리상담, 가족상담 등을 받는 등 법원의 결정으로 인한 충격을 완화하는 장치들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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