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386 김찬훈의 정치도전기
김찬훈 지음 | 나라아이넷
진짜 386 김찬훈의 정치도전기
김찬훈 지음
나라아이넷 / 2020년 10월 / 294쪽 / 15,000원
시민과 함께 정치 속으로
정치는 왜 해? 남은 내 인생: 나이 55세. 이 나이 정도면, 많은 사람들이 인생 2막이니 실버 인생이니 은퇴 후 인생 등을 이야기한다. 당연히 젊었을 때 가졌던 꿈은 접어둔다. 하지만 나는 완전히 다르다. 나는 이제야 평생 가져온 꿈을 향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 한다. 청춘을 불태운 청년 민주화운동가가 가져온 꿈, 이 나라 이 민족의 미래를 위한 정치가로서의 삶을 시작하려 한다.
소위 386들은 이미 오래 전에 시작해 국회의원이 3선, 4선을 앞두고 있는데,「진짜 386」으로 살기를 원했던 나는 이제 시작이다. 지금 시작하지만 대부분 낯설지 않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정치 속에서 인생과 대중을 배웠기 때문이다. 진짜 386은 이 땅의 짓밟힌 민주주의를 세우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웠고, 민주화된 세상에서는 이 나라 경제를 떠받든 기업의 경영자로 노동자로 헌신했고, 항상 누군가의 자식으로 또는 부모로서 살고 있는 1980년대 전환기의 영웅들이다. 나는 이 평범한 영웅들이 어떻게 역사 속에 기록될지 잘 알고, 항상 그들 중 하나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대학 때 지하 운동권에서 조직적으로 단련되고 6월 민주대항쟁 이후에는「전국민족민주연합」,「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등 재야의 대중단체에서 나라의 민주화와 민족의 통일을 위해 헌신했다. 1990년 사회주의권 붕괴 등 시대가 변할 때는「포럼2001」등 새로운 틀을 마련해 국가와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찾아 노력했다. 민주화된 세상에서 급속히 찾아온 IT혁명의 시대에는 벤처기업을 창업해 대한민국 경제의 혁신과 성장을 위해 몸을 바쳤다. 1996년 나라아이넷이라는 벤처기업을 창업했으니, 너무나 이른 IT로의 투신이었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개척자로서 역할을 자임했다.
법률, 특허정보 전문 IT기업 창업: 나라아이넷은 법률과 특허정보 전문 빅데이터 분석 및 정보서비스 회사이다. 원래 1996년 창업 때에는, 5만여 쪽의 대한민국현행법령집을 CD롬으로 담아 법령집 없는 전자시대를 열겠다는 사명감으로 시작했다. 그렇게 만든 대한민국현행법령 CD롬타이틀「법누리」는 당시 김영삼 대통령 주재 하의 국무회의에 보고될 정도로 전자민주주의의 선구자였다. 또한 당시 국회 전자민주주의연구회를 비롯한 정치인과 법제처장 등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함께 해주었다. 하지만 역시 경제에 정치주의가 개입하면 실패하기 마련이었다.
뭔가 외향은 근사하고 화려해 보이지만, 이익은 없고 빚만 불어나는 형국이었다. 창업 9개월쯤 되어 늘어나는 적자와 빚을 바라보며 정치주의로 사업할 수 없다고 생각해, 1997년 IMF 직전부터는 모든 정치인과 거리를 두고 경영과 개발에 전념했다. 말로만 듣던 구조조정도 했다. 그때 바로 IMF가 닥쳤고, 나와 남은 직원들 힘으로 그것을 극복했다. 이 사업은 정말 너무나 빠른 IT벤처로의 길이었다. 예를 들어 강동구청에 CD롬드라이브가 장착된 컴퓨터가 불과 4, 5개였는데, 대한민국현행법령을 CD롬타이틀로 만들어 전 공무원에게 팔려고 했다. 이와 같이 시장분석도 제대로 안 하고 심하게 앞서 나간 것이다. 고객들 PC에 CD롬드라이브가 없어 사용할 수 없는 CD롬타이틀은 폐기되었다.
그리고 바로 시작한 인터넷도 현대정보기술(주)의 인터넷서비스인「신비로」와 제휴해서 의욕적으로 했다. 하지만 1997~1998년만 해도 인터넷 사용인구가 그렇게 많지 않아 보기 좋게 실패했다. 무엇보다도 이 법률정보 콘텐츠를 돈을 주고 이용하겠다는 인식 자체가 없었다. 저조한 경영성과를 접한 주주들의 불만과 협박이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률ㆍ특허정보 전문IT로의 길에서 한 치의 이탈도 없었다. 그러자 심하게 앞선 선구자에게도 기회가 왔다.
1998년 말부터「골드뱅크」라는 회사가 불러일으킨 인터넷 열풍이 바로 그것이다. 묻지마 투자가 시작되었고, 우리 회사에도 개인과 기관들의 투자가 이어졌다. 하지만 최대한 그 투자를 억제해 나가야 할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만약 내가 그때 그 투자를 전부 받았으면 안하무인이 되었을 것이고, 흥청망청 써대던 나나 직원들 때문에 망했거나 주주들을 속인 죄로 감옥에 갔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때 다른 분야의 벤처기업도 마찬가지이지만, 변호사들이 중심이 된 법률정보회사도 우후죽순격으로 20여 개나 생겨났다. 특히 해외에서는 렉시스넥시스, 웨스트로 등 세계적 기업들이 십수 조 원의 시장을 이끌고 있어, 글로벌 성장의 미래도 눈에 보였으므로 관련 분야의 창업과 투자가 확대되었다. 그 후 IT버블이 꺼지기 직전에 이를 사전에 감지하고 법률정보화에 상대적으로 뒤진 일본 법률정보시장에 눈을 돌려 준비를 시작했다. 2001년부터 일본 3대 법규출판사 중 하나인 신일본법규출판사와 제휴해 일본 내 최초로「e-hoki.com」이란 포털사이트를 만들어 회사의 일본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렇게 해서 회사의 발전과 안정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벤처업계에서 100억 원 이상 투자하며 위기와 고난을 다 겪고 성장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차츰 이 업계에 유일무이한 회사로 거듭나게 되었다. 물론 2000년 전후로 인터넷 버블이 꺼지고, 우리 뒤를 이어 생겨난 20여 개의 법률정보회사들은 문을 닫았다. 또한 법제처가 1998년부터 이 민간 법률정보시장에 뛰어들어 법령정보를 무료로 제공하면서, 대부분 기업들은 아예 고사 되었다. 당시 법률정보 관련 기업들이 투자한 돈만 해도 어림잡아도 200억 원을 넘을 것이다. 이러한 엄혹한 상황 속에서도 회사는 일본과 한국에서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안정성장이, 내가 절대로 멀어질 수 없는 고박종철열사 기념사업의 기반으로도 될 수 있었다.
사랑하는 고박종철열사: 나는 후배이자 동지였던 고박종철열사의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1990년부터 2005년까지 계속했다. 전국연합 등 재야단체에 있을 때에는 물론이지만, 벤처기업을 경영할 때에도 그것만큼은 한 번도 소홀히 한 적이 없다. 2005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박종철열사와 그가 남긴 흔적은 내 삶이었다. 지금은 2018년 영화「1987」을 통해 박종철열사가 많이 알려졌지만, 당시에는 정말 관심밖에 있어 어려움이 많았다. 열사의 추모제에 사람들을 모아 함께 하기도 힘들었고, 기념물 조성과 추모행사 개최 등 뭘 하는데 모금도 꽤 어려웠다. 마석에 있는 열사 묘지에서 추모제를 할 때마다, 동대문운동장에서 버스를 빌어 다녔는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행사를 위한 모금은 하지 않았다. 가끔 서울대 학생들이 고맙게도 정성 어린 돈을 보내오긴 했지만, 행사를 치루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고박종철열사 아버지 박정기님이 가끔 “훈아, 사람들 밥값은 내가 낼게” 하시면서 마음을 보태셨다. 추모제가 끝나고 모란공원 근처 식당에서 보통 50여 명, 많을 때는 200여 명이 항상 식사를 하곤 했으니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일본 유학의 길로: 나는 2005년 7월 박종철기념사업회 사무국장직을 그만두고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다. 한일 관계를 비롯한 북한 핵문제, 무엇보다도 한반도 통일에 대한 답을 얻고자 연구자의 길로 들어섰다. 일본에서의 삶은 그야말로 주경야독이었다. 2002년부터 본격화된 일본 사업이 자리를 잡아 지속적 성장을 위한 사업적 노력이 필요했다. 또한 도쿄대학 종합문화연구과라는 대학원에 입학해 국제정치를 전공으로 학교를 다녔다. 대학원 석사를 북한학으로 했고, 한반도에서의 일본의 역할을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 왔으니, 전공 분야도 주저 없이 북한-일본관계를 택했다.
이러한 주경야독의 유학 생활에서 많은 일본인, 학계 정계 경제계의 사람들과 관계가 넓혀졌다. 특히 2011년 3.11동일본대지진 이후 동북지방에서 진행된「히마와리프로젝트」라는 봉사활동에 10여 년간 3, 4차례 참여하고 후원하면서 그 관계가 더욱 발전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 인생의 가장 값진 결실 중 하나는, 7, 8년의 오랜 연구 기간이 걸렸지만 북일관계에 대해「3개의 공간론」이라는 나름의 이론과 실증을 기초로 한 연구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내 인생은 운동의 연속: 내 인생은 쉴 새 없이 새로운 것을 향한 도전의 연속이었다. 민주화운동과 중소벤처기업인, 일본연구가로의 삶이 얽히면서 총체적으로 만들어질 내 모습은 뭐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움직이는 삶, 개척하는 삶, 진실한 삶, 실력 없이는 못 견디는 삶, 그런 것이라고는 믿고 싶다. 결국 운동이 인생이었던 움직이는 내 삶은 이제 쉰다섯에 달해 있고, 이제 또다시 운동으로서 정치여정을 시작하려고 한다. 이 정치도 역시 움직이는 그 무엇일 것이고, 지금까지 인생이 그랬듯이 하나의 방향, 이 사회의 개혁과 나라의 부강을 위해 나아갈 것이다.
준비는? 결단은? 쉽고 빨리: 새로운 정치도전에서 준비는 별다를 게 없었다. 평소 해온 것이 준비과정이었으니까, 회사도 정체되었다고 할 정도로 너무나 안정돼 있었다. 직원들도 대표의 정치도전에 대해 일상의 연장으로 생각했다. 회사의 주요 제품이 법률과 특허정보로 주로 관공서와 정부정책과 연관된 것들이라, 공공 영역이란 점에서 정치 분야도 동일했다. 특히 회사가 사회적책임 차원에서 함께 하고 있는 (사)신규장각 활동에, 직원들이 직간접적으로 참여함으로써 회사와 정치사회 영역의 관계에 대한 공감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준비라기보다는 결단이 남았다.
이것마저도 평생 나름의 정치를 해왔으니 더 늙기 전에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간단히 이번 21대 국회의원선거라고 판단할 수 있었다. 그러면 지역구는? 대전, 분당, 순천, 부산이 떠올랐다. 모두가 소중한 인연이 있는 곳이라 선택에 어려움이 컸다. 결국 단순하게 지금 살고 있는 곳을 택하기로 했다. 바로 성남시 분당구갑이다. 이 곳은 내 삶의 역정과 맞는 곳이기도 했다. 벤처사업가로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판교테크노밸리의 발전 전략을 갖고 대한민국 정치를 살려볼 수 있는 곳이었다.
정치도전, 2월부터 개시 / 나는 나라를 이렇게 만들려고 한다: 2019년 2월부터 분당구갑에 둥지를 틀고, 함께 할 주민들을 만났다. 친구들과 선후배들도 만나 정치도전을 알렸다. 가까운 정치인들에게 조언도 구했다. 나는 신나라, 새정치, 경제우선을 가치로 해, 담쟁이민주주의의「정의」,「성장」,「평화」,「통합」,「안전」등 5개 분야에서 30대 과제를 구체적으로 실천해, 2030년의 대한민국의 번영을 이끌어 갈 것이다.「정의」는 부정과 부패를 끊어내는 것이다.「성장」은 국민 잠재력의 극대화를 필요로 하는 4차 산업혁명시대에 늦출 수 없는 과제이다.「평화」는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이 상존하는 현재는 물론 통일을 위한 미래에도 가장 절실한 것이다.「통합」은 우리가 사는 시대가치로 모두가 서로 믿고 함께 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안전」은 국민의 생명과 국가의 생존을 우선하는 것이다.
싸(4)가지 없는 정치신인
싸(4)가지 없는 정치신인 예비후보로 등록하고: 예비후보 등록까지는 권리당원 모집과 그들 중심으로 맨투맨 관계를 넓히고 새로운 사람과의 직접 만남을 우선시했다.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행사나 집단모임에 나가지 않고 그것을 모두 예비후보 선거운동 때로 미루어 두었다. 예비후보 등록 후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인사나 명함을 전하는 대인 접촉에 모든 것을 걸 계획이었다. 나는 2019년 12월 17일 예비후보를 등록했다.
싸(4)가지 없는 북콘서트: 북콘서트를 새로운 정치문화 확립을 위한 첫걸음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에 다음과 같은 홍보 문구를 내세우고 2020년 1월 13일 실시했다. ”새로운 정치를 하기 위해 나왔습니다. 북콘서트 또한 새로운 모습으로 찾아가려 합니다. 김찬훈의 북콘서트는 다음과 같이「싸(4)가지」가 없습니다. ‘① 내빈 소개가 없습니다! ② 정치인 축사가 없습니다! ③ 귀빈석이 따로 없습니다! ④ 모금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싸(4)가지(평등, 혁신, 소통, 재미)는 있습니다. 누구나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책 안 사셔도 괜찮습니다. 따뜻한 마음만 가지고 오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코로나19보다 잔인한 경선 배제: 민주당 예비후보자를 대상으로 한「공천적합도조사」라는 여론조사가 2월 4일부터 5일에 걸쳐 순식간에 실시되었다. 그것도, 주민들과 스탭들이「조사가 제대로 된 것이냐?」고 의아해할 정도로 초스피드로 마무리되었다. 중앙당의 후보심사 면접도 분당구갑이 가장 빠른 2월 9일이었다. 설상가상이라는 말이 이럴 때 필요한 듯 했다. 1년간 준비했지만 뭔가 일정에 쫓기는 듯 해 생각이 복잡해졌다. 면접은 각 후보당 자기소개 30초를 포함해 3분 정도만 주어져 자신의 정체성과 비전과 전략을 구체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분당구갑은 3명의 예비후보가 심사를 받았는데, 나 외에 두 후보에 대해서는 범죄사실에 대한 소명이 집중되었다.
나에게는 판교테크노밸리의 게임 산업에 대한 입장과 수출규제로 악화된 한일관계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짧은 시간 내에 답변했다. 그중 판교 게임 산업 종사자들에 대한 선거 전략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대표 콘텐츠로서 게임 산업의 가치와 역할을 중시하며 판교 내 게임업계 종사자들에게 적극 다가갈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고 나서 며칠 후 나는 코로나19가 확산일로에 접어들기 훨씬 전인「2월 13일」, 총선을 무려 두 달이나 남기고 일찌감치 컷 오프 당했다. 컷 오프는 공식적 통보는 없이 언론보도를 통해 확인했는데, 그 때 팽개쳐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치신인 재수: 나는 분당구갑에서 많은 권리당원을 모으고 지역 현안 해결에 앞장서는 등 지역 활동을 열심히 했다고 자부한다. 정치신인이 나름 돈과 시간과 힘을 들여 모든 것을 쏟아 부었는데, 무슨 이유인지도 공개하지 않은 채 경선조차 못하게 하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나는 다음에 선거에 또 나갈 것이지만,「국회의원선거 재수」가 아니라「정치신인 재수」를 하게 되었다. 신인 가산점을 생각하면 다행이기도 하지만 국회의원 출마하겠다고 나선 자로서는 왠지 씁쓸하다. 어쨌든 예비후보로서 선거운동이 한편으로는 코로나19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더불어민주당 중앙당이 들이민 당 정체성에 제대로 응하지 못해, 아주 힘겨운 준비운동만 하고 끝난 셈이다.
경선이 끝나고 공동선거대책위원장: 경선 배제 이후, 남은 분당구갑 두 경선후보들의 만나자는 요구가 계속되어 나는 경선에 개입할 수도 있었다. 권리당원도 많았고 10년공공분양임대아파트와 서현동110번지 주민들 사이에 지지자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름답고 공정한 경선을 위해 철저히 중립을 지켰다. 이후 김병관후보가 2월26일 경선에서 이긴 후 만나자고 해 다음날 만났더니, 나에게 공동선대위원장을 제안해서 당연히 수락했고 열심히 돕겠다고 했다. 또 사람들을 선거캠프에 파견해 달라고 해서 흔쾌히 알았다고 했다. 이후 김병관후보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아 역할을 충실히 하려고 노력했고, 나를 지지하고 믿었던 주민들에게 김병관후보 지지를 호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하긴 했지만, 김병관후보에 대한 반감이 강해 지지자들의 반발과 이탈이 생겼다. 특히 서현동110번지 단톡에서는 김병관캠프 선대위원장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3분도 안 돼 나를 강제퇴장(강퇴) 시켰다. 나를 도왔던 사람들 중에는 미래통합당 후보캠프로 옮겨간 사람도 있다. 나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선거에서 사람들이 여기저기 캠프를 옮겨 다닌다. 왜 그런가 했더니 결국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지지후보가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전에 선거 후 자신의 행보와 연관이 있다. 선거 후 자신과 여러 문제로 경쟁할 사람과는 선거 때 함께 하기 힘들므로 다른 캠프로 옮긴다. 그것이 다른 당 후보일지라도 가능한 이유이다. 이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냥 선거라는 것이 그런 것이라는 걸 알았다.